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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상의 빛이 되어라 (미 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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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서영원 목사 

심판에 대해 좋은 느낌을 가지거나, 심판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늘 선지자들을 통해 심판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미가역시 심판에 대한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미가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주의 백성들을 심판하시는 것은 결코 주의 백성들을 멸망에 이르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구원과 회복을 주시기 위한 목적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광스러운 미래를 위해서는 먼저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 해결방법중의 하나가 바로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판을 곧 구원의 기초가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미가는 1-3장까지는 혹독한 심판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해 주었습니다.

만약 당시의 백성들이 미가가 전해준 메시지를 귀담아 들었다고 한다면 그들은 이제 모든 것을 포기해야만 하는 순간이 되었음을 마음으로 정리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에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과 회복에 대한 메시지가 전해집니다. 이 같은 메시지는 걷잡을 수 없는 환희와 감격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죽었다고 모든 것을 포기하는 순간에 살수 있다는 메시지는 모든 사람의 삶에 환희와 감격을 가져다줍니다. 우리는 죄로 죽을 수밖에 없다고 했는데, 그 순간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 우리들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즉 예수님을 영접하면 살길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환희와 감격을 가져다주는 메시지입니까?

절망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그곳에 희망의 메시지가 전달된 것입니다. 미가시대 백성들을 괴롭게 하는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소위 지도자라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배를 채우기 위해 가난한 백성들의 것을 다 착취해 가 버렸습니다. 심지어 선지자들도 거짓예언들을 통해 백성들을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이런 절망적인 순간에 하나님의 구원의 메시지가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메시지는 바로 앞에서 선포된 메시지와 매우 다른 극적으로 바뀌어 지고 있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매우 가혹하기만 했던 분위기에서 구원에 대한 기대로, 메시지를 듣는 대상이 부패한 예루살렘 지도자들이었던 것으로부터 신실한 남은 자들로 바뀌어 지고 있습니다.

앞의 말씀과 비교해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3장 9절에서 12절 말씀은 시온이 죄로 물들었으므로 완전히 파괴될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4장에서는 시온이 여호와의 말씀과 율법으로 가득 찬 곳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성전의 산은 광야와 같이 되었지만, 그날이 오면 영호와의 전의 산이 세상에가 가장 으뜸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의 악행은 세상의 으뜸이지만 시온은 세상의 모든 산들의 꼭대기가 될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비록 이스라엘은 시온을 죄인들의 소굴로 만들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시온을 자신의 가르침의 중심지로 삼으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뇌물을 수수하여 부당한 판결을 일삼았지만, 여호와의 통치는 공평하고 합리적이어서 모든 사람들을 만족케 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의 비교를 통해 주님의 백성들이 갈망해야 할 진정한 통치자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뿐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통치하는 곳은 세상의 모든 것의 중심지가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시온이 세상의 중심지가 되는 것은 곧 여호와의 통치가 세상의 중심이 될 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온이 무엇 때문에 세상의 중심지가 됩니까?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이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가나안에는 예루살렘성보다 훨씬 높은 산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온이 가장 높은 산으로 군림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곳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즉 누가 있는가 하는 것이 그곳을 으뜸이 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집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집에 누가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그 집이 얼마나 큰 가 멎진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인의 삶이 매력적이고 선망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그와 함께 하시며 그의 삶을 통치하시는 하나님께서 매력적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삶속에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는 것을 소망했던 것을 봅니다. 그래서 그는 고백하는 이제 자신 안에는 자신이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십자가에 죽어주신 예수님께서 사신 것이라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자신된 것은 예수님 때문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즉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것은 자신이 존경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 있는 예수님께서 존경 받을 만 한 분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것은 내 안에 있는 예수님이 빛이 나야 하는 것입니다.

시온이 영화롭다고 하는 것은 믿는 자들의 가치가 믿는 자들 때문이 아니라 믿는 자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자신을 죄인 중 괴수라고 생각는 사람이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라면 그는 하나님께서 영화롭게 하신, 하나님께서 소중하게 여기시는 그분의 형상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존재 가치는 오직 주님을 통해 빛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선지자들을 이 같은 사실을 끊임없이 선포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국경과 민족을 초월하여 누구든지 여호와를 경외하고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민족을 초월 하여 국경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미가선지자는 온 세상 민족들을 초청하고 있습니다. 이제 초청에 임하는 것은 열방의 선택이며 몫인 것입니다. 초청을 받아들이면 그들은 하나님의 축복 속에 살게 되지만 초청에 임하지 않으면 자신들만 손해인 것입니다.

열방이 초청에 임하는다는 것은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열방이 순례의 길에 오른다는 것은 자신의 본거지를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떠나지 않고는 절대로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성도의 삶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내가 익숙해 있는 환경에서 떠나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버리고 싶지 않지만 버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 같은 일을 할 수 있는 근거는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치러야 할 대가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의 끝나는 것과 잃은 것에 대해 계산을 한다면 잃은 것에 비해 얻는 것이 너무라도 많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만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이들은 이 같은 사실 자체를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롯의 아내였습니다. 그는 구원을 바라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고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못해 더 좋은 것을 얻지 못하고 소금 기둥이 되어 버렸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이들이 있습니다. 좋은 기회가 주어졌지만 그 기회를 놓치는 이들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산인 백두산 꼭대기에 가면 천지라고 하는 호수가 그곳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호수에서 시작해서 좌우 양편으로 두 개의 큰 강이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왼쪽으로 흘러내리는 것은 황해와 연결되어지는 압록강이라고 합니다. 다른 하나니는 오른쪽, 곧 동쪽으로 흘러가서 동해로 연결되어지는 두만강입니다.
그런데 백두산 꼭대기 천지 속에 떨어지는 빗방울은 조금만 서쪽으로 기울어지면 압록강으로 흘러가게 된다고 합니다. 그와 반대로 조금만 동쪽으로 기울어지면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젖는 뱃사공과 함께 동해로 들어가게 된다고 합니다.
처음에서 똑 같은 천지라는 호수 속에 있었지만 얼마 뒤에는 수 천리, 수 만리나 떨어지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가는 방향이, 서로 간에 선택한 방향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가는 길이 달랐기 때문에, 그 결과도 역시 엄청나게 달라지고 만 것입니다.
이처럼 내가 과연 어느 길을 선택했느냐? 여기에 따라 내가 다다르게 되는 종착역도 역시 달라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1절에서 미가는 이방인들이 열심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오는 모습을 “몰려가다”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이 표현은 마치 강물이 범람하여 밀려오듯이 예루살렘을 향해 오고 있다는 표현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가르침에 대한 갈증이 단숨에 예루살렘으로 오게 만든 것입니다.
이제 편안하고 익숙한 자리를 박차고 그들은 하나님의 도를 배우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온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시온에서 배운 말씀을 가지고 시온에 머무르지 않고 말씀과 율법을 가지고 세상을 향해 갑니다. 즉 2절 하반 절에 말씀하기를 “율법이 시온에서 나오며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 나온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온은 그들을 양육하는 훈련 장소였다면, 세상은 그들의 사역지였던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적용됩니다. 교회는 우리가 훈련받는 훈련 장소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사역지는 세상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나의 가정, 학교, 직장이 나의 사역지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망각 할 때 우리는 신앙인으로써 바른 삶을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믿는 자들을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부르셨습니다. 문제는 상당수의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의 소금과 빛은 될 지언정 세상의 소금과 빛은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일주일 내내 교회 중심으로 생활하고 교회 행사를 중심으로 삶을 꾸려 나가는 성도들을 목격하게 됩니다. 이들은 교회 생활에 너무 바빠서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시간이 없습니다. 교회 생활이 너무 보람 있고 재미있어서 그렇다고 합니다. 일종의 교회 중독증을 앓고 있습니다. 물로 교회 생활을 즐기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 생활이 현실에서의 도피나 성도가 이 세상에서 감당해야 할 일을 회피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말에 ‘배워서 남주냐’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배워서 남에게 전달해 주어야 합니다. 나도 깨달아야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끊임없이 주어야 합니다.
시온에서 훈련받은 백성들은 흩어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온 세상에 전해야 하는 사명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교회 안에만 안주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흩으셨던 것을 봅니다. 이처럼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훈련을 통해 잘 양육 받아 세상 속에 나가 그들 속에서 소금과 빛으로 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진정 우리가 그리스도인다운 성도가 되기 위해서 교회 생활에 안주할 것이 아니라 이제 세상에 나가 자신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내가 훈련받은 대로 양육 받은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전해야 합니다. 이 사명을 잘 감당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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