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주의 강림을 대망하라! (약 5:7-8)

  • 잡초 잡초
  • 346
  • 0

첨부 1


- 설교 : 정근두 목사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성도들은 항상 땅위에 있었습니다. 2천 년 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면에 있어서는 다 같습니다. 2천 년 전의 성도들도 하나님의 백성이었고 오늘 여기 나와서 예배하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러나 동일한 성도들이지만 생각하는 면에 있어서 때로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과 비교해 볼 때 그 의식에서 현저한 차이가 나는 것이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말하자면 주의 강림에 대해서 이 천년 전 성도들과 오늘 성도들의 생각이 다릅니다.

오늘날 신학교에서 이론신학을 가르칠 때 주의 강림 교리를 그 순서의 마지막에 두고 있습니다. 서론, 신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입니다. 아마 논리적 서술을 하다 보니까 마지막으로 주의 강림을 논하나 봅니다.

오늘날은 주의 강림을 다루는 ‘종말론’을 맨 마지막 교리로, 어쩌면 기독교 교리 가운데 부록처럼 여기는 반면 이천 년 전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종말론의 주제 ‘주의 강림’에 대한 교리를 가장 우선적인 고려 사항으로 두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도 우리가 믿는 여러 가지 기독교 진리를 믿고 살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생생하게 기억하면서 살았던 것이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진리입니다.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의 설교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하실 날을 작정하셨음을” 알리는데 주력했습니다. (행 17:31)

해 아래 모든 인생이 돌이켜 하나님을 믿어야 할 근본 이유로서 주의 재림과 심판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예배의 자리를 찾은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여러분이 하나님을 꼭 믿어야 중요한 이유는 예수께서 다시 오시기 때문입니다. 역사의 종말은 다가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종말론적인 현상을 바라보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처처에 모든 것이 흔들리는 것을 감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권위뿐 아니라 모든 권위가 지금은 흔들리고 있습니다. 미국뿐 아니라 어떤 나라도 안전한 나라는 이 땅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역사의 종말이 도래할 뿐만 아니라 최후의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오셔서 모든 사람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와 알지 못하는 자로 나누실 것입니다. 선을 행한 자와 악을 행한 자로 구분하실 것입니다.

바울의 아덴설교만 아니라 그의 데살로니가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의 설교의 결과로 데살로니가 인들은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이제 섬기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소망을 하나님의 아들의 강림에 두고 성도로서 삶을 살아갔습니다.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살전 1:9-10).

여기 데살로니가 성도들도 여러 가지 기독교 진리를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핵심은 예수님에 관한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그들의 신앙을 이 한 절속에서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선 이들은 예수를 “그의 아들”이라고 믿었습니다.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죽음에서부터 다시 살려내신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믿고 있었습니다. 나아가서 그들은 그의 하늘로부터의 강림하심을 믿고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부활을 믿은 동시에 예수님의 재림을, 강림하심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 강림하심의 목적은 “장래 너희를 하나님의 진노에서부터 구원하시기 위함이라” 세상에 다시 오셔서 하나님의 진노에서부터 구원하실 분이라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골로새 성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골로새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베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소망이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특징일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 있고 성도를 향한 사랑이 있고, 마지막으로 오시는 주님을 소망할 것처럼 우리는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들의 믿음과 사랑은 이 소망에 기초하고 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골로새 성도들은 그 소망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잘 믿을 수가 있었고 성도를 향해서 뜨겁게 사랑할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주를 향한 믿음과 성도간의 사랑의 기초로서 하늘에 쌓아둔 소망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늘에 쌓아둔 그들의 소망은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들어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수표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의 아들이 오실 때 우리도 영광중에 나타나리라는 수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아들이 다시 오시는 날은 우리가 가진 영광스런 수표를 현금화하는 날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심장처럼 중요한 주의 강림 교리가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는 마치 맹장처럼 있으나 마나한 교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것 없이도 신앙생활 하는데 크게 불편이 없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 오늘의 문제입니다.

‘왜 오늘의 교회는 사도행전의 교회와 다릅니까? 왜 그때처럼 영향력이 없습니까?’라고 묻는다면 그 대답을 바로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사도행전의 교회는 주의 강림에 대해서 설교했고 성도들은 그 강림을 바로 내 몫으로 돌아올 주식배당금을 기다리는 것만큼이나 기다리고 살았는데 반해서 오늘 신자들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남의 일처럼 되어 버린 것입니다.

오늘날 투자한 주식에 대한 관심 이상으로, 청약한 아파트 추첨에 대한 관심 이상으로, 초대교인들은 주의 강림을 사모하고 살았습니다. 하늘로부터 다시 오시는 주님을 대망하며 살았기 때문에 오늘날 사람들로서는 이해조차 하기 어려워합니다. 우리가 현실에 매몰되어 살고 있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오히려 초대교인들이 주의 재림을 잘못 집었다고 주장합니다.

심지어는 야고보야말로 그 대표적인 실수를 한 사람으로 지목을 당합니다. 야고보는 예수님이 오실 것을 언급하면서“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고 선언하기 때문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보라, 심판자가 문밖에 서 계시니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봐라 2000년이 지나가도 아직 안 왔잖느냐?.’고 말합니다. ‘아마 초대교인들이 예수님을 사모한 나머지 너무 감정적으로 지나쳐서 실수했다’고 생각을 합니다. 예, 그렇습니다. 속화된 세상에 매몰되어 사는 우리로서는 곧 바로 주님 오실 것을 기다리고 살았던 성도들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세상과 짝짜꿍이를 맞춰 사니까 세상에 사는 것이 힘든 일도 아니고 주님이 오셨으면 하는 소망도 없습니다. ‘우리 아들이 내년에 대학에 들어갔으면’ ‘아파트 분양이 되었으면’, 하고 땅에서 세워놓은 계획들이 너무 많고, 거기에 거는 기대가 크다 보니까 주님이 오신다는 소식이 우리에게는 오히려 섬뜩한 소식이 됩니다.

바로 이 재림의 문제가 오늘 우리와 초대교회 성도들과 생각 차이가 가장 큰 곳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의 강림을 사모하지 않는 교회는 무기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이 오신다는 것을 현실적으로서 기대하지 않는 성도는 힘이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인사말을 통해서 이 사실을 서로에게 기억시켜 주었습니다. “마라나타”라고 서로 인사하면서 오실 주님을 기억했습니다. 그들의 인사말이 바로 “주께서 임하시느니라.”였습니다.

때로는 경고의 의미로, 때로는 격려의 의미로 “마라나타, 주께서 임하느니라.”는 인사말은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마라나타” 이 말은 잘못된 길로 가는 성도들을 향한 경고의 의미로도 사용되었습니다. 동시에 주님이 오신다는 소식만큼 핍박 가운데도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위로가 되는 말씀이 없었습니다.

동일한 어조를 우리는 계시록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핍박 받는 교회를 향해 “보라 내가 속히 오리라”는 말로 주님은 격려합니다. ‘너희가 겪는 환난을 내가 다 알고 있다. 내가 너희를 버려두지 아니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이제 야고보 선생은 땅 위에 흩어져 사는 주의 백성을 향한 거듭되는 교훈이 그 막바지에 도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주의 강림에 대한 살아있는 소망이 없는 교회의 삶은 헤이해지기 쉽습니다. 주의 강림에 대한 믿음이 없는 성도는 핍박을 견디어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동안 여러 번 되풀이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교훈하시다가 이제 마지막으로 ‘조금만 더 힘을 잃지 말고 견디어내라 저기 주님이 오시고 있구나.’라고 격려하기 원합니다. 야고보 선생이 격려하기 원하는 당시의 성도들의 삶의 정황은 지난주일 우리가 살핀 야고보서 5장 1절에서 6절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날로 부하여가는 가진 자들의 착취의 대상이었습니다. 사치하고 연락한 부자들의 모습 속에 상대적 위축을 느끼며 사는 주의 백성들입니다. 매일 마음을 정히 하며 손을 깨끗이 한 대가가 이게 전부냐는 생각이 스스로 들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의롭게 사는 성도를 알아주는 세상은 아닙니다. 어리석은 자로서 여길 뿐입니다. 그러다보면 ‘정말 나만 양심을 지켜 사업한다는 것이 의미가 있는가?’라는 생각이 오늘 우리에게도 들 수 있습니다.

때로는 숨어 꾸민 음흉한 흉계의 희생이 되기도 했습니다. 의롭게 산 보상은 마치 억울함을 하소연할 기회마저 박탈당한 채 죽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형편에 있는 주의 백성을 향해서 야고보 선생은 “형제들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고 용기를 북돋아주고 있습니다. 억울하게 핍박받는 너희를 구원하시려고 그가 오시고 있다는 격려입니다. 압제자들이 받아 마땅한 보응을 하려고 그가 오시고 있다는 격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까지 본문의 정황을 설명했습니다. 그러면 이 상황을 여러분의 삶에 적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주님이 오시는 그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 날이 빨리 다가올까 봐 두려워집니까?

그것이 여러분의 영적인 형편을 보여줍니다. 그것이 여러분이 지금 신앙의 잠을 자고 있는지, 죄악에 깊이 빠져있는지, 의를 핍박을 받는 삶을 살고 있는지를 보여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여러분의 신앙상태를 바로 보여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는 그 날이 오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오히려 성도는 그 날을 사모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날이 임하기를 간절히 사모하십시오. 세상 사람들에게는 크고 두려운 날이지만 여러분에게는 영광의 주님이 오시는 복된 날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그 분이 오시는 소식이 더 이상 두려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두려움을 느끼는 분들은 자기의 삶을 돌아보고 돌아서야 합니다. 매몰된 세상에서부터, 깊이 빠진 죄에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거기 머물면 정말 두려운 날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호소합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계18: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 사람들이 짓는 죄에 동참하지 마십시오. 그래야 그들이 받을 재앙을 면할 수 있습니다. 냉장고를 거룩하게 하십시오. 옷장을 거룩하게 하십시오. 제발 썩어나가는 음식, 처박아두는 옷이 없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은 이 사회가 어떤 사회인 지를 알고 있습니까? 우리 주님은 오늘 우리 사회를 규정해서 단 하나의 형용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불의한 세상’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핵심을 여러분이 간파했다고 하면 불의하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그것이 정치계의 속성이고 그것이 경제계의 속성입니다. 그것이 세상의 속성인 동시에 그러한 세상의 영향이 오늘 교회의 구조를 잠식해 들어오고 있습니다.

옛날에 비해서 풍요로워진 세상을 살면서도 아직 끼니를 먹지 못하는 사람들을 내버려두는 세상은 악하고 불의한 세상입니다. 인간이하의 주거환경에 살고 있는 이웃이 남아있는 세상에서 한 장에 수천만 원을 하는 발열유리를 붙이고 산다면 불의하고 악한 사람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몇 천만 원만 있어도 전세를 얻는데 말짱한 아파트 입주하면서 수천만 원 들여서 뜯어고치고 있다면 불의한 짓입니다. 

악이 팽창하는 세상 속에서 의롭게 산다는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비도덕적인 사회에서 의롭게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향하여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고 권면합니다.

“길이 참으라.”는 단어의 뜻은 미워하거나 보복하려 들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오래 참는다.”는 것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하나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오래 참으시는 분”이라고 소개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때로는 우리가 봐도 도대체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라고 생각이 될 때가 있습니다. 도대체 우리의 삶에 왜 이런 고통이 있습니까?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또 우리가 볼 때는 도대체 저렇게 정직하게 살려는 사람이 3년째, 4년째 고생을 해야 되는지 이해가 안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서, 사람을 향해서 오래 참지를 못합니다. ‘정말 하나님이 계실까? 정말 하나님이 계신다면 저 권사님 집 한 번 봐라 왜 그 아들 김 집사는 하는 일마다 실패를 하냐?’고 의심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길이 참으라.” ‘조금 더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아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인자하시고 노하시기를 더디 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때가 오면 그의 오래 참으심을 거두실 것입니다. 끝까지 회개치 않던 자들을 향해 그의 진노가 쏟아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역시 오래 참음으로 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래 참는 것은 원수 갚는 것이 주께 있음을 알고 그 분의 손에 모든 억울함을 맡겨버리는 자세입니다. ‘하나님 내 생각에는 억울하지만 하나님 다 아시지요 하나님이 다 알아서 판단하십시오.’

베드로 사도의 권면이 여기 퍽 어울릴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체휼하며(서로 동정하고)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3:8-9).

주님이 빨리 오시지 않고 악이 점점 팽창해지면 성도 사이에 사랑이 식어지게 됩니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3:9).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여러분을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복을 빌어주십시오. 여러분이 복을 빌어줄 때에 여러분은 복을 유업으로 받은 자라는 증명이 됩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여러분이 축복해주면 여러분이 복을 받을 수 있게 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러분을 저주하는 자를 악을 악으로 갚지 아니할 때에, 여러분이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복 빌어 줄 때에 여러분은 이미 복을 유업으로 받을 자라는 것을 입증합니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의 삶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의 눈앞에 자행되는 악을 하나님은 다 보면서도 참아야 하고 우리는 다행히 모든 불의를 다 알지 못하고 참는 것 아닙니까? 도대체 용납할 수 없는 죄악인데도 불구하고 당신의 눈앞에 행해지는 것을 하나님은 보고도 참고 있다는 말입니다.

별수 없는 우리의 눈으로 보기에도 용납할 수 없는 악이 행해질 때에도 “참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즉각 하나님의 응징이 실시되지 않는다고 불만을 갖지 마십시오. 스스로 하나님 대신 보응하려고 덤비지 말라는 야고보 선생의 권면입니다.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는 농부처럼 성도들이 길이 참고 용기를 가져야 할 이유로서 성경은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고 말합니다. “주의 강림”이란 말의 뜻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오심을 설명하는 몇 가지 단어가 신약에는 쓰이고 있지만 그 중에 특징적인 단어입니다.

‘주의 강림이 가깝다’는 말은 야고보가 사용한 결정적인 격려의 말입니다. 영광과 위엄 중에서 오시는 임금의 행차를 설명할 때에 이 ‘강림’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지금 식 단어를 쓴다면 ‘초도순시’일지 모르겠습니다. 대통령의 자격으로 처음으로 어떤 지역이나 기관을 방문할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당시에도 통치자라는 위엄을 가지고 나타날 때에 ‘강림’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초림하신 주님과 재림하실 주님의 차이입니다. 초림하실 때는 ‘강생’하셨다는 표현을 씁니다. 그러나 재림하시는 주님께는 ‘강림’하신다고 말합니다.

‘강생’과 ‘강림’의 차이는 무엇입니다. ‘강생’하신 주님은 아기로 태어났습니다. 여느 아기처럼 태어났습니다. 보통 아기로 태어나서 사람들이 그가 누구인지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아주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로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정말 마구간에 태어난 아기에 불과했습니다.

좋은 유치원도 못 갔고 좋은 초등학교도 못 갔습니다. 가난한 나사렛 목수로서 젊은 나이를 보내셨습니다. 어디 가든지‘목수 예수’라는 이름이 따라 다녔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도 목수를 크게 쳐주지 아니하지만 그 때 유대 사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게 세상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의 전성시대, 예수님이 가장 깃발을 날리던 시절에도 보면 열 두 제자 거느리고 이 지방 저 지방 다닐 때에 호텔 예약해놓고 다니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가서 눕는 곳이 당신이 주무실 처소였습니다.

‘나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하셨지요. 그것이 초림하신 주님의 모습이었습니다. 친히 사람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게 그 몸을 의탁치 않으셨습니다. 끝내 멸시와 거절당한 사람의 아들이었습니다. 그의 신성은 인성 속에 숨겨져 있어 믿음의 눈으로만 알아볼 수 있는 그 분이었습니다.

강생하신 주님은 여느 사람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강림하실 주님의 모습은 다를 것입니다. 그는 나타나실 순간에 천사장의 나팔 소리와 함께 나타나실 것입니다. 그의 위엄의 광채를 발하시면서 나타나실 것입니다. 그가 오실 때에는 아무도 왈가왈부하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 가운데 오시게 될 때에 그들과 함께 한 마을에서 지냈던 사람들이 얼마나 영광의 보좌에서 하나님의 위엄으로 나타날 것인지 그들이 보게 될 것입니다. 초림하시는 주님과 재림하시는 주님은 엄청난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날 오시게 되면 그가 인류의 심판자인 것을 누구나 수긍하게 될 것입니다.

“산아 내 위에 무너져라 바위야 나를 덮어라”고 외칠 것입니다.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 날 그 분은 택한 자를 불러 모으실 것입니다. 자기 택한 자를 ”하늘 이 끝에서 하늘 저 끝까지“순식간에 모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중에 여러분의 얼굴이 보이기를 바랍니다. 그 가운데 여러분이 속해 있으리라는 확신으로 신앙생활을 하셔야 합니다.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메시지는 어떤 내용의 설교보다도 우리로 하여금 새롭게 해주는 말씀이 되어야 합니다. 주의 강림에 관한 소식이 대학에 합격한 소식 이상으로, 사업에 성공한 소식 이상으로, 그 어떤 병에서부터 완쾌함을 받은 소식 이상으로 기쁜 소식으로 받아드릴 수 있는 사람이 건강한 주님의 백성들입니다.

이미 주님과 연합된 자들을 장차 부르셔서 그와 영원히 함께, 그의 지극한 영광을 함께 나누실 것입니다. 주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심장의 박동을 힘 있게 하는 소식이 되기를 바랍니다. 확실한 그의 강림의 인식은 여러분의 순례의 걸음을 힘차게 할 것입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 디딜 때 이제는 왜 여러분이 그 방향으로 걷는지 분명히 아실 것입니다. 우리의 소망의 근거가 되는 주의 ‘강림’을 여러분은 깊이 생각해 보셨습니까? 우리의 삶 속에 그의 영광스런 강림을 사모한 적이 있었습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의 강림을 생각해 보지 않고 한 주간을 보내었다면 여러분은 세상에 도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주의 강림을 사모하지 않고 한 주간을 지냈다면 여러분이 신앙의 잠을 자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고 계십니다.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고 계십니다. 그 날 하나님의 진노 중에 여러분을 구원하려 오십니다. 여러분의 죄악이 예수님의 보혈로 씻음 받은 자라면 그 날 그 영광에 참여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그 영광스런 구원의 날을 대망하도록 농부의 경우를 예로 들어 설명합니다.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위해서도 그처럼 기다려서 추수를 거두거든 하물며 너희들일까 보냐?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위해서 그처럼 기다린다면 하늘에서 오는 귀한 구원을 위해서 얼마나 더 간절히 기다려야 하지 않겠느냐?

보배로운 소산을 위해 이른 비와 늦은 비를 - 씨를 싹 트게 하기 위해 이른 비를, 씨를 결실시키기 위한 늦은 비를 농부는 기다립니다. 보배로운 구원의 완성을 위해 그 날을 사모합시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은혜의 이른 비에 참여했습니다. 초림하신 구주의 은혜에 이미 동참했습니다. 이미 구원의 은혜를 맛본 처지에 있습니다. 그러나 싹이 튼 것이 결코 결실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늦은 비가 내려서 그 이삭을 영글게 해야 합니다. 오직 그 보혈을 믿음으로 구원의 싹이 틉니다. 그러나 구원의 결실은 아직도 미래의 사건입니다. 주의 강림으로 놀라운 완성을 가져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불의한, 세상 속에서 답답함을, 억울함을 당합니까? 길이 참으십시오. 마음을 단단히 하십시오. 주의 강림이 가깝습니다. 이른 비를 허락한 은혜의 하나님은 늦은 비를 보장하시는 실실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안에 구원을 시작하신 은혜의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실 신실한 하나님이십니다. 주의 강림에 대한 소망을 새롭게 하십시오. 그의 강림을 대망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삶은 새로운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걸어가도, 달려가도, 다함없는 위에서 부어지는 새 힘이 여러분의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