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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부활을 소문냅시다.(행 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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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진주라고 하는 세계적 문호 톨스토이를 잘 아시지요. 그가 쓴 소설이 많습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Chem lyudi zhivy)” “두 노인(Dva straika)” “악은 유혹하나 선은 인내한다.(Vrazhye lepko, a bozhye krepko)” “많은 땅이 인간에게 필요한가?(Mnogoli cheloveku zemli nuzhno?)” “세 가지 질문 (Tri vopresa)” 그 외에도 많습니다. 그는 정신적 위기를 체험 했습니다.

그가 쓴 장편소설 “부활(Voskresenbiye)”이 있습니다. 이 소설은 그가 일흔 한 살 때 쓴 소설입니다. 부활은 한 소녀의 정조를 짓밟은 귀족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소녀가 매춘부가 된 뒤 저지르지도 않은 죄의 범인으로 재판을 받게 됩니다.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된 주인공이 그녀와 결혼을 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래서 그녀를 데리고 시베리아로 갑니다. 그 창녀는 그의 사랑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끝내 그의 청혼을 거절합니다. 주인공 네홀류도프가 재판소 배심원으로 법정에 갑니다. 공작 네홀류도프라는 귀족은 살인 절도 혐의로 재판을 받는 창녀 카츄샤를 만납니다. 그가 청년시절에 정욕의 대상으로 삼아 순결을 짓밟은 순결하고 아름다운 카츄샤였습니다. 그녀는 임신을 했습니다. 하녀 겸 양녀로 있던 집에서 쫓겨납니다. 그는 갈 곳이 없습니다. 손 쉬운 일은 몸을 파는 것 밖에 없었습니다. 귀족은 카츄샤가 이렇게 된 것이 자기 때문이라는 양심의 가책을 느낍니다. 그는 정말 귀족이 노동자를 짓밟는 것에 회의를 느낍니다. 그는 카츄샤를 위해 온갖 힘을 쏟습니다. 그의 노력으로 카츄샤는 석방이 됩니다. 귀족 네홀류도프는 한 창녀를 따라 괴로운 시베리아 유형을 자청합니다. 시베리아 황망한 벽지에서 끝없이 바라던 용서의 정신으로 정신적 부활을 발견한다는 내용입니다.
저는 이 소설을 중학교 1학년 때 읽었습니다. 너무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이 소설을 세 번 읽었습니다. 이제는 어렴풋이 이해가 되는 것 같습니다.

오늘이 부활주일입니다. 우리도 카츄샤와 같은 더러운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지켜야 할 것을 옳게 지키지 못한 사람입니다. 얼룩진 영혼입니다. 상처 입은 영혼입니다. 죄로 인해 사형 선고 받은 몸입니다. 이름 그대로 구제불능입니다. 우리가 죽어도 하나도 억울할 것이 없습니다. 누구의 탓도 아닙니다. 누구 때문도 아닙니다. 시베리아 벌판으로 내쫓아도 섭섭하지 않습니다. 불가마에 던져져도 원망 못합니다.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죄만큼 더러운 것 어디 있습니까? 죄만큼 무서운 것도 없습니다. 질병, 고통, 죽음, 다 죄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서 범죄한 일들이 없었다면 이런 일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가 아들로 대신 죄 값을 치르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다들 자기 것 아까워합니다. 돈, 물건, 집, 몸, 자식은 물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죄 용서를 위해 아들을 아낌없이 죽게 하셨습니다. 너무 참혹하게 죽으셨습니다. 그 아들이 죽으신 지 사흘 만인 오늘 새벽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주일이라고 합니다. 부활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날입니다. 가장 바른 표현은 “예수님의 날”입니다. 그래서 불신자를 생각해서 “주일”이라고 부릅니다. 저도 “부활을 소문냅시다.”라는 말씀으로 같이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Ⅰ. 삶은 부조리입니다.

이 시대는 균형을 잃었습니다. 비틀거립니다. 그러니 어지럽지요. 정상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모든 인간이 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선하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인간의 마음에 흑심이 생긴 것입니다. 욕심이 문제였습니다. 죄를 지었습니다. 병이 든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한 것입니다. 우리는 본향을 잃었습니다. 영적 실향민입니다. 그러니 불안, 공포, 초조가 끊이지 않습니다. 다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이런 고난은 아무도 피해갈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름만 영적 귀족이 아닙니까? 거룩하고 빛난 영광의 아들, 딸로 자부하고 있습니다. 틀리지 않습니다. 하나도 그런 말이 아닙니다. 여기 부활에 나오는 주인공 공작은 악랄하게 노동력과 재산을 빼앗는 것이 당연한 줄 알았습니다. 그 이유는 귀족이니까..네홀류도프는 눈을 떴습니다. 이제야 보입니다.

교회가 교회답지 못했다는 것이 크게 보입니다. 귀족이 귀족답지 못한 것이 드러났습니다. 여기 창녀 카츄샤는 억울하게 재판 받고 있습니다. 그는 바로 자신이 이 여인을 이렇게 만든 장본인임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이 소설에서 “내가 그녀에게 용서해 달라고 빌어야 되겠다. 어린애처럼 마구 용서를 빌어야겠다.” 그는 하늘을 향해 짐승처럼 괴성을 지릅니다. “주여 저를 도와주소서. 주여 저를 인도해 주소서. 저의 마음 속에 들어오셔서 저의 모든 더러움을 깨끗이 씻어주소서.” 합니다. 그가 하나님을 만납니다. 우리의 더러움을 아시지요. 내가 거룩하지 못하다는 것 아시지요. 나는 정말 인격이 되먹지 못하다는 것 아시지요. 잘난 것도, 자랑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입만 열면 남의 이야기가 실타래처럼 나옵니다. 눈만 뜨면 남의 실수나 약점이 크게 보입니다. 이거 야단났지요. 남을 싫어합니다. 미워합니다. 시기와 질투가 일어납니다. 그러니 나쁘기가 그지없습니다. 고상하고 깔끔하지 않습니다. 카츄샤는 네홀류도프가 정조를 빼앗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을 파는 매춘부가 되었습니다. 그는 살인 누명까지 씁니다. 우리도 허위를 진실로 포장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돈이면 다라고 착각합니다. 돈 때문에 다른 사람을 죄짓게 하지 않습니까?

요즈음 “돈이 양반이다”라고까지 합니다. 돈 때문에 친구를 잃습니다. 돈 번다고 주일도 제대로 못 지킵니다. 돈이 아까워서 십일조도 못 냅니다. 곧 후회합니다. 지금도 이런 유혹의 검은 손길이 우리를 흔들고 있습니다. 지금 세상에는 떳떳하지 못한 행동을 많이 합니다. 영이 맑아야 합니다. 깨끗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영혼이 병들었습니다. 치료는 십자가 믿음 뿐입니다. 우리는 한 평생 영혼과 육체의 싸움을 합니다. 우리는 근본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근본은 죄가 깔고 앉아 있습니다. 영혼이 병든 것을 불신자는 잘 모릅니다. 어디로 가든지 죄 없는 곳이 없습니다. 에덴에서 쫓겨난 인간은 죄와 더 가깝습니다. 자꾸 하나님을 멀리 하려고 합니다. 범죄하면 하나님을 피하려고 합니다. 세상 곳곳에 정의 보다 불의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이 죄인들은 다 죽어야 합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시험을 받습니다. 이런 연약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가 곧 이 세상입니다. 우리는 눈 뜬 장님입니다. 저 밝은 광명의 세계를 잘 못 봅니다. 이 세상은 부조리의 연속입니다. 그래서 정부에서도 소위 잘 났다는 정치인들부터 깨끗하라고 합니다. 이 세상은 앞뒤, 좌우, 위아래가 따로 따로 입니다. 이게 비정상 아닙니까?

어느 신문(조선일보 2005.3.4 A35면)에 난 재미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어느 날, 악마들의 사람을 유혹하는 경연대회가 있었습니다. 주제는 “잘못을 저질렀을 때 어떻게 해야 사람을 더 깊은 유혹에 빠뜨릴 수 있을까?”라는 것이었습니다. 첫 번째 마귀는 나와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지옥은 없어 네 마음대로 살아라.” 두 번째 마귀는 나와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걱정 하지 마. 보는 사람 없잖아.” 세 번째 마귀는 나와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내일부터 새롭게 시작하지 뭐.” 네 번째 마귀는 나와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네 잘못은 용서받기에는 너무나 커.” 결국 대상은 네 번째 마귀에게로 돌아갔습니다. 사탄은 우리의 죄를 용서 받을 수 없다고 합니다. 물론 우리의 죄가 별것 아니라는 것 아닙니다. 하잘 것 없다고 가볍게 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큰 죄를 지었습니다. 죄는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병원에 가면 ‘무균실’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나쁜 병균이 못 들어와 감염이 되지 않도록 한 특실입니다. 하긴 서울에 대형 병원 특실 하루 입원비가 98만원이랍니다. 특급 호텔 숙박료의 몇 배가 됩니다. 그런 병실에 입원만 하면 병이 저절로 낫는 것이 아닙니다. 요즈음 입시, 정치인, 교사, 기업인들이 비리 때문에 검찰청을 오가는 것을 신문, 방송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Ⅱ. 부활을 소문냅시다.

얼마 전 우리나라 대형 신문사의 연간 매출액이 4.000억이 된답니다. 그 중에 상당 부분은 광고비랍니다. 요즈음 광고에 출연하는 인기 모델들의 몸값이 대단합니다. 어떤 탤런트는 광고 1편에 10억인가 받는답니다. 앞으로는 병원도 광고해도 된다지요. 자기 회사 소문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소문냅시다. 부활을 소문냅시다.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하리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했습니다. 십자가는 죽음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입니다. 그 십자가의 죽으심은 우리를 살리시는 십자가였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나 말씀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이십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은 자기의 부족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우리를 부활케 하십니다. 우리의 삶은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 합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사람들이 다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사흘 만에 다시 사신다고 하셨습니다. 다 비웃었습니다. 그의 제자들도 믿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이상한 청년으로 여겼습니다. 정신병자 취급을 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너무 엄청난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비웃고 조롱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면서도 궁시렁 거렸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헐면 사흘 만에 다시 짓는다고 큰 소리 치더니 너 십자가에서 내려와 봐라”고 까지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멸시 천대를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예언하신 대로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사셨네 사셨네 예수 다시 사셨네”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할렐루야인 것입니다.

백화점의 창시자인 미국의 워너메이커를 아시지요. 그는 가난했습니다. 벽돌공의 아들이었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이 그의 최종학력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백화점의 창시자로 대기업의 사장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예수는 이렇게 믿어야 한다. 이렇게 살면 부자가 된다.”는 교과서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성경대로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평생 주일학교 교사였습니다. 그는 평생 주일성수를 했습니다. 십일조를 바쳤습니다. 더 바쳤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축복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가 어린시절 성경을 통해 부활 신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평생 베다니 교회에서 교사로 섬겼습니다. 그는 체신부 장관을 하라는 대통령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는 “주일 성수를 방해 받지 않는다는 조건”을 받아내고 수락했답니다. 매주 그는 먼 길을, 기차를 타고 본 교회 가서 어린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는 나의 본업은 교사이고 장관은 부업이라고 했답니다. 미국의 장관 자리가 보통자리입니까? 교사 여러분, 교인  여러분 주일학교 교사는 젊은이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른들, 사회적 지휘가 높으신 분들도 하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는 많은 교회를 세웠습니다. 1921년 그의 나이 60세 생일 때였습니다. 한 기자가 물었습니다. “회장님 지금까지 투자한 것 중에 가장 성공적인 것이 무엇입니까?” 그는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대답했습니다. “내가 열 살 때 최고의 투자를 한 적이 있지요. 그때 나는 2달러 75센트를 주고 예쁜 가죽 성경을 샀어요. 이것이 내 인생의 가장 위대한 투자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성경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으니까요.” 했습니다. 그는 구원받은 기쁨을 전하는 부활의 증인입니다. 너무도 멋있는 신앙의 선배입니다. 우리는 부활을 소문냅시다. 살다보면 우리는 이상한 것만 소문냅니다. 그래서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것 심심찮게 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소문냅시다. 부활의 증인이 됩시다. 하나님은 늘 우리에게 생명의 소식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맺는 말 :

저는 오늘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사람은 한 번 자기에게 잘 못 보이면 늘 그를 미워합니다. 싫어합니다. 어떤 이는 몇 년 전 벌써 잊어버려야할 것까지 되씹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건 마음이 비뚤어져서 그렇습니다. 그러니 사람은 정상이 아닙니다. 손, 발, 어떤 몸에 이상이 있는 것 큰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문제는 영적인 것입니다. 또 마음이 비꼬인 것입니다. 마음이 변해야 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다 부조리라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정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이건 다 우리가 하나님과 멀어졌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통로가 막혔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병 고침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환자입니다. 더 가혹한 표현은 “불구자”입니다. “장애자”입니다. 영적 장애자입니다. 영적으로 말썽꾸러기입니다. 이것은 어떤 약, 주사, 수술로도 치료가 안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로만 치료가 됩니다. 이게 특효약입니다. 지금은 불안, 공포, 초조, 갈등 속에 삽니다. 이해와 사랑이 부족합니다. 십자가 붙들고 회개해야 합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하리라.” 하셨습니다. 부활의 주님 만나서 얻은 기쁨 우리도 전합시다. 부활 소문 전하는 증인이 됩시다. 늘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2005.3.27-충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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