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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요 11: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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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강정태 목사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고 명령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음으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죄가 들어오고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죽음의 한계를 극복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죽음입니다. 이 죽음의 문제를 극복하거나 초월한 사람들은 없습니다. 공자도 석가모니도 마호메트도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호언장담했던 영생교의 조희성도 모두 죽어 우리에게 무덤을 남기고 있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사람도, 종교도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죽음의 문제는 인간의 권한이 아니라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의 고유권한입니다.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는 바로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십니다.

오늘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부활주일입니다. 십자가가 기독교의 뿌리라면 부활은 기독교의 열매와 같습니다. 우리가 믿는 신앙은 바로 부활의 신앙입니다. 부활의 신앙이란 인간의 육체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 영생하는 것을 말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이것은 네가 믿느냐?”라고 마르다에게 말씀하신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고 부활의 참된 신앙을 소유하는 신실한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 부활의 첫 열매를 맺으신 예수님

복음서에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 사건이 세 번 나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막5:35-43), 나인 성 과부의 아들(눅7:12-15)과 오늘 본문의 나사로입니다. 이들은 모든 죽음을 경험한 자들입니다. 야이로의 딸은 방금 죽었다면, 나인성의 과부의 아들은 죽어 상여를 매고 무덤으로 향하였고, 나사로는 이미 죽은 지 나흘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주님의 명령에 죽음에서 살아났습니다. 야이로의 딸에게는 ‘달리다굼’(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이라고 했고, 나인성 과부의 아들에게는 “청년아 내가 네가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했으며, 나사로에게는 “나사로야 나오너라”고 외쳤을 때 죽은 자들이 살아났습니다. 제자들을 비롯해서 많은 자들이 놀랐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것은 부활의 본질은 아닙니다. 참된 부활은 죽음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나중에 다 죽었습니다. 주님이 이들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궁극적인 이유가 바로 죽음을 극복하는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함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을 때의 아담과 하와는 영생하는 존재였습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기고 죄를 범한 인간에게는 영벌 곧 사망이 왔습니다. 하나님을 통하지 않고는 이 영원한 사망에서 해방 될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바로 사망의 독소를 제거하고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기 위함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을 여러번 말했습니다. 죽음을 말하면서 다시 살아날 것도 말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에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에게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주님이 왕이 되기를 원했고, 왕이 되면 출세하기를 소원했습니다. 실제로 제자들은 서로 높아지려는 문제로 심하게 다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관심은 십자가와 부활이었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기 전에 주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나는 인간의 죽음을 극복하기위해 이 땅에 왔으며, 나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저주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그 죽음에서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이 부활은 나사로와 나인성 과부의 아들과 같이 다시 죽는 부활이 아니라 영원히 죽지 않는 부활입니다. 이것을 영생이라고 합니다. 주님의 부활이 왜 중요합니까? 오늘 우리에게는 부활의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했듯이 우리도 마지막 날에 다시 부활한다는 소망을 가지는 것은 주님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2. 부활의 신앙을 요구하시는 예수님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부활의 신앙을 요구하십니다. 주님은 마르다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했습니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물으신 주님은 마르다에게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부활의 신앙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부활의 신앙이란 바로 죽음의 권세를 무너뜨리는 능력을 말합니다. 주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것뿐만 아니라 인간의 죽음 자체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네가 믿느냐?’는 주님의 말에 마르다는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리스도’와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은 같은 뜻으로 메시아를 의미합니다. 마르다는 주님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신앙은 부활의 신앙입니다.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주님의 십자가와 더불어 주님의 부활을 증거 할 정도로 부활의 신앙을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이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죽음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죽음이 두려움으로 다가오지만 죽음이후에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소망을 가지는 자들에게는 결코 죽음이 두려움의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활의 신앙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분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복음을 증거하다가 잡혔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에서 베드로와 요한에게 다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했을 때 베드로와 요한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4:19-20)라고 담대히 말했습니다. 이들에게는 세상의 그 무 엇도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이 처음부터 이렇게 담대한 신앙을 소유하지 않았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과 마지막 밤을 보낼 때 베드로와 요한은 주님이 기도하라고 부탁했음에도 불구하고 피곤하여 잠을 자고 말았습니다. 주님이 체포되는 그 순간에 베드로와 요한을 비롯한 제자들은 모두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주님이 어떻게 되려는가 궁금하여 심문받던 가야바의 뜰까지 갔던 베드로는 그만 어린 계집 종 앞에서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숨어지내던 이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다시 용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승천하신 후 이들은 마음을 같이하여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오순절 날에 성령을 받게 되고 능력을 받아 밖으로 나와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의 용기와 능력의 배후에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부활의 신앙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모리아 산에서 자신의 독자 이삭을 제물을 바치려했던 아브라함의 신앙은 부활의 신앙입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은 이 아들을 통해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의 씨와 같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씨종자는 먹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삭이 비록 큰 민족을 이루는 씨라고 해도 하나님의 명령을 더 우선했습니다. 이삭이 죽을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인 큰 민족을 이루는 일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라는 부활의 신앙을 가졌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삭을 죽여도 다시 살려 그를 통해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신다는 것이 바로 아브라함이 가졌던 부활의 신앙입니다.


오늘 우리가 가져야할 부활의 신앙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무모한 결정일 수 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뜨거운 풀무불보다 하나님을 더 신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능히 우리를 저 풀무불 가운데서 구원해 주실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풀부불 가운데서 구원해 주시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겠노라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신앙입니다. 주님 때문에 당하는 여러 가지 불이익과 고통이 뒤따라도 주님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곧 부활의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불이익과 고통가운데서도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이 복음을 증거하다가 돌에 맞아 죽어가는 순간에도 주님은 스데반과 함께 했습니다.

부활의 신앙은 눈에 보이는 이익만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부활의 신앙은 주님이 나와 함께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환경에 처해있어도 그것 때문에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것이 부활의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사람들을 의식하는 신앙은 외식되지만 하나님을 의식하는 신앙은 곧 부활의 신앙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선언하신 주님은 자신을 온전히 신뢰하는 오늘 우리들에게 부활의 능력을 주시려고 합니다. 이 부활의 능력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어떤 환경에서도 좌절하지 않는 용기와 힘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 부활의 능력을 가지시기를 원합니다. 이 부활의 능력으로 날마다 승리하는 믿음의 군병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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