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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전능의 하나님 - 그 이름의 의미 (출 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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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피영민 목사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강한 손
을 더하므로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라 강한 손을 더하므로 바로가 그들을 그 땅에서 쫓
아 내리라 2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로라 3 내가 아브라함
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4 가나안 땅 곧 그들의 우거하는 땅을 주기로 그들과 언약하였더
니 5 이제 애굽 사람이 종을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을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
라 6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 내며 그 고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큰 재앙으로 너희를
구속하여 7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
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줄 너희가 알찌라 8 내가 아브라함
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
업을 삼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하셨다 하라 9 모세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에
게 전하나 그들이 마음의 상함과 역사의 혹독함을 인하여 모세를 듣지 아니하였더라 

서론

이름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목회를 하다보면 사람을 대하다가 이름을 잊어버릴 때 제
일 곤란합니다. ‘아~ 이 사람을 알긴 아는데 이름이 뭐더라?’ 생각이 들면 상대편
을 부를 수도 없습니다. 그때는 참 괴롭습니다. 어떤 할머니 두 분이 평생 친구로 지
내시다가 노년기가 되니까 치매가 왔습니다. 한 할머님이 친구에게 묻습니다. “여보
게 내가 자네하고 평생 친구인데 한 가지 질문이 있네. 뭔가 자네 이름이 뭔가?” 그
러니까 상대방 할머니가 가만히 생각하더니 “아이고 그거 나도 잊어버렸네. 언제까
지 가르쳐 줘야 되나?” 치매가 와서 자기 이름도 잊어버렸던 것입니다.
사람도 이름이 있듯이 하나님에게도 이름이 있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의 명령
에 순종하여 바로의 왕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난주
에 본 것처럼 그 결과는 오히려 나빠졌습니다. 바로가 더욱 분노하고 이스라엘 백성에
게 고통을 주었으며 이스라엘의 패장들도 모세를 원망하게 되어 모세 자신도 혼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때 모세가 기도한 것이 출애굽기 5장 22-23절입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돌아와서 고하되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으로 학대를 당케 하셨나이까? 어찌
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내가 바로에게 와서 주의 이름으로 말함으로부터 그가 이 백
성을 더 학대하며 주께서도 주의 백성을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내가 하나님 말
씀대로 말했는데도 하나님이 구원하지 아니하시니 이것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모세
는 그렇게 좌절 섞인 기도를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그
것이 오늘 읽은 6장 1절에서 9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모세야 네가 너를
구원하지 않는 것 같고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지 않는 것 같지만 그런 것이 아니다.
내가 이제 네가 이 일이 성공하리라고 확신을 가져도 좋을만한 네 가지 근거를 이야
기 하겠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첫 번째 근거는 3-4절 말씀입니다.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
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가나안 땅 곧
그들의 우거하는 땅을 주기로 그들과 언약하였더니” 라고 했습니다. 첫째는 “모세
야 네가 확신을 가져도 좋은 근거는 내가 너희 조상과 언약을 맺었다는 것이다. 무슨
언약이냐면 가나안 땅을 너희 이스라엘 후손에게 영영히 주기로 한 언약이다. 그러므
로 애굽 땅에 영영히 살 것이 아니고 내가 언약한 대로 가나안 땅으로 돌아갈 것이
다.” 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으로 먼저 확신을 시키십니다. 두 번
째는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5절에 “이제 애굽 사람이 종을 삼은 이
스라엘 자손의 신음을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 하나님은 주의 백성들이 신음하
며 기도하면 그것을 들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입니
다. “내가 너희와 언약을 했고 내가 너희를 불쌍히 여기기 때문에 틀림없이 출애굽
의 역사가 일어날 것이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이 단호하게 결심을 하셨다
는 것입니다. 6-8절의 말씀에 하나님의 그 결심이 드러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
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
어내며 그 고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큰 재앙으로 너희를 구속하리라” 8절에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으
로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하셨다 하라” 그러니까 6-8절
에는 “내가 빼어내고, 내가 건지며, 내가 구속하며, 내가 인도하고, 내가 주어, 그
땅을 기업으로 삼게 하리라” 하는 하나님의 단호한 결심과 의지가 드러나 있는 것입
니다. 구구절절이 하나님의 결심이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 지금 이
구원의 역사를 지금 안 이루십니까?” 하고 기도했지만 하나님은 “내가 너희 조상과
언약을 맺었고 내가 너희를 불쌍히 여기고 그리고 내가 틀림없이 구원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느니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네 번째 모세에게 가르쳐 주신 것은 “내 이름 자체가 너희를 구원하
지 아니하고는 견딜 수 없는 존재니라” 하는 말씀을 하십니다. 6장 말씀에는 하나님
의 이름이 두 종류가 나오고 있습니다. 첫째는 “나는 여호와라.” 여호와라는 이름입
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대표이름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누구냐 물으시
면 여러분은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다른 이름을 가진 존재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알라도 하나님이 아니요, 부처도 하나님이 아니요, 공자도 하나님이 아니요, 맹자도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이 뭐냐고
묻지 않았습니까? “내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서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
다 할 때 그들이 우리 조상의 하나님의 이름이 누구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합니
까?” 라고 했을 때 출애굽기 3장 14절에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스스로 있는
자, 여호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은 의미가 두 가지 입니다. 첫째는 약속하신 것을 성취하는 하나님이라
는 것이고, 둘째는 시작하신 일을 완성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믿
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약속한 것을 꼭 성취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
님의 백성들은 말을 잘 지켜야 합니다. 약속을 이리 바꾸고 저리 바꾸고 하면 그것은
여호와라는 이름에 합당치 않습니다. 또 여호와라는 이름은 ‘시작하신 일을 완성하시
는 하나님이시다’ 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 창조기사를 보면 “하
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 때에 쓰인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가 아닙니다.
‘엘로힘’입니다. ‘엘로힘’이라고 하는 것은 복수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라 하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엘로힘 하
나님이 하늘도 지으시고 땅도 지으시고 인간도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엘로힘 하나님
이 천지를 창조하시기를 마치시고 난 후에 사용된 이름이 무엇이냐면 바로 여호와라
는 이름입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구약성경에 6,800번 사용되었습니다. 그 이름이 처음 쓰인 것은 창
세기 2장 4절입니다. 여호와라는 이름 하나만 해도 설교를 열 번도 더 할 그런 엄청
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은 여호와라는 이름을 다루지 아니하고 본문에 나타
난 또 다른 이름 3절에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
으나”에서 사용된 ‘전능의 하나님’은 히브리어로 ‘엘 샤다이’입니다. 오늘 우리
가 생각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이름은 엘 샤다이의 하나님입니다. ‘전능하신 하나
님’ ‘엘 샤다이’라고 하는 이름의 기원은 창세기 17장 1절입니다. 아브라함이 99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
(엘 사댜이)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
라함이라는 사람을 갈대아 우르에 있을 때에 택하셔서 약속을 주셨습니다. 창세기 12
장 1절에서 2절에 보면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
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건은 아브라함이 75살 때입니다. 아브
라함은 그 후로 100년을 더 살았습니다. 그런데 75살에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네 몸
에서 아들이 있으리라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누구를 봅니까? 자기
아내 사래의 배를 봅니다. 오늘이나 있으려나, 내일이나 있으려나, 아 그런데 배를 자
꾸 봐도 아무 일도 없습니다. 날씬하기만 합니다. 일년을 봐도 소식이 없고, 이년을
봐도 소식이 없습니다. 약속을 받기는 받았는데 십년을 봐도 소식이 없자 아브라함이
십년 만에 조바심이 나서 드디어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을 합니다. 그래서 86세에 사래
의 여종인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낳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머지않아 사래
는 하갈을 핍박하고 내 쫒게 됩니다. 이스마엘로 인해 심각한 가정문제가 일어났기 때
문입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깨닫습니다. ‘아하 그것은 하나님의 방법도 아니고 하
나님의 때도 아니었다. 그리고 이스마엘은 하나님이 주신 아들도 아니구나.’ 아브라
함이 86살 때 실수를 한 결과로 이삭의 후손이 대대로 핍박을 받고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다시 기다리게 됩니다. ‘내 아내 사래에게서 자식을 주시려나?’ 오늘도
바라보고 내일도 바라봅니다. 그렇게 13년의 세월이 더 흘렀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
이 99세가 된 것입니다. 75세에 약속을 받아서 99세가 되었으니까 몇 년이 지났습니
까? 24년이 지났습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지나친 칭호가 아
닙니다. 사라도 경수가 떨어졌습니다. 아브라함도 늙었습니다. 아무 낙이 없습니다.
생물학적으로 잉태가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말
씀하셨으니 아들을 주시리라’ 이것을 믿고 의심치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그런 아브라함에게 99세가 될 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가르쳐 주신 이름이 ‘전능한
하나님’ ‘엘 샤다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네가 명년에 아들을 낳을 것이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엎드려 있다가 웃었습니다. “아이고 하나
님, 농담도 잘하시네” 하고 웃은 것 아니겠습니까? ‘어찌 내가 믿기는 믿지만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 아브라함도 웃고 그 아내 사래도 장막문 뒤에서 웃었습니다. 그런
데 희한한 일이 벌어집니다. 사래의 배가 자꾸 불러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드디어 아
브라함이 100세가 되었을 때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아들의 이름이 이삭, ‘그가 웃
었느니라’ 하는 뜻입니다. 아브라함도 웃었고 사래도 웃었습니다.
하나님은 ‘엘 샤다이’ 전능의 하나님입니다.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하고 늙고 노쇠하
고 아무리 낙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이 태의 문을 여시면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
브라함은 지금까지 하나님의 이름을 네 가지 알고 있었습니다. 엘로힘, 여호와, 엘엘
리온(지극히 높은자), 엘로이(감찰하시는 하나님)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아브라
함은 한 가지 이름을 더 알게 되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엘 샤다이’라 하는 것
입니다. 하나님은 이제 출애굽의 절망하고 있는 이 모세에게 나는 ‘엘샤다이’라 전
능한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다시 한번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엘 샤다이는 어원적으로
두 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1. 엘 샤다이의 기원

첫째는 샤다이라는 말은 ‘샤드’ 여자의 젖가슴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파생된 것입
니다. 아이들에게는 이 세상의 어디가 가장 따뜻하고 어디가 가장 배부르고 어디가 가
장 평화스럽습니까? 어머니의 젖가슴입니다. 거기 묻혀 있을 때에 늘 배부르고 제일
행복하고 제일 평안한 것이 아닙니까? 애를 낳아가지고 조선호텔에 갖다 놓은 들 애
가 좋아하겠습니까? 아이들에게는 어머니의 젖가슴이 제일 좋은 것입니다. 어머니는
애를 낳으면 자기 젖으로 먹여야 합니다. 안 그러면 자꾸 유방암 같은 것이 생기게 되
는 것입니다. 자기 젖으로 먹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젖은 다 짜서 버리
고 애는 소젖을 먹이고 하니까 애들이 소처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에게 병이
생기고 그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젖가슴이라는 것이 얼마나 귀중합니까? 어
머니의 사랑, 따뜻함, 양육의 상징인 것입니다.

2. 엘 샤다이의 어원적 의미

그러므로 ‘엘 샤다이’는 젖가슴의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은 어머
니의 젖가슴 같은 분이시라, 모든 필요를 충분히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All
sufficient God)이시라 하는 것입니다. 엘 샤다이, 충분하신 하나님, 그러므로 오늘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에게는 엘 샤다이의 하나님이 함께 계신 것입니다.
시편 23편 기자인 다윗처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사람들은 다 뭐가 부족하다 뭐가 부족하다 난리이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과 함께하는 우
리는 부족함이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전능
하신 하나님 ‘엘 샤다이’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필요에 따라 공급해 주시기 때문
에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엘 샤다이의 두 번째 의미는 ‘샤다드’ ‘능력있다’(Powerful)하는 말입니다. 그러
므로 엘 샤다이는 전능한 하나님(Almighty God)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무한대의
능력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가 200만을 이끌고 홍해 앞에
섰을 때에도 모세는 두려움이 없었던 것입니다. 지팡이를 내미니까 홍해가 갈라지고
물이 벽처럼 되서 마른 땅처럼 홍해를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광야에서 200만을 먹일
것이 없고 입힐 것이 없고 마실 것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반석을 치면 물이 나오고,
먹을 것이 없으면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오고, 고기가 없으면 메추라기 떼가 내려오
고, 신발이 닳지도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40년 닳지를 아니했습니다. 아 그것이 얼마
나 위대한 능력입니까? 모자람이 없는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99세가 되었던 999세가
되었던 9999세가 되었던 아브라함이 몇 살이 되었던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면 전능하신
능력으로 이루신다는 말입니다.
바로왕은 얼마나 강퍅한가? 애굽 군대는 얼마나 많고 무서운가? 이런 것들에 상관 없
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으면 그대로 이루어질 줄로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
니다. 우리 강남중앙침례교회가 여호와의 대사를 경험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면 그대
로 될 줄로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엘 샤다이의 하나님이 우리와 함
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엘 샤다이의 하나님은 어머니의 젖가슴 같으신 하나님이며 엘
샤다이의 하나님은 능력이 조금도 부족함이 없으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엘 샤다이의 하나님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실제적인 의미가 있습니까?

3. 엘 샤다이의 실제적 의미

첫째로는 엘 샤다이의 하나님은 이 세상 어떤 세력보다도 강하고 능력이 많으신 분이
십니다. 엘 샤다이의 하나님을 이길 존재는 없습니다. 왜 우상숭배하는 자가 망합니
까? 우상들도 신이 있지 않습니까? 그 붙어 있는 신들은 귀신이라 하고 잡신이라 하
고 악신이라 하는 열등한 신입니다. 왜 우상숭배하면 망합니까? 그 이유는 열등한 잡
신을 섬기기 때문입니다. 능력이 없는 신을 섬기기 때문입니다. 그런 신을 참신이라
고 섬기는 자들은 엘 샤다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멸시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그들
보다 때문에 더 강한 엘 샤다이의 능력 앞에 패배하고 마는 것입니다. 우상숭배를 버
리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 승리의 길이요 살길인 것입니다.
우리는 우상숭배를 버려야 합니다. 고린도 전서 10장 14절에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
들아 우상숭배하는 일을 피하라”고 했습니다. 대한민국이 지난 4-50년간 세계 어디에
서도 볼 수 없는 압축된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그것이 ‘역대 어느 대통령의 공헌이
다’ 이야기들을 하기도 하지만, 진실은 우리 백성들이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
아왔기 때문에 하나님이 복을 주신 것입니다.
우상숭배는 망하는 길입니다. 우상에는 악신이 붙어 있고 악신은 열등한 신이기 때문
입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안에 나타난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사람에게는 엘 샤다이의 능력이 역사하는 줄로 믿으시기를 주
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번 명절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절대 우상숭배하지 마시기
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령을 모시고 귀신에게 절합니까? 우리가 절을 하면
하나님이 귀신에게 절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말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
게 되면 그 집안에 어려움이 생기게 됩니다. 우상숭배는 천지가 개벽을 해도 하지 마
시고 하늘이 무너져도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엘 샤다이의 하나님은 우상과 싸움이
안 되는 하나님이십니다. 시편 115편 3-8절에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
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그러나 우상은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
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
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으로 소리도 못하느니라. 우상을 만드는 자
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와 같으리로다.”고 했습니다.
두 번째로 엘 샤다이 전능하신 하나님은 그 기뻐하시는 뜻은 무엇이든지 행하시는 하
나님이십니다. 다니엘서 4장 35절은 “땅의 모든 거민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
의 군사에게든지 땅의 거민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누가 그의 손을 금
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 할 자가 없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
상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상 뒤에 있는 악신들이 조화를 부리는 것입니다. 우상은
자기 뜻대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악신들은 자기 뜻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
님은 기뻐하신 뜻을 무엇이든지 이루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유명한 바벨론의
왕 느브갓네살이 교만을 떨었습니다. 바벨론 제국을 바라보면서 “이것이 다 내 능력
으로 한 것이다.” 이렇게 교만을 떠니까 하나님께서 느브갓네살을 치셨습니다. 명철
을 빼앗아갔습니다. 그러니까 그가 들짐승 가운데 거하면서 7년 동안이나 소처럼 풀
을 먹고 살았습니다. 때가 되어서 하나님께서 느브갓네살에게 명철을 다시 돌려주었습
니다. 그가 제정신이 들고 나서 고백한 말이 바로 방금 살펴본 다니엘서 4장 35절 말
씀인 것입니다.
우리는 엘 샤다이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성도들입니다. 엘 샤다이, 어머니의 젖가슴
같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어디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참으로 어려운 시기를
지날 때에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사람은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정신
적으로 물질적으로도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최저점을 지날지라도 엘
샤다이의 하나님이 떠나지 아니하시는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엘 샤다
이 하나님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4. 엘 샤다이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

첫째는 하나님을 존경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마땅히 존경을 받으셔야 합니다. 창세기
17장 3절에서 아브라함에게 나는 “엘 샤다이다.”라고 계시하셨을 때에 아브라함의
반응은 무엇이었습니까? 엎드렸습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이 엎드린대” 했습니다. 우
리는 납작 엎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교만을 떨고 하나님을 꾸짖고 하나님을
가르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도전할 수도 없고 하나님을 꾸짖을 수
도 없습니다. 하나님께 불평불만을 토로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내 인생
을 왜 이렇게 만드셨습니까? 하나님이 만드셨나요?” 로마서 9장 20-21절은 “이 사람
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
를 이같이 만들었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고 대답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
님을 힐문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아담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을 때 좀 말리시지 그
것도 안 말리시고 우리를 원죄에 빠뜨리십니까?” “하나님 나를 왜 이런 고통에 빠뜨
리십니까?” 이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려고 할 때
베드로가 “주여 그리 마옵소서” 하고 꾸짖으니까 주님이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갈
지어다. 너는 사람의 일만 생각하고 주의 일은 생각하지 아니하는자로다.”고 말씀하
셨던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엘 샤다이의 하나님은 마땅히 우리가 존경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존경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존경하고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행동을 해
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업신여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아무리 작
은 자라도 업신여길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작은 자
라도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성도들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가 어려울 때 피난처가 되십니다. 시편 91편 1-2절
에는 하나님을 피난처라고 했습니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요 나
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전능하신 하나님은 그늘이 있습니다.
그 그늘은 우리 성도들의 피난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려울 때 그 그늘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피곤 할 때 그 그늘로 가는 것입니다. 새 사냥꾼의 올무와 극한 염
병과 밤의 놀램과 낮에 흐르는 살과 흑암 중에 행하는 염병과 백주에 황폐케 하는 파
멸로부터 하나님은 피난처가 되시는 것입니다. 무능한 우상에 피하는 자는 멸망하지
만 전능하신 하나님께 피하는 자는 보호를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경배를 받으셔야
마땅하며 그 분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십니다.
세 번째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보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잘한 자에게 반드시 상을
주시고 하나님을 대적한 자에게는 반드시 벌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능력
이 없어서 상도 못주고 벌도 못주는 우상과는 다르다는 말입니다. 데살로니가 후서 1
장 6-9절에 보면 “너희로 환란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란으로 갚으시고 환란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저
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
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고 나와 있습니다.
영원한 형벌, 영벌을 받는 곳은 지옥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고 그 힘
의 영광을 떠나는 자들은 지옥의 영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
며 반드시 보응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결론

여러분 모세처럼 어려운 현실 앞에 좌절하고 혼동을 겪는 분이 계십니까? 예수 그리스
도를 믿는 언약의 백성들에게는 엘 샤다이의 하나님이 함께 계십니다. 하나님은 때가
되면 나의 필요를 공급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전능의 능력으로 나의 피난처가 되신다
는 것을 믿으시고 하나님께로 피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절대 절명의 위기에서도
건져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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