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회개와 용서와 화해 (창 33:1-11)

  • 잡초 잡초
  • 370
  • 0

첨부 1


- 설교 : 서정호 목사

오늘은 사순절 다섯째 주일입니다. 사순절 기간에 깊이 묵상하고 결단해야 할 주제는 회개와 용서와 화해입니다. 여러분! 아직도 회개하지 못하고 남아있는 죄와 허물이 있습니까? 아직도 용서받지 못한 일과 용서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까? 화해하지 못해 갈등과 앙금이 남아있는 대상은 없습니까?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사람의 입에서 고상하고 인격적인 말이 아닌 거칠고 천박한 말이 나온다면, 아주 고상하고 아름다운 천사와 같은 말을 하면서도 행동이 거칠고 천박하고 폭력적이라면, 상의는 훌륭하고 값비싼 양복을 입고 아래는 누덕누덕 기운 더러운 한복바지를 입었다면, 주인으로부터 아주 가난하고 어려울 때 많은 신세를 지고 도움을 받아 큰 재산을 누리고 살고 있는데 그 주인의 아들이 심각한 경제적인 위기에 처해 죽어가고 있는데도 전혀 도움을 줄 생각도 하지 않는다면, 엄청난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이 지극히 적은 금액을 빌려주고 받지 못해 못 살게 군다면,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 모습일까요? 이와 같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한 큰 용서와 사랑을 받은 자들임을 고백하고 살아가는 자들인데 아직도 누군가를 향해 용서하지 못한다면 얼마나 어색하고 어울리지 않는 이율배반적인 삶의 모습일까요? 세상에는 용서받지 않아도 될 만큼 깨끗한 사람, 완전한 의인은 아무도 없고, 용서할 수 없을 만큼 주님의 십자가보다 큰 아픔과 상처를 지닌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용서에 앞서 우리가 선행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회개입니다. 회개와 용서 그 다음에 화해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회개의 은총

성경의 모든 기록 중에 용서라는 단어만큼 아마 위대한 단어는 없을 것입니다. 용서만큼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단어가 없고 용서만큼 우리의 삶에 감격을 주는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용서 없이 예수의 사랑은 으며 예수님의 용서 없이 인간의 구원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통해서만이 인간은 거듭나게 되는 것이며, 은총이 인간에게 오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참 행복이란 바로 용서 받는 일이며 인간의 참된 가치 있는 행동과 삶은 용서하여 주는 일입니다. 죄가 내 속에 있을 때, 하나님이 그 죄를 보고 계실 때, 그 죄가 고백되지 않았을 때 다윗은 "내 뼈가 녹아갑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뭄에 마름같이 되었도다" 이야말로 고통스러운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용서 받기위해서, 용서하기 위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없을 때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의 완전한 위선자요 거짓 삶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용서가 없는 사람은 평화가 없고 용서를 받기 전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내가 남을 용서하기 전에는 나에게 평화가 없습니다. 그런데 용서보다 앞서 회개의 단계가 있어야 하는데 회개는 사람 앞에서 돌이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돌아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일랜드에서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그곳에서는 종교간 싸움이 그치지를 않았습니다. 이러한 때 아홉 살 난 소년이 심부름을 마치고 두 진영 간의 싸움하는 곳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이 소년은 결국 그들의 쏜 총을 맞고 죽었습니다. 비통에 잠긴 소년의 어머니는 무엇을 생각하였는지 피 흘리는 아들의 시체를 어깨에 메고 두 적진 사이를 걸어갔습니다, 이를 본 어머니들이 너도나도 소년의 어머니와 함께 행진하였습니다. 이를 지켜보는 무장한 게릴라들은 총구를 떨어뜨렸습니다. 그들은 싸움을 멈췄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화해하였습니다. 한 소년의 죽음으로 원수가 친구가 되어 서로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을까요? 하나님과 우리들 사이에서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오셔서 사람들의 죄를 짊어지시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십가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어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게 됩니다.  하나님을 친구로 섬기게 됩니다. 예수님은 원수 된 사이를 친구로 만들어 줍니다.

오늘의 말씀을 보십시오. 야곱과 에서는 쌍둥이였습니다. 에서가 어머니의 뱃속에서 먼저 나왔습니다. 아마 2-3분 차이일 것입니다. 야곱은 2-3분 차이로 동생이 된 것입니다. 그것이 억울하였습니다. 유대나라에서는 큰 아들이 많은 재산도 물려받았습니다. 욕심 많은 야곱은 꾀를 내어 형 에서를 자기에게 형이라 부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앞을 잘 보지 못하는 아버지에게는 눈을 속여 자기가 형 에서인 것처럼 변장을 하여 형이 받아야 할 축복을 다 받아버렸습니다. 결국 그들은 원수가 되었습니다.

야곱은 20여 년간 집을 떠나 살아야 했습니다. 그동안 결혼해서 식구도 많았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재산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걱정은 형 에서였습니다. 형은 나를 아직 원수로 생각할까? 20년이 지났는데, 들려오는 소식에 의하면 형의 마음은 조금도 변하지 않고 지금도 동생 야곱을 죽이려고 이를 갈고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야곱은 지난 잘못을 눈물로 회개의 기도를 드리고 결단을 내렸습니다. 형이 나를 잡아 죽인다하여도 고향으로 내려가 형을 만나리라. 그리고 형에게 용서를 구하리라. 야곱은 믿음으로 형 에서에게로 나갔습니다. 믿음으로 나가는 것은 하나님을 앞에 서게 하고 자기는 그 뒤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야곱이 두려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가는데 멀리서 형 에서가 오는데 보니 형 옆에는 많은 군사들이 무장하고 달려옵니다. 야곱이 얼마나 두려워하였겠습니까? 그러나 야곱은 한번 결단한 마음,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형은 나를 원수로 맞이한다하여도 나는 형을 사랑하리라.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시리라.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가까이 온 형 에서가 두 팔을 벌려 야곱에게 달려옵니다. 꿈을 꾸는 것 같았고 상상도 하지 못한 일입니다. 형이 먼저 팔을 벌려 야곱을 맞이하고 그리고 형이 야곱을 품에 안고 그리고 그들은 고개를 어긋맞기고 서로 입 맞추며 서로 울었습니다. 원수가 친구가 된 것입니다. 누가 원수를 친구로 맞이하게 하였습니까? 그들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형 에서의 마음을 돌려 눈물로 동생을 맞이하게 하였습니다.

참 회개 

인도에 한 수도사가 있었는데 이 수도사에게 늘 한 창녀와 한 신부가 와서 상담을 하곤 하였다고 합니다. 이 인도의 수도사가 훗날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 창녀는 와서 언제나 하나님 이야기만을 하는 반면 천주교 신부님은 와서 하나님 이야기는 하지 않고 오직 여자 이야기만 하다가 갑니다."

이 수도사의 말에 우리 인간들의 현주소가 잘 밝혀져 있는 것 같습니다. 창녀는 늘 죄 가운데 살고 있고 자기가 죄 가운데 있는 것을 자신이 알고 온 세상이 압니다. 그러나 창녀는 자신의 거듭되는 죄의 삶에서 하나님을 늘 생각하는데 신부는 늘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삶을 살면서 자신이 율법을 어기는 행동은 하지 않고 모든 사람의 눈에 죄스러운 행동을 하지도 않습니다. 그의 삶은 죄와 상관없어 보이지만 그의 마음은 늘 죄의 유혹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창녀는 죄 가운데서 하나님을 그리워하고 있고, 신부는 의로운 삶 가운데서 죄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인간의 현주소를 이 인도 수도사가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우리의 참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죄에 깊게 빠져있는 사람일수록 하나님을 그리워합니다. 반면 의롭게 산다는 사람일수록 죄의 유혹을 그리워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떨면서 살아야 하는데 우리들의 떨림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늘 율법의 소리를 들으면서 우리들의 끝없는 죄성으로 인해 떨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엄청난 인자하심과 자비하심 앞에 떨어야 합니다. 나 같은 죄인에게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을 안고 매일 찾아오시는 하나님 앞에서 떨어야 합니다.

여러분, 지금 죄로 인해 떨고 계시진 않습니까? 지은 죄로 인해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를 구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계시진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사탄의 전략입니다. 사탄은 우리들에게 율법을 들고 찾아옵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지은 죄로 꼼짝 못하게 합니다. 사탄은 율법만을 소개합니다. 우리에게 사랑과 자비가 넘치는 하나님을 소개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절망 가운데서 더 큰 죄에 빠지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은 우리에게 율법만을 갖고 찾아오지 않습니다. 사랑과 자비가 넘치는 하나님을 소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합니다. 성령은 율법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율법으로 우리의 죄를 깨우치게 하지만,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인자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을 소개해 주십니다.

여러분은 율법을 더 가까이 느끼십니까? 아니면 인자하심이 무궁하신 하나님을 더 가까이 느끼십니까? 우리가 율법을 행하여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 할 때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을 더욱 느낍니다. 아니 더욱 쉽게 죄의 유혹에 빠집니다. 반면 하나님의 무궁무진한 인자하심을 생각할 때 죄에서 해방됩니다. 참으로 의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무궁무진하신 사랑과 자비 앞에서 떨고 서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동안 우리의 죄로 인해 늘 떨고 살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죄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이제 우리는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 앞에서 떨면서 사십시다. 아침마다 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생각하며 겸손히 머리 숙이십시다. 저녁마다 새롭게 찾아오시는 은총을 생각하며 조용히 우리의 마음을 가다듬읍시다. 간음한 다윗에게 도리어 솔로몬을 허락하시는 엄청난 자비의 하나님 앞에 두려움과 떨림으로 서십시다. 이 길만이 죄에서 해방되는 길이요 하나님께 우리의 삶을 산제사로 드리는 삶인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의 소리도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더 크게 들어야 할 소리는 하나님의 무궁무진한 자비와 사랑의 노래입니다. 우리는 엄청난 사랑의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 떨어야 합니다. 그러할 때 우리는 율법이 금하는 죄를 범치 않게 됩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엄청난 축복을 만끽하는 자가 됩니다. 이것이 참으로 회개한 자의 모습입니다.

사랑과 인자가 엄청나신 하나님이 아침마다 여러분의 문밖에 오셔서 문을 두드리실 때에 그 사랑의 주님을 매일 맞아들이시고 금년도를 참 회개한 자로서 살아가십시다. 오늘도 사랑의 하나님이 여러분의 가정의 문을 두드리시고 여러분의 사업체의 문을 두드리시고 우리 교회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이 사랑의 하나님을 맞아들이십시다.

용서

어느 사람이 항상 원수에 대하여 좋은 말만 하는 링컨 대통령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항의를 했습니다. "원수는 없애야(죽여야)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말하는 사람에게 링컨은 웃으면서 "옳습니다. 없애야 하구 말고요. 저도 바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원수를 친구로 만들어 원수를 없애버리는 걸요."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주님은 하나님과 원수 된 우리를 친구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서로 원수 된 사람들 가운데서 친구로 만들어 가십니다. 주님이 계신 거기에 용서와 화해와 평화가 있습니다.

가난한 창고, 가난한 마음 

인간의 마음을 우리가 물질적인 걸 쟁여 놓는 창고와 비유해서 생각할 수 있는데 부자들의 창고는 보물이 가득 차 있어 문을 꼭꼭 걸어 잠가야 하지만 반대로 별로 대수로울 것이 있을 리 없는 가난한 사람의 창고는 문단속이 허술할 수밖에 없으며 아예 활짝 열어 제쳐 놓고 산다 한들 불안할 것도, 누굴 의심할 필요도 없습니다.

가난한 마음이란 빈자의 창고처럼 열린 마음을 뜻하는 것이며 꽉 찬 창고란 더 이상 물건을 들일 수 없는 창고라는 뜻도 되는데 비록 자기가 지닌 것보다 더 나은 보물이 있다고 해도 그는 차지하지 못할 것입니다. 한번 주입된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남의 말을 전혀 들을 줄 모르는 사람, 머릿속이 온통 지식으로 꽉 차서 단순한 진리도 받아들일 여지가 없는 사람을 한 번 상상해 본다면 그는 얼마나 교만할까요. 그러나 가난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가난한 창고와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 하나 있는데 그곳에는 여유와 풍성함이 있습니다. 가난한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마음과 일맥상통합니다. 무엇을 받아들일 지에 대해서는 여러분이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미워하는 사람, 마음속에 한을 품고 있는 대상을 받아드릴 수는 없는지요? 여러분이 미워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 사람과 여러분 중간에 주님이 계시도록 하십시오. 주님은 그 사람을 여러분의 친구로 만들어 주십니다.

공산당이 기독교를 대단히 핍박하는 루마니아 감옥에서 이야기입니다. 그 감옥에는 있는 사람들은  기독교의 신앙을 지키다가 들어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새로 들어온 '죄수'를 보고 그들은 너무나 놀랐습니다. 그 사람은 기독교인들을 잔인하게 핍박하였던  비밀경찰의 우두머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기독교인이 되어 신앙을 지키다가 감옥에 들어온 것입니다. 알고 보았더니 이런 사연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이 사람이 근무하는 곳에 한 소년이 꽃을 들고 와서 면회를 신청하였는데 그 소년은 수줍어하면서 그 비밀경찰 대령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령님' 대령님은 저의 어머니와 아버지를 체포했어요. 오늘은 어머니의 생신이에요. 생신 때마다 저는 어머니께 꽃을 드리곤 했지요. 그러나 오늘은 대령님 때문에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릴 수 없게 되었어요. 어머니는 그리스도인이세요. 항상 저에게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고, 그리고 악을 선으로 갚으라고 가르쳐주셨어요. 어머니를 만날 수가 없으니 이 꽃을 대령님의 아이들의 어머니에게 드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을 사모님에게 전해줄 수 있으세요?'” 대령은 꽃을 받고는 눈물을 흘리며 그 소년을 껴안았습니다. 그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되었고 더 이상 무죄한 사람들을 체포하고 고통을 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그리스도를 믿고 전하는 자가 되어서 감옥에 까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원수를 주님으로 말미암아 친구로 만들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그 사람을 위하여서도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하십니다.

치유가 있는 묵상

원수를 사랑하는 일이 맨 정신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그 큰 사랑을 인정할 때만 가능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가슴에 원수를 품고 있지 말고 그 사람을 사랑하여 친구를 만들라”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사랑하면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원수를 친구로 만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산다면 누구인들 사랑하지 못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마음 아파하는 사람이 부모를 죽이고 형제를 죽인 원수는 아니잖습니까? 사랑을 포기하지 맙시다. 다시 나를 싫어하는 사람도 사랑할 수 있도록 야곱과 같이 기도합시다. 여러분과 관계된 모든 사람이 여러분과 친구의 관계, 화목한 관계로 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교회는 세례입교식을 거행하게 됩니다. 성례전에는 세례와 성찬식 두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세례는 씻음을 받음과 깨끗하게 되었음을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세례(Baptism)는 물을 가지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씻는 예식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 씻음을 받고 깨끗하게 된 것이 증명이며, 주님의 사람이 되기를 결단한 우리의 서약을 표시하고 인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례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했을 때 하나님께서 내 속에 이루어 놓으신 신분의 변화를 외적으로 또한 공적으로 인치는 예식입니다.

이에 대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세례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는 결정적 사건

갈3;27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라고 말씀을 합니다. 세례는 세상에 속했던 내가 세상의 옷을 벗고, 그리스도의 옷을 입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함으로써 타락한 생활에서 벗어나게 하며 적극적인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게 하는 인침입니다.

세례는 회개와, 용서의 예식

세례는 하나님의 은총의 확증입니다. 회개하는 자녀의 죄를 완전하게 도말하여 씻겨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곧 세례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교인들은 세례 받기 전에 반드시 금식을 하면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타락한 인간이 자신의 허물과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세례 때에 머리에 부어지는 물은 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주님의 흘리신 보혈이며, 이 보혈의 뿌림을 받는 자는 그 보혈로 인하여 모든 죄가 씻김 받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죽을 죄인들의 수치와 치욕을 자신의 것으로 짊어지시고 고통을 다 감내하였고 용서의 길을 열어 놓으셨는데 이 회개와 용서에 참여하는 예식이 성례전입니다. 

세례는 새로운 피조물로의 탄생을 의미

세례는 예수 안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세례를 주실 때 역사하신 성령님 안에서 내가 변화된 생의 출발을 하는 것입니다. 칼빈은‘세례는 새 생명으로 인간을 재형성시키는 성령님의 은혜’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세례는 죄의 세계로부터 의의 세계로, 속박에서 자유로, 율법 아래의 죽음으로부터 성령 안에의 생명으로 옮겨지는 중요한 과정입니다.“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일본 어느 마을에 만 두 살 된 아이가 소아암에 걸렸습니다. 병원에 입원시키고 정성을 다해 기도했지만 결과는 절망적이었습니다. 죽음의 시간이 언제냐 문제였습니다. 목사가 아이에게 유아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세례가 끝나자 목사는 아이가 두 살 밖에 안됐지만 예수님에 대하여 알아야한다고 하였습니다. 부모들은 그림으로 된 성경책을 몇 권 구했는데, 아이는 유독 그 중에서도 “예수님은 내 친구”라는 책을 가장 좋아했습니다. 그 책 그림 중에도 예수님께서 한 어린아이를 안고 있는 그림을 제일 좋아했고, 이 아이는 그 그림 속의 아이가 바로 자기라고 말했습니다. 3개월 후에 그 아이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이 아이가 예수님의 품으로 간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때까지 세례를 받지 못한 아이의 어머니도 ‘하나님의 것’이 되기 위하여 세례를 받고 온 가족이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세례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새로운 피조물로의 탄생입니다.

세례는 주님의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의식

세례는 그리스도의 공동체 안에 들어오는‘입장허가’입니다. 초대교회는 세례 받지 않은 사람은 성도의 수에 넣지 않았고, 그들을 말씀의 예전에는 참여시켰으나, 다락방 예전 곧 성찬의 자리에는 그들을 모두 다 퇴장시키고 나서 세례 받은 이들끼리 행했습니다. 주님의 교회는 그만큼 공동체 의식을 엄격하게 지켰습니다. 그러나 일단 세례를 받고 나면 조건을 따지지 않고 누구든지 한 형제, 한 재매로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세례는 교회의 성도가 되는 예식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