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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으로 씨를 뿌리는 사람 (시 12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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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동호 목사

예수를 믿는 궁극적인 목적은 구원입니다. 구원은 단순한 말로 정의하면 하나님의 나라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우리들은 종종 이와 같은 사실을 잊곤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관심과 욕심을 잊고는 그저 세상 나라의 회복에만 관심을 갖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 다른 사람도 아닌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함이 언제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와 같은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으로 거듭남을 통하여 회복될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삼년이나 제자로 따라다닌 저들도 예수를 믿는 궁극적인 목적에 대하여 거의 무지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나라 즉 세상 나라의 회복을 위하여 예수를 믿을 뿐이었습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서의 형통함과 건강함과 부요함만을 위하여 예수를 믿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죽어서나 가는 나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죽어 세상을 떠날 때나 생각하는 나라입니다.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하나님 나라의 삶보다 그저 세상 사람들과 같이 세상에서 세상적으로 잘 사는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세상적으로 다 형통한 것도 아니고, 예수를 안 믿느다고 세상적으로 다 형통하지 못한 것도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 중에도 가난하고 고생하며 건강치 못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 중에도 부하고 형통하며 건강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예수를 안 믿어도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건강하게 인간적으로 잘 살 수 있습니다. 세상적으로 형통한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지 않고 구원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믿음으로 얻게 되는 하나님의 나라는 과연 어떤 나라일까요? 요한계시록 21장에 보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요한의 증언이 있습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 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 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 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 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 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데살로니가 전서 5장 16절 이하에 보면 우리가 잘 아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고 늘 감사하고 언제나 기도 즉 하나님과의 대화가 끊이지 않는 나라가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와 같은 삶은 절대로 이 세상에서 불가능한 삶입니다.

부하고 형통하며 건강하게 사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를 항상 기뻐하고 늘 감사하며 살아가게 하지는 못합니다. 처음에는 기쁘고 처음에는 감사하지만 조금만 지나면 그저 그렇고 그런 것이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천하보다, 온 세상보다 크고 귀하게 창조하셨기 때문에 천하를 다 얻는다고 하여도 그것으로 우리의 삶을 채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적인 욕심을 채우면 만족한 삶,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솔로몬은 부귀와 영화와 쾌락에 관한 한 전무후무한 삶을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그것을 통하여 진정한 삶의 만족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전도서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1:1-2)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 하여 흐르느니라.”(1:7)

그러나 세상의 욕심을 다 채우지는 못하였지만 예수를 진정으로 믿고 의지한 삶을 살았던 사람에는 넘치는 은혜와 감사와 기쁨이 있었습니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찬송가 491장)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어렵고 험하든지 나의 영 혼은 늘 편하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찬송가 470장)

“귀하신 친구 내게 계시니 나 주안에 늘 기쁘다. 그 피가 내 죄 씻으셨으니 나 주안에 늘 기쁘다. 나 주안에 늘 기쁘다 나 주안에 늘 기쁘다. 주 나와 늘 동행하시니 나 주안에 늘 기쁘다.”

“주 내짐 대신 지시었으니 나 주안에 늘 기쁘다. 그 생명 버려 나를 구했네 나 주안에 늘 기쁘다. 나 주안에 늘 기쁘다 나 주안에 늘 기쁘다. 주 나와 늘 동행하시니 나 주안에 늘 기쁘다.”

“주 은총 매일 내게 더 하네, 나 주안에 늘 기쁘다. 저 악한 죄 길에서 지키네, 나 주안 에 늘 기쁘다. 나 주안에 늘 기쁘다 나 주안에 늘 기쁘다. 주 나와 늘 동행하시니 나 주 안에 늘 기쁘다.” (찬송가 497장)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갔다가 해방 되어 돌아 올 때의 기쁨과 감격을 노래한 시편입니다. 나라를 잃었던 백성이, 그래서 포로로 잡혀갔던 백성들이 해방이 되어 조국으로 돌아올 때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시편 기자는 그 때의 마음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 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열방 중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저 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다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1-3)

시편 기자는 이스라엘의 회복이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진 대사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대사를 이루어 주신 이유를 누군가가 울며 씨를 뿌렸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같이 돌리소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 아 오리로다.” (4-6)

우리는 이와 같은 시편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꿈꿀 수 있으며, 하나님의 나라가 회복될 때 얼마나 기쁘고, 얼마나 감사하고, 얼마나 행복할까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그와 같은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일이 먼저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려도, 그것은 사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래봤자 씨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뿌리면 하나님이 그 위에 축복해 주셔서 30배 60배 100배의 추수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씨가 별것 아닌 것 같아도 뿌리지 않으면 30배, 60배, 100배의 축복은 역사하지 않습니다.

5,000명을 먹이고도 12광주리가 남은 오병이어의 기적도 보잘것 없어 보이는 어린 아이의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라고 하는 씨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린 아이의 오병이어가 없었다면 오병이어의 기적은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씨를 뿌린다고 그것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씨를 뿌리지 않는다면 오병이어와 같은 하나님의 나라의 회복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씨를 뿌려야만 합니다. 씨를 뿌려야만 거두는 법칙은 세상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상 나라의 회복을 위하여 상상도 가지 않는 엄청난 씨를 뿌리며 삽니다. 그러나 구원을 바라며 예수를 믿는 우리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좀처럼 씨를 뿌리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들도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씨를 뿌리려 하기 보다는 세상 사람과 똑같이 세상 나라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씨를 뿌린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 20절에서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씨를 뿌리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투자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요즘 다윗의 시편을 읽다가 매우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다윗하면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골리앗과의 싸움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평생 전쟁터에서 산 장군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제가 새삼스럽게 성경을 읽다가 깨달은 놀라운 사실은 평생을 싸웠지만 그의 싸움은 늘 하나님의 대적과의 싸움이었지, 자신의 대적과의 싸움이 아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대적하는 사람들과 싸우려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대적하는 사울, 구시, 시므이 같은 사람과 싸우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대적하는 사람이 있을 때마다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싸워 주시기를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통하여 우리는 매우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다윗은 자신을 위하여 산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산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조금 확대하여 해석한다면, 다윗은 자신과 세상에 투자하며 산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투자하며 산 사람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정말 믿음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으며, 정말 지혜로운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정 반대의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세상을 위하여, 자신을 위하여는 엄청난 씨를 뿌리며 살아가고 있지만,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서는 어리석으리만큼 인색한 삶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미국 집회를 하면서 아주 아름다운 집에 초대를 받아 식사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호수가에 지어진 집이었는데 거실 문을 열고 뒷 정원으로 나가면 호수로 연결되어 있는 정말 아름다운 집이었습니다. 호수를 끼고 그와 같은 집들이 지어져 있었는데 집집마다 보트가 있고 그 보트를 대는 선착장이 있었습니다.

식사 중에 집 값 이야기가 나왔는데, 미화로 약 150 만 불 정도 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돈으로 약 15억 원 정도 하는 것인데, 물론 적지 않은 돈이었지만, 집의 규모나 아름다움 그리고 주변 환경과 여건을 생각할 때, 그리고 우리나라의 주택과 비교해 볼 때 상당히 괜찮은 가격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웠던 것은, 감사하게도 그 집이 그렇게 욕심이 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부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집에서 사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무조건 큰 집에서 사는 것을 비난하는 것은 조부라운 생각입니다. 무조건 그와 같은 집에서 사는 것을 비난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생각입니다.

제가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은 그와 같은 집에서 살 필요가 없다든지, 그런 집에서 사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라든가 부끄러운 것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나는 그렇게 욕심이 나지 않았다는 것뿐이고, 그것이 좋고 감사했다는 것뿐입니다.

제 나이만 해도 저 자신만을 위하여 모든 투자를 하기에는 벌써 늦은 나이이며, 위험한 나이입니다. 세상에서 산 날이, 세상에서 살 날 보다 길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을 떠날 날이 이제 그다지 많이 남지 않았습니다. 저는 벌써 큰 고통 없이 죽을 수 있기를 위하여 기도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기도만으로 죽음을 준비한다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 아닙니다. 큰 고통 없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가야 할, 그리고 영원히 살아야 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씨를 뿌리고, 투자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는 그 아름다운 집을 보며, 그 집의 가격을 계산해 보며, 저런 집, 하나, 하나님 사 드리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하면 하나님께 그와 같은 집을 하나 사드리는 셈이 될 것인가를 깊이 생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하여 재산정리에 들어갔습니다.

물론 하나님 나라를 위한 투자와 준비가 돈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돈은 마음입니다. 예수님도 우리들에게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 (마6:21)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 없이, 자기를 들어내고 자랑하려고 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부자의 연보를 귀히 그리고 크게 보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진심으로 드리는 과부의 엽전 두 푼을 귀히 그리고 크게 보셨습니다.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 세상 뒤에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고 믿는다면서, 자신의 온 삶을 잠시 있다 떠날 세상에만 투자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행동이거나, 말로나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야기할 뿐 실제로는 믿지 않는다는 것이나 진배없습니다. 세상 떠날 날이 얼마 남지도 않은 사람들이 밤낮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면 자신만을 위한, 세상만을 위한 삶을 사는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평생을 자신과 세상만을 위하여 살며,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온전한 십일조 하나 변변히 드리지 못하며 사는 것은 참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 아십니까?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사시려고 만드시는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앞에서 인용하여 읽어드린 요한계시록 21장에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하나님을 위하여 만드시는 나라가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만드시는 나라입니다.

작은 오병이어를 예수님께 드린 아이 때문에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눈물로 씨를 뿌린 사람들이 있어서, 하나님이 그 위에 축사하심으로 이스라엘 나라가 회복되어 포로생활을 그치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그와 같은 말씀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끊임없이 하나님의 나라 회복을 위하여 눈물을 씨를 뿌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는 삶을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하여,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과 세상도 하나님의 나라가 되게 하기 위하여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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