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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난주일,종려주일] 베드로의 실패(失敗)원인 (마 26:6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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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신만교 목사

(마 26:69) 베드로가 바깥뜰에 앉았더니 한 비자가 나아와 가로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마 26:70)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마 26:71) 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비자가 저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마 26:72)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 하노라 하더라 
(마 26:73)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마 26:74) 저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곧 울더라 
(마 26:75)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痛哭)하니라 

  오늘 본문에는 수제자였던 베드로가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부인(否認)한 실패담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세상을 살아가면서 실패를 경험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누구나 실패의 쓴잔을 맛봅니다. 돌이켜보면 실패(失敗)가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실패를 거울로 삼게 될 때 성공에 이르는 디딤돌이 됩니다. 그래서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이다'라는 말을 합니다.

  베드로가 여지없이 실패했습니다. 그렇다고 베드로가 아주 낙오자(落伍者)가 됐습니까? 천만에요. 더 귀하게 쓰임 받았습니다. 실패(失敗)란 성공을 위해 지불하는 수업료와 같습니다. 학교 다니면서 뭔가 배우려면 수업료를 꼭 내야합니다. 공짜란 없습니다. 귀한 것을 배울수록 값이 비쌉니다. 중학교보다는 고등학교가, 고등학교보다는 대학교의 수업료가 훨씬 비쌉니다. 사회(社會)에 들어와서 내는 수업료는 학교의 수업료에 비교할 수 없습니다. 사업(事業)을 하다가 실패하면 몇 천만 원, 몇 억의 수업료를 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옆 사람과 인사합시다. '그 동안 수업료 많이 내셨으니 앞으로 잘 될 겁니다' 여러분 중에도 실패한 경험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그 실패를 실패로 생각하지 마시고 더 좋은 것을 얻기 위한 조금 비싼 수업료를 낸 것으로 생각하십시오.
  신앙생활에도 실패가 있을 수 있습니다. 성경(聖經)의 주인공들 중에 실패가 없었던 사람이 있을까요? 그들은 실패를 은혜(恩惠)의 기회로 승화시켜 더 크게 쓰임 받은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그 주인공들의 실패한 이야기, 부끄러운 죄들, 허물들도 상세히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왜요? 우리들에게 교훈(敎訓)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자신을 살피는 거울로, 또 경계로 삼으라는 뜻입니다. 타산지석(他山之石)을 삼으라는 거지요. 타산지석(他山之石)이란 시경(詩經)에 나오는 말로 '남의 산의 돌이라도 자기의 옥(玉)을 가는 데 도움이 된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의 실패를 보고 비웃지 말고 큰 교훈으로 삼으라는 겁니다. 오늘 우리는 베드로의 실패 원인을 분석하고 교훈을 받기를 바랍니다. 베드로의 실패는 곧 나의 승리(勝利)의 비결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4차례에 걸쳐서 수난에 대한 예고를 하셨습니다.(마 17:22-27, 마 17:22,23, 마 20:17-19, 마 26:1-5)
(마 17:22-23)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더라 
  예고하신 대로 예수님께서 대적(對敵)들에게 체포되어 대제사장에게로 끌려갔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는 예수님의 제자인 가롯 유다가 결정적인 정보를 주었습니다. 이렇게 상황이 급변하자 나머지 제자들은 혼비백산(魂飛魄散) 다 도망가 버렸습니다. 예수의 제자그룹이 최대의 위기에 봉착했습니다. 그나마 수제자였던 베드로는 도망은 가지 않고 예수님을 잡아가는 무리들의 뒤를 멀찍이 서 뒤따라갔습니다.
  날씨가 꽤 쌀쌀했습니다. 베드로는 대제사장 집의 바깥뜰에 있었습니다. 추운 밤인지라 그는 불 가까이 가서 손을 녹였습니다. 바로 그때 한 여종이 베드로에게 다가와서 '당신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자 베드로는 순간 두려워서 '나는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소' 시치미를 떼며 부인했습니다.
  조금 있다가 또 다른 사람이 베드로를 보더니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라고 하며 베드로가 예수의 제자였음을 고발을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그때 '나는 그 예수라는 사람을 모른다'고 부인하였습니다. 또 다른 사람이 '너도 진실로 그 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자 이제는 예수를 저주까지 하며 맹세하기를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연달아 거짓말을 했습니다.

  베드로는 여지없이 예수님을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베드로의 실패원인은 과연 무엇일까요? 우리가 면밀히 분석해서 타산지석을 삼아야합니다. 베드로가 실패한 원인은?

1.자신을 지나치게 과신(過信)했던 영적 교만(驕慢)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것이 그의 (本心)이었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만약 베드로가 그것이 본심이었다면 다른 제자들처럼 도망갔을 겁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누구보다도 주님을 사랑했고, 충성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베드로에게는 약점(弱點)이 있었습니다. 자신에 대한 지나친 과신(過信)이었습니다. 너무 자신 만만한 겁니다. 베드로는 신념(信念)이 강한 사람입니다. 자신감과 신념에 있어서 베드로보다 뛰어난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성격은 다분히 충동적이고 성급하고 열광적이며 낙천적이고 때로 분별력이 없고 매사에 적극적인 성격입니다.
(마 26: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그럴 때 베드로가 뭐라고 자신했습니까? 
(마 26:33)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마 26:35) 베드로가 가로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요 13:37)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이런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대개 비교의식, 우월 의식에 빠집니다. '내가 누군가? 나는 예수님의 최 측근이 아닌가?' 그러기에 '다 버릴지라도 나는…' '나는 다르다. 나는 저들과 같지 않다.' 아주 위험한 생각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영적 교만입니다. 신앙(信仰)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누구와 비교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상대평가가 불가능합니다. 오로지 하나님 앞에서 절대평가만 있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비교의식, 우월 의식이 결국 사단이 파고들 수 있는 틈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단은 이 같은 교만(驕慢)을 자극하여 넘어지게 합니다. 
(잠 16:18) 교만(驕慢)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고전 10: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은 신념과 자신감(自信感)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의지로, 내 결심으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입니다. 신앙(信仰)과 신념(信念)은 다릅니다. 신앙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겁니다. 신념은 자기 자신을 의지하는 겁니다. 베드로는 신앙보다 신념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겸손히 하나님의 능력만을 의지해야합니다.
  인간(人間)은 연약한 종이와 같습니다. 아무리 튼튼하고 질긴 종이라도 종이 스스로는 약합니다. 바람에 날리고 쉽게 찢어집니다. 그러나 이 종이를 강판에 붙여보세요. 총알도 못 뚫습니다. 이게 믿음입니다. 이 믿음에 능치 못함이 없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것은 신념이 아니라 신앙이었습니다. 
(빌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신앙(信仰)은 능력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고 신념이 자신에게 있습니다. 신념(信念)은 내 약한 손이 하나님을 붙잡는 힘입니다. 그러나 신앙(信仰)은 하나님의 권능의 손이 내 손을 붙잡아 주는 겁니다. 그분의 힘의 능력으로 만이 우리의 신앙이 지탱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붙잡는 손은 약합니다. 그러나 엄마가 붙잡으면 안전합니다. 신앙은 오히려 자기를 포기하는 겁니다. 자기를 죽이는 겁니다. 특히 사도 바울이 이 점을 강조합니다.
(고후 1: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고후 1:9)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베드로의 신앙은 다분히 신념적이었습니다. 신념(信念)이 쉽게 무너집니다. 베드로는 마음으로는 진정 예수님과 감옥에도 같이 가고, 죽는 데도 같이 가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현실에 부딪치고 보니 도저히 그럴 수 없었습니다. 신변의 위험을 느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도 모르는 사이 예수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신념은 순간적으로 무너집니다. 신념이 의지할 것이 못됩니다.
(잠 3:5)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여러분은 신념의 사람이 아니라 신앙(信仰)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베드로가 실패한 원인은?

2. 하나님께 무릎 꿇는 기도(祈禱)를 게을리 한 때문입니다.

  자신(自信)이 넘치는 사람이 기도를 열심히 할 리가 없지요. 기도할 필요를 별로 느끼지 않았을 겁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을 쏟으시며 기도하시면서 베드로에게도 기도할 것을 당부 하셨습니다.
(마 26: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그러나 베드로는 기도하지 않고 잠만 잤습니다. 자신이 있었으니까요. 여러분 중에도 기도의 필요를 느끼지 않는 사람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사순절에도 새벽기도도 안 하지요. 이것은 위험한 신앙입니다. 승리의 비결은 하나님께 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을 공급받는 파이프입니다. 기도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합니다.
(슥 4:6)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결국 피땀 흘리며 기도하신 예수님은 시험을 당할 때에 승리하셨지만, 베드로는 기도하지 않고 잠만 자다가 시험에 빠지고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여기에 베드로의 실패한 원인이 있습니다. 승리는 기도하는 자의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사울 왕은 실패한 왕입니다. 그런가 하면 다윗 왕은 성공한 왕입니다. 그 이유와 근원이 무엇입니까? 간단합니다. 사울 왕은 여호와 하나님께 묻지 아니하였고 다윗 왕은 여호와께 물었습니다. 다윗은 기도하였고 사울은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입니다. 
(대상 10:13) 사울의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犯罪)하였음이라 저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神接)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대상 10:14)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저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돌리셨더라 

  그러나 다윗 왕은 매사(每事)를 여호와께 물었습니다. 기도하였습니다. 골리앗과 싸움을 하고자 할 때도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삼하 5:19) 다윗이 여호와께 물어 가로되 내가 블레셋 사람에게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저희를 내 손에 붙이시겠나이까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말씀하시되 올라가라 내가 단정코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붙이리라 하신지라 

  여러분은 매사(每事)를 하나님께 묻습니까? 아니면 그냥 여러분의 소견대로 합니까? 여러분이 하나님께 묻지 아니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無視)하는 엄청난 죄악(罪惡)입니다. 여러분은 집안에 무슨 일이 있으면 부모님께 묻고 의논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아이들도 매사를 여러분과 의논하지 않습니까? 의논하지 않는 것은 부모를 무시하는 오만(傲慢)한 태도입니다.
  베드로의 실패는 기도 실패입니다. 기도는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줍니다. 아무리 큰 시험도 기도하는 자는 이길 수 있습니다. 기도하면 성령께서 도와주십니다. 아무리 큰 소리 뻥뻥 쳐도 기도하지 않으면 승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베드로는 기도와 성령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기도를 게을리 하다가 큰 시험을 당한 베드로가 오순절에 다른 제자들과 함께 마가 다락방에서 전혀 기도에 힘썼습니다. 무려 10일간이나 기도에 전념하였습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을 받았습니다. 그 후부터 베드로는 오직 기도의 사람, 성령의 사람이 되어 당당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증거 하므로 수 천명의 영혼을 구원했습니다. 그때는 감옥(監獄)가는 것이 두렵지  않았고 죽음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기도를 게을리 하다가 실패했던 베드로는 시험을 이기는 비결이 오직 기도임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벧전 4: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여러분은 기도하므로 하나님께 능력과 지혜를 구하셔서 승리(勝利)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베드로가 실패한 원인은? 

3. 예수님의 경고(警告)의 말씀을 소홀히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할 것을 수 차례 경고(警告)하셨습니다.
(요 13:3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말은 실수로 한번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3번씩이나 부인하게 될 것을 말씀하신 겁니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주님의 경고를 무시했습니다.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왜 저런 말씀을 하실 까에 대해 신중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이렇게 넘어지게 되고 실패의 쓴잔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열심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작은 방심이 함정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신중하게 받지 않고 가벼이 여기는 것은 시험의 원인이 됩니다. 운동경기에도 주의(注意)를 줍니다. 경고(警告)를 받고 퇴장(退場)을 당하기도 합니다. 이런 선수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항상 긴장해야합니다. 매일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으면서 그 날 그 날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합니다.
  말씀은 우리에게 주의(注意) 줄 때도 있습니다. 경고(警告)를 줄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신중하게 생각하고 매사(每事)를 말씀에 비추어서 살아야 합니다. 주의와 경고의 말씀과는 상관없이 자기의 소견과 습관처럼 살면 반드시 실패하게 됩니다. 자동차도 과속(過速)을 하면 경고음이 납니다. 그런데 무시하고 달리면 사고납니다. 오늘날 대부분 그리스도인의 실패의 원인은 경고의 말씀을 소홀히 하기 때문입니다.
(잠 3:1) 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
(잠 3:2) 그리하면 그것이 너로 장수하여 많은 해를 누리게 하며 평강을 더하게 하리라

  매일 매일 주시는 말씀의 주의 경고를 명심하여 승리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4. 회복(回復)의 길은 진정으로 회개(悔改)하는 눈물의 기도뿐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3번씩 부인하고 나서 얼마 후 곧 닭이 울었습니다. 그 순간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예수님이 계신 곳을 쳐다보자 예수님께서도 베드로를 말없이 쳐다보시고 계셨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한 잘못을 생각하고 밖으로 나가서 심히 통곡(痛哭)하며 울고 또 울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목놓아 통곡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실망시켜 드린 일이 몹시 마음 아팠습니다.
(마 26:75)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痛哭)하니라 

  그리고 베드로는 다시 일어섰습니다. 베드로를 다시 살린 것은 회개의 눈물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눈물은 후회의 눈물이요, 죄책감의 눈물입니다. 못난 자신을 생각하며 흐느꼈습니다. 그 눈물은 고귀(高貴)한 것이었습니다. 내일을 새롭게 여는 눈물이요, 그의 인생을 깨어나게 하는 값진 눈물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베드로는 눈물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베드로는 한 장의 수건을 항상 가슴에 넣고 다니면서 넘쳐흐르는 눈물을 닦았다고 합니다. 주님의 다정한 말씀과 주님 곁에 있었을 때를 생각하면 눈물이 억제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특히 매일 새벽, 첫 닭의 울음소리와 함께 기도를 시작하면서 심하게 울었다고 전해집니다. 

  이것이 가롯 유다와 베드로가 다른 겁니다. 두 사람은 똑같이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그 결과 가룟 유다는 가장 비참한 삶으로 그의 생을 마감하게 되었고 베드로는 가장 훌륭한 제자로 재기에 성공하였습니다.
  이 두 사람의 차이는 과연 무엇입니까? 가롯 유다는 자신의 의지(意志)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배반이 이루어졌습니다. 처음부터 예수님을 배신할 의도를 가지고 고의적으로 배신을 하였습니다. 물론 유다에게는 회개(悔改)도, 눈물의 기도도 없었습니다. 결국 자살로 인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달랐습니다. 그는 오히려 더 잘해 보려고 다른 사람들처럼 도망가지도 않았고 그는 예수님이 잡혀가신 곳까지 따라갔습니다. 그러다가 약해서 부족해서 배신을 하게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잘 섬기려고 하다가 실패하는 것에 대해서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우리의 마음의 동기를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하려고 했으나 실패하는 것, 죄를 안 지으려고 했으나 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한 것 그런 약함과 부족함을 하나님께서 아시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넘어진 돌에 우리가 또 다시 넘어져서는 안됩니다. 명심(銘心)하고 조심하면 됩니다. 과신(過信)하지 맙시다. 기도(祈禱)에 게으르지 맙시다. 경고(警告)의 말씀을 명심합시다. 회개(悔改)의 눈물...347장 찬송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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