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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새 시대의 여명 (삼하 1: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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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황요한 목사

할렐루야 ! 지난 22년동안을 하루같이 인도하신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려드립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은혜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갈급하듯 목이 마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직도 주님의 소원을 다 이루었다고 생각치 않기 믿기 때문입니다. 좋게 이야기 하면 겸손함이요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아직도 주님의 남은 고난에 참예하면서 한 영혼 한 영혼을 구원해야할 사명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경은 사무엘서를 상과 하로, 열왕기서도 상과 하로 구분을 하여 네 개의 성경으로 편성되어져 있지만 본래 히브리 성경에는 하나로 편집이 되어 있습니다. 사무엘서를 상하로 나누는 중요한 기준은 바로 사울의 죽음입니다. 그만큼 사울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 이스라엘 민족에겐 역사적인 신앙의 터닝포인트가 될 만큼 중요한 사건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사울의 죽은 후라..." 사무엘 하 1절은 그렇게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에는 왕이 없습니다. 왕이 없이 사사로 시대를 살았던 이스라엘 민족들이 사사 대신 왕을 세워달라고 주의 종 사무엘에게 떼를 쓰던 것이 엊그제 같습니다만은, 그렇게 하여 세워진 초대왕 사울왕은 죽었습니다. 그리고 사무엘하는 왕이 없는 이스라엘로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사울의 집안과 후손들은 나름대로 복잡한 정치적 계산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왕이 죽고 난뒤의 후계문제는 실로 어렵고 힘든 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더구나 왕이 아끼던 세 아들, 요나단과 아비나답과 말기수아가 죽고 난 후의 복잡한 서열 정하기는 더욱 그리했을 것입니다. 고난은 슬픈 일이지만 정치는 현실이기에 왕이 없는 이스라엘 정국은 혼미한 상태였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2장에 보면, 아브넬이라는 장군이 정치적 야욕으로 이스보셋이라는 사울 왕의 아들을 옹립하면서 북쪽 지역에서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국가가 어지러울 때에는 군대가 힘을 가지기 마련인데 그 군대가 정치에 개입하게 되면 역사는 후퇴하기 마련입니다. 결국 다윗은 북쪽 이스라엘을 제외한 남쪽 유다지역에서 30세에 왕으로 추대되어 헤브론에서 칠년 육개월을 다스린 후에야 비로소 북쪽 이스라엘 지파들의 추대를 받아 삼십 삼년을 통일왕국의 왕으로서 온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1절에 보면, 다윗이 아말렉 사람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 팔레스틴 남부지역 시글락에서 머물고 있는 동안, 사울 왕은 팔레스틴 중북부지역 이스르엘평야의 길보아산에서 블레셋과 전투 중에 자신과 세 아들이 모두 전사하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울의 죽음에 다윗이 전혀 개입되지 않았음을 분명히 말해주는 확인기사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시글락에 있을 때 한 소년이 찾아왔다고 했습니다. 소년이라고 했지만 실상은 전쟁터에서 도망하여 왔다고 고백하는 것으로 보아서 자신을 패잔병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질문합니다 ‘전투가 어떻게 되었느냐? ‘이스라엘 군대는 다 죽었고 사울 왕과 요나단까지도 죽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자 다윗은 마음이 너무 애통하여 어쩔줄 몰라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다윗은 의문이 생겼습니다.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의 죽은 것을 네가 어떻게 아느냐?"

그러자 젊은이가 말을 바꿉니다. ‘사실은 제가 전쟁터에 구경을 하러 갔다고 목격하였습니다" 블레셋 병사와 기마대가 사울 왕을 향해서 다가오는데 사울 왕이 저를 보더니 '너는 누구냐' 하시기에 '나는 아말렉 사람'이라고 하였더니 '아직 내가 목숨이 붙어 있으니 차라리 나를 죽여다오 '하기에 죽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 왕의 왕관과 팔찌를 가지고 왔다는 것이지요.

다윗이 듣고 있자니 요즘말로 소설을 쓰고 있어요. 사실 이 젊은 친구는 어떤 종류의 사람이냐하면, 전쟁터에서 시체를 약탈하여 금반지나 목걸이 같은것을 훔쳐가는 그런 부류의 사람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전투가 끝난 후에 전쟁터를 찾아가는데 혹 늦게라도 가면 다른 사람들에게 기회를 빼앗길까 염려하여 전투 중에 시체를 약탈하는 것이지요.

시체를 약탈하러 갔는데 왕이 죽은 것을 본 것입니다. 이미 사울 왕은 삼상 31장에서 자신이 할례받지 못한자의 손에 죽느니 차라리 자결을 택한 것인데 이 젊은이가 발견한 것입니다. 왕관과 팔찌를 보면서 엄청나게 수지 맞았다고 생각했으나 생각을 바꾸어 다윗 진영으로 온 것입니다. 사울과 다윗이 원수관계라고 알고 하고 있던 그는 자신이 직접 다윗의 원수인 사울을 죽였으며 다음 왕으로 즉위할 사람은 바로 다윗이기에 당신이 쓸 왕관을 가지고 왔다고 자신이 영웅적인 행동의 주인공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다윗은 세 번의 질문을 통하여 그가 거짓을 고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뿐만아니라 다윗공동체들도 이 상황을 숨을 죽이고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원수 같은 사울이 죽었다는 것은 지금까지 고생했던 피난생활이 끝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와 ! 하고 한마디만 외치면 모두가 함성을 지르면서 기뻐하며 축제가 벌어질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11절을 보니까, 다윗은 자신의 옷을 잡아 찢으면서 애통하였다고 했습니다. 오히려 사울과 요나단, 그리고 백성들의 죽음을 인하여 저녁 때까지 슬퍼하며 울며 금식까지 하였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러자 다윗의 공동체들도 이심전심으로 다윗의 행동에 감동하여 모두가 옷을 찢으며 슬픔에 동참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2가지 놀라운 모습을 다윗에게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원수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입에 달린 말을 합니다. "원수를 사랑합시다..." 하지만 그 말이 얼마나 허구인지 일상생활에서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조금만 기분 나쁜 말만 듣거나 섭섭하여도 금새 얼굴색이 달라지거나 말도 안하는 등 이기적인 모습이지요. 원수를 사랑하겠노라고 거창하게 선언해 놓고서 이웃이 한 마디 섭섭하게 하면 말도 안하는 우리의 행동이 너무 이중적이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백성들은 지도자 하기 나름입니다. 성도들은 우리 목회자 하기 나름입니다. 그래서 지도자들의 멍에는 언제나 무거운 것입니다. 슬픔을 가눈 뒤에 다윗은 다시금 젊은이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선언합니다. 14절입니다. "네가 어찌 하여 여호와의 기름 부은 자 죽이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냐? " 사실 이 말은 다윗의 일관된 신앙고백이기도 한 말입니다.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 행동했기 때문입니다.

사울을 자기가 죽였다고 소설처럼 거짓말을 꾸몄던 젊은이는 영웅적인 행동을 인하여 다윗 진영에서 크게 대우를 받은 것이 아니라 죽임들 당했습니다. 다윗은 그를 죽이라고 명하면서 그가 왜 죽어야 하는지 이유를 알려 줍니다. 16절입니다. "네 피가 네 머리로 돌아갈 지어다. 네 입이 네게 대하여 스스로 증거하기를 내가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주였노라"라고 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다윗의 신앙관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19절부터 27절까지 사울왕과 요나단을 중심으로 해서 그들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지은 노래가 ‘활노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아 너의 영광이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 졌도다. 이 일을 가드에도 고하지 말며 아스글론 거리에도 전파하지 말찌어다. 블레셋 사람의 딸들이 즐거워할까, 할례 받지 못한 자의 딸들이 개가를 부를까 염려로다.

다윗이 이 슬픈 상황 속에서도 믿지 않는 자들이 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실패에 대해서 개가를 부르고, 즐거워할까봐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까봐 염려하고 있습니다. 활노래의 클라이막스는 26절입니다.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승하였도다.

이 애절한 슬픈 다윗의 노래를 활 노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원수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았던 다윗입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에게서 또 하나의 위대한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제는 자기에게 굴러 들어온 기회입니다. 새로운 정권을 잡을 새로운 국가의 왕이 될 기회가 자기에게 굴러들어왔어요. 그는 절대로 인위적으로 기회를 빼앗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세워 주실 때까지, 하나님께서 자신을 인도하실 때까지 기다릴 줄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다윗의 모습을 통해서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오늘 말씀의 제목을 새 시대의 여명이라고 삼았습니다. 우리 평안의교회가 지난 22년동안 참으로 어려운 과정을 많이 겪어왔습니다. 교회의 어려움들이 다 그렇지만 다시 한 번 하라면 할 수 없을 만큼 마치 군에 갔다온 형제에게 다시 한 번 군대생활을 할 수 있겠냐고 물으면 죽어도 못한다고 그러지요. 죽는거 보다는 낫겠지요. 그만큼 지난 과거에 어려움은 쉽지 않은 거지요.

지난 번 부광교회에서 대부분 부목사님과 개척교회 목사님을 대상으로 전도세미나가 있었는 데, 그 분들에게 말씀을 전할 기회가 있었어요. 다른 어떤 것들도 그들이 은혜를 받지만, 제가 보니까 눈동자가 빛나는 순간이 언제인 줄 아세요? 가장 어렵고 힘들었던 개척의 과정, 5000원 전기료가 없어서 8개 형광등 중에 회중석에 6개를 끄고, 강단에 2개를 켜고 예배를 드린 이야기를 하니까 그들의 눈이 빛납디다. 왜? 지금 내 이야기 거든, 지금 우리의 이야기거든...

거창하게 전도세미나 가서 오백명 전도하고, 천명 전도 하고 그러면 김 샙니다. 그것은 남의 이야기 거든, 그저 어떻게 해서든지 직장 다니면서, 어려운 가정 생활 하면서 슈퍼타이 사가고, 박카스 사 가면서 전도해서 한 명 전도했습니다. 다섯 명 전도했습니다. 그게 내 이야기 같아서 나도 한 번 해 봐야지. 그런 도전이 생기는 거지요. 그런 어려운 과정들을 거치면서 지금 1300명 재적의 오늘의 평안의교회가 된 줄로 믿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2가지를 부탁하고 싶습니다. 하나는 지금까지 여러분들의 수고, 목사만의 수고가 아닙니다. 저를 도와서 여러분들의 그 눈물겨운 수고에 대해서 저는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1983년 3월 13일 바로 오늘, 이 아침에 평안의교회가 창립이 되었습니다. 허허벌판에서 2층 건물에 몇 개가 안 되는 그 상황 속에서도 우리 평안의교회는 창립이 되었습니다.

그 몇 안 되는 여러 형제들, 그 동역자의 길을 걸어온 여러분들에게 진심으로 존경과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에게 한 가지를 부탁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여기에 만족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보통 전도합시다. 열심히 우리가 부흥합시다. 그러면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저 목사님이 욕심이 많은가봐. 지금 천명이 넘었으면 이제는 만족했을 때가 되지 않았나? 여러분, 어느 사람의 말이 맞는 것입니까? 만약에 그런 세속적인 기준으로 만족을 이야기 한다면 40명만 넘으면 전도 안해도 되요. 60명이 넘으면 자립이 되거든요.

그런데 우리의 기준은 거기에 있지 않잖아요. 잘못된 기준을 가진 사람들은 개척교회나 전도하는 줄 알고 미자립교회나 자립을 위해서 전도하는 줄 알지만 그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열심히 전도하는 사람들은 천명, 이천명, 오천명되도 열심히 전도해요.

이번에 부광교회 가보니까 그 목사님은 정말 전도에 미친 사람 같습디다. 그러니까 교인들도 죄다 전도에 미친 사람 같고, 온 교인들이 다 그런 것 같아요. 그 교회는 한 3000명정도 모이는 교회거든요. 뭐가 부족해서 그 전도에 난리를 치는 거예요. 자립하려고? 아니잖아요. 전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인 줄 믿습니다. 주님이 오시는 그 날까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 주님의 명령인 줄 믿습니다.

이 주님의 명령이 우리가 순종 할 때 그것이 사명이 되는 거예요. 이 사명을 위해서 우리가 이 모습에 만족하지 말고, 주님 기뻐하시는 그 날까지 주님이 오시는 그 날까지 한 영혼 구하는 일에 최선을 다할 때 새 시대는 바로 우리에게 평안의공동체에게 허락하실 줄로 믿습니다. 새 시대의 주인공 되기를 새롭게 다짐하면서 주님 앞에 새출발하면서 평안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원수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고, 주어진 기회를 탈취하지 않으면서 하나님께서 세우실 때까지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때까지 기다릴 줄 아는 다윗을 바라봅니다. 우리의 주변에 너무나 이기적인 삶의 모습들을 보면서 주님 앞에 새로운 다짐들을 하기 원합니다. 주님, 주님 앞에 순결함을 회복하게 하옵소서. 22년 출발할 때에 그 열정과 순수함을 회복하게 하옵소서. 숫자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뻐하심에 만족하게 하시옵소서. 열정을 가지고 영혼을 구원하는 구원의 교회가 되게 하시고, 구원의 방주로써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는 평안의교회가 되어 새시대에 쓰임받는 주인공의 복된 공동체로 삼아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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