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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부활의 신비 (고전 15: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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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이봉 목사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
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
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
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노릇 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
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고전15:20-26)

1. 인간의 영원한 풀 수 없는 신비는 죽음의 문제입니다.

한동안 대중가요로 유행했던 <하숙생> 또는 <인생은 미완성>이란 노래가 있었습니다. 그 노랫말 가운데 무
척이나 진지한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인생은 하숙생처럼, 어디론가 옮겨갈 존재라는 것이고, 인생은 구름처럼 떠돌다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는 존재
라고 하였고, 또 인생은 미완성으로 쓰다 만 편지 같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모두가 인생의 문제들을 다룬 노랫말이라고 봅니다.

우리의 삶에서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생명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죽은 후에는 어디로 가는가?
이 문제는 인류의 영원한 숙제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물음 앞에서 불가지론(不可知論)을 말했습니다.
공자도 제자들이 사후의 세계를 물었을 때,
‘살아있는 이 세상의 것도 모를 것이 많은데 죽은 후의 것을 어떻게 알겠는가?’고 하였다고 합니다.
사실 인간의 지식으로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여러 종교에서도 이 죽음의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윤회설(輪回說)이나 환생설(還生說)을 주장하였습니다.
불교에서는 윤회설을 주장하며 사람이 되었을 때 성불하지 못하면 다시 무엇으로 태어날지 모른다고 하면서
살생을 금하였습니다.
고대 에집트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혼이 육체에서 빠져나가 돌아다니다가 다시 들어오게 된다고 하여 육체를
썩지 않도록 잘 보존하였습니다.
그것이 오늘의 미이라들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설들은 하나의 설(說)로 끝났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적 사건(事件)
(Historical Event) 이었습니다.
로마제국 시대에 일어났던 역사적 사실이었습니다.
직접 <듣고> <보고> <만져본 바> 입니다.
기독교 2000년 역사 속에서 이 부활 사건을 부인하려고 한 세력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그럴듯한 말
로 부활을 부정하려고 한 이단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마태복음서 기록에 벌써 그런 기록이 나옵니다.
부활의 아침 갑자기 땅이 흔들리는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막아놓았던 돌무덤이 열리는 순간, 수비하던 군인들이 혼비백산(魂飛魄散)하여 엎드려졌습니다. 아마 엊그제
일본 <후꾸오까>에 일어났던 지진보다 더 강력한 지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빈 무덤을 보는 순간 파수병들
은 자기들의 목숨이 위태하게 되었음을 직감하였을 것입니다.

이 사건은 즉시 장로들과 제사장들에게 전해졌을 것입니다.
장로들이 모여 의논하기를 파수병들을 돈으로 매수하였습니다.
‘밤에 예수의 제자들이 몰래 시체를 가져갔다’고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너희들 생명은 우리가 보장해 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마28:12-15) 이 얼마나 생생한 기록입니까?
오늘도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은 거짓으로 꾸며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2000년 동안 이
런 말은 계속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오늘 세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들이 점점 더 많아지는 것을 보아도 이것이 역사적 사건
이란 것이 명백한 증거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생의 근본적인 수수께끼가 해결되었습니다.

2. 무덤은 인간의 종착점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지금껏 사람들은 죽지 않으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릅니다.
중국의 진시황제는 불사약(不死藥)을 구하려고 동남동녀(童男童女) 500명을 보내면서 늙지 않는 불로초(不老
草)를 캐 오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에 늙지 않는 불로초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기에 죽지 않으려고 죽음을 두려워했습니다.

요즘도 이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늙지 않는 약이 있다면 아무리 비싸도 사 먹으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특히 우리 한국 사람들이 세계 어느 나라 사람들 보다 더한 것 같습니다.
산삼뿌리를 몇 천만원을 주고도 진짜라면 사 먹으려고 합니다.
외국 관광을 가서도 제일 큰 관심은 몸에 좋은 것을 먹으려고 합니다.

몇 년전 노회에서 대만을 갔던 일이 있었습니다. 대만에 가면 야시장이 유명한데, 그 야시장에 대부분이 이상
한 것들을 팔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뱀이며 자라 같은 것입니다.
몇 분이 밤에 나가서 이상한 것을 먹었다고 아침 식탁에서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 중에 한 분이 이렇게 말했습
니다.
“이제 큰 일들 났습니다 사탄을 먹었으니 그 입에서 사탄의 말이 나올 것이 아니겠습니까?”
“거 무슨 말을 그렇게 하노? 사탄을 잡아먹었으니 이제야 비로소 바른 말을 하게 되었지 않았는가...”
모두 늙지 않고, 죽지 않으려고 하는 노력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죽지 않는 약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21세기가 과학기술의 발달로 앞으로는 부품교환을 한다고 합니다.
벌써 이빨도, 혈관도, 관절도, 눈도, 귀도, 심장도, 갈아 끼우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죽음의 문제를 해결
하지는 못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 하
였습니다.
아담의 핏줄로 태어난 사람은 다 죽는다고 하였습니다.
육신의 부모의 핏줄로 태어난 우리들은 다 죽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제 2의 아담이라고 하였습니다.
첫째아담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사망 하에서 살았다면, 둘째아담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영생한다고 하였습니
다.
그러므로 주님은 ‘내가 곧 부활이요 생명이니...’ 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어 우리 앞에 나타나신 것이 오늘 부활사건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가 사망으로 끝나는 인생들이 아니라,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것
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지금도 물으십니다.

3. 부활은 지식으로 이해될 수 없지만 믿을 뿐입니다.

아는 것과 믿는 것은 차원이 다릅니다.
교리적인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내가 그것을 믿지 않으면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
고 그와 함께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을 얻게 됩니다.
이것을 목숨 걸고 전한 사람이 사도 바울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5장을 보면 사도 바울은 우리들에게 부활신앙을 갖도록 얼마나 강하게 말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 중에 제일 불쌍한 사람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왜? 있을 수도 없는 헛된 것을 전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앞에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여 모
든 사람들에게 나타나 보여 주었고, 심지어 만삭되지 못해 태어난 자기에게까지 보여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도마는 처음에는 부활의 주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손으로 직접 확인해 보지 않고는 안믿겠다고 하였습
니다.
사실 도마 같은 제자가 있었기에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다 도마 같은 심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의심 많던 도마에게 주님은 나타나 보여 주었습니다.

‘네 손가락을 내밀어 내 손의 못 자국을 만져보라 그리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였습
니다.
직접 자기 손으로 확인해 본 후 도마는 ‘오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 도마의 고백처럼 완전한 신앙 고백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고 했는데, 도마는 한 단계 더 들어가 ‘오!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부활은 인간의 지적(Knowledge) 영역이 아닙니다. 인간의 이해의(Understanding) 영역이 아니란 말입니다.
부활은 하나님의 주권적(Divine Ruling) 영역이기 때문에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을 믿을 것 뿐입니다.

이것이 부활신앙입니다.
마르다에게 물으셨던 주님이 오늘 우리에게도 묻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여기에 내가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하는 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도 마르다와 같이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
이다”라고 고백해야 하겠습니다.

사망의 권세를 이긴 힘은 이 부활신앙뿐입니다.
로마시대의 성도들이 학정과, 핍박과, 고문과, 배고픔과, 투옥과, 죽음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이 부활신앙이
었습니다.
주님과 함께 죽으면 함께 다시 살아난다는 부활의 신앙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세상이 감당할 수 없었다’고 히브리서 기자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순교자들의 흘린 피로 한국 교회는 이만큼 성장했습니다. 그 많은 순교자들이 죽음의 고통을 이길 수 있었던
힘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세상 지식이 아니었습니다.
<주와 함께 죽으면 주와 함께 다시 산 다 >는 그 부활신앙이었습니다.

영국 성직자 파머의 글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알려지지 않은 이름 속에 위대함이 숨어 있고,
조용히 행하는 의무 속에 영생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작은 공간을 채워 나가는 사람,
작은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 기쁘게 달려 나가는 사람,
낮은 지위라도 불평 없이 받아들이는 사람,
오해, 왜곡, 시기, 모략을 받아도 의연히 참아내는 사람,
마음의 고통이 심해도 이웃의 기쁨을 위해 웃을 줄 아는 사람,
모든 이기심과 야만과 조급함을 구원의 봉사를 위해 몰아내는 사람,
이러한 사람들은 어떤 순교자만큼이나 위대한 순교자들입니다."

어떻게 이러한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부활신앙을 소유한 사람일 것입니다.
우리 모두 살아있는 순교자들이 되어 이 세상의 빛과 소금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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