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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난주일] 나를 너희에게 주노라 (요 6:4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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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명섭 목사

새봄의 기운이 완연한 주일 아침입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이 주시는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이 이 예배에 참석하신 여러분 모두 위에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은 평화의 왕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을 향해 입성하신 날을 기념하는 종려주일입니다. 또한 오늘부터 시작하여 한 주간을 고난주간으로 지킵니다. 초대 기독교의 전통을 보면 이 주간에는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마음으로 회개하고 금식하면서 경건하게 보냈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고난주간을 보내면서 특별히 주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인류 구원을 이웃들에게 전하면서 기도와 전도에 힘쓰시는 한 주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 사람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시여” 하면서 환호성을 올리던 사실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호산나’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호시안나(Hosianna)라는 말을 헬라적 표현으로 발음한 것인데 그 본 뜻은 ‘이제 우리를 구원 하소서’ 또는 ‘아무쪼록 우리를 구원해 주소서’라는 기도입니다. 오늘 저는 읽어 드린 말씀을 가지고 ‘나를 너희에게 주노라’는 제목의 말씀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어머니와 단 둘이 사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청년은 외출에서 돌아오다가 뜻하지 않게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소식을 듣고 몹시 놀란 어머니가 가슴 졸이며 병원에 달려갔지만 불행히도 청년은 이미 눈을 실명하고 말았습니다. 멀쩡하던 두 눈을 순식간에 잃어버린 청년은 깊은 절망에 빠져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느 누구와도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마음의 문을 철저하게 닫은 채 우울하게 지냈습니다. 바로 곁에서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는 어머니의 가슴은 찢어 질 듯 아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청년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그 누군가가 그에게 왼쪽 눈을 기증하겠다는 것입니다. 깊은 절망감에 빠져 있던 그는 그 사실조차 기쁘게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결국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으로 한쪽 눈 이식수술을 마친 청년은 한동안 눈을 붕대로 가리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도 청년은 자신을 간호하는 어머니께 앞으로 어떻게 애꾸눈으로 살아가냐며 투정을 부렸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청년의 말을 묵묵히 듣고만 있었습니다.

꽤 시간이 지나 드디어 청년은 붕대를 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붕대를 모두 풀고 앞을 본 순간 청년의 눈에는 굵은 눈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앞에는 한쪽 눈만 보이는 어머니가 애틋한 표정으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머니는 “두 눈을 다 주고 싶었지만 그러면 내 장님 된 몸뚱이가 네게 짐이 될 것 같아서…” 라며 말을 잊지 못했습니다. 청년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고 합니다. 인터넷 에 나온 <새벽편지> 라는 곳에 실린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 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과거에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들이 광야에서 먹은 양식, 즉 하늘에서 내린 만나를 먹은 사람들도 죽음을 피할 수 없었으나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나를 너희에게 주노라’는 말씀을 통하여 여러분의 영혼이 살고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신을 얻는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첫 째, “나는 생명의 떡 이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여름성경학교를 준비하는데 예산문제가 생겼습니다. 내용인즉 예산 중에 아이들에게 주는 먹거리 비용이 너무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식이 있는 교사가 이번에는 먹거리 비용을 줄이고 다른 프로그램에 비중을 두었으면 좋겠다는 건의를 했습니다. 요즈음 어린이들은 교회에서 먹이지 않아도 집에서 잘 먹으니까 줄이자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나이가 좀 드신 선생님이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 건 아니에요 잘 생각해 보세요. 우리 때도 처음부터 예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과자 먹으려고 교회에 갔다가 예수님을 만났거든요., 그리고 다 먹으려고 하는 일인데 집에서 잘 먹이면 교회에서는 더 잘 먹여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파송의노래, 부흥 등을 작곡한 고형원 전도사란 분이 있습니다 청년 대학부시절 교회일 하는것이 너무 기뻐서 교회에서 밤을 세우고 집에들어오는 일이  잦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의 아버지께서 그에게 꾸짓듯이 물으셨습니다." 맨날  예수가 밥 먹여 주냐?” 그러자 아버지의 손을 지긋이 잡으면서 " 아버지!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예수가 우리가 밥 이예요. 지금은 잘모르시겠지만 아버지께서도 곧 알게 되실겁니다.”라고 말했다는 일화는 유명합니다. 어떤 분은 전도를 하면 “교회에 나가면 떡을 주냐, 밥을 주냐”고 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에 오시면 떡도 드리고 밥도 드립니다. 오늘은 밥을 드리고 다음 주에는 부활주일이라 떡도 드리고 밥도 드리고 계란도 드릴 겁니다.

예수님 당시 군중들도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가난과 압제에 눌린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떡을 먹고 배부르게 되었고 앞으로도 먹는 걱정은 안 해도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께서는 다른 차원에서 말씀하셨습니다. 32-3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노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생명을 주는 떡’ 이라는 말씀에 감동하며 사람들은 이 떡을 우리에게도 달라고 간청 합니다. 그들은 잘못된 것에 마음을 빼앗겨 예수님에 대하여 바른 이해를 갖지 못했습니다. 고작해야 먹어도 배고프지 않은 어떤 신비한 것이 있는 줄 알고 요청했지만 그들이 마음에 두고 구하였던 것은 육신의 생명을 위한 떡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귀를 잘 알아듣지 못하는 군중들에게 다시 말씀하십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쉽게 받을 수 있지만 그냥 주어진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 당신 전부를 주시는 사건이요. 그것은 자신을 찢어야만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생명의 떡을 받아들이는 자는 영원에 이르게 되는 새 생명의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십자가의 중한 고통을 당하심으로 우리가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할레의 경건한 의사였던 리히터 박사는 십자가 형벌의 육체적 고통에 대해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몸은 부자연스럽고 움직일 수 없는 자세였다. 그리고 팔이 심하게 뻗쳐져 있기 때문에 조금만 움직여도 온 몸에 엄청난 고통을 느끼게 되며, 특별히 상처가 난 등과 찢긴 부분들이 너무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대못들은 손과 발의 가장 민감한 부분들에 점점 더 큰 고통을 일으켰고 찢긴 곳에서는 염증이 생기기 시작했을 것이고, 몸의 심한 긴장으로 인하여 혈액순환의 장애를 일으켰고 무더운 중동의 날씨에 피를 계속해서 쏟기 때문에 견딜 수 없는 목마름이 점점 더 심했을 것이다. 계속해서 피는 극심한 빈혈과 두통을 일으키며 폐에 있는 혈액은 누적되고 가슴을 압박하며 형언할 수 없는 괴로움은 더해갔을 것이다. 상처들이 열려져 있어 피가 계속해서 쏟아지고 결국 피가 모자라게 되어 고통은 말할 수 없을 만큼 극심했을 것이다. 죽음은 서서히 다가오며 근육, 혈관 신경들이 점차 굳어져 가고 생명력은 기진하여 점점 움츠러들었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받으신 이런 고통 때문에 우리는 살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자기희생의 사랑 때문에 내가 살게 되었습니다. 이 시간 놀라운 사랑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은 영원한 생명을 선포하십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것이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그렇습니다. 우리 때문에 주님은 이런 고통을 받으셨고 그 결과로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셨습니다.

둘 째, 주님은 ‘다시 나를 너희에게 주노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냉정한 사람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무감각한 사람들에게 은혜의 빛줄기가 비쳐옵니다.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 내가 이 생명의 떡을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는 취하여 생명을 얻으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생명의 떡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시기 위해 십자가로 나아가셨습니다. 이렇게 십자가를 통하여 심판의 대상이었던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대상이 된것 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렇게 모여서 감격의 예배를 드립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서 백성들에게 다시 귀한 사랑으로 덧입혀 주시기를 원합니다. ‘다시 나를 너희에게 주노라’

그렇습니다. 초대 교회로부터 기독교의 예배는 두 기둥에 의해서 세워졌습니다. 그 첫째가 말씀 이라면 두 번째는 성만찬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하늘로부터 허락하시는 말씀의 만나를 맛보게 하십니다. 즉, 오늘 우리는 설교를 통해서 하늘의 음성을 다시 듣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만찬은 떡과 포도주라는 물질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계속적으로 당신 자신을 주시는 사건입니다. 프랑스 혁명당시 공포정치 기간 중에 있었던 일입니다. 프랑스의 한 귀족이 오늘 사형에 처해지게 될 아들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잠깐이라도 볼 수 있을까 하는 희망을 가지고 감옥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아들의 이름은 로와즈르유 였습니다. 그 귀족이 사형 집행 광경을 보러 나온 구경꾼들과 면회객들의 무리에 섞여 교도소 마당에 들어섰을 때, 감옥 문이 열리며 사형 집행관들이 나와서 단두대에 올라섰습니다. 단두대에 올라선 집행관들은 죄수들의 이름을 하나씩 호명하며 단두대에서 처형하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후 귀족의 아들 로와즈르유의 이름도 불려 졌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군중의 무리들 속에서 “네!”라고 대답이 들려왔습니다.

그러자 죄수들 사이에서 침통한 심정으로 대답을 하려던 로와즈르유는 깜짝 놀랐습니다. 하지만 내심으로는 하늘이 준 행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혁명과 무질서의 도가니 속에서 누가 누구인지 확인할 시간도, 그럴 책임자도 없지 않은가! 난 살고 싶어, 그래 살 수 있을지도 몰라!” 로와즈르유는 혹시나 하고 마음으로 천천히, 천천히 죄수들 틈을 비집고 앞으로 걸어 나갔습니다. 도대체 누가 내 이름에 대답을 했을까? 라고 생각을 하며 고개를 들어 저 멀리 단두대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습니다. 단두대 위에는 로와즈르유의 아버지가 서 있었습니다. 로와즈르유는 정신이 아찔해졌고,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아니 이럴 수가 아버지가, 아버지가...” 로와즈르유가 수많은 사람들을 비집고 앞으로 나가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을 때 단두대의 칼은 이미 아버지의 목을 내리치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십자가위에서 내 대신 죽으셨습니다.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이 엄청난 값을 지불하시고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다시 나를 너희에게 주노라.” 오늘도 예배를 통하여 다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구원하시고, 당신 자신을 주심으로 세상을 이기게 하시며 승리하게 하시는 줄 믿습니다.

셋 째, 이 은혜를 받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합니까?

시편기자는 116:12에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하나님께 무엇으로 보답 할꼬”라고 고백했으며 사도 바울은 “내게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리라”고 썼습니다. 이 놀라운 사랑을 받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어느 성악가의 고백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는 자기 인생을 돌아보며 노래하는 자세가 세 번 바뀌었다고 합니다. 젊었을 때는 자신의 명예를 위해 노래를 불렀습니다. 좋은 무대만 골라서 섰습니다. 노래 할 때 마다  자신의 경력이 쌓이는 것 같았습니다. 청중들의 반응이 좋을 때 자신이 늘 최고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태도가 바뀌었습니다. 그 자신이 크리스챤 임을 깨달았습니다. 이제는 자신을 위해 노래하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노래 부르기로 작정했습니다. 그 때부터 무대를 가리지 않고 작은 교회에서 부르면 기쁜 마음으로 달려가 노래를 불렀습니다. 몸은 피곤하였지만 너무나 기뻤습니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어 큰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게 되었습니다. 음악회가 열리기 전날 밤 감기가 들어 목이 잠기게 되었습니다. 어찌할 바를 몰라 애쓸 때 그의 가슴에 이 모든 재능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깨닫고 회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이 자기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요 도우심임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한 성악가의 인생에서 세 편의 드라마를 볼 수 있습니다. 첫 째는,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둘 째는, 내가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나의 힘을 바쳐 하나님을 위해 노래하며 봉사하는 삶입니다. 셋 째는,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 입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내 노력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날 위해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도우심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인생이 되시기 바랍니다. 시편 91:2 말씀에 보면 "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지하는 하나님이시라" 고 했으며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전서 5:7에서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고 했습니다.

미국의 어느 큰 도시의 교회를 관리하는 집사는 놀라운 일을 발견했습니다. 매주 예배를 마친 후에 여러 달 동안 맨 뒷자리에 종이가 구겨진 채로 놓여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늘 교회에는 휴지요 잃어버린 물건이 좌석에 남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매 주일마다 뒷자리에 종이 한 장이 구겨져 놓여 있는 것을 궁금히 여긴 관리인은 조그만 뭉치의 글을 읽어 보았습니다. 종이에는 몇 마디의 단어만 써 있었습니다. ‘클라라~병’ ‘톰~직장’ ‘아파트,월세’ 그래서 관리인은 이 사실을 목사님에게 알렸습니다.

목사님은 주일 날 파란 줄에 단어를 써서 종이를 놓고 가는 그 여인을 조심스럽게 불러 부드럽게 물었습니다. “부인 당신은 늘 주일에 단어 몇 자를 종이에 써서 놓고 가는데 왜 그런가 그 이유를 물어보아도 되겠습니까?” 그 때 부인은 “목사님은 제가 어리석다고 하실지 모르지만 어느 날 전철을 탔는데 전철에서 ‘당신의 고민을 교회로 가지고 오십시오’ 라는 광고 포스터를 보았어요. 그래서 내 걱정거리를 하나님이 맡아 주시리라 믿고 이곳에 남겨 두지요.” 그러자 목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요 하나님께서 당신의 걱정거리를 맡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 간절히 기도해 주고 나오는 자리에 부인이 놓고 간 종이에는 ‘쟌~ 한국에’라는 두 마디가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님, 나의 아들 쟌이 한국전쟁에 참여했으니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깁니다.’라는 뜻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놀라운 은혜를 입은 자답게 오늘도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다니기 바랍니다. 의지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다시 나를 너희에게 주노라’ 이 음성을 듣고 세상을 이길 새 힘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던 그 날 우리에게는 엄청난 사건이 이루어졌습니다. 죽어야 할 운명이 영원히 사는 운명으로 바뀌어졌습니다. 사순절 절기의 마지막 주간인 고난주간을 맞이하면서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생명의 떡으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생각하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이 예배를 통하여 ‘다시 나를 너희에게 주노라’ 하시는 음성을 들으면서 모든 삶의 문제를 온전히 주님께 맡기고 의지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십자가 사랑의 큰 의미를 깨닫고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바라옵기는,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삶 속에 새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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