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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앙의 기본 : 집에서 모이고 (행 2:4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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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윤성진 목사

하나님께서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신 후에 그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아담에게 데리고 오니까 아담은 너무 감탄하면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라”하고 그를 사랑했습니다. 아담은 하와를 통하여서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 하라는 말씀을 성취할 수가 있었습니다.
아담은 하와가 아니고는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한 복을 누릴 수가 없었습니다. 아담은 하와를 통해서만 아이를 낳을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의 옆구리에서 갈비뼈를 뽑아내실 때에 피가 흘렀을 것입니다. 피 흘림으로 인하여서 하와가 생겼다는 말입니다. 그의 아내가 생겼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계실 때에 로마 병정이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러서 피와 물이 쏟아짐으로 교회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20장 28절에 보면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자기 피>로 교회를 샀다는 말입니다.

아담의 옆구리의 갈비뼈로 아내인 하와가 만들어졌던 것처럼 예수님이 옆구리에서 흘린 피로 예수님의 신부(新婦)인 교회가 탄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가리켜서 ‘교회의 신부’라고 말합니다. 아담이 하와를 통해서만 자녀를 낳을 수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도 신부인 교회를 통해서만 자녀를 낳을 수 있고 구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5장 17절에는 교회를 <영광스러운 교회>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을 구원하는 유일한 기관입니다. 교회를 통하지 아니하고는 세상을 구원할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교회의 모습이 다양합니다. 큰 교회도 있고, 잘 지어진 교회도 있고 아름다운 교회도 있습니다. 작은 교회도 있고, 지하실 교회도 있고 임대교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건물은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당(敎會堂)이요, 예배당(禮拜堂)입니다. 교회는 지금 교회당 안에서 예배드리는 우리들, 예배드리는 사람들의 모임을 ‘교회’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볼 때는 볼품이 없는 교회라도 하나님은 교회를 보실 때 영광스럽게 보십니다.

왜냐하면 교회를 통하지 아니하고는 세상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만들기 위해서 예수님은 피를 흘리셨고 ‘피 값으로 너를 샀다. 너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너는 나의 생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시각으로 교회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에 걸림돌이 되지 말고, 교회에 방해가 되지 말고, 이렇게 귀한 교회에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하나님께 쓰임 받는, 교회에 절대 필요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하나님이 계획하신 교회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의 본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교회의 본질적인 모습을 여러 부분으로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46절에 보면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어디에 모이기를 힘썼다고 했습니까?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또 어디에서 모였습니까?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했다>고 했습니다.

여기 보면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본래 교회를 만드실 때에 교회의 구조(構造)가 교회에서 모이는 모임, 그리고 집에서 모이는 모임, 이 두 모임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교회가 이 세상에서 사람들을 구원하고, 세상을 구원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새(鳥)로 말하면 교회에서 모이는 대그룹의 한 날개와  집에서 모이는 소그룹의 한 날개로 날아오르게 만드셨습니다. 두 날개를 가지고 날아가는 새가 얼마나 잘 날아 가겠습니까?
그래서 초대교회를 보세요. 120명에서 3,000명으로, 5,000명으로, 더 큰 무리로 교회가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소아시아로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로마에 전파된 기독교가 핍박 때문에 카타콤(Catacombs)이라는 지하공동묘지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거기서 생활을 했습니다.

핍박시대에는 성전에서 모이는 예배를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몇 사람 씩 집에서 모여서 비밀리에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마치 누룩처럼 로마를 복음으로 정복해 들어갔습니다. 그러다가 313년 콘스탄틴 대제(Constantinus 大帝)가 기독교를 공인(公認)했습니다. 교회를 지어주었습니다. 꿈에도 그리던 신앙의 자유를 얻었습니다.
지하(地下)에 있던 교회가 지상(地上)으로 올라왔습니다.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교회당에 모여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감격의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성전에서 모이는 예배가 활성화 되면서 집에서 모이는 소그룹의 예배가 사라지기 시작 했습니다. 새(鳥)로 말하면 한쪽 날개가 점점 작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한쪽 날개가 작아진 새가 날아가는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세요. 실제로 교회는 그런 모습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교회는 이만큼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하나님이 계획하신 구조(構造)로 성전에서 모이는 대그룹의 낮 예배, 한쪽 날개와 집에서 모이는 소그룹의 한쪽 날개를 동시에 사용해서 날았다고 하면 벌써 세계를 복음화 시키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 교회가 하나님이 계획하신 교회의 구조인 <성전에서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도 모이기를 힘쓰는> 교회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데 힘쓰고 기도하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집에서 모이는 한쪽 날개를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집에서 모이는 소그룹의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릅니다.     

2. 소그룹 모임의 힘

1949년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선교사들이 추방되고, 교회가 문을 닫고, 성도들이 핍박을 받았습니다. 지상에 있던 교회가 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성도들은 몇 명씩 집에서 비밀리에 모여서 신앙생활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교회의 지도자들은 의심을 품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중국에 선교의 문을 막으셨는가? 그런데 40년이 지나고 중국이 개방되었습니다. 교회지도자들은 과연 중국에 성도는 남아있을 것인가? 교회는 있을 것인가? 하고 기대에 찬 마음으로 중국으로 들어갔을 때 깜짝 놀랐습니다.

40년 전에는 불과 몇 십만 명에 불과했던 교인이 5,000만 명으로 불어나 있었습니다. 지금은 1억에 가까운 성도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그동안에 성도들은 집에서 비밀리에 모였습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10명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다가 능력 있는 복음, 살아있는 복음으로 예배를 드리니까 모인 사람들 가운데서 병든 자가 일어납니다. 귀신이 쫓겨 나갑니다. 사람이 새로워집니다. 인생이 달라집니다.

그러니까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이게 무슨 일인가 하고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고 소문이 퍼져 나가면서 사람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그들도 와서 예배를 드리다가 그런 기적을 체험합니다. 10명이 20명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많아지면 당국에 발각되기 때문에 10명 씩 나누었습니다. 나누어진 10명이 또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면 또 20명이 됩니다. 이렇게 해서 커지면 나누고, 또 커지면 또 나누고 그렇게 해서 집에서 집으로 모였습니다. 
목자(牧者)도 없습니다. 목사님도 없습니다. 신학서적도 없습니다. 성경도 없습니다. 극동방송에서 내보내는 설교가 유일한 자료였습니다. 그리고 읽어주는 성경을 들으면서 받아썼습니다. 그것을 돌려 보면서 신앙생활을 숨어서 했습니다.
그러다가 개방이 되고 다소 신앙의 자유가 주어지자 지하에 있던 교인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5,000만 명이 넘었습니다. 1억에 가까운 성도들이 지금도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세계가 놀랐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참으로 알 수 없다는 감탄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인도네시아는 350년 동안 화란(Netherlands)이 지배한 나라입니다. 그때 신학교를 많이 세웠습니다. 교회를 많이 세웠습니다. 교인들도 많았습니다. 마치 기독교 국가와 같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회교 지도자가 인도네시아에서 공동체 생활을 했습니다.
자기의 모든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아픈 상처를 싸매어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몰려 왔습니다. 공동체가 커지니까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곳에서 또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 나갔습니다. 우리말로 하면 구역예배처럼 회교신앙생활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운동이 확산되어서 한 개의 모임이 두 개가 되고, 두 개가 네 개가 되고, 네 개가 여덟 개가 되고, 여덟 개가 열여섯의 모임으로 확산되어 나가서 결국은 나라 전체를 회교화(回敎化) 시키고 말았습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들을 살펴보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로 세상을 구원하는 유일한 기관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얼마나 영광스럽게, 얼마나 귀하게 보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본래 계획하신 교회의 구조는 성전에서 모이는 교회와 집에서 모이는 교회가 되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은 마치 새의 두 날개와 같았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성전에서 모이는 대그룹의 날개만 가지고 날기 시작했습니다. 집에서 모이는 한쪽 날개는 너무 작아서 균형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성전에서 모이는 한쪽 날개만이라도 교회는 이만큼 성장해 왔습니다.
만약에 두 날개를 동시에 갖추고 날아왔다고 하면 세계복음화가 벌써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우리교회도 교회에서 모이는 예배는 이만하면 모이는 편입니다. 이제 집에서 모이는 모임만 제대로 회복된다면 우리교회는 날아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날개달린 교회가 될 것입니다. 성도들의 신앙도 날개를 달게 될 것입니다.

3. 집에서 모이는 교회의 필요성

왜 집에서 모이는 교회가 그처럼 필요한가 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집에서 모이는 모임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농촌에는 이웃사촌이란 말이 있어서 4~50호 되는 마을이거나 조금 더 큰 100호 쯤 되는 마을이라 할지라도 사정들을 다 압니다. 누구의 자녀인지 알고, 그 집의 사정이 어떤지 알고, 길흉사가 무엇인지 알고 서로 그렇게 지냅니다.
그러나 점점 세상은 도시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100년 전에는 인구 100만 명 이상 되는 도시가 지구상에 스무 개 정도 밖에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100년 사이에 433개로 늘어났습니다. 70년 전에는 천만이 넘는 도시는 뉴욕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70년이 지난 지금은 24개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자꾸 도시로 도시로 몰려들고 있습니다. 이처럼 도시집중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세상이 도시화 되면서 여러 문제가 대두되고 있습니다만 그 중에 하나가 고립입니다. 사람들이 서로 담을 쌓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이웃 사람들이 죽은 지 보름이 지나도 죽은 것을 모르는 일들이 일어나고, 이웃집의 아이가 굶어서 아사(餓死) 직전까지 가도 그 사정을 모르는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부산참여자치시민연대에서 지난 해 11월과 12월 두 달 동안에 ‘당신은 이웃과 얼마나 사귀고 있습니까?’하는 설문조사를 했더니 51%의 사람들이 이웃과 전혀 교류하지 않는다고 했고, 40% 정도의 사람은 이웃과 조금 교류가 있긴 하지만 필요한 가재도구를 빌려주고 빌려 쓰는 정도이지 진정한 교제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91%의 사람이 이웃과 교제를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깊이 있는 사귐을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교제다운 교제를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타면 참 곤란할 때가 있습니다. 천정만 쳐다 볼 때가 있습니다. 벽만 보고 있다가 아주 어색한 몇 분이 지나고 문이 열리면 아무 인사 없이 쑥 나가 버리는 이런 어색한 경험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이제는 아이들도 적게 낳으니까 형제도 없어지고, 이모도 없어지고, 고모도 없어지고, 혼자서 모든 것을 걱정하고 결정해야 되는 이런 시대가 도래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더 공허해 지고, 더 고립되고, 더 외로워지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인정해 주고 내 마음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내 문제를 같이 아파하고 상의할 수 있는 사람을 기대하고 있지마는 그런 사람이 없습니다.

누군가에게 내 이야기를 털어 놓으면 같이 아파하는 것이 아니고 즐깁니다. 그리고 소문을 내 버립니다. 그러니까 아무하고도 이야기를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문을 닫아버리고 맙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정말 필요한 것은 집에서 모이는 모임, 가족적이 되는 이 모임, 집에서 모여서 서로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내 마음 속에 있는 아픔을 이야기하고, 아픈 사람이 있으면 서로 도와주고 위로해 주는 이런 사람이 정말 필요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집에서...>하는 말이 나옵니다. 이것은 ‘한 집에서 다른 집으로’하는 말입니다. from house to house 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초대교회 성도들은 어느 특정한 한 집에서 모이지 아니하고 여러 성도의 집으로 돌아가면서 모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동번역과 쉬운 말 번역에는 <집집마다 돌아가며 떡을 떼며 음식을 먹고...>, 현대인의 번역에는 <집집마다 돌아가며 성찬을 나누고...>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주로 집에서 모였습니다. 특별히 환난의 시기에는 더 그리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야손의 집에 모였습니다. 가이사랴 사람들은 빌립의 집에 모였습니다. 빌립보 사람들은 루디아의 집에 모였습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가는 고린도로 가든지, 로마로 가든지 자기 집을 아예 교회로 개방해 놓았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마가 요한의 집에 모여서 성령받기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했고, 거기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고 베드로가 옥(獄)에 갇혀서 내일이면 죽는데 오늘 밤을 세워가면서 마가 요한의 집에 모여서 철야기도를 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이렇게 가정에서 모일 때 단순히 구역예배처럼 친교나 구역을 관리하는 정도의 모임이 아니었습니다. 작은 교회로써 교회가 가지고 있는 모든 형태를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중 하나만 딱 떼어도 그것이 교회였습니다.

4. 집에서 모이는 교회의 모습

집에서 떡을 떼었다고 했습니다. 집에서 떡을 떼었다는 말은 성찬식을 했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 다음에 음식을 또 먹는 것을 보면 앞에 있는 것은 성찬이고, 뒤에 있는 것은 식사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현대인의 번역에는 <성찬>이라고 바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초대교회는 집에서 모일 때에 지도자가 있어서 예배를 인도하고 성찬을 집례 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날마다 더 해 졌습니다. 그러니까 전도가 되었다는 말이고, 또 거기에 새신자가 왔다는 말이고, 또 새신자를 양육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가족과 같은 공동체가 이루어졌습니다. 물건을 서로 통용(通用)했습니다. 재산과 소유를 팔아서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 주었습니다.

자기 재산을 자기 것이라고 아무도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기독교 공동체가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천국에서 누리게 할 아름다운 천국의 공동체입니다. 이 공동체의 맛을 초대교회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완벽한 공동체는 아니더라도 우리는 이러한 공동체를 모방해서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어 나가고 천국공동체의 맛을 보아야 하겠습니다. 이 공동체를 모방하다가 실패한 것이 바로 공산주의 아닙니까?
공산주의의 창시자인 칼 막스(kal marx)는 신학교 출신입니다. 그의 부모는 다 예수 잘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칼 막스가 성경을 보니까 너무도 아름답고 황홀한 공동체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공동체를 모방하여 만든 것이 공산주의입니다.

기독교 공동체와 공산주의가 다른 것이 있다고 하면 교회는 성령이 원동력이 되어서 자발적인 공동체로 이루어지고, 공산주의는 인간이 주동화 되고 중심이 되는, 힘에 의해서 강제적으로 만들어지는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닙니까?

이제 우리 교회가 주일 낮에는 교회에 모여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영감 있는 예배를 드릴 뿐만 아니라 집에서 드리는 예배를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설계하신 교회의 본래 모습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구역예배가 있습니다. 그리고 모이는 것도 좀 모입니다. 그러나 낮 예배에서 할 수 없는 친밀한 교제를, 그리스도 안에서 아름다운 한 몸 된 경험을, 한 가족 되는 경험을 집에서 모이는 예배에서 맛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제 구역에서 드리는 예배에 적어도 다섯 가지가 있어야 합니다.

이 다섯 가지는 먼저 집에서 모이는 모임에서 공동체가 경험되어져야 합니다. 공동체는 다른 말로 하면 ‘가족경험’입니다. 가족처럼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관계가 형성되는 모임이 되어야 합니다. 구역에서 가족적인 모임을 하는 곳도 있습니다마는 아직도 마음을 다 털어놓고, 치료하는 구역들이 많지는 않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며 모든 성도는 한 가족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도 가족과 같은 이런 아름다운 돌봄과 치료와 사랑이 전체예배에서는 힘들지만 집에서 드리는 예배, 구역에서는 반드시 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하나님의 집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집을 보세요. 집은 재료만 가지고 집이 되어지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를 짓는데도 수많은 벽돌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벽돌이 하나 씩 따로 있다면 집이 되겠습니까? 우리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수의 세포로 우리 몸이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세포 세포가 다 떨어져서 따로따로 있다면 몸이 되겠습니까? 고깃덩어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고 생명도 유지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포가 서로 연결되어서 하나의 기관이 되면 이 기관은 또 다른 기관을 연결해 주고, 세워주고, 보완해 줍니다. 마치 뼈가 있고 힘줄이 있어서 서로 당겨주고 받쳐주면 우리의 몸이 만들어지고, 우리가 이렇게 서 있을 수 있고, 앉아 있게도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디스크 환자들은 여러 가지 치료 방법이 있겠지만  허리의 근육을 강화시켜서 치료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허리의 힘줄을 운동이라든지, 등산을 해서 강화시키면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주면 허리의 뼈가 힘을 덜 받아서 디스크가 치료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몸의 모든 세포가 다 연결되어 있고 서로 교류하고, 서로 세워주고, 서로 붙들어 주어서 우리의 몸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집도 마찬가지입니다. 벽돌과 벽돌이 서로 연결되어 있으니까 집이 되지, 따로따로 있으면 집이 안 됩니다. 특별히 한옥(韓屋)은 나무를 얼마나 잘 짜 맞추었는지 못 하나 없어도 집이 될 수 있습니다. 서로 붙들어주고 서로 보완하기 때문에 집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인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성도가 서로서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서로서로 세워주어야 합니다. 서로서로 보완해 주어야 합니다. 서로서로 도와주어야만 건강한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내가 다른 세포인, 다른 성도들과 연결되어 있습니까? 서로 세워주고 서로 격려하고 서로 붙들어주고 있습니까? 아니면 일주일 내내 전혀 교류가 없다가 주일에 예배드리고 가면 끝입니까? 이러한 서로 세워주기가 어디에서 이루어지느냐하면 구역에서 이루어집니다.
낮 예배 때는 이런 분위기가 되기 힘듭니다. 내 신앙은 그렇게 연결되어 있습니까? 교회 속으로 들어가서 집에서 모이는 모임에서 이런 관계를 가져야만 건강한 교회가 되고, 내 신앙도 따라서 건강하게 성장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신앙도 붙들어 세워 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공동체, 가족경험이 이루어져야 됩니다. 

두 번 째로는 이런 가족적인 경험이 어디에서 이루어지느냐 하는 것입니다. 가족의 특징이 뭡니까? 상호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 보세요. 42절에 보면 <서로 교제하며>. 44절에는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절에는 <재산과 소유를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 주고>, 46절에는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라고 했습니다.

가족은 서로 책임을 지는 것처럼 집에서 모이는 교회도 이렇게 책임을 지는 일을 서로가 할 수 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가정에 누가 아프면 어떤 사람은 병원에 데려 갑니다. 어떤 사람은 수속합니다. 어떤 사람은 비용을 댑니다.  어떤 사람은 간병을 합니다. 마찬가지로 집에서 모이는 교인들이 어떤 문제가 있을 때 모든 식구들이 벌 떼와 같이 달려들어서 서로 위해서 도와주고 아픔을 감싸주는 가족 같은 모임이 되어야만 건강한 모임이 될 수 있습니다.
아픔이 있으면 서로의 아픔을 이야기하고 서로 책임지기 위해서 노력하는 이런 공동체가 되어야 건강한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어느 병원에 감당키 어려운 환자가 입원을 했습니다. 공사장에서 허리를 다쳐서 하반신이 마비된 젊은 환자였습니다. 이 환자 옆을 의사가 지나가든지, 간호사가 지나가든지, 또 다른 사람이 지나가다가 보기만 하면 보는 사람마다 병신 처음 보았느냐고 온갖 욕설을 다 퍼부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난폭하던 사람이 점차 유순해지기 시작하더니 전혀 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이유가 이렇습니다. 그 환자는 사고 직후 아내가 전세 보증금을 챙겨 사라지는 바람에 돌봐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배치된 간병인에게도 난폭하게 굴어서 간병인도 손을 들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한 자원봉사자가 그 환자를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아무 것도 묻지 않고 돌봐주는 그 자원봉사자에게 반발심이 생겼습니다. 어디 한번 들어보라는 심정으로 자신의 일그러진 과거를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부모로부터 버림받고 고아원에서 자란 이야기, 고아원에서 도망쳐 나온 후에 막노동판에서 원망과 술로 세월을 보냈고 사고 직후에 아내마저 도망쳐 버린 이야기, 그래서 자신이 미워지고 세상이 미워진 이야기를 털어 내 놓았습니다.
이야기를 묵묵히 듣던 자원봉사자는 그의 손을 꽉 잡고 “참으로 힘든 세상을 살았네요, 나 같았으면 벌써 미쳐 버렸을 것인데 선생님은 참 잘 참고 견디셨네요. 그런데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선생님의 친구가 되어주는 것 말고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이 참으로 아픕니다. 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네요.”하면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웁니다.
환자도 따라서 울기 시작했습니다. 자원봉사자는 손을 잡고 소리 내면서 웁니다. 환자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람다운 대접을 받게 되었다는 생각에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지친 인생살이에서 강퍅하게 되었던 한 사람이 사랑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우리의 구역에 이런 이해와 사랑이 넘쳐 난다고 하면 그것이 건강한 구역입니다. 이 자원봉사자가 돈 한 푼 쓰지 않았습니다. 사탕 하나 사 주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같이 마음아파하고 눈물 흘리면서 ‘친구가 되어주는 것 말고는 제가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네요’ 하고 손을 잡아주는 바로 이것이 그의 마음을 변화시켜 주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실제적으로 이런 사랑을 느끼게 할 수 있는 곳이 구역입니다. 전체 모임에서는 이런 사랑을 느끼기가 힘듭니다. 집에서 모일 때 내 깊은 사정 이야기를 할 수 있고, 그것을 받아 줄 수 있고, 그것을 같이 아파하고, 공감하고, 같이 눈물 흘릴 수 있는 이런 아름다운 분위기를 만들어 나가자는 것이 집에서 모이는 모임의 모습이 되자는 것입니다.
초대교회가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났던 이유가 성령충만 받은 사람이 집에서 이런 사랑을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 집에서 만나는 모임에 참여하여 공동체가 경험되고 상호책임이 경험되는, 그래서 세상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는 사랑의 경험, 사람다운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아름다운 경험을 우리 구역에서 한다면 살아있는 구역이요, 그곳이 바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작은 날개의 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는데 앞장서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공동체 안에서는 서로 상호책임을 져서 같이 웃고, 같이 울 수 있는 참 사랑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모이면 불신영혼을 위하여 관심을 가지고 이들을 초청하여서 이들을 돌보고 양육하고, 구체적인 양육이 이루어지는 구역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건강한 구역입니다.

구역의 인도자는 지도자이지마는 군림하지 않습니다. 섬기는 지도자입니다. 그 자원봉사자처럼 집에서 모이는 성도의 아픔을 같이 아파하고 같이 들어주고 같이 눈물 흘리고 이해하는 지도자, 격려하고, 알아주고, 섬기는 지도자가 있으면 우리가 모이는 구역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디자인하신 작은 교회, 집에서 모이는 교회의 원형(原形)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구역예배가 우리 교회에서도 점점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배 중에 귀신이 쫓겨 나가고, 예배 중에 환자가 일어나고 치료가 되고, 예배 중에 일꾼이 세워지고, 예배 중에 기쁨이 있고, 예배 중에 눈물이 있어서 찬송만 부르다가 눈물로 끝내는 구역예배를 드리는 구역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구역들로 회복될 수 있도록 기도해야 겠습니다. 모든 성도가 다 집에서 모이는 예배에 참여하십시다. 구역예배를 드리십시다. 그리고 “구역예배 드립시다”하면 다 기다렸다는 듯이 참여하여서 이런 아름다운 경험을 집에서 모이는 예배에서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을 다시 한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손가락으로 표현한다면, 엄지손가락 -제일 중요한 것은 공동체입니다. 가족경험을 할 수 있는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중지손가락 -이 공동체를 이끌어 가는 사람은 키가 제일 큰 가운데 중지(中指)입니다. 섬김의 지도자입니다.
그리고 검지손가락 -우리의 방향은 어딘가 하면 불신영혼입니다. 우리가 공동체를 이루어서 무엇을 경험하느냐, 약손가락 -약지(藥指)와 같이 상호책임, 서로 도와주는 것과, 새끼손가락 -제일 작은 새가족을 양육하는 것입니다.
자, 이런 교회 공동체가 경험되고, 불신영혼을 위해서 전도하고, 섬기는 지도력이 있고, 상호책임이 있고, 약한 사람을 위해서 양육이 이루어진다면, 이렇게 집에서 모이는 교회는 하나님이 계획하신 바로 그 교회가 될 것입니다. 우리 구역에서 모이는 교회가 이런 모임이 되도록 다시 한번 새롭게 나가보자는 것입니다.

우리교회가 이제까지 구역이라고 해 왔던 이름을 목장(牧場)으로 바꿉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양들이기 때문입니다. 양들이 있는 곳이 목장 아닙니까?  그리고 목장에서 양을 치는 사람을 목자(牧者)라고 합니다. 섬김의 목자가 가족공동체를 이루고, 믿는 모든 성도가 상호책임을 지며 모든 관심이 전도로 모아지고, 그래서 생겨진 새가족을 잘 양육하게 될 때에, 그러한 집에서 모이는 교회를 회복할 때에 초대교회처럼 칭송받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세상을 구원하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교회를 위하여서 기도하고 노력하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부터 낮 예배만 한차례 모이지 말고 집에서 모이는 교회에도 참여하여서 하나님이 만드신 영광스러운 교회, 초대교회처럼 아름다운 교회, 두 날개를 가지고 날아올라가는 아름다운 교회를 이루어서 자신이 아름다운 교회 속에서 치료되고, 새 힘을 얻고, 능력을 받고, 서로 교제하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우리 영락의 온 성도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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