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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생이 여의치 않을 때 (출 5: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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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피영민 목사

20 그들이 바로를 떠나 나올 때에 모세와 아론이 길에 선것을 만나 21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우리로 바로의 눈과 그 신하의 눈에 미운 물건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 여호와는 너희를 감찰하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22 모세가 여호와께 돌아와서 고하되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으로 학대를 당케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23 내가 바로에게 와서 주의 이름으로 말함으로부터 그가 이 백성을 더 학대하며 주께서도 주의 백성을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서론

사람들은 누구든지 인생을 살면서 자기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모든 일이 자신의 뜻대로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상숭배 하는 사람들은 자기 뜻을 이루어 준다고 하는 구슬을 사모합니다. 그 구슬의 이름은 ‘여의주(如意珠)’입니다. 이무기가 999년의 도를 닦아도 이 여의주를 얻지 아니하면 용이 되지 않는다 하는 이야기도 내려오고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사람 몸속에 여의주가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여의주는 ‘단전’이라는 곳에 있는데 사람은 단전호흡을 잘 해야 여의주가 활동을 해서 뜻이 이루어진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여의주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은 우주의 중심에 자기가 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 우주가 다 자기의 뜻에 순종하고 다 자기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사상을 가리켜서 인본주의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세상이 다 내 뜻대로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이 만약에 다 내 뜻대로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성경은 ‘이 세상에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진다.’ 하는 것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생의 주관자시며, 역사의 주권자시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사상은 인본주의가 아니고 신본주의인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여 내가 내 뜻을 이루게 하여 주옵소서” 그렇게 기도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여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이렇게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신본주의의 삶을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세상 가운데 살고 있는데 하나님의 뜻이 내 뜻과 합할 때에는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내 뜻과 충돌될 때도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5장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가 내 뜻대로 다 되지 아니하고 여의치 않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모세와 아론

모세와 아론은 지금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소명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모세를 만나시고 애굽에 가서 백성을 건져내라는 분명한 사명을 주십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네 번씩이나 변명을 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절합니다. 결국엔 하나님이 노를 발하시면서 모세에게 아론을 붙여 주십니다. 출애굽기 3장 27절에 여호와께서 아론에게 이르십니다. “너는 광야에 가서 모세를 맞으라.” 그래서 아론은 하나님의 산에서 모세를 맞아서 함께 순종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됩니다.  모세와 아론은 먼저 이스라엘에 장로들을 모으고 이스라엘 백성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나타나신 것과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모든 말씀을 장로들과 백성들에게 전합니다. 그리고는 백성들 앞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하다 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세가지 이적을 행했습니다. 지팡이를 던져서 뱀이 되게 하고 손을 품에 넣어서 문둥병이 되었다가 치료함을 받게 하고 또 하수를 취하여 뿌릴 때에 그것이 피가 되는 그런 이적을 행하게 됩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머
리 숙여서 여호와를 경배하고 모세와 아론을 하나님의 종으로 추앙을 했습니다. 여기까지 모세와 아론은 얼마나 승승장구 합니까? 하나님의 뜻이 다 모세와 아론의 뜻과 완전히 일치되었습니다. 이제 모세와 아론은 승리감과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리고는 바로왕 앞에 나아갑니다. 가서 여호와께서 명하신대로, 한 글자도 틀리지 아니하고 가감없이 전했습니다. 3장 18절에 하나님은 이미 모세가 바로왕 앞에 해야 될 말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려 하오니 사흘길쯤 광야로 가기를 허락하소서.” 그래서 그 말씀 그대로 출애굽기 5장 3절에 모세가 전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사흘 길쯤 광야에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려 하오니 가기를 허락하소서 여호와께서 온역이나 칼로 우리를 치실까 두려워하나이다.”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이 명하신 그 말씀을 똑같이 전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모세의 목적은 단순히 3일 휴가를 얻어서 광야에 가서 희생제사 한번 절기 드리고 다시 돌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의 뜻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완전히 건져내서 출애굽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모세는 단지 3일간의 휴가를 요구했습니까? 단지 3일 휴가를 얻어서 광야에 가서 희생을 드리겠다고 하는 요구를 했습니까? 모세의 요구가 사기성이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모세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는 것이라 할지라도 지금 첫 번째 모세의 요구는 바로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드러내기 위해서 지금 첫 번째 요구를 하게 하신 것입니다.
당시 애굽에는 소수민족들이 있지 않습니까? 소수민족들도 각각 나름대로 종교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아무리 바로왕이라 할지라도 소수민족이 와서 “우리가 당신을 위해서 일을 하지만 우리도 종교가 있으니 우리에게 휴가를 주어서 우리의 종교의식을 행하게 해주십시오.” 라고 요구하는 것은 불합리한 요구가 아닙니다. 이것은 소수민족으로 마땅히 할 수 있는 합리적인 요구입니다. 그런데 바로왕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불합리한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왕의 마음이 강퍅한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아 강퍅하다는 것은 합리성이 통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불합리한 것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감정도 있지만 이성도 있습니다. 사람은 짐승이 아닙니다. 모든 일에 감정 따라 움직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성이 있기 때문에 판단도 하고 이성으로 옳고 그름을 가리기도 하고 이성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수납하기도 하고 계시를 정리해서 믿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합리성을 따라야 합니다. 불합리한 것은 마음에 강퍅함을 드러냅니다. 즉, 모세의 첫 번째 요구에 의해서 바로왕의 마음속에 있는 불합리성과 강퍅함이 드러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뜻을 행한 결과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증거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상황이 어렵게 돌아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자기가 원하는 뜻이 이루어지지 아니하고 도리어 여의치 않은 사건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먼저 바로왕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바로왕은 모세의 말을 들었을 때 크게 분노했습니다. 그리고는 무슨 말을 합니까? 도전적으로 대답을 합니다. 5장 2절에 “바로가 가로되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 바로왕은 하나님을 향해서 도전적인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바로왕이 참 어리석은 존재다. 하나님이 계신데 그가 어찌 그런 어리석은 말을 했을까?’ 하고 비웃습니다. 하지만 우리도 가끔은 바로처럼 말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관대 내가 그의 말씀을 들어야 하느냐? 하나님이 누구관대 내가 주일이 되면 나들이 갈 수 없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를 드려야 되느냐? 하나님이 누구관대 내가 하나님께 그 아까운 물질의 십일조를 드려야 하느냐? 하나님이 누구관대 내가 하나님께 내 죄를 회개하고 죄를 토해놔야 되겠느냐?” 여러분이 사용하는 말 중에 ‘하나님이 누구관대 내가 그렇게 해야 하는가?’ 하는 말은 ‘바로형 언어’인 것입니다. 여러분, 바로형 언어를 사용하지 마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로의 말은 어리석습니다. 바로는 지금 모세가 합리적인 요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불합리한 분노를 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더 큰 고통을 내립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미 비돔과 라암셋이라고 하는 두 국고성을 짓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로 삼아서 벽돌 만드는 일을 시키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바로왕은 모세의 요구를 듣고 이 백성이 게으르기 때문에 나가서 종교행사를 하겠다고 하는 것이라고 하며 간역자들과 패장들을 시켜서 더 큰 어려운 사명을 내립니다. 간역자는 누구입니까? 그들은 애굽족속으로서 공사감독입니다. 패장은 이스라엘 족속으로 인부의 두목입니다. 간역자들은 패장을 치고 때리고, 패장이 가서 자기 동족들을 시켜서 벽돌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왕은 지금까지는 벽돌을 만들 때 원료가 되는 짚을 주었지만 그것도 주지 않으면서 이전과 같은 양을 만들라고 명령합니다. 결국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말씀을 증거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은 감소되기는커녕 크게 증가되는 어려운 결과가 나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패장들은 왕에게 가서 “전에는 짚이라도 주더니 원료도 주지 않고 만들어 놓으라고 하니 우리에게 어떻게 이런 불합리한 요구를 하십니까?”라고 호소합니다. 그런데 바로왕은 호소를 들어주지 않습니다. 더욱더 괴롭힙니다. 벽돌 생산량을 조금도 줄여주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패장들은 ‘화가 내 몸에 미쳤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들은 바로왕을 떠나 나오면서 모세와 아론을 만나게 되자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바로 얼마 전 까지 머리 숙여 경배하고 하나님의 종이라고 높이던 모세와 아론을 향해서 원망을 합니다. “너희가 우리로 바로의 눈과 그 신하의 눈에 미운 물건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팔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구나 여호와는 너희를 감찰하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모세와 아론이 상황을 보니 바로왕은 더 성질을 내고, 또 이스라엘 백성은 더 괴롭힘을 당하고,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는 자기들을 향해서 원망을 합니다. 결국 모세는 혼란에 빠집니다. 22절 23절에 “모세가 여호와께 돌아와서 고하되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으로 학대를 받게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내가 바로에게 와서 주의 이름으로 말함으로부터 그가 이 백성을 더 학대하며 주께서도 주의 백성을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하며 하나님께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세는 혼란과 좌절에 빠진 이런 기도를 하나님께 올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런 고통과 좌절을 주셔야만 했을까요? 저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이런 고통이 없으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 대한 정을 끊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고통을 당하고도 이들은 광야에 가서 조금만 배고프면 불평합니다. 애굽에서는 고기도 먹고 마늘도 먹고 부추도 먹고 힘도 좋았는데 광야에서 하나님이 주신 만나를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힘이 없다고 불평합니다. 만약에 큰 고통을 통해서 애굽에 대한 정을 떼지 않았더라면 출애굽 후에 조금만 원망스러운 상황이 닥치면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자고 다수결로 결의했을 것입니다. 고통을 당해야 애굽과 정을 뗄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죄를 짓고 있으면 고통으로 말미암아 정을 뗄 수 있습니다. 죄는 고통을 받아야 끊어지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만약에 이런 좌절이 없었다고 한다면 모세와 아론은 지금 교만심이 하늘을 찔렀을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서 하나님께 쓰임 받게 되면 인간은 쉽사리 교만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키게 되면 겸손한 마음을 유지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에게 이런 좌절감이 없었다면 하나님께 기도할 리가 없습니다. 고통으로 인해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이런 일이 생겼습니까? 하나님 내가 내 지팡이 하나만 가지면 다 역사가 일어날 줄 알았더니 어렵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와주십시오.”하고 하나님을 절대 의지하며 기도했던 것입니다. 이런 고통과 좌절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애굽에 대한 정을 끊게 하고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가 뜻대로 되지 아니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러분 지금 인생이 뜻대로 다 되십니까? 여러분의 뜻대로 다 되지 않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내 뜻대로 다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 뜻대로 되어야 이 세상이 바르게 돌아가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세 가지 대처방안을 찾을 수 있습니다.

3. 여의치 않은 상황을 대처하는 세 방편

첫째로는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에는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람들은 인생이 여의치 않으면 하나님을 떠나려고 합니다. 교회를 떠나려고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멀리하고 기도를 중지해 버리려고 합니다. 하나님 믿어도 아무 소용없고, 말씀 읽어도 아무 소용없고, 예배 드려도 아무 소용없고, 십일조를 드려도 아무 소용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는 교회를 떠납니다. 그러나 이런 반응은 방향이 옳지 않은 것입니다. 이런 반응은 성숙치 못한 어린아이와 같은 반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애들을 보세요. “아빠 이거 해주세요 저거 해주세요.” 하다가 안 해준다고 하면 집을 나갑니다. 그러니까 집 나갈까봐 할 수 없이 조금씩 해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집을 나간다고 하는 것은 애들이 자기 뜻이 안 이루어질 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좌절이 되고 내 뜻대로 되지 아니할 때 모세처럼 하나님께 더 나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야고보서 4장 8절에 보면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가까워져서 하나님을 체험하며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다 하는 자는 한마디로 어리석은 자입니다. 하나님이 없다 하는 사람은 밖에 나가서 하늘을 보고 땅을 보십시오. 그것을 누가 만들었습니까? 그것을 과학자가 만들었습니까? 정치가가 만들었습니까? 그것을 석가모니나 공자가 만들었습니까? 석가모니도 그 땅에 태어났고 그 하늘에서 태어난 것입니다. 하늘과 땅, 해와 달, 산과 나무, 바다와 물고기를 보십시오. 누가 그것을 만들었습니까? 이 천지가 한 치도 빈틈없이 돌아가고 있는 것을 보고도 신이 안 계시다고 말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못 만나서 모르는 것이지 만나면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만나려면 하나님께 가까이 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면 하나님이 가까이 하시리라” 하는 말씀대로 여러분의 삶이 어려워도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을 합니다.

두 번째로 인생이 내 뜻대로 되지 아니할 때에는 성급한 결론을 내리지 말아야 합니다. 내 뜻대로 안 될 때에는 잠깐 기다려야 합니다. 성급한 결론은 금물입니다. 내 뜻대로는 안 될지라도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모세는 지금 너무 성급한 결론을 내리지 않습니까? “하나님, 당신의 계획이 좌절되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지금 실패하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생의 주권자시요 역사의 주관자이십니다. 하나님의 뜻이 지금 이루어져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려면 바로왕의 강퍅함이 먼저 드러나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려면 이스라엘 백성이 좀더 고통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모세가 제 뜻대로 안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실패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과정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시요, 이 세상이 내 뜻대로 안되더라도 하나님께서 지금 그 뜻을 행하고 계시다 하는 믿음을 가져야 될 것입니다. 역사는 도도한 물결 같아서 묵묵히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고 있는 중입니다. 내 뜻이 안 되고, 내가 어렵고 고통을 받아도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믿음을 가지고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로 인생이 내 뜻대로 안 되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는 그래도 옳은 편에 서야 합니다. 정의 편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왕은 사단의 상징, 마귀의 상징입니다. 압제의 상징이요, 포악의 상징이요, 불신의 상징이요, 탐욕의 상징입니다. 그는 비돔과 라암셋에 국고성을 짓게 하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포악을 행합니다. 바로왕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편에 서 있는 것입니다. 바로왕 쪽에 서는 것은 죄의 편에 서는 것이요 마귀 편을 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이 어려워도 언제든지 옳은 편, 정의 편에 서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대한민국은 소망이 있는 나라입니다. 대한민국은 예수 믿는 성도가 천만을 헤아리는 나라입니다. 예수 믿는 성도들은 불의 편에 설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정의 편에 서야 합니다. 사람들은 좌로도 아니고 우로도 아니고 중용지도가 좋다고 합니다. 중용지도가 좋다고 하는 것은 너무 지나치지 말라는 것이지 정의 편에 서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정의냐 불의냐의 문제가 있을 때 예수 믿는 사람들은 단연코 정의의 편에 서야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인생이 내 뜻대로 안 되고 어렵다고 해도 불의를 따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정의를 따라야 합니다. 바로왕을 따를 수는 없 것입니다. 우리는 정의의 편에 서야 합니다. 옳은 편에 서야 합니다. 사람은 그렇기 때문에 인생이 내 뜻대로 안 되어도 판단력을 바르게 행사하고 이성을 가지고 생각해야 합니다. 정의로운 곳에 참 자유가 있고 구원과 평화가 있는 것입니다. 정의의 편에 서서 모세는 계속해서 일을 했던 것입니다. 인생이 내 뜻대로 안 되어도 성도 여러분들은 정의의 편에 서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인생이 안 되고 내가 망해도 정의! 내가 망해도 믿음 편에!  내가 어려워도 믿음 편에! 내가 어려워도 하나님 편에! 하나님께 더 가까이! 이것이 바로 인생의 정도를 가는 삶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이 왜 어려운지 그 이유를 다 일일이 설명하지는 않으십니다. 이유는 모를지라도 우리가 정의 편에, 하나님 편에, 믿음 편에 서서 살아갈 때에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그것이 우리에게 축복이 된다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될 줄로 믿습니다. 어려운 상황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가르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언제나 믿음으로 사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1장 40절에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믿음의 삶, 정의로운 삶, 하나님 편에서 사는 삶을 살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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