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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성령 (행 5: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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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성덕 목사

어느 한 교회에 성이 아씨 사씨 성을 가진 집사 부부가 있었습니다.
섬기는 교회가 성령충만하여 굉장히 부흥하여 사회복지관을 짓게되었는데
많은 교인들이 땅과 집을 팔아 바쳤습니다.
아집사 사집사 부부도 가만히 보니 곧 직분자 피택도 있고 해서
우리도 집 팔아 바치자 해서 덜렁 집을 팔아 바치겠다고 작정을 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집을 팔아 바치는 헌금이 1억인데
자기 집은 괜찮은 집이라 2억을 받았어요
그래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 혼자 2억 바칠 것 뭐 있노
그래서 1억은 통장에 저축하고 1억을 바쳤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아 집사한데
[ 집사님, 집 값이 1억 밖에 안됩니까? ] 하니
[ 예, 목사님 은행 담보되어 있는 것도 있고
급히 처분하니 집 값이 반값이네요 ] 합니다.
[ 집사님 왜? 하나님을 속이러 합니까? ] 하고 책망을 하니
그만 아 집사가 그 자리에 쓰러져 죽어 버렸습니다.
이런 사실도 모르고 3시간쯤 뒤에
부인 사 집사가 교회에 들어오는데 목사님이 하는 말이
[ 사 집사 왜 집 판 값이 이것뿐이냐? ] 고 하니
역시 사 집사가 하는 말이
[ 그것 밖에 안 되는데요 ] 합니다.
[ 왜 성령을 시험하느냐?
네 남편을 메고 나간 사람들이 들어오는데
또 너를 메고 가리라 ] 하니
그만 사 집사도 그 자리에 엎드려저 죽어버렸습니다.
이건 실제적 사건입니다.
오늘 본문말씀 앞에 행5:1-11절 까지의 말씀을
제가 현대판으로 조금 각색해서 이야기 한 것입니다.

성령사건으로
구제와 봉사와 전도의 열기가 뜨거워저 교회가 부흥하려고 하면
이렇게 반드시 마귀의 시험이 틈을 타
모든 축복을 물거품으로 만들어 놓으려고 합니다.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행5:의 아나니아 삽비라 사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련을 성령의 조명으로 잘 분별하여 이기면
또 한번 교회에 놀라운 축복이 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시련 뒤에 어떤 축복이 임하는가를 살펴보며 <2>
그 축복의 주체가 누구인가에 눈이 뜨여지는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럼 초대교회에 시험 뒤에 찾아온 축복이 무엇입니까?

12-14절에 보면
[ 사도들의 손을 통해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니
백성들이 칭송을 하게 되고 믿고 주께로 돌아오는 자가 더 많아지더라 ] 고 합니다.
사도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함께 함이 나타나니
교회가 더 크게 부흥되었다는 말입니다.
아나니아 삽비라를 통해서 교회를 흔들어 놓으려고
마귀가 거짓 영으로 가장하여 침투하려고 했지만
그래도 성령 받아 영안이 밝은 지도자가 있었기 때문에
교회 안에 거짓영의 침투가 차단되고
교회가 거룩해지고 순결해지니 성령의 능력이 더 강하게 나타난 것입니다.

여기에 [ 사도들의 손으로 ] 하는 말은
교회 지도자들의 손에 의해 기적이 일어난 것을 말합니다.
진정으로 성령의 은혜 받은 지도자는
그 손을 통하여 축복과 기적이 흘러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요즘 성도들의 영적 갈급함을 볼 때
능력 없는 제 자신을 보면 너무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이 모여 기도할 때
주의 종들을 위해 먼저 기도하라고 한 것 같아요.
저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그리고 우리 교역자들, 장로님들 순장님들 위해서도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가만히 보면 예친 순장을 통해서도
순원들이 방언의 은사를 받고 능력을 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면 진짜와 가짜가 구별됩니다.
아나니아 삽비라 사건을 보고
그리고 사도들을 통하여 표적과 기사를 본 사람들은
솔로몬 행각으로 몰려들기 시작하였고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성령의 역사를 보고 믿는 사람은 모여서 더 사모하게 되고
안 믿기워지는 사람은 따로 떨어져 나가더라는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 자신의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3>
아무리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도 내 자신의 믿음이 없으면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교회에 출석해도 자기 믿음이 아니라
남에게 끌려 다니는 교인들 이렇게 비유합니다.
운전 면허증을 따서 초보 운전을 하는데
왜 그렇게 길이 좁아 보이고 차는 많아 보이는지
그래서 손에 힘을 주고 진땀을 흘리며 운전을 하고 가는데
경찰관이 세우더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조심해서 운전했는데 그리고 교통위반 한 것도 없는데
경찰관이 세우니 [ 내가 뭘 잘못했습니까? ] 하니
[ 불 좀 켜고 다니세요 ] 하더랍니다.
운전하는데 신경을 써다 보니 날이 어두워졌는데도
라이트를 켜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러니 남의 불빛으로 운전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 안에도 남의 불빛에 의해 신앙생활 하는 교인도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이런 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 불 좀 켜고 다녀라 ]
그렇습니다. 내 가슴에 불이 붙어야 합니다.
아무리 뜨거운 교회라 할지라도 내 가슴에 불이 붙지 못하면
나는 솔로몬 행각의 교인이 아니라
교회 안에 딴 교인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내가 불 켜고 다니는지 불 끄고 다니는지 표가 나는 것이 있습니다.
13절에 백성이 칭송하더라
그 가슴에 불이 붙은 성도는 그리스도인답게 예수 제자답게 살아가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랑의 교회 옥한흠 목사님 설교에 이런 간증이 있습니다.
결혼식을 앞둔 두 젊은이가 목사님을 찾아와 주례 부탁을 했습니다.
본 교회에서 자란 청년이라서 주례를 해 주겠다고 했는데
느닷없이 결혼식 때 부를 찬송가를 바꾸어 달라는 것입니다.
[ 이 건방진 녀석들 봐라 목사가 부르는 대로 하면 되지
무슨 찬송가를 바꾸라 말라 그러냐? ] 생각이 들었지마는
참고 청년에게 물었습니다. [ 그래 무슨 찬송으로 바꾸어 줄까? ]
그러니 청년은 358장 [ 아침해가 돋을 때 ]로 바꾸어 달라는 것입니다.
그 찬송가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 밤낮 주를 위하여 몸과 맘을 드리고 / 주의 사랑 나타내 햇빛되게 하소서
주여 나를 도우사 세월 허송 않고서 / 어둔 세상 지날 때 햇빛 되게 하소서]
목사님이 그 말을 듣고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4>
밤낮 주를 위하여 몸과 맘을 바친다는 것이 어디 어린애 자장가입니까? 다른 사람에게 빛이 된다는 것이 보통 힘든 일입니까?
결혼하는 마당에 왜 이렇게 부담스러운 찬송을 불러달라고 하는지?
신랑 아버지는 이름 있는 변호사이고
청년도 사법고시를 합격하고 이제 법관 준비를 하고있는 엘리트입니다.
신부 아버지는 외국 대사이고
신부는 외국어에 능통하고 모든 것을 갖춘 자매입니다.
이런 청년들이
밤낮 주를 위하여 몸과 맘을 드리고 어둔 세상 지날 때 햇빛되게 해달라고 하니 목회자로서도 큰 충격을 받았던 것입니다.
밤낮 주를 위하여 몸과 맘을 드리고 어둔 세상 지날 때 햇빛되게 하소서!
이런 청년들이 많이 일어나 교회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칭송 받도록 합시다.
가슴에 불이 있는 성도는 세상 사람들이 칭송하는 햇빛될 줄 믿습니다.
이렇게 교회가 성령의 역사로 거룩해지고 순결해 질 때
교회 안에 분명히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14절에 [ 믿고 주께로 나아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
교회에 질적인 부흥이 일어나니 양적인 부흥은 절로 일어나더라는 것입니다.
근간에 사도행전 교회를 지향하면서
성령의 은혜를 사모하여 교회가 새벽기도 철야기도에 힘을 쏟으니
무엇보다도 새벽기도 철야기도가 수적으로 두배나 불어났습니다.
아주 성경적입니다.
그 전에도 새씨200운동이라 해서 새벽기도회를 강조하고
철야기도회를 강조 안한 것은 아닌데
아하~! 불이 붙으니 절로 모여드는구나,
교회에 성령의 불뿐만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심령에 이 불이 붙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15절에 보니
[ 병든 사람을 메고 와서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림자라도 덮일까 바라고 ]
얼마나 놀라운 장면입니까?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아 요 위에 누이고
베드로가 잘 다니는 길에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베드로가 지나가다가 그림자라도 스치도록 바랐던 것입니다.
이 자체만 가지고 말한다면 상당히 문제 있는 말씀이겠지요
베드로의 그림자가 무슨 신통한 능력이 있겠습니까? <5>
베드로의 그림자가 스쳐 지나가면
병이 나을 수도 안 나을 수도 있겠지요
사도행전 저자 누가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초대교회 지도자들은 그 만큼 영향력이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교회가 줄 수 있는 영향력입니다.
이것이 성령 받은 사람이 줄 수 있는 영적권위입니다.
이 영향력은 베드로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행8:8절에 보면 성령받은 빌립 집사가 사마리아 성에 들어갔을 때
[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 고 합니다.
이 영적권위를 저와 여러분들이 성령 받아
회복되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그리고 16절에
[ 병든 사람과 귀신에게 괴로움을 받는 사람들이 다 나음을 입었다 ]고 합니다.
교회가 거룩을 회복하고 순결해지며 깨끗해지니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서 병자가 낫고
귀신이 떠나가는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계속해서 성령의 불이 회개의 불길로 타올라 꺼지지 아니하면
이런 표적과 기적이 분명히 일어날 줄 믿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꼭 다시 주목해야할 말씀이 있습니다.

교회에 부흥의 불길이 타오르고 성도들의 삶이 회복되어져가니
사탄의 시기와 질투가 가만있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17-18절을 보세요
[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
[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 ]
핍박은 모르는 사람이 하지 않습니다.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이 누구입니까?
종교적인 열심과 긍지가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범인으로 알았던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을 통하여
저들이 할 수 없었던 일을 감당하고 역사를 나타내니
이들이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베드로를 옥에 잡아 가둔 것입니다.
사랑하는 내일의 가족여러분 !
우리도 종교적 열심과 긍지만으로는 자칫하면
하나님의 일을 방해할 수 있다는 점 알아야 합니다.
시기와 질투가 언제, 왜 일어납니까? <6>
1) 상대적인 신앙이 될 때 시기와 질투가 일어납니다
2) 시기와 질투는 생래적인 기질이 아닙니다.
마귀가 주는 생각을 물리치지 못하면
내 속에 시기와 질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한 무리의 정치인이 바닷가를 거닐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뭔가 심각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정적을 제거할 계략을 짜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그들은 게를 잡고 있는 어부를 만났습니다.
어부는 게를 잡아서 바구니에 넣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구니에는 뚜껑이 없었습니다.
한 정치인이 어부에게 말했습니다.
[ 바구니에 뚜껑이 없군요. 그러면 게들이 다 도망칠 텐데요. ]
그러자 어부는 태연하게 말했습니다.
[ 아무 염려 없습니다. 이 게들은 정치인들과 비슷한 놈들이라서
한 마리가 기어오르면 다른 놈들이 곧 끌어내립니다.
다른 놈들이 올라가는 꼴을 보지 못하거든요. ]
교회는 정치판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교회는 잔치판이 되어야 합니다.
서로 서로 위로 격려 축하해 줄 수 있는 축제분위기가 되어야 합니다.

사탄의 계략은 당시 교권주의자들을 통하여
시기 질투심을 일으켜 베드로와 사도들의 입을 막으려 했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일 수가 없는 생명의 말씀인 것입니다.
사탄의 하수인들의 핍박이
하나님의 역사를 막아놓을 수는 없다는 것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그 누구도 막아설 수 없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19절에 보니 [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었다 ] 고 합니다.
밤중에 일어난 기적, 하나님의 손이 밤 중에 개입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밤이 되면 하던 일도 놓아버리고 쉬러 가지만
하나님은 밤중에도 일하시는 분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행12장에도 헤롯왕이 사도 야고보를 칼로 죽이고
베드로를 옥에 가두어 군사 넷씩 세워 지키고 있는데
밤중에 주의 사자가 베드로를 깨워 옥문을 빠져 나오게 하는 기적이 나옵니다.
혹 나의 삶에도 옥에 갇혀 옥문이 꽁꽁 잠겨있듯이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 있는 성도들 있습니까?
밤 중에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7>
단지 저들과 나와 다른 것이 있다면
성령충만한냐 아니냐 차이가 있을 따름입니다.
밤중이라고 포기하지 마시고
행16장에 나오는 빌립보 감옥에 바울과 실라와 같이
밤 중이기 때문에 더 찬송하며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비록 발은 착고에 손은 수갑에 묶여있다 할지라도
가슴 만큼은 하늘을 향하여
저 지난 주 말씀드린바와 같이 하늘을 향해 호흡을 할 때에
나의 삶에 유쾌한 날이 밝아올 줄 믿습니다.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그들을 빠져 나오게 하신 기적의 사건, 놀라운 사건입니다.
그러나 기적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기적이 주는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20절 [ 가서 성전에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
하나님이 베드로와 사도들을 감옥에서 건저내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 성전에 가서 생명의 말씀을 외쳐라 ] 는 것입니다.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명입니다.
사명 감당하지 않거나 못하는 삶은 동물보다 조금도 나은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기적에는 선교적 사명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에도 하나님의 기적을 또한 기적같은 은혜를
체험한 분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은혜를 체험하고 나는 지금 무엇을 합니까?
중요한 것은 기적보다 기적 이후에 사명을 감당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건강 주시고 직장 주시고 남다른 재능 주었는데
이것 가지고 나는 지금 무엇하느냐?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위와같이 시험을 이기고 기적을 나타내며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힘
바로 성령의 능력입니다.

공회가 관속들을 시켜 사도들을 감옥에서 데려 오라고 보내었는데
지금 관속들의 눈앞에 벌어진 일
이건 인간의 지성과 이성으로서는 도저히 해석이 안 되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관속들이 가서 공회에 보고하기를
옥문은 든든히 잠기고 지킨 사람들은 문에 섰으되
문을 열고 본즉 그 안에는 한 사람도 없더이다.
제사장들이 이 말을 듣고 어떻게 할 줄 모르는데
다른 사람이 와서 하는 말이 <8>
[ 옥에 가두었던 사람들이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치더이다 ] 하니
그래서 가서 강제로 잡아오라 했어 대제사장 앞에 세웁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일도 있지만
이해할 수 없는 일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바로 믿음의 세계는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세계가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에 하나님의 복음은 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
하나님의 능력을 인간의 능력으로 제한시키려는 일이 없어야 겠습니다. 하나님도 하나님의 말씀도 매이지 아니합니다.

이런 능력이 어떻게 사도들에게 나타났습니까?
21절에 사도들이 주의 사자를 통해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더니 ] 하듯이
즉각적인 순종이 하나님의 능력을 수반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제사장이 휠문하면서 예수의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할 때
29절 [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 하며 저들에게 되려 십자가의 죽으시고 부활하신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항상 순종함에 있어서 명쾌한 답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충만 바로 믿음충만으로 담대해지기 때문입니다.
순종할 때 성령의 능력이 함께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표적에는 반드시 「기도」와 「순종」이 따르는 법입니다
순종하는 마음으로 기도함으로 나의 삶에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내는 표적이 나타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베드로와 사도들을 통해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자세가 어떠해야함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29절 [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
그리고는 되려 제사장과 공회 앞에서
[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 사람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 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 ] 하고는
우리가 이 일의 증인이다
그리고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성령도 그러하다 ] 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사도들을 통하여 나타난 역사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9>
그러면서 그 성령에 대해 순종하는 자에게 주는 성령이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에게 더 좋은 것, 성령을 주십니다.

복음 전도자의 행동원리는 바로 순종입니다.
가끔 연합회에서 순회헌신예배를 드리면서
회원들의 신앙을 강조하기 위하여 행동강령을 외칩니다.
그 행동강령 가운데는 온갖 좋은 말들이 다 들어 있어요.
그러나 늘 찜찜한데가 있어요.
강령이 뭡니까? 강하게 명령하는 것 아닙니까?
명령만 하면 뭐합니까? 순종이 따라야지요.
그르지 말고 따라합시다 순종합시다 - 아멘 !
116오직전도주일 헌신합시다 순종합시다.

베드로와 사도들은
자기들이야 말로 이 모든 일에 살아있는 증인이라고 담대히 말합니다.
[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
증인 - 마르튀스라 해서 순교자적인 자세의 증인을 말합니다만
저는 오늘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빅토리아 여왕은 신앙심이 깊고 선정을 베푼 여왕인데
어느 날 믿음이 좋다는 한 과부의 집을 찾아 이렇게 물었습니다.
[ 일찍이 이 집을 찾아온 손님 가운데 가장 고귀한 손님이 누구입니까? ]
믿음이 좋기로 소문이 났으니 으레히 우리 주님입니다 라고 할 줄 알았는데
그 대답은 [ 두말할 것도 없이 여왕폐하이십니다. ] 합니다.
빅토리아 여왕이 실망하여
[ 예수님이 가장 귀한 손님이 아닐까요? ] 라고 반문하니00
대답이 [ 아니예요, 예수님은 손님이 아닙니다. 나의 주인입니다.
처음부터 계신 분입니다. 나는 그분을 위해 존재합니다. ]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는 말
바로 예수님은 나의 주인이 되시며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주가 되신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예수의 증인이라면
나의 삶을 통해 예수가 주시라는 사실을 나타내며
또한 전할 수 증거할 수 있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116오직전도 헌신주일입니다.
오늘부터 이 일의 증인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부터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선언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베드로와 사도들은 <10>

33절 [ 하나님이 순종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성령도 그러하니라 ] 고 합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두 가지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1) 우리가 순종할 때 성령이 임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령 사건이 일어나기를 원하십니까?
더욱 순종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2) 우리에게 주신 성령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부으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성령이 임하면, 내가 성령 받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내 속에서 일어나야 할 뜨거운 의욕이 있고
나의 삶에 일어나야 할 사건이 있습니다.
바로 영혼구원에 대한 열정과 영혼을 구원하는 전도가 나타나야 합니다.
오늘 116오직전도헌신주일을 선포하면서
성령의 사람이 되어 오직 전도에 헌신되어진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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