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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 부활신앙의 합격 선언 (창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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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종호 목사

(창 22: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1. 하나님은 대속제물인 수양으로 부활신앙의 합격을 선언하신다.

본문의 사건은 전체적으로 일곱 번째 장면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 최종적인 선언을 하시는 장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들 독생자까지도 아끼지 않았음을 보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동기와 자세로 하나님 자신만을 향하고 있는 믿음을 지닌 아브라함에게 시험에 합격했다고 선언해 주셨습니다. 소망 가운데 살아왔고, 지금도 살아가고 있는 아브라함의 믿음의 삶에 대한 합격 선언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아브라함에게 말씀을 전한 후 아브라함의 눈에 곧 수양 한 마리가 들어왔습니다. 이 수양은 아브라함의 눈에 단순하게 들어 온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이라고 표현합니다. “살펴본” 것입니다. 사실 4절과 13절의 문장은 동일한 문장입니다. 4절에서는 단순하게 “바라보았다(라아)”로 번역됩니다. 그런데 13절의 “라아” 뒤에는 우리말에는 생략되었지만 “그리고 보라!”라는 단어가 이어집니다. 즉 이 감탄사를 고려할 때 “살펴보았다”라는 뜻이 합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주위를 자세히 살펴 본 것입니다. 자세히 살펴본 아브라함의 눈에 한 수양이 들어왔습니다. 아브라함이 의도적으로 살펴 본 것입니다. 13절에는 어떠한 하나님의 명령도 담겨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것이 아닙니다. 요구하신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단순하게 아브라함의 행동을 지켜보고만 계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무엇인가 행하기를 기다리며 지켜보시기만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아직도 아브라함의 시험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합격 선언은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시험이 아브라함의 출발부터 시작되어졌듯이 하나님의 합격 선언은 그 선언을 누리는 데까지 측정되어집니다. 결국 이곳에서의 하나님의 시험은 아브라함이 합격 선언을 받은 자로서의 삶을 이어가는지 보시고자 하심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시험에 합격한 자에게 합격의 표증을 보여 주시고 누리게 하십니다. 그러나 그의 눈에 단순하게 들어와 누리게 하시지는 않습니다.

부활신앙의 누림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누리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 누림은 우리의 삶에 나타나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의지를 통하여 우리가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이 누림은 확신과 소망 가운데 의지적인 활동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이 수양은 단순한 바라봄에 의해 보여진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누리려고 자세히 살펴볼 때 보여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시험의 합격 기준을 알려 주실 때 자신의 부활신앙을 확인하고 체험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시험에 합격된 자의 마음에 그것을 누릴 힘을 주십니다. 우리는 그 힘을 사용하여 누림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눈을 들어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분명히 합격케 하신 하나님께서 합격의 선언을 그의 눈에 나타내 보여 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합격한 자가 삶 속에서 그것을 누리게 하시는 분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주위를 둘러보면 그 합격의 선언문이 그의 눈앞에 있을 것을 안 것입니다. 그 선언문이 바로 한 수양입니다. 이 수양은 하나님께서 합격을 선언하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수양을 통해 아브라함이 시험에 합격했음을 알리셨습니다. 그런데 이 수양은 하나님께서 확인해 주시는 방법임과 동시에 아브라함이 확인하는 방법입니다. 아브라함의 눈에는 많은 것이 들어왔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중에서 수양이 부활신앙에 대한 하나님의 시험의 확인 증표임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통해 확증하고 누리게 하심을 알았습니다.

2. 수양은 아브라함의 부활신앙의 증거물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수양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렸습니다. 수양을 주심은 하나님의 선언 방법임과 동시에 아브라함의 확인과 확신의 증표였습니다. 아브라함이 누리는 대상임과 동시에 하나님께 드릴 대상입니다. 하나님의 선언 방법과 선언의 내용과 대상은 별도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부활신앙에 합격한 자의 눈에는 이러한 이중성이 보입니다. 그래서 그것으로 누리며, 드리며, 확인하며, 확신하며, 즐거움 속에 살아갑니다.

아브라함이 자세히 살펴볼 때 그의 눈에 수양이 들어 왔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의 반응은 성경 저자까지도 깜짝 놀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보라!” 감격스러우면서도 놀라는 표현입니다.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사자의 말을 들으며 하나님을 향해 있을 때 이미 아브라함의 뒤쪽에 그 수양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자의 뒤에는 항상 하나님께서 응답으로 주시는 것들이 예비 되어 붙어 다닙니다. 아브라함의 눈에 이제야 그것이 들어 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 수양은 “뿔이 수풀에 걸렸다”고 표현됩니다. “걸렸다(아하즈)”라는 단어는 닢알형 수동 분사입니다. 즉 “잡혀져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 단어가 닢알로 쓰일 때는 “꽉 붙잡다, 잡아채다”라는 격렬한 의미를 함축합니다. 그러므로 도망갈 수 없도록 단단히 잡혀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도망갈 수 없도록 단단히 붙잡혀져 있는 것입니다. 찾는 자가 찾을 수 있도록 잡혀 있습니다. 찾으려는 자가 찾으려고만 하면 보이도록 잡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수양을 찾을 때까지 꽉 붙들고 계십니다. 아브라함이 수양을 확인 증표로 잡아 누릴 때까지 잡고 계십니다. 수양은 이미 준비되어져 있습니다.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단에 드리기 전부터 이미 준비되어져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사전(TWOT)에 의하면 “수양(아일)”이라는 단어의 어근은 “으뜸이다(울)”라는 의미를 뜻합니다. 이것은 수양이 양떼의 지도자임을 암시합니다. 당시에 양들은 암양 10마리 당 수양 1마리의 비율로 사육되는 것이 전형적인 것이었고, 수양만 희생 제물로 바쳐졌다고 알려집니다. 이러한 대표자의 입장에 있는 수양이 하나님에 의해 준비되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볼 때 수양의 어원적 의미는 사전(TWOT)에서 추측되는 어원과는 다른 사실을 보여줍니다. 수양은 성경상 아브라함과 첫 번째의 관계를 맺으며 등장하는 가축입니다. 창 15:9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 하나님께서 바치라고 요구하셨던 짐승(암소, 암염소, 수양, 산비둘기, 집비둘기)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등장하는 곳이 이곳입니다. 그런데 모리아 산에서 하나님의 합격 선언을 받은 후 그의 앞에 준비된 제물은 수양뿐입니다.

오직 수양만 준비된 사실은 아브라함에게 주는 암시가 있음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사건이 아브라함의 “부활신앙”과 관련이 있다면 “수양”도 그와 관련되어 등장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8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부활신앙을 고백한 문장이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LAha,r_yI !yhil|a>)”라고 하였습니다. 이 문장에서 각 단어의 첫 문자들을 합치면 “수양(לꖹאַ)”이란 단어입니다.

즉 수양은 아브라함의 부활신앙의 증거물이며, 아브라함의 부활신앙에 대한 하나님의 확증의 표시이고, 부활신앙을 지닌 자가 늘 하나님께 올려 드려야 하는 신앙의 완결판입니다. “수양(아일)”이란 단어가 아브라함의 신앙고백의 전승에 의해 형성된 단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어원적 추측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부활신앙의 확증물인 수양을 보여주며, 자발적으로 그 수양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부활신앙을 누리기 원하신 것입니다.

신앙고백의 표식인 수양은 이미 준비되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었습니다. 이러한 수양이 아브라함의 부활신앙이 하나님에 의해 온전한 것으로 확증함을 받았을 때에야 눈에 보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에 의해 부활신앙이 인정되고, 알아주심을 입은 자가 부활신앙을 친히 체험할 수 있도록 하나님에 의해 수양이 보여 진 것입니다. 이 수양은 곧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하나님은 부활신앙이 확증된 자가 자신을 대속해 주시는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목격하며, 체험하며, 누리며 살아가게 하십니다. 마치 부활신앙이 있는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부활을 체험하며, 친히 목격하며 지내도록 항상 하나님 우편에서 부활의 주님을 붙들고 계신 것처럼, 부활신앙이 있는 아브라함이 그 부활신앙을 체험하며 목격하고 지내도록 수양을 잡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수양의 붙들림은 고난 가운데서의 붙들림입니다. 마치 만물의 주인 되시고, 통치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모든 왕적 능력을 고난 아래 덮어두고 하나님께 붙들려 있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대속을 위해 고난의 가시관 밑에 순종으로 붙들려 계시듯이 한 수양이 수풀에 붙들려 있습니다. 언제든지 양들의 통치자, 양들의 인도자이며 으뜸이 되는 수양의 그 능력의 뿔이 수풀의 고난 아래 붙들려 있는 모습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아브라함의 눈에 이러한 수양이 보여진 것입니다. 언제든지 손으로 취하여 드릴 수 있는 대속의 제물이 준비되어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언제든지 준비된 그 제물을 취하여, 드리며, 체험하며, 누리는 삶을 살 수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의 대속 제물인 수양을 주신 것은 아브라함의 부활 신앙의 합격 선언일 뿐 아니라 그 부활신앙을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의 증거물이기도 합니다.

3. 부활신앙의 합격 증거인 수양은 하나님께 드려져야 한다.

아브라함은 수양을 취했습니다. 그 수양을 잡아 아들 이삭을 대신해서 번제로 드렸습니다. 여기서 “대신하여(타하트)”라는 단어는 대리적 속죄를 예시하는 구절들에 나타나는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심을 나타낼 때 쓰는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수양을 이삭과 자신의 대리적 속죄를 위해 하나님께 드리며, 자신의 부활신앙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마음을 드리고, 부활의 주님을 통한 교제를 감사하는 마음을 드리기 위해 취했습니다.

즉, 아브라함은 자신의 신앙의 총체를 그 수양에 담아 하나님께 드립니다. 이것은 아브라함 자신이 부활신앙의 모든 것을 체험적으로 확증 받았다고 하나님께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 수양을 번제로 드리라는 명령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수양은 응답을 위해서 번제로 드려져야만 했습니다. 온전한 부활신앙은 그의 전 영역이 항상 부활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차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수양을 번제로 드림은 명령에 순종하는 강제 행위가 아니라 부활신앙으로 관계가 회복된 자가 능동적으로 그 부활신앙을 삶 가운데서 누리기 위한 표현입니다.

수양의 번제는 죽은 자를 살리신 하나님께 대한 헌신과 온전한 굴복을 표현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아브라함의 삶 가운데 부활신앙이 중심이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아브라함에게 수양을 준비해 주시며, 보여주십니다. 바로 부활신앙을 고백하는 자가 드리는 자원하는 수양의 번제를 받기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본래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 이삭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그는 경외하는 마음과 아끼지 않는 마음으로 드렸습니다. 순종의 순수한 동기와 자세로 드렸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손으로부터 이미 드려진 것입니다. 여기에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있었습니다. 부활신앙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 믿음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확인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의 길을 통하여 은혜를 주셨습니다. 대속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죽어야 할 이삭 대신 수양으로 대속케 함으로서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체험케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수양을 직접 잡아서 죽여야 했습니다. 자신과 이삭을 위해 잡아 죽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수양을 번제로 드림에 의해 죽어야 할 이삭은 죽음에서 살아나는 대속적 은혜를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수양을 죽이며 하나님의 대속적 은혜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체험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롭게 해 주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친히 죽이셔야만 했던 것을 체험케 하셨습니다. 수양을 죽이며 죄인 된 자신의 죽음을 보고, 돌려받은 이삭을 보며 자신의 부활을 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확인하였습니다. 이삭 대신 수양으로 번제를 드리며 하나님의 긍휼을 깨닫고, 체험하며, 확인하고, 누리는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부활신앙이 생활 속에 누려지기 시작하는 부분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이 각으로 떼어져 놓여져야 할 자리에 수양을 놓고 번제로 드렸습니다. 이삭이 있어야 할 자리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수양이 놓여졌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자리를 찾아 놓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해서 붙들고 계셨던 수양을 찾아, 취하여, 이삭의 자리에 놓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해야만 합니다. 아브라함이 확인하고 누리길 원하시는 부분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놓아야 할 그 자리에 놓을 수양을 친히 찾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삭 대신 예수 그리스도를 친히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삶의 구석구석에서 이삭이 놓여야 할 자리에 놓여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삶의 구석구석에서 항상 그분이 대신 자리를 차지하여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져야 합니다. 이것이 부활신앙을 체험하고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시험하십니다. 부활신앙이 확인된 자에게 이와같은 대속의 수양을 통하여 합격을 선언해 주십니다. 그 수양을 통한 누림이 “합격 통지서”를 받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고백합니다. “보라! 한 수양이 그의 뒤 수풀에 그의 뿔이 잡혀져 있다.” 세례요한도 예수님을 발견하고 그와 같이 외쳤습니다(요 1:29).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우리가 날마다 삶 가운데서 그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번제로 드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은 단 한번으로서 영원히 끝났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날마다 삶 가운데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성도의 누림을 통하여 날마다 고백되어져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이미 구원받은 자로서 부활신앙이 있었지만 삶 가운데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삶 가운데 나타나도록 시험하신 것입니다.

이삭의 입장에서 보면, 이삭이 죽어야 했던 번제단 나무 위, 저주받을 그 자리에 놓이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곳에서 이삭은 저주로 죽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죽음으로 죽어 주셨습니다. 즉, 수양이 번제로 드려짐으로 인해 이삭이 산 것입니다. 이삭이 번제단에 올려졌을 때 죽은 것이고, 수양이 대신 올려짐으로 번제단에서 내려올 때 이삭은 산 것입니다. 롬 6:5의 말씀처럼 이삭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연합하여 죽고, 그리스도의 부활하심과 연합하여 산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돌려받은 이삭은 이제 육신에 속한 아들이 아니라 언약과 은혜에 속한 아들입니다. 이제부터 아브라함이 이삭을 볼 때마다 부활케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부활신앙을 경험하며 살 수 있습니다. 이삭 자신이 아브라함에게는 부활한 자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제물로 삼은 것처럼 이삭 대신에 수양을 제물로 삼았고, 하나님께서 죽으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케 하신 것처럼 이삭을 부활케 하신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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