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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난주일] 용서의 십자가 (눅 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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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명섭 목사

사순절 다섯 번째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십자가상에서 우리 죄를 위하여 대신 죽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과 용서의 기쁨이 이 예배에 참석하신 여러분 모두 위에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이라는 그림에는 많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빈치가 어느 날은 친구 화가와 말다툼을 하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그림을 구상하면서 가룟 유다를 어떻게 그릴까 생각하다가 조금 전 자신이 제일 싫어하고 미워하는 그 친구의 얼굴을 그려서 가룟 유다를 삼았습니다. 그 다음 예수님의 얼굴을 그리려고 하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그려지지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한참 생각하던 그는 자기가 미워하여 가룟 유다로 그린 그 친구를 찾아가서 사과를 했습니다. “내가 실상은 당신의 얼굴을 가룟 유다의 얼굴로 그렸는데 나머지 그림이 그려지지가 않아서 회개하는 마음으로 왔소.” 그러면서 친구에게 자신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관용의 마음을 가지고 그린 그림이 그 유명한 ‘최후의 만찬’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의 첫 출발은 용서로부터 시작되며 십자가의 가장 큰 메시지도 용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십자가를 통하여 용서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제겐 건강이 필요합니다”라고 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먼저 말씀하십니다. “아니다. 네게는 용서가 필요하단다. 용서는 네게 치료하는 능력이 되어 줄 것이다”, “하나님, 제겐 친구가 필요합니다”, “아니다. 진정 네게 필요한 것은 현재 있는 친구를 용서하는 것이란다”하고 말씀하시는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의 진정한 의미와 기쁨은 내가 죄인인 것을 깨닫고 나 같은 죄인도 하나님이 용서해 주셨다고 믿어질 때에 그 때부터는 신앙생활의 기쁨, 감사가 넘쳐나게 되고 사랑이 뭔지 눈을 뜨게 되는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무리들에 대한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순절을 지내면서 우리 모두가 십자가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이 십자가는 용서의 십자가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는 십자가를 통해서 용서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용서받아야 할 죄와 허물을 사함 받고 회복하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또한 용서할 사람들을 용서하므로써  잃어버렸던 마음의 평안과 기쁨이 넘쳐나시기를 축원합니다.

첫 째,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로마서 5:12에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인류의 조상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본성이 있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언제부터 죄인입니까? 죄를 짓는 순간부터일까요? 아니면 태어나는 순간부터이겠습니까? 어떤 분은 갓 태어난 아기가 무슨 죄를 지었겠느냐고 묻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태어나기 이전부터 죄인입니다.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인이 아니요, 이 땅에 태어났기 때문에 죄인도 아닙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태어나기 이전부터 죄인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배꼽이 있습니다. 아마 여기 앉아 있는 분들 중에 배꼽이 없으신 분은 천사이거나 아니면 성형수술을 받아 배꼽을 메우신 분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배꼽이 있는 모든 사람은 다 죄인입니다. 왜냐하면 ‘나’라고 하는 존재는 내 어머니, 내 아버지하고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나’라고 하는 존재 속에는 내 부모님의 유전인자가 숨어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내 할아버지, 내 외할아버지의 유전자 속에 이미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내 배꼽을 연결해 가다보면 결국 아담과 하와에게로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배꼽 아래 있는 모든 자는 아담의 자손이요, 이미 죄 지은 아담의 유전자 속에 내가 숨어 있는 것입니다. 아담 한 사람이 선악과를 따 먹으므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고 그 결과 모든 사람에게 사망이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를 지은 첫 번째 이유로 내 본성이 죄인이기에 그랬다는 것입니다.

어느 집의 개가 토끼를 물고 왔습니다. 그런데 토끼가 흙투성이로 죽어있는 것을 보니까 개에게 물려서 발버둥을 치다가 죽은 것이 분명했습니다. 알고 보니 이웃집 토끼였습니다. 정신이 아찔했습니다. 그냥 사과하면 좋을 뻔 하였는데 그렇지 않고 죽은 토기를 샴푸를 풀어 깨끗이 씻겼습니다.  그리고 드라이어로 털을 보송보송하게 말려서 몰래 이웃집 마당에 살며시 갖다 놓았습니다.

조금 있으니까 그 집 주인이 나와서 난리법석이었습니다. 가만히 들어가 앉아 있자니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슬며시 나가서 능청스럽게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토끼 주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 글쎄, 이 것 좀 보세요. 토끼가 간밤에 죽어서 땅에 묻어놨는데 웬 미친놈이 토끼를 꺼내서 깨끗이 목욕을 씻겨서 여기다 갖다 놨지 뭐요.” 죽어서 묻어버린 토끼를 개가 파헤쳐서 물고 온 것인데 개주인은 자기 개가 토끼와 싸워 물어 죽인 것으로 오해하고 책임을 피하고 양심을 속이려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인 된 우리의 본성입니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내 속에 있는 본성이 죄를 알게 하고 죄를 짓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어거스틴의 어린 시절 이야기입니다. 자기 집 담 너머 이웃집에는 돌배나무가 있었는데 주렁주렁 달린 그 것이 탐이 나서 장대를 가지고 가 모두 따 자기 집 돼지를 주었다고 합니다. 자기 집 마당에는 더 맛있고 좋은 배나무가 있었음에도 말입니다. 더군다나 먹으려고 딴 것도 아니고 돼지를 주려고 땄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가만히 있으면 지옥에 갈 사람들입니다. 본질이 그렇습니다. 운명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용서와 사랑을 믿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3 장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으며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하심을 얻었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께서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전혀 없으시고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분이었지만 우리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나의 모든 죄와 허물을 십자가 위에서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 시키셨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악을 담당하시고 십자가 위에 달리셨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며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며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담담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이사야 5:3-7)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나와 같은 죄인들을 위하여 끝까지 참으시되 죽기까지 참으셨습니다. 이것이 십자가 위에서 보여 주신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입니다. 십자가는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의 표현인 것입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라”

주님은 모질고 쓰린 아픔의 순간에도 온 인류가 감당해야 할 고통을 한 몸에 걸머지시고 괴로워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순간에 자신의 고통을 위하여 기도하지 아니하시고 자신에게 못질하고 조롱하던 사람들을 위하여 자신의 십자가 형벌에 가담한 모든 사람들의 죄 용서를 위하여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용서의 절정이요, 용서를 완성하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둘 째, 십자가는 죄인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해 줍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알지 못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과 그 예수님이 세상 죄를 대신 지시고 죄인들을 구원하실 구세주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 사실을 알았다면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몰랐기 때문에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한 것입니다.

어느 젊은 여자 신도가 걸리버 여행기를 쓴 스위프트 신부를 찾아왔습니다. “신부님! 제가 교만했습니다. 교만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제가 얼굴 예쁘다는 것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며 살았습니다.” 그러자 스위프트가 말했습니다. “자매님, 제가 자매님의 얼굴을 보니 그것은 교만이 아니고 착각입니다, 착각! .

성도 여러분! 알지 못하면 그만큼 죄를 범하기도 쉽습니다. 또한 무지한 사람은 하나님께 바르게 기도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 “힘써 여호와를 알라 내 백성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없어서 망하는도다”라고 탄식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우선 조건이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믿을 수 없고 믿지 못하면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는 49:20에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부와 명예를 소유했어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과 다름이 없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둔하고 영적인 귀가 막히고 영적인 눈이 감긴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합니다. 보기는 보아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믿고 의지하는 예수님이 누구신가 분명히 알고 바로 믿을 때에 구원이 이루어지고 복이 되는 줄 믿습니다.

20 세기 시대의 설교가라는 찬사를 받았던 스펄젼 목사님은 “무지는 무죄가 아니라 유죄”라고 말했습니다. 즉 ‘알지 못하는 것도 죄’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면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온전히 전할 수 없고 그로 인해 구원의 길이 막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 가운데 오셨지만 백성들은 그를 영접치 아니하였고 도리어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했습니다. 이것은 분명 유죄입니다. 몰랐다고 해서 죄가 없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어느 노신사는 어느 날 자동차를 운전하다가 늘 하던 대로 어느 지점에 이르러 좌회전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그 곳에 좌회전이 금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 때 교통순경이 와서 법을 어겼다고 말했습니다. 그 신사는 “미안하지만 저는 몰랐습니다”라고 답변하자 그 순경이 말하기를 “선생님, 법을 어기는 것과 모르는 것은 똑같이 처벌을 받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세상을 구원하실 구세주이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사실을 모르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만약 그 사실을 알았다면 감히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모르고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해서 그들이 죄 없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죄인들이 죄를 깨닫고 그 죄에서 돌이켜 회개하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헤아려 볼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셋 째, 십자가의 진정한 승리는 용서입니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서 오스카 쉰들러가 독일군 장교에게 하는 말 가운데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무엇이 진정한 힘인가? 죽일 수 있으면서 죽이지 아니하고 때릴 수 있을 때 때리지 않는 것이 바로 은혜를 베풀 줄 아는 것, 그것이 참된 힘이다” 라고 했습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있지 아니하시고 보란 듯이 십자가 위에서 내려 오셨다면 사탄에게 완전히 패배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12명도 더 되는 천사들을 동원하시고 하늘의 군사들을 동원하여 로마병사들을 죽여 버릴 수도 있었지만 원수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수 년 전 LA에서 흑인 폭동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때 한인타운과 한인상가들이 제일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만큼 미국 사회에서 한인들에 대한 거부감이 팽배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거부감이 완전히 해소된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몇 해 전 7 월 4 일 인디아나 주 불루밍턴 한인 연합감리교회에서 예배를 마치고 나오던 성도들 가운데 26 살 윤원준 이라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하기 위해서 준비하고 있던 학생이었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나오다 백인 우월주의자 벤자민 스미스가 무차별 난사한 총에 이 학생이 맞아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일주일 후 오후 7 시 뉴스시간에 미국 전역에 추모예배 광경이 방영되었습니다. 미 법무장관과 한국에서 온 윤원준 학생의 부모와 그의 친척들 그리고 한인교인들 1500 여명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장엄한 분위기였습니다. 추모예배 마지막에 윤원준 학생의 이종사촌 형인 박승호 목사님이 가족을 대표하여 인사를 했습니다. 미국 언론들은 박승호 목사님의 인사에 “온 몸이 감전되는 것 같은 전율을 느꼈다”고 보도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가족을 대표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 사촌을 죽인 벤자민 스미스를 용서합니다. 그리고 내 사랑하는 가족의 꿈을 빼앗아가고 아우의 피를 흘리게 한 이 미국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용서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용서를 위해 오셨기 때문이고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의 주님, 우리의 구세주로 믿는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 이후 한인상가를 떠났던 미국인들의 발걸음들이 다시 잦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용서는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병든 몸을 치료하는 능력이 있고, 흐트러졌던 인격을 가다듬어주는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영혼을 풍성케 하는 놀라운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제의 해결은 사랑과 용서입니다. 욥이 무서운 시험을 이긴 것도, 자기를 괴롭히는 아내와 친구들을 욕하지 않고 그들을 저주하지 않은 데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않은 데 있습니다. 그 결과 갑절의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도 우리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십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오늘의 주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나 자신이 죄인 됨을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나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우리도 주님을 본받아서 형제와 이웃의 잘못을 용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진정한 승리는 용서를 통해서 주어지는 것을 깨닫고 용서를 통한 삶의 승리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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