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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 부활신앙의 유익 (고전 15: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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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송선옥 목사

요20: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만나시기 위해 오셨을 때 도마는 그곳에 없었다. 도마는 다른 제자들의 말을 믿지 못했다. 그때 도마의 태도에 대한 다른 제자들의 반응이 어떠했을까? 대단히 불쾌했을 것이다.
“이 사람 참 의심도 많네. 나만 본 것이 아니라 여기 있는 모두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불신은 도마만이 아니다. 다른 제자들로 마찬가지였다.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예수님의 시신에 향유를 부으려 갔던 여인들이 빈무덤을 확인하고 돌아와서 제자들에게 고했지만 믿은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눅24:11, 사도들은 저희 말이 허탄한 듯이 뵈어 믿지 아니하나”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 만큼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개념이 없었던 것이다.내가 처음 교회에 출입할 때 가장 큰 걸림돌이 바로 이런 문제였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성경에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기록은 믿지만 내 마음 속에 믿어지지 않았다. 몸은 예배당에 나와 앉아 있었지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건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었다.

세례 문답을 할 때마다 세례대상자들에게 꼭 묻는 질문이 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사실을 믿습니까?” 대부분은 믿는다고 고백한다. 자신있게 믿는다는 대답이 나올 때마다 놀란다. 나 자신의 옛날과 비교가 되기 때문이다. 속으로 “이 사람 나보다 믿음이 더 좋은데..”

부활은 기독교의 핵심 교리이다. 이것을 빼면 기독교 신앙은 무너지는 것이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께서 40일 동안 지상에 계시면서 하신 일은 부활하신 당신의 몸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시는 것이었다. 제자들을 찾아 가셔서 직접 만나주시고, 음식도 함께 먹고, 하나님나라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 비로소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40일이란 기간은 예수님이 지상에서 당신의 부활을 증거하시기에 충분한 기간을 의미한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의심없이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런 후 승천하셨다.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을 계기로, 성령 충만을 받은 제자들이 나가서 부활을 힘있게 증거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그 사실을 믿었다. 하나님께로 돌아 왔다.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 이 부활의 복음은 바다 건너 고린도 땅에까지 전파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고린도 교회 안에 부활에 대하여 의심을 품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사도 바울은 이 소식을 듣고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하여 상세하게 증거하는 내용의 서신을 보내게 되었다.


1.부활에 대하여 의심하게 된 원인(1-2절)
고전15: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고전15:2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개척할 당시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고린도를 방문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더 이상 육체로 제자들 가운데 계시지 않는다. 바울은 홀로 고린도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단지 복음을 전하고 복음을 가르쳤을 뿐이다. 복음은 그 자체가 능력인 것이다. 고린도 사람들은 바울에게서 복음을 들었고 그 복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것이다.

그러나 본문 12절의 말씀을 보면 고린도교회 안에 부활에 대하여 의심하는 무리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이 몸의 부활에 대하여 의심을 하게 되었는가? 2절의 말씀이 그 원인에 대한 대답을 주고 있다. 그들은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의 말씀을 굳게 지키기는 것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고전15:2).

자전거 패달을 계속 밟지 아니하면 넘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앙도 계속 달음질 하지 아니하면 넘어지고 시험에 들게 된다. 신앙은 항상 현재진행형이다. 지금 나와 주님과의 관계가 중요한 것이지 과거에 열심히 믿었던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고린도교회 교인들 중에 부활에 대하여 의심하고 있는 사람들도 처음부터 의심했던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불같이 뜨거웠을 것이다. 고린도교회 안에 은사로 인해 소란했던 것을 보면 그들 나름대로 열심이 있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처음의 열심을 계속 유지하지 못했다. 세상적인 생각이 그들의 마음을 유혹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말씀을 굳게 지키라” 했는데 놓치고 말았다.

오늘날도 성도들이 믿음의 중심을 지키지 못하고 헛된 것을 추구하면 믿음이 약화되고 진리에 대하여 의심하게 된다. 사람은 환경과 감정에 따라 변하기 쉽지만 진리는 변함이 없다.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부활이 어딨어? 죽으면 끝이지. 다 지어낸거야!” 사람의 말에 현혹되지 말라. 우리가 받은 복음의 말씀을 굳게 지키라. 주님 앞에 가는 날까지 자신의 믿음을 견고히 지켜기 바란다.
2.부활의 확실성에 대한 바울의 증거(3-11)
1)부활은 성경예언의 성취다(3-4절).
고전15:3-4,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부활의 근거를 성경으로부터 제시하고 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성경예언의 성취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사건은 놀랍게도 구약의 선지자들에 의해서 예언된 것이다. 예수님 탄생 800년 전 선지자 이사야가 이렇게 증거했다.
사53:10,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시16:10,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예수님 탄생 1000년 전, 다윗을 통하여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였다. 이외에도 구약 성경 여러곳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하여 예언하고 있다.
뿐만아니라 예수님께서 친히 제자들에게 여러차례 당신의 고난과 부활에 대하여 미리 말씀하셨다.
마16: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마17:22-23, 마20:18-19).

2)목격자들을 통한 증거(5-7절)
고전15:5-7,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세상에 계셨다. 새벽에 무덤을 찾은 여인들에게 나타나셨고, 제자들을 여러 차례 만나셨으며, 그 외 많은 사람들에게 부활의 몸을 보여 주셨다. 의심하는 도마에게 가까이 가셔서 “만져 보아라.”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 20여년 이상의 세월이 지나갔다. 그동안 죽은 사람들도 있지만 아직도 태반이나 살아 있다는 것이다. 더 이상 확실한 증거를 보일 수 있겠는가? 의심의 여지가 없도록 그들 앞에 제시하였다.


3.부활사건에 대한 논리적 변증(13-19절)
사도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만약 부활이 없다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라는 부정적 가정하에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부활의 사실을 변증하고 있다.
만약 부활이 없다면....

1)그리스도께서도 다시 살지 못하셨을 것이다(13, 16절)
13절,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이것은 신앙의 대상이 없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2)전도도, 믿음도 헛것이 될 것이다(14절)
14절,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예수님이 많은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여 죽었으니까 인류의 스승이요 인격자는 될 수 있다. 그러나 경배의 대상은 되지 못하는 것이다. 유교에서 공자와 맹자를 숭상하듯 예수를 숭상할 수는 있어도 그는 어디까지나 인간에 불과한 것이다. 인간이 인간을 숭상하는 것은 참된 종교가 아니다.

3)거짓증인이 될 것이다(15절)
15절,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예수님을 전파한 모든 사도들과 주의 제자들은 부활하지 못한 예수를 부활했다고 전파했으니 다 거짓말쟁이들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4)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다(17절)
17절,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성경은 죽음의 원인을 죄라고 가르치고 있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므로 죄를 담당하셨지만 부활이 없다면 아직 죄를 안고 계신 것이나 마찬가지다. 죄의 저주 아래 놓여 있는 것이다.

5)가장 불쌍한 자가 될 것이다(18-19절)
18-19절,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일생을 예수를 위해 헌신했는데 부활없이 죽음으로 끝난다면 예수를 믿었던 모든 사람들은 그에게 집단 사기를 당한 꼴이 되고 마는 것이다.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했을 때 “혹시 예수라는 종교가에게 사기당하는 것은 아닌가?” 꼼꼼히 살펴본 경험이 있다. 그런데 고민한 결과 사기를 당해도 손해 볼 것은 없다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니 여러분도 안심하고 믿으세요. 기독교 2000년 역사 가운데 그리스도의 부활은 많은 사람들에게 소망과 평안을 주었다. 사도 바울은 의심하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이해가 되도록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4.부활신앙의 유익
고전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신자들의 부활의 표본이자 보증이 된다. 첫 열매가 되셨다함은 계속해서 열매가 맺혀진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부활이 성도들에게 끼치는 유익은 무엇인가?

1)산소망이 있게 하심
벧전1: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예)아름다운이야기가 있다. 미국 메사츄세츠주에 주일학교에 다니는 9살난 톰이라는 소년이 있었다. 병약해서 휠체어를 타고 출석해다. 어느 주일날 선생님이 속이 비어 있는 프라스틱 계란을 나눠주며 생명이 있는 것을 넣어오라고 숙제를 내 주었다. 부활절 아침 - 꽃, 나뭇닢, 곤충등등
그러나 톰의 계란은 비어 있었다 - 아이들이 깔깔거리며 놀렸다. 선생님이 톰을 위로했다. “많이 아팠나보구나.” 그 때 톰이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저는 생명을 준비했어요, 이것은 예수님의 빈무덤이예요. 예수님은 살아나셨기 때문에 그 무덤이 비어 있었거든요.” 톰은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확실히 믿는 소년이었다. 이 소년이 10개월 후에 죽었다. 그의 장례식날 그의 관에 꽃다발 대신 빈 프라스틱 계란이 놓여 있었다.

그리스도인들이 여러 가지 시련과 환란 가운데서도 낙심치 않는 것은 썩지 않는 영원한 산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하거나 슬퍼하지 않는 것이다.
딤전6:17,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2)신앙의 담대함과 견고함을 키워준다.
행2:14,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같이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행4:19-20,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우리 동에 주일학교에 나오는 3학년 된 어린이가 있다. 대단히 붙임성이 좋다. 하루는 태권도복을 입고 체육관에 가다가 만났다. “너는 왜 태권도를 배우니?..” 이녀석 대답이 “저는 용기가 부족해서요 담력을 키우기 위해 배우는 거예요.”

그러나 담대함의 근거는 힘이나 재물이 아니다. 부활 신앙이 확실한 사람이 담대한 사람이다. 주님을 부인하고 도망쳤던 제자들이 어떻게 이렇게 담대해질 수가 있었는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자신의 신앙에 대하여 확신을 갖지 못하고 흔들리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이번 부활절을 통해 확실한 부활신앙을 갖기 바란다.

3)열매맺는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
부활신앙을 소유한 사람들은 생명의 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고 사는 사람들이다.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리스도를 마음에 품고 살았던 초대교회 성도들의 모습 - 은혜를 사모하며, 모이기를 힘쓰고, 서로 도우며, 가르침을 받고, 백성들로부터 칭찬을 듣고 날이 갈수록 부흥되어져 갔다.

흔히들 기독교를 부활의 종교라고 말한다. 역사이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정하려는 많은 시도가 있어 왔다.
독일의 자유주의 신학자 라이마루스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만약 예수가 부활해서 산헤드린 공회나 빌라도 앞에 나타났다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었고 나도 믿었을 것이다. 왜 제자들과 갈릴리에만 나타났느냐?”

본인이 믿지 못함을 예수님의 탓으로 돌리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산헤드린 공회 앞에 나타나지 않으셨다 할지라도 공회원뿐만 아니라 많은 수의 제사장들도 예수님을 믿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행6:7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의심하는 자에게는 부활이 한낱 허구에 불과한 것처럼 보이지만 믿는 성도들에게 부활은 산소망이요 능력이요 기쁨인 것이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부활은 봄에 푸르러 오는 풀 한 포기에도 약속되어 있다.”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부활의 증거는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나타나는 현실은 마치 소돔과 고모라성과 같다. 물질주의와 쾌락주의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 잡고, 도덕적 윤리적인 타락 현상들이 심화되어 가고 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이 현실의 행복이지만 필경은 망하게 될 것이다.

이 시대에 성도와 교회의 사명이 있다. 죽어가는 이 사회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오직 부활신앙뿐이다.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냐 아니냐 가지고 따질 시간적 여유가 없다. 하나님의 행하신 일을 인간의 머리로 판단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를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지는 못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감화하사 믿게 하시고 부활하신 예수를 우리 마음에 모시게 하셨다.

이제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부활의 주님이 우리 안에서 충만히 역사하사 내 영혼을 살리고, 내 가정과 교회를 살리고, 내 직장과 학교를 살리는 주역들이 되기를 바란다. 이 시대의 소망은 바로 부활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에게 있다. 교회에 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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