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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고난주일] 나귀 타고 오신 왕 (요 12: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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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덕휴목사

오늘은 사순절 후 제4주 째 되는 주일입니다. 부활절 예배를 이제 3주 앞두고 있는데 부활절 바로 전 주일을 우리는 종려주일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종려주일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을 모두 다 아시고 계시겠지만 한 번 더 우리가 그 유래와 예배자세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시고 은혜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에 큼 무리가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과 예수님을 환영한 것을 기념하여 만들어진 교회 명절입니다. 언제부터 그리스도의 교회가 종려주일을 지켰는가 하는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교회역사가들에 의하면 주후 4세기부터 종려주일을 지켜왔다고 합니다. 원래 교회의 절기예배는 천주교에서 더욱 철저히 지킵니다만 우리 개신교에서도 일부 지키고 있는 실정입니다.

종려주일은 예배당을 종려나무 가지로 장식하고, 나귀 타신 왕의 행차를 흉내 낸 행진도 하고, 그밖에 여러 가지 행사를 치룹니다. 그러나 개신교회들은 종려주일을 기념하는 예배를 드리며 종려주일의 의미를 묵상하는 것으로 그칩니다.

예수님께서 어린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셨다는 이야기는 요한복음 외에 공관복음에도 있습니다(마 21:1-11, 막 11:1-11, 눅 19:28-38). 요한복음의 이야기는 공관복음의 이야기보다 훨씬 내용이 짧습니다. 제자들이 나귀 새끼를 구해오는 이야기가 빠져있고, 또 입성 뒤에 있는 성전 정화 이야기도 생략되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만 있는 내용도 있습니다. 그 첫 번째 내용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 때가 유월절 명절 이틀 전이었다는 내용입니다. 이 내용으로 인하여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 날이 주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환영하는 무리가 손에 들고 흔든 나뭇가지가 종려나무 가지라는 것도 요한복음에만 있는 내용입니다. 이 내용으로 인하여 종려주일로 명명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가 큰 사건입니다. 일반적으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승리의 입성(The Triumphal Entry; 개선의 입성)”라고 말합니다만, 실상은 “영광을 위한 고난의 입성”이라 말해야 옳을 것입니다. 즉 부활의 영광을 위하여 십자가 죽음을 위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예수님의 고난을 알지 못하는 유대 백성들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기적만을 기억하고, 또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사건만을 기억하고 “호산나” 찬미를 부르며 환영한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조차도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신 그 겸비하신 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 곧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야 예수님이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 뜻을 깨달았다고 했습니다(16).
오늘 이 시대 교회들 안에도 하나님의 영광을 취하기만 바라고 십자가의 죽음의 고난을 알지 못하는 유치한 신자들이 참 많습니다. 심지어 복음을 증거하는 사명자 중에도 어린 나귀 타신 예수님이나 십자가 고난의 주님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는 유치한 사명자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종려주일이 명목적인 명절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좀더 진지하게 모든 내용들을 깊이 묵상하므로 우리의 잘못된 신앙과 부족한 신앙을 바로 잡는, 그리하여 우리도 예수님이 가신 길을 기꺼이 따라갈 수 있는 신앙이 확립되는 명절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1.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내로 들어가셨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우리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상상해 보십시오. 임금님의 행차와는 너무너무 다릅니다. 아니 고을 원님의 행차만도 못합니다. 고작 어린나귀를 타시고, 그리고 힘없고 가난한 백성들과 어린아이들이 예수님을 맞고 있습니다. 그들이 손에 들고 흔드는 것도 깃발이 아니라, 고작 종려나무 가지일 뿐이었습니다.
유대 백성들이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라고 환호하였지만, 실상 그 모습은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행사였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어린 나귀를 타신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가 섬기는 주님이 어떤 왕이신가 하는 것을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진정 참으로 겸손하시고 온유하신 만왕의 왕이신 주님이십니다. 진정 인류가 영원토록 사모할 왕의 모습을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나귀타신 예수님의 모습에 대해서 이미 스가랴 선지자는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슥 9:9)

1) 공의로우신 임금
성경에서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재판장이시며, 의로우신 주님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말 “공의”로 번역된 히브리어의 원뜻을 보면 모두 재판과 심판과 정의와 관련되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시며(시 7:11), 공의로 세상을 심판하시며(찬 18:25), 하나님의 의는 세상 끝 날까지 절대 변함이 없는 의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의의 기준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에 비추어 판단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에 무엇이 의롭고 무엇이 공평한 가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람은 결코 의로울 수 없습니다(욥 4:17). 성경은 의인은 한 사람도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사람은 세상 의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합 2:4).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의의 왕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세우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의의 왕이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장차 오실 메시야께서 공의로 허리띠를 삼으시고(사 11:5), 이방의 공의를 베푸실 것이며(42:1),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고 그들의 죄를 친히 담당하실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53:11). 또 마가복음은 의를 위하여 고난 받는 종을 복음서 전체에 그렸습니다. 그러므로 공의의 주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요구하시는 바는 “의로운 백성이 되라”는 것입니다. 산상수훈에서 주님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배부름을 얻을 것이라 말씀하셨고,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가 복이 있으며, 천국은 바로 의를 위하여 핍박 받는 자들의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마 5:^~10). 뿐만 아니라 “너희 의가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 받은 성도들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염려 걱정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삶을 걱정해야 합니다. 이 세상이 끝날, 불의한 자들은 공의로우신 주님 앞에서 심판을 받아 지옥 형벌을 받게 될 것이고, 믿음의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 같이 빛날 것입니다(마 13:43).

2) 구원하시는 구세주
스가랴 선지자는 나귀 타신 메시야는 공의로우신 왕이실 뿐 아니라, 구원을 베푸시는 구세주라 예언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공의의 왕으로만 오셨다면 구원 받을 자들이 한 명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공의의 법으로 심판을 받아 죄인으로 정죄 당할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당신의 몸을 십자가 못 박아 희생하심으로 말미암아 공의의 심판에서 해방을 받게 하신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공의의 형벌인 사망을 친히 당신 몸으로 당하신 것입니다. 이 엄청난 구속의 은혜로 믿는 자들은 예수 십자가의 보혈로 모든 죄가 용서되고, 간과되어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로마서 3장은 바로 이 사실을 증거하는 말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3~24).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떳떳하게 부를 수 있는 은혜는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전적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켜드린 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고, 아들로 말미암아 세상을 구원하려 하심이라고 요한복음 3장 17절에 말씀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들을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고 생명의 은혜를 얻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은 구원의 은총을 얻을 수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구세주로 오셨다는 사실을 기뻐하고 믿는 자에게는 구원의 길이 활짝 열립니다. 어린 나귀를 타신 예수님을 “호산나” 찬미는 바로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 주여!”라는 찬미였음을 알아야 합니다.

3) 겸손하신 임금님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은 “그분은 겸손하여서 작은 나귀를 타셨다”했습니다. 우리는 나귀가 어떠한 짐승인지 잘 압니다. 말과 비교하여 볼 때에 크기도 작고 볼품도 없는 말에 훨씬 뒤쳐지는 짐승입니다. 물론 말처럼 잘 달리지도 못합니다. 나귀는 기껏해야 짐수레나 끌고 밭갈이에나 쓰입니다. 그러나 나귀는 성격이 매우 유순합니다. 말이 전쟁을 위한 짐승이라면 나귀는 평온한 시골 농가에서 쓰임을 받는 평화의 짐승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겸손한 왕이십니다. 그리고 평화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 11:29). 얼마나 겸손하신 분이신지 친히 제자들의 더러운 발까지 씻어주신 분이십니다.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신 따뜻한 겸손이십니다. 평생 머리 둘 곳도 없이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예수님을 환영한 유대 백성들 역시 겸손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가난한 민중들과 어린아이들이 나귀 타신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그들은 호산나 찬미를 부르며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겸손하신 왕을 환영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겸손한 자를 사랑하십니다.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나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은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으로 단장하여야 합니다. 겸손하신 왕 앞에 겸손히 무릎 꿇고 경배드리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2. 큰 무리가 어린 나귀를 타신 예수님을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 찬미로 환영했습니다.

1) 호산나 찬미
“호산나”는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아람어입니다. 호산나는 간구나 기원을 드릴 때 사용하였고, 또 기쁨의 환호와 찬양의 송영으로도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호산나 뒤에 “영광 있으라” 또는 “축복있으라”는 말이 붙여졌습니다.
큰 무리가 호산나 뒤에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라고 한 것은, 그들은 나사렛 예수가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시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나사렛 예수가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 곧 다윗 왕과 같은 새 왕으로 오셔 줄 것을 희망했던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했음이 이를 잘 말해 줍니다.
큰 무리의 이러한 찬미로 인하여 바리새인들과 유대 지도자들은 더욱 분히 여겼습니다. 그들은 ‘나사렛 예수가 민중 봉기라도 일으킬까?’하는 오해를 했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그렇다 어린아이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적이 있느냐”(눅 19:40, 마 21:16)
그렇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을 찬양함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만약에 사람들이 찬양하지 아니하면 돌들이 나서서 주의 구원함을 찬양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찬양은 구원 받은 성도들이 해야 할 귀중한 일입니다. 호산나 찬미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고백하는 성도들의 찬미입니다. 항상 성도들의 마음 깊은 곳에서 “주여, 우리를 지금 구원하소서!”라는 찬미가 우러나와 드려져야 합니다. 찬미가 얼마나 소중한 신앙의 덕목입니까? 히브리서 13장 15절에 찬미의 제사라 했고, 입술의 열매라 했습니다.

2) 종려나무
예수님을 환영하는 큰 무리는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환영했습니다. 성경에서 종려나무는 번영과 승리를 상징하는 야자나무과에 속하는 상록수입니다. 초막절에는 종려나무를 베어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여 흔들며 기뻐했다고 레위기 23장 40절에 말씀했습니다. 열왕기상 6장 29절에 보면, 성소의 내`외소 사면 벽에 그룹들과 종려나무와 핀 꽃 형상을 부조(浮彫)했다 했습니다. 시편 92편 12절에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발육하리로다”고 말씀했습니다. 요한계시록 7장 9절에 보면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을 향해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라고 찬양하였습니다.

만나가족 여러분, 우리가 구원의 주님 앞에 무엇을 흔들며 감사해야 하겠습니까? 우리 손에는 종려나무 가지가 없는데 말입니다. 우리는 비록 종려나무 가지가 없지만, 우리가 주님을 향해 흔들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도의 손입니다. 디모데전서 2장 8절에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말씀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모세가 손을 들고 기도하니 여호수아의 군대가 이기고, 모세가 손을 내리니 여호수아의 군대가 패했다는 르비딤 전투의 이야기 말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 분노와 다툼을 그치고 거룩한 손을 들고 기도한다면, 승리의 주님, 영광의 주님이 우리의 기도에 큰 응답을 주실 것입니다. 손을 들고 주를 찬양하고, 손을 들고 기도하여 신앙의 큰 승리를 이루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이제 곧 불원간에 공중의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실 것입니다.

어린 나귀를 타신 예수님은 환호하는 무리를 뒤로하고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걸어 나가셨습니다. 무리를 선동하지도 않으셨고, 무리의 환영에 크게 기뻐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평소와 다름없이 당신이 하셔야 할 일을 계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고, 떡과 잔을 떼어 주시며 당신의 죽으심을 기념하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겟세마네 동산으로 나가시어 밤이 새도록 간절한 기도를 드리신 후에, 성 금요일 새벽에 유대 관원들과 등을 돌린 유대 민중들에게 붙잡히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모든 것을 끝낸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곧 부활의 새 아침을 여신 것입니다.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신 부활의 주님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부활을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부활 후 40일이 되는 날, 예수님은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하나님 나라로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현장에서는 하늘에서 이러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 1:11)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주님을 재림을 약속한 말씀입니다. 초림의 주님은 마리아의 몸을 빌려 이 땅에 오셔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셨지만, 재림의 주님은 영광의 왕으로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실 것입니다. 언제 오시느냐고요? 물론 우리 성도들이 살 처소가 다 준비되면 오실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가 예비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요한복음 14장 2절로 3절에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에는 천사장의 나팔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강림하실 것입니다(살전 4:6).

그리고 그 때에는 엄청나고 놀라운 광경을 믿음의 성도들뿐만이 아니고 예수님을 찌른 자들, 곧 비난하고 불신하던 자들까지도 다 보게 될 것입니다(마 24:30, 계 1:7). 그리고 그 날에는 땅에 두 광경이 일어날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던 성도들은 홀연히 변화되어 휴거(携擧)의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 믿음의 성도들에게는 최고의 기쁨의 날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찌른 자들은 어찌할 줄 모르고 통곡하며 절규할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그 날이 생의 가장 최악의 저주의 날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장 7절에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맺음
하나님의 약속은 절대로 변하지 않습니다. “내가 속히 오리라” 약속하신 주님이십니다. 여러분이 눈으로 목격하는 바와 같이, 이제 세상의 모든 징조가 주님이 다시 오실 날이 멀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미혹을 당하고 있고, 배교하는 신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적그리스도가 처처에 나타나서 할 수만 있다면 어떻게 하든지 믿음의 성도들을 유혹하는 시대입니다. 믿음이 좋다 하는 이들도 퍽퍽 넘어지는 시대입니다.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는 시대요, 쾌락을 사랑하는 시대입니다. 참으로 믿음으로 살기가 힘들어 어려운 시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정신 차리고 근신하여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신랑 예수를 맞이할 준비를 잘 갖추어야 합니다.

상상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 찬미를 부르며 예수님을 환영하던 무리들이, 예수님께서 체포당하시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향할 때에 다 어디론가 도망쳐 버리고 말았지 않습니까? 심지어 그들 중에는 예수님을 향하여 욕하고 침을 뱉은 자들도 있었을 겁니다. 세상인심이란 항상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인자가 다시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주임이 재림하실 때에 과연 믿음을 굳건히 간직한 사람들을 얼마나 찾아 볼 수 있겠느냐는 뜻입니다. 진정 누가 끝까지 믿음을 잃지 않고 재림의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성도이겠습니까? 깨어 기도하는 성도만이 믿음을 지킬 수 있음을 필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신 모습에서 우리는 공의의 왕이시며 겸손하신 왕이신 예수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환영하는 큰 무리가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 찬송을 부른 것을 통하여 메시야를 환영하는 백성들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제 나귀 타시고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신 예수님은, 불원간에 공중의 구름을 타시고 재림의 주님으로 다시 오실 것도 깨달았습니다.

만나가족 여러분!
초대교회부터 오늘날까지 교회들이 대망하고 있는 가장 큰 일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재림의 주님이 속히 오시는 것입니다. “마라나타”라고 예배 때마다 간절히 부르짖었던 초대교회의 신앙을 잊지 마십시다. 우리 모두 나귀 타고 오신 예수님을 찬미하고, 그리고 구름 타고 오실 주님을 찬미드립시다(찬송 168장을 부릅시다).

하늘에서 나팔소리가 들리는 그 날, 찬미의 제사를 드리는 믿음의 성도들에게 큰 영광이 임할 것입니다. 그 주인공들이 여러분 모두이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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