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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난주일,종려주일] 어디로 가리이까? (삼하 2: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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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요한 목사

고난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매일 보는 십자가 이지만, 오늘 바라보는 십자가는 예사롭지 않습니다. 십자가에서 여러분을 향해서 어떤 메시지가 나오는 것을 느끼지 않습니까? 나는 너를 위해서 피 흘려 주었건만 너는 나를 위해서 무엇을 하였느냐? 그런 강력한 메시지가 십자가에서 나오는 것 같습니다.

신앙생활 하면서도 어떤 기대, 새벽제단에서는 제가 어떤 혜택, 교회를 다니면서 어떤 혜택을 볼까? 교회를 다니면서 어떤 도움을 받을까? 그것이 충족되지 않으면 실망하고, 시험들고 삐지는 우리의 모습은 아니었는가?

그 모든 것들이 십자가를 바라보면 물거품처럼 정말 부끄럽고 아무 것도 아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 때문에 많은 시간을 보내고 많은 가슴앓이를 하지 않았는가? 십자가의 주님을 다시 한번 바라보면서 이번 한 주간 고난 주간을 맞이해서 주님의 십자가가 부끄럽지 않고 떳떳한 십자가로 여러분들이 바라볼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헤브론으로 가라’ 여러분, 저 위에 2000년 21세기가 시작되면서 한결같은 표어가 있습니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여호수아 14장 12절에 이 말씀은 갈렙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구했던 기도의 제목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주셨습니다.

바로 갈렙이 구했던 그 땅, 이 산지가 어디냐하면 헤브론이었습니다. 저 현수막의 배경을 잘 보시면 당시에 헤브론 지형을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해서 황무지입니다. 거기에는 많은 수고의 땀과 눈물이 필요한 곳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다윗이 여호와께 물어 가로되 지금 블레셋의 시글락이라고 하는 곳에 자기 공동체와 함께 살다가 사울이 길브아 전투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제는 우리나라로 돌아가야 되겠다. 그런 마음을 먹고 돌아가려고 하면서 먼저 그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가도 될까요? 간다면 어디로 갈까요? 사실 다윗은 이스라엘 지형 모르는 곳이 없었습니다. 어디가면 샘이 있고, 오아시스가 있고, 사람들이 살 수 있는 곳이 있고, 어디 가면 땅이 척박하고, 어디 가면 사람이 살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자신의 생각에 이제 자기와 원수 같은 사울이 하나님의 심판하심으로 이제 그의 인생이 끝났다고 하면 이제 어디 가서 살까?, 어디 가서 왕국을 이룰까? 물 좋고, 기름진 땅을 찾아가는 것 당연할 것입니다.

아마도 예루살렘이나 조금더 욕심을 낸다면 예루살렘 옆에 있는 여리고, 거기는 샘이 흐르고, 오아시스가 풍부하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살 수 있는 기름진 땅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하나님 앞에 물어보고 있습니다.

다윗이 여호와께 물어 가로되 어디로 갈까요? 헤브론으로 가라. 다윗은 지금까지 다가오는 수많은 기회들을 인위적으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완벽하게 해칠수 있는 두 번의 기회도 하나님의 기뻐하시지 않는다고 하는 하나님의 주권에 전적으로 맡겼습니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지 않고, 더구나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자를 내가 해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이 아니다. 자신과 주변의 사람들을 철저하게 그는 잘 간수했습니다. 경거망동하지 않게 했습니다.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 출세의 고통을 빨리 끝내고, 출세의 길을 앞당기려고 하는 어떤 인위적인 방법과 수단도 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보실 때 너무 마음에 들었던 아름다운 모습이었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이 쯤 되었으면, 그렇게 수고와 환란 속에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기회를 인위적으로 만들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때, 카이로스를 기다렸다고 하면 어디로 갈까요? 예루살렘으로 가라. 여리고로 가라.

주님도 아시고, 다윗도 아는 가나안땅입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말씀합니다. 헤브론으로 가라. 쉽게 말하면 황무지로 가라는 것이지요. 헤브론으로 가라라고 하면 시험들 사람 여기 많을 것 같은데...정말 내가 주님을 위해서 충성했는데, 얼마나 내가 찬양대를 위해서 희생하고, 교사, 교회학교를 위해서 얼마나 수고하고, 여선교회, 남선교회를 위해서 내가 온갖 수고와 고생은 다 했는데, 기껏 목사님 내게 주어지는 대답은 그것입니까? 헤브론으로 가라는 것입니까? 그럴 수 있습니까? 실망했습니다. 섭섭합니다.

성도는 평상시의 신앙은 신앙이라고 할 수 없지요. 이해관계가 연결이 되어질 때 진정한 그의 신앙이 드러나는 거예요. 가짜 신앙도 드러나고, 진솔한 신앙도 드러나는 거예요. 여기도 어느 한 환란이 이 교회를 휘몰아치면 옥석이 가려질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북한 공산당이 쳐들어 와서 지금 상상하기도 싫은 이야기지만, 이 부천을 점령했다. 북한 공산당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 지금 부안초등학교에 소집을 했어요. 목사도 잡아가고, 장로도 잡아가고, 이 가운데서 목사질 한 사람 나와. 장로질 한 사람 나와. 교회학교 교사 한 사람 나와. 찬양대 한 사람 나와. 그럴 때 여러분은 어떤 태도를 취하겠습니까?

그래놓고 총을 들이대고서 한 번 기회를 줄 텐데, 예수를 저주하고 저 믿지 않는 사람들 자리로 돌아가면 살려주겠다고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나는 살고 봐야지. 내 청춘이 아직 젊은데,...

많은 희한한 일들이 벌어질거예요. 깜짝 놀랄 것입니다. 평소에 존경하고, 굉장한 믿음이라고 생각했던 그 분이 유유히 예수를 저주하고, 군중 속으로 들어갈 때 아마 수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평소에 정말 신앙이 별거 아니었다고 생각하는 분이 끝까지 죽음 앞에서도 신앙의 자리, 성도의 자리를 지킬때, 또 다른 충격을 받을 것입니다. ‘저 분은 신앙이 진짜였구나.’ ‘저 분은 신앙이 진짜인 줄 알았는데, 가짜였구나.’ 아마 판가름이 날 것입니다. 삶의 위기는 때때로 우리에게 어려움을 가져다 주지요.

어렸을 적에 부천에서 약대로 가는 시외버스를 타면 차비가 5원이었는데, 그 차비가 아까워서 걸어다녔어요. 밤늦게 학교에서 돌아오면 피곤해서 버스를 타는데, 타면 그 당시는 차장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사람이 너무 많아서 차장이 문을 잡고 밖으로 나올 정도로, 배가 나올 정도로 그렇게 사람이 많았어요. 저렇게 해서 어떻게 버스가 가나?

그런데 방법이 있더라구요. 운전기사분께서 브레이크 한 번만 잡으면 그냥 착착착 해서 싹 들어가버려요. 그래서 사람이 많이 탈수록 운전기사는 자꾸 브레이크를 밟아요. 그러면 결국 차곡차곡 들어가서 결국 차장은 문을 닫을 수가 있어요.

어떤 어려움이 우리의 삶을 제자리로 가게 만드는 거예요. 여러분의 삶에 고난과 역경이 올 때에 ‘아, 하나님께서 옥석을 가리실래나 보구나.’ 오늘 다윗은 헤브론으로 가라고 하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한 줄로 믿습니다.

내가 이 정도 주님을 위해서 했는데, 이럴 수 있습니까? 라고 원망하거나 실족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고 하는 것은 두가지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기도가 필요하고, 하나는 노동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것 노동입니다. 오늘도 보세요. 오늘 고난주일 예배드리지요. 또 우리 새가족양육부 위원들은 벌써 한달전부터 카드를 보내고, 전화하고, 문자보내고, 그리고 오늘 유치부실에서 그들을 초대할 뿐만 아니라 아주 예쁘게 차려놓은 상에 맛있는 음식들로 준비합니다. 그 음식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입니까? 그들의 수고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가하면 또 오늘 저녁에는 세례 예식이 있습니다. 세례를 위해서는 너무나 많은 분들이, 지역장, 속장님들이 세례 받는 자들을 추천하고, 세례 받기 위해서 그들을 설득하고,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 세례 예비 문답을 가르치고, 그리고 그 세례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수고의 땀을 흘립니까? 카메라가 준비되고, 비디오가 준비되고, 순서 순서의 모든 것이 준비되는 것이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가 하면 세례 예식이 있은 후에 어린이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각 전도팀의 사역발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병원전도를 어떻게 하고 있는 것인지, 학원전도는 어떻게 하는 것인지, 길거리에서 노방전도는 어떻게 하는 것인지, 그동안 해왔던 것을 성도들 앞에서 그대로 전도를 시연해 보면서 우리 전도팀들이 역전에서는 그렇게 했고, 병원에서는 저렇게 했고, 학교에서는 저렇게 했구나. 그렇게 느껴가면서 나도 저 전도의 구경꾼이 아니라 참여자가 되어야 하겠다는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서 전도발표회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실제로 전도할 뿐만 아니라 전도하고 훈련하고, 연습합니다. 그 수고가 얼마나 큽니까?

수고의 땀을 흘리는 사람들은 말할 수 없습니다. 다음 주일 부활주일을 위해서 할렐루야, 임마누엘, 갈릴리 찬양대는 두달부터 끊임없이 준비했어요. 평일날도 저녁이면 늦게까지 와서 훈련들을 했습니다. 성도들은 그냥 오셔서 은혜만 받으세요. 라고 해도 그 한걸음 옮기기가 친구들 만나고 쇼핑하는 거에 그냥 훌쩍훌쩍 흘러버리고, 얼마나 기가 막힌지 모르지요. 그 수고의 땀을 흘린 사람들을 생각하면 그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난 번 젊은이교회가 정성을 다해서 콘서트를 준비하고, 새로운 후배들을 초청했는데, 막상 그 날 보니까 몇 명 안왔다는 거지요. 세상에 몹쓸 친구들이 어디 있습니까? 후배를 위해서 선배들이 그렇게 많은 시간과 물질, 정성을 들이면서 후배들을 위해서 축제를 벌여 주고, 콘서트를 벌여줬는데, ‘왜 못왔니?’ ‘친구 만나러 가느라구요.’ 이게 말이 되는 이야기입니까?

정말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고 하는 것은 정말 기도가 없이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다시 말하면 지금 다윗은 하나님 앞에 자신의 블레셋 시글락의 삶을 청산하고, 예루살렘으로 가고 싶은, 유다땅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앞서서 먼저 여호와께 물어 가로되, 기도했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먼저 구했다는 거지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고 하는 것은 또한 노동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수고의 땀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거저 되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 예배 전에 우리 찬양대가 찬양을 하면 요즘 무엇을 느끼시나요? 많은 분들이 정말 찬양대가 점점 좋아지고 있다. 우리 할렐루야찬양대가 갈수록 은혜롭게 성장하는 것,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다음주일에는 세 찬양대 연합으로 부활절 칸타타 할 텐데, 여러분 가족과 모든 성도들이 오셔서 찬양으로 은혜 받는 기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은 기도가 필요하다고 그랬습니다. 노동이 필요하다고 그랬습니다. 수고의 땀이 필요하다고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헤브론으로 이끌어 가셨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불평하지 않고, 다윗과 가족과 모든 공동체를 이끌고 헤브론으로 갔습니다.
나중이 되어 헤브론에서 다윗이 왕이 되었는데, 거기서 무려 7년 6개월동안이나 거기서 왕으로 재직을 했다고 했습니다. 거기서 그 헤브론이 왕도, 왕이 있는 성이 되었습니다. 그 척박한 땅을 모든 사람들이 와서 살고 싶은 땅으로, 모든 사람들이 함께 하고 싶은 성으로 바꾸었다고 하는 것이지요.

여러분 창조적인 사람은 남들이 다 해놓은 곳에 가서 누리는 것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선교회도 새로 된 선교회는 모이는 것조차 버겁지요. 전화해도 잘 모이지 않고, 잘 모이는 선교회는 회장으로 다음 사람이 누가 되어도 그것 어렵지 않습니다. 잘 운영이 되고, 잘 돌아갑니다. 모이라고 하면 모이고, 봉사하라고 하면 봉사합니다.

그런데 신설된 선교회는 모이는 것조차 어려워요. 봉사하자고 하면 더 어렵지요?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힘들어 하는 이 부분을 내가 맡았을 때, 이 맡은 부분을 정말 주님 앞에 기도하면서 정말 수고의 땀을 흘리면서 이 부서를 하나님 기뻐하시는 부서로 만들었을때 다른 사람들이 저 부서 일을 했으면, 내가 저 부서에서 같이 조금 일해 봤으면 그런 매력적인 부서로 만들어 가는 것, 이것이 창조적인 사람의 모습인 줄 믿습니다.

교회에서 어떤 부서를 맡아도 골라서 맡으려고 하는 사람 있잖아요. 저는 속장은 싫어요. 저는 강사는 싫어요. 저는 무슨 부는 싫어요. 저는 무슨 부를 하겠습니다. 수많은 당회부서, 하고 싶은 부서와 하고 싶지 않은 부서, 하고 싶지 않은 부서는 뭐예요? 이유가 2가지 있지요? 하나는 별로 갈채를 받지 않는 부서예요. 수고해 봐야 아무리 땀 흘려봐야 알아주지 않는 부서라는 것이지요. 또 하나는 수고의 땀을 흘려야 하는 노동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우리 목사님이 나를 이런 부서에다가 임용을 했을까? 그래가지고 삐지는 사람도 있지요. 어느 교회가 주차하는데, 수많은 차들이 주차장에 들어오는데, 1부예배 나가고, 2부예배 들어가고 하면 얼마나 복잡합니까? 대한민국 교회 중에 주차장에 마음껏 교인수만큼 주차장 있는 교회는 하나도 없어요.

만명이 모이는 교회이면 만명이 수천개의 자동차를 가지고 오면 그것 외에도 절반 이상 주차를 못합니다. 그러니 주차요원들이 얼마나 일이 고됩니까? 아마도 그 일 하려고 하지 않지요. 그런데 어느 장로님이 그 주차요원일을 자청했어요. 주차봉을 들고, 이제는 불을 번쩍번쩍 거리면서 주차요원을 했어요. 그 교회가 전부 주차 안내하려는 사람만 몰려가지고 목사님이 좋아서 어쩔줄을 몰랐어요. 행복한 비명을 질렀어요. 서로 주차 안내만 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평안의교회가 식구가 아무리 많아도 부흥회 한 번 할 때, 강사님 모시는 차가 한대도 없어서 담임목사 차로 하잖아요. 차가 많으면 뭐합니까? 이번에 부흥회 때는 제 차로, 강사님을 모시겠습니다. 그런 사람이 없어요. 좋은 차 타고 다니면 뭐합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헌신한다고 하는 것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 부목사님이 강사님 픽업 하느라고 수고합니다. 죄송한 이야기지만 부목사님이 그거 하러 온 것입니까? 저는 부목사님이 순종해서, 기쁨으로 해서 고맙기는 하지만 그것은 사실은 예배를 위해서 더 다른 부분에서 더 많은 일을 해야할 그런 포지션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것을 성도들이 바라보면서도 무감동, 무감각이지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정말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임 받는 상황에서 많은 부분에서 노동과 수고의 땀이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다윗은 말없이 헤브론으로 자기의 공동체를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나서 거기서 그 척박하고 황무지 같은 땅에서 하나님께서 그를 왕으로 세워주셨습니다. 5장에 보면 다윗이 기름을 부어 유다족속의 왕이 된 나이가 30세라고 했습니다. 거기서 7년 6개월을 왕으로 하고,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옮겨주신 줄 믿습니다.

예루살렘에서 33년동안 왕을 하고, 도합 40년 6개월동안 왕으로써 이스라엘 최고의 왕으로, 모든 사람이 존경하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으로써 삶을 산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으로 세워 주셨는데, 어떤 사람이 다윗에게 전합니다. 사울 왕이 죽었는데, 그 사울 왕을 장사한 사람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입니다. 사울왕이 죽으면서 이스라엘 통일 왕국은 절반으로 나누어지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유대라고 하는 남쪽지역의 왕이 되었고, 북쪽지역 이스라엘은 이스보셋이라고 하는 사울의 아들을 왕으로 세웠지만, 사실 그는 허수아비 왕입니다. 오늘 본문 8절에 보면 사울의 군장 넬의 아들 아브넬이 이 군대 장관 아브넬이 5년동안이나 자기가 왕 노릇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이스보셋이라고 하는 사울의 아들을 허수아비 왕으로 추대를 했어요.

이스보셋이라고 하는 이름의 뜻이 기가 막합니다. 수치스럽다. 망신스럽다. 그런 뜻이 있습니다. 어느 부모가 자기 자식의 이름을 이렇게 지을 수가 있습니까? 이 이스보셋은 군대장관 아브넬 그의 통치 밑에서 허수아비 왕으로써 2년 동안 이름 뿐인 왕노릇을 했습니다.

북왕국 지역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군장 아브넬의 통치에 지금 있었는데, 그 지역에 길르앗-
야베스라고 하는 동네가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사울왕의 시신이 블레셋 사람들이 목을 베고 벧산 성벽에 걸어놓았는데 그것을 위험을 무릅쓰고 밤새 가서 그 시신을 모셔다가 화장을 하고, 장례를 하면서 통곡했습니다. 그 소식을 다윗이 들었습니다.

지금 지리적으로 보면 지금 적대적으로 있는 지역에 조금 심하게 말하면 적군의 이야기들입니다. 내 편이 아닌 상대편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소식을 듣고나서 사자를 보냈습니다. 당신들이 한 일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지, 우리 하나님께서 당신들에게 은혜와 진리로 복을 내리시기를 원합니다. 그런 축복의 메시지를 사자를 통해서 보냈습니다.

다윗은 선한 일, 옳은 일을 네 편, 내편 가리지 않고 칭찬하고 축복할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요즘 우리 백성들은 일본과 긴장관계에 있습니다. 독도문제로 우리의 신경이 바싹 날카롭습니다. 지금 말 잘 못하면 괜히 애국자가 아니라 이상한 사람 되기 쉽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본 시네마현 독도와 제일 가까운 그 일본의 한 지방자치단체에서 독도의 날을 제정해서 지금 우리 외무부가 이제는 조용한 외교가 아니라 공격적인 외교로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이런 저런 조치를 취하는 가운데, 마산시가 대마도의 날을 조례를 통과 했습니다.

공청회를 거친 것도 아니고, 상임위원회를 거친 것도 아니고, 일본에 대해서 성토하다가 그 날 밤에 갑자가 욱하는 심정으로 ‘그러면 우리도 대마도의 날을 만들자.’ 그래서 다음 날 아침에 ‘대마도의 날’을 통과시켰다는 거예요. 전 무척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분별력이 없는 그러면 우리가 독도의 날을 만들었다고 일본을 공격한 우리의 명분은 다 없어지는 거예요, 너나 나나 똑같은 사람들이다. 이럴 때 국민들은 감정적으로 그럴 수 있습니다. 군중은 그렇다고 치고, 이럴 때 중요한 것은 지도자입니다.

지도자는 평상시에는 별로 중요한 것 같지도 않습니다. 회사의 CEO들이 부서의 수많은 억대의 연봉을 받으면서, 좋은 차 타고 다니면서 회장실, 사장실 차지하면서 저 사람들 왜 아무 것도 안 하면서 왜 저렇게 좋은 대우 받는거야. 그런 생각 들지요? 회사가 어려울 때 그 한 사람의 판단에 따라 그 회사가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해요.

죽으면 수만명, 수십만명의 종업원이 죽는 거고요. 살면 수십만의 종업원들이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도자들은 위기 때에 중요한 것입니다. 그 위기 때 한 번 써먹으려고 그렇게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 위기 때 군중심리에 한번 몰아버리면 그 무슨 지도자라고 할 수 있습니까? 지도자는 그럴 수록 냉정해야 합니다.

지금 다윗은 자기와 상대방 앞으로 피 터지게 유다와 이스라엘이 싸워야 하는 그런 상황인데도 그들의 잘 한 점, 그들의 정말 아름다운 점을 축복하고 칭찬해야 합니다. 아버님이 그런 이야기를 하십니다. 우리나라가 초기에 여당, 야당 피터지게 싸울 때 기차를 타셨는데, 야당의원들이 전부 목포로 유세를 가면서 기차를 탔대요. 옆에 앉았는데 그들이 하는 이야기가 ‘대통령이 참 인물은 인물이야. 경부고속도로 만들어놓고, 그 당시에 상상도 못 했던 고속도로를 만들어놓고, 서울 부산을 하루종일 가야 하는 그 길을 4- 5시간만에 가게 만들어 놨다. 유통이 잘 되게 하고, 저 지역에서 공산물들이 서울로 올라가게 만들어주고 부산을 세계적인 항구로 가게 기반을 만들어 놓고, 역시 인물은 인물이야.’ 그렇게 마구 칭찬을 하더래요. 그런데 마지막 그렇지만 우리는 야당이니까 무조건 반대해야돼.

그 당시 야당의 최고 지도자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참 실망했답니다. 잘 하는 것 알면서도 신문 방송에 논평내는 것은 무조건 잘못 됐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들의 한계입니다. 잘 한 것은 잘 했다고 인정하고 축복해 줄 수 있는데, 지금 우리는 다윗에게서 그 큰 그릇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보고 계신 줄 믿습니다.

결국 아브넬이 7년여동안 다스리기 시작하다가 이스보셋을 허수아비로 세우기도 하다가 이렇게 저렇게 했지만, 이스보셋이라고 하는 왕은 개인에 의해서 세우신 왕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세우셨고, 모든 유다 족속들이 온 백성들이 추대에 의해서 세워진 왕인 줄 믿습니다. 출발은 같은 왕으로 머리는 왕관을 쓰고, 왕의 옷을 입고, 왕좌에 앉아있는 외형적인 모
습은 같지만, 내용은 너무나도 달랐습니다.

헤브론에서 시작된 다윗의 상황이 모든 사람들이 헤브론을 축복의 땅으로 은혜의 땅으로, 함께 있고 싶어하는 장소로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오늘 저는 고난 주일을 맞이하면서 주님 앞에 다시 한 번 우리는 다윗의 모습으로 돌아가기를 권면하고 싶습니다. 다윗이 가로되 어디로 갈까? 철없는 사람도 아니고, 경험도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그는 삶의 중요한 시기에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기도의 사람의 모습, 하나님 그 자녀의 모습을 잃지 않았습니다. 어디로 갈까?

오늘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지금까지 내 성질대로 내 기호대로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골라서 가리라. 신앙생활이 나에게 맞으면 기쁘고, 즐겁고, 즐겁지 않으면 늘 짜증이고, 늘 불평이고, 내 중심대로 신앙생활 하면서도 그것이 신앙인 줄 알고 그것이 믿음인 줄 알았다면 오늘 주님의 십자가를 다시 한 번 바라보면서 이제는 주님이 부르시는 대로, 주님이 명하시는 대로 기쁜 마음으로 사명을 감당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자리가 복된 자리가 되게 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돌려드리는 순종의 성도들이 십자가의 길을 기꺼이 따라갈 수 있는 믿음의 성도들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고마우신 주님,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자의 대로, 편의 대로 살았던 우리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경험이 많고, 삶의 지혜가 넘쳤던 다윗이지만 중요한 삶의 골목골목 마다 길목길목 마다 무릎을 꿇었습니다. 주님, 어디로 갈까요? 주님이 인도하신다면 헤브론이라도 가겠습니다. 사랑하는 평안의 모든 성도들,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면서 이제 다시 한 번 다짐하기를 원합니다. 부름 받아 나선 이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순종의 결단으로 십자가를 부끄럽지 않게 하는 진정한 주의 백성들 위해 거듭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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