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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 사랑으로 풀리는 부활의 신비 (요 2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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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흥규 목사

<序: '소생'과 '부활'의 차이>
과학과 의학이 눈부시게 발달함에 따라 영생불멸을 바라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냉동 치료'(cryogenic treatment)라고 하는 방법이 특히 주목을 끌고 있습니다.  이것은 화씨 영하 350도까지 내려가는 극저온 냉장고 속에다 죽은 사람의 시신을 얼리는 방법입니다.  다시 말해서 시체를 커다란 액체 질소 통 안에 집어넣어서 보관하다가 나중에 사람을 살릴 정도로 의학이 발달하게 될 때 다시 녹여서 살린다는 방법이지요.

이와 같은 냉동 치료가 세상 사람들의 입에 크게 오르내린 것은 작년 7월 5일에 미국의 전설적인 야구 선수 테드 윌리엄스(Ted Williams, 1918-2002)가 죽었을 때였습니다.  윌리엄스는 '보스톤 레드 삭스'(Boston Red Sox)의 타자였는데 평생 평균 타율이 3할 4푼 4리가 넘는 명타자였습니다. 

문제는 윌리엄스가 세상을 떠났을 때 사후처리를 놓고서 자식들 간에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큰딸은 1996년 윌리엄스가 남긴 유서를 근거로 해서 아버지의 시신을 화장한 뒤 그 유골을 플로리다 해안에 뿌리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막내아들과 또 다른 딸은 2000년 11월에 아버지와 맺은 계약(pact)을 들먹이면서 시신을 냉동처리해서 영구 보관해야만 한다고 맞섰습니다. 

결국 아들의 주장이 워낙 강해서 테드 윌리엄스의 시신은 곧바로 애리조나 주의 스카츠데일(Scottsdale)에 있는 냉동 보관실로 옮겨졌습니다.  이렇게 해서 윌리엄스의 시신은 오늘 이 시간까지도 다른 두 사람의 시체와 함께 영하 350도의 극저온 액체 질소 통 안에 거꾸로 매달린 채 들어가 있습니다.  언젠가 꽁꽁 얼어붙은 그의 시신을 녹여서 소생시켜 줄 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시신을 냉동실에 보관하는 가격이 결코 싸지 않습니다.  애리조나에 있는 냉동 치료 회사인 '앨코어 생명 연장 재단'(the Alcor Life Extension Foundation)은 계약금 조로 150불을, 그리고 매년 400불씩을 요구한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사망해서 냉동실로 시신을 운반할 때 다시 12만불을 내야만 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에는 현재 약 1천 여명이 냉동 회사와 계약을 맺었다고 합니다.   

장차 의학이 놀랍게 발전해서 냉동실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을 녹여서 다시 살려낼 수만 있다면, 이것은 나쁜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이 실제로 일어나서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고 할지라도 이것이 곧 '부활'(RESURRECTION)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런 현상을 우리는 단지 '소생'(RESUSCITATION)이라고 부를 뿐인 것입니다. 

우리는 일시적으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가 많습니다.  호흡이 일시적으로 멈춘 사람들을 인공 호흡이나 전기 충격 등으로 회복시켜서 다시 살리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것은 부활과 거리가 멉니다.  호흡이나 생기가 다시 돌아와 소생한 것일 뿐,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다시 돌아왔다고 할지라도 다시 노쇠해지고 결국 언젠가는 죽게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활하게 되면 다시 늙어지거나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게 됩니다.  고전 15: 42-44에 따르면 부활은 네 가지 특성을 가진 전혀 새로운 존재로 변하게 되는 초자연적인 현상입니다. 곧, "썩어지지 않고, 영광스럽고, 강하며, 신령한 몸"으로 변형(TRANSFORMATION)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더 이상 죽음을 보지 않고 영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本①: 부활의 해석에 있어서의 세 가지 가능성>
  현대인들의 문제는 육체의 소생까지는 받아들이지만 부활은 쉽사리 믿지 않으려고 한다는 데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모든 것을 이성과 경험으로 확증할 수 있어야지 만 사실로 받아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직접 두 눈으로 보고 두 손으로 만져봐야 지만 사실이라고 인정합니다. 

그런데 부활의 역사성은 성경에 나타난 사람들의 증언으로서 우리에게 간접적으로 전달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다는 사람들의 경험담과 보고만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수많은 현대인들이 부활이 우리의 이성이나 경험으로 직접 증명될 수 없고 단지 간접적인 증언에만 의존해 있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부활은 과연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요?  세 가지 가능성을 들 수 있겠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이 산 채로 사람들에게 다시 나타나셨을 가능성입니다. 
이 경우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진짜로 죽으신 것이 아니어야만 합니다.  다시 말해서 로마 군병의 실수로 완전히 절명(絶命)하신 상태가 아닐 때, 즉 중상을 입은 정도에서 십자가에서 내려 와 누군가의 집에 거하면서 치료를 받고 회복되신 뒤 다시 사람들 앞에 나타나셨다고 가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말 그대로 억측(臆測)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미 가상칠언을 살펴볼 때 충분히 드러났지만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신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4복음서는 공히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신 뒤 장사지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마태와 마가, 누가, 요한 모두는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장사지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마 27: 57-60; 막 15: 43-46; 눅 23: 50-53; 요 19: 38-40).  또한 요한은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하여 몰약과 침향 섞은 것 100근 쯤을 가져 왔다는 사실까지 밝히고 있습니다.   

성경뿐만 아닙니다.  타키투스(Tacitus)와 같이 저명한 역사가들 역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역사적 사실임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완전히 죽지 않으시고 산 채로 내려 오셨다가 부활의 소문이 났다는 것은 믿을 수 없습니다. 

두 번째로, 분명히 죽기는 죽으셨지만 예수님의 추종자들이 환각(hallucination)이나 망상(mirage)에 빠져서 부활하신 것으로 착각했거나, 아니면 제자들이 시체를 감추어 두고 유언비어를 선포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가능성은 주로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했던 유대 당국자들이 제시했던 해석입니다.  먼저 환상을 보았다는 설명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12 제자들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추종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예수님을 배신하고 도망쳤습니다.  까딱 잘못하면 자기 신변에 피해가 올 것을 두려워해서 삼지 사방 도망을 쳤던 것이지요. 

만일 이들이 예수님께서 생전에 말씀하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는 예언을 믿었더라면 이렇게 배신하고 도망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더욱이 본문 9절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과 같이 예수님께서 극진히 사랑하셨던 제자들조차도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결국 제자들은 십자가 사건 후에 한 편으로 깊은 패배 의식에 사로 잡혀 있었고, 다른 한 편으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것을 이해하지도 믿지도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제자들이 부활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을 리 만무합니다.  헛것을 보았을 리 만무한 것입니다. 

게다가 사도 바울은 고전 15: 5-6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비롯한 12 사도들에게 먼저 나타나신 후 500 여명 이상이나 되는 많은 제자들 앞에 일시에 나타나셨다고 증언합니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동시에 환각에 빠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환상을 보았다는 주장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의 시신을 도굴한 후 부활에 대한 유언비어를 퍼뜨렸을 가능성입니다.  이것 역시 근거가 희박합니다.  예수님이 갇히신 무덤 입구 밑에는 홈(groove)이 파져 있었습니다.  이 홈에 원반 바퀴 모양의 큰 바위가 자리를 잡으면 무덤 입구를 완전히 가로막게 됩니다.  이 바윗돌 문을 굴리려면 최소한 장정 몇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런데다가 마 27: 66은 빌라도 총독이 파숫군을 파견해서 예수님의 무덤을 굳게 지키라고 명령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파숫군들이 로마 군병인지 아니면 유대인인지 확실치 않지만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로마 군병일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군인들은 무덤을 지키는 일을 게을리 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부활에 대한 소문이 흉흉했기 때문에 만에 하나 시신을 도굴이라도 당하는 날에는 즉각 군법회의에 회부되어서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24 시간 눈에 불을 켜고 철통같이 감시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시신을 도굴해서 부활이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는 설 역시 믿기가 어렵습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두 가지 가능성이 신빙성이 없다면 이제 우리는 세 번째 가능성으로 넘어가야 할 것입니다.  부활에 대한 세 번째 해석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셔서 제자들에게 진짜로 나타나셨을 가능성입니다. 

두말 할 필요도 없이 성경은 바로 이 세 번째 사실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세 번째 해석이 가장 믿을만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제자들의 변화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두 가지 해석은 전부 다 예수님의 부활이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를 비롯한 수많은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후 순교 당했습니다.  그것도 아주 비참한 방법으로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죽어갔습니다. 

세상에 거짓말 때문에 자기 목숨을 버릴 사람이 있겠습니까?  혹시 진리를 위해서 목숨을 던지는 사람이 있겠지만 아무도 거짓을 위하여 죽으려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 달리실 때 겁쟁이처럼 뿔뿔이 흩어졌던 제자들이 부활 사건 이후에는 목숨을 걸 정도로 담대해졌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부활을 경험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핍박이나 순교도 두려워하지 않을 어떤 강력한 체험을 했음이 틀림없습니다.  부활 전과 부활 후에 제자들의 모습이 이와 같이 180도 변화되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부활의 역사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本②: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부활을 본다>
지금까지 부활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오늘 부활절을 맞아서 부활의 역사성을 아무리 설명해도 여러분들에게 아무 영향력도 미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활의 신비는 과학적인 증명이나 이성적인 논증으로 풀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도대체 어떤 자세로 부활의 진리를 받아들여야만 할까요? 

이제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 오늘 봉독한 본문 말씀으로 되돌아갑시다. 

막 16: 9과 오늘 봉독한 요 20장에 따르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최초로 목격한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그러면 막달라 마리아가 누굽니까?  눅 8: 2에 보면 마리아는 일곱 귀신이 들렸다가 고침을 받은 여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녀는 어두운 과거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 때문에 변화되었으며 충성스러운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른 여제자들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막달라 마리아의 이름이 제일 먼저 나온다는 사실은 그녀가 이 그룹의 지도자였음을 알려줍니다.

그 후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누구보다 사랑해서 다른 제자들이 다 도망간 가운데도 예수님의 십자가 곁을 끝까지 지켰습니다(마 27: 55-56; 막 15: 40-41; 눅 23: 49; 요 19: 25 참조).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시신을 무덤에 장사 지내는 현장에도 있었습니다(마 27: 61; 막 15: 47; 눅 23: 55-56 참조). 

그 당시 십자가형은 가족이나 친지들조차도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무서운 형벌이었습니다.  그리고 시신은 매장되지 않고 들판에 버려져 들짐승의 밥이 되도록 했습니다.  이와 같이 살벌하기 짝이 없는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 근처에서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봤다는 사실은 목숨을 걸고 주님을 따랐다는 사실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중요한 것은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때 제일 먼저 예수님을 목격한 사람입니다(마 28: 1-11; 막 16: 9; 눅 24: 1-12; 요 20: 11-18 참조). 

그렇다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왜 막달라 마리아에게 제일 먼저 나타나셨을까요?  그 당시 남존여비의 사회에서 여자는 사람 축에도 끼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다가 어두운 과거까지 가지고 있었던 여자가 부활하신 주님을 어떻게 제일 먼저 만났을까요?  한 마디로 대답하면 마리아의 예수님 사랑하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간 그녀의 모습에서 잘 나타납니다.  안식일에 무덤에 가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행위가 됩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의 관습에 의하면 시신을 장사지낸 후 삼일 동안 무덤을 방문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죽은 사람의 영혼이 사흘 동안 무덤 주변을 배회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삼일이 지나면서 시신이 부패해서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가 되면 영혼이 무덤을 떠나간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삼일이 지나야지만 무덤에 찾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쨌거나 본문 1절에 보면 막달라 마리아는 안식 후 첫날 아침, 즉 주일 새벽 아직 날이 어두울 때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습니다.  학자들은 대충 새벽 3 시부터 6시 사이에 무덤을 찾아간 것으로 봅니다.  얼마나 무덤에 갇혀있는 예수님이 궁금했으면 안식일이 지나자 마자 신 새벽에 찾아갔을까요? 

그런데 무덤에 가보았더니 무덤 앞에 있어야 할 돌이 옮겨져 있었습니다.  깜짝 놀란 마리아는 예수님이 가장 사랑했던 제자 베드로와 요한(2절의 "예수의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이 사실을 전했습니다. 

두 제자가 즉시 달음박질하여 무덤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베드로보다 요한이 나이가 더 젊었기 때문에 더 빨리 무덤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무덤에 구푸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기는 했지만 무덤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습니다.  뒤따라 온 베드로는 무덤 안으로 들어가서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진 것을 확인했습니다. 

7절을 보세요.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  이게 무슨 말입니까?  돌아가신 예수님의 머리를 쌌던 수건이 다른 사람이 치운 흔적이 전혀 없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누가 수건을 벗겨준 흔적이 전혀 없이, 예수님의 시신이 증발되듯 저절로 빠져 나온 것임을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10절에 보면 빈 무덤을 보고서도 두 제자는 집으로 돌아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명색이 수제자인 베드로도, 예수님이 끔찍하게 아끼셨던 요한도 빈 무덤을 보고서도 별 감동 없이 그냥 집으로 돌아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달랐습니다.  두 제자가 집으로 돌아간 다음에도 무덤 밖에 계속 서서 울고 있었습니다.  울면서 허리를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 보기까지 했습니다.  아무도 없는 무덤에서 얼마나 무서웠겠습니까?  요일 4: 18은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는다"고 말씀했는데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마리아를 담대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리아는 흰옷 입은 두 천사와 대화까지 나누었던 것입니다.

어쨌거나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부활을 최초로 목격하는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수제자인 베드로도, 가장 많은 사랑을 받던 요한도 아닌 어두운 과거를 가졌던 연약한 여인,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일 먼저 만났던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사모했기 때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장 먼저 만났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녀의 눈을 열어주었던 것입니다.  마리아가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두려워하지 않고 안식일이 지나자마자 신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무덤 앞에 바윗돌이 치워진 것을 보자마자 베드로와 요한에게 알렸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두 제자가 집으로 돌아간 뒤에도 무덤 가에서 슬피 울었다는 사실은 또 무엇을 말합니까?  모두 다 예수님을 마음 깊은 곳에서 사랑했다는 사실을 보여주지 않습니까? 

<結: 과학과 이성을 넘어서>
그렇습니다.  부활의 진리는 아무리 과학적으로, 논리적으로 설명해도 이해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경험적으로, 이성적으로 그럴듯해도 내가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그래서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냉소를 지을 뿐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거듭 말씀드리지만 부활의 신비는 과학적인 증명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부활의 진리는 논리적인 설명으로 풀어지지 않습니다.  오직 우리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서 그 분의 은혜와 사랑을 체험한 뒤 마음과 뜻을 다해 사랑할 때에만 확실히 와 닿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보아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과 순종과 사랑으로 풀어질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무덤을 가로막고 있는 바윗돌을 치우기 전에 우리의 불신앙과 불순종과 교만의 돌을 먼저 제거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오늘 이 시간에도 만날 수 있습니다.

어떤 젊은 화가가 19세기의 유명한 화가인 구스타브 도레(Gustave Dore)에게 자기가 그린 예수님의 초상화를 가져 왔습니다.  그림을 잘 그렸는지 못 그렸는지 평가를 해달라는 것이었지요.  그림을 한 참이나 보던 도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딱 한 마디만 했습니다.  "자네는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네.  만일 사랑하는 마음만 있었더라면 훨씬 더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을 텐데." 

그렇습니다.  오늘 부활절 아침에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예수님의 부활은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부활의 주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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