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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부활을 믿습니까? (고전 15: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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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지 3일 만에 다시 사신 것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 제정한 부활 주일입니다. 역사적으로 예수님은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을 맞는 안식일 다음날에(즉 안식후 첫날)에 부활하셨습니다. 이 주님의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기 위해 니케야 종교회의에서 춘분이 지나고 만월 다음에 오는 첫째 주일을 부활절로 지정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키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어느 종교에서도 죽은 자가 다시 살 수 있다는 진리는 없습니다. 이 진리의 증거는 예수 부활에 있습니다. 모든 종교의 창시자들은 다 죽어서 그 무덤에 그 뼈가 묻혀 있는 그대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무덤은 빈 무덤으로 남아 있습니다.
  어떤 위인의 전기가 아무리 훌륭하다고 하더라도 그의 죽음과 함께 그 전기의 기록을 마칠 수밖에 없고 쓰던 붓을 던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죽음으로서 마지막을 내리신 것이 아니라 부활하심으로 역사의 새장을 여셨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사는 일이 있느냐고 질문합니다.

  1. 원초적인 질문 / 사람이 다시 살 수 있는가?

  이 같은 질문은 오늘 이 시대에도 그대로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 시대에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고전15:35절에서 사람들이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라고 묻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사두개인들은 천사나, 영적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고 죽은 자의 부활도 믿지 않았습니다.(막12:18)

  사람들이 부활을 믿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육신의 죽음을 존재의 소멸로 보기 때문입니다. 
  육신은 영이 거하는 집과 같은 존재로서 영이 떠나면 존재 가치가 상실되지만 영이 있으면 존재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죽음은 존재의 소멸 즉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본래 흙으로 만들어진 사람의 몸은 영이 떠나면 존재 가치가 상실되어 다시 흙으로 돌아가지만 주님 재림 시에 낙원에 가 있던 영혼이 주님과 함께 이 땅에 올 때 그 존재 가치가 되살아나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죽음은 영과 육의 분리이며 부활은 육과 영의 결합입니다. 그러나 부활을 믿으려 하지 않는 사람들은 죽음을 소멸, 즉 없어지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부활을 믿지 못합니다.

  영적 존재와 영적 세계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며 또한 영적인 세계가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여 부활을 의심합니다. 인간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영적인 세계가 있습니다. 흔히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초월하는 4차원의 세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세계는 유한하지만 영적인 세계는 무한합니다. 육신적인 세계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 속에 지배당하고 있지만 영적인 세계는 시간과 공간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습니다. 

  '이솝 우화'에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어느 여름날 하루살이와 메뚜기가 즐겁게 놀다가 저녁 때가 되어 메뚜가 하루살이에게 말했습니다.
  "얘, 하루살이야 내일 만나자" 
  하루살이는 "내일이 뭔데" 라고 물었습니다. 하루살이는 내일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 수 가없는 것입니다. 하루살이에게는 내일이란 없기 때문입니다. 메뚜기는 분명히 존재하는 미래 적인 내일에 대해  열심히 설명했지만 하루살이는 도무지 미덥지 못한 코웃음만 흘릴 뿐 이해를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메뚜기가 개구리와 함께 놀게 되었습니다.
  그 풍요로운 자연의 낭만이 깃들인 여름이 가고,  소슬바람 낙엽 지는 가을도 지나자 개구리는 메뚜기에게, " 얘, 메뚝아! 우리 이젠 그만 놀아야 할까 보다. 날씨가 추워 오니까 우리 내년에나 다시 만나자." 라고 말했습니다. 그말을 듣고 메뚜기는 "내 년이 뭔데?" 라고 의아하게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루만 살다가는 '하루살이'에게는 '내일'이란 이해할 수 없는 그 어떤 것이고, 겨우 한 해를 살다가는 '메뚜기'에게는 '내년'이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세계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세계, 부활의 세계” 도 마찬가지입니다.

  메뚜기가 내년을 이해할 수 없고 하루살이가 내일을 알 수 없듯이 인간들은 하나님을 믿으려고 하지 않고 부활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루살이가 내일이 무엇인지 몰라도 메뚜기에게는 내일이 오고 메뚜기가 내년을 몰라도 개구리에게는 내년이 있듯이 주님의 부활을 믿는 성도들에게 주님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사람의 육신은 흙으로 만들어졌으나 동시에 하나님의 영을 부여받아 생령이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영적인 존재입니다. '하루살이'가 '내일을 부정한다고 해서 내일이 없는 것이 아니고 '메뚜기'가 내년을 알지 못한다고 해서 내년이 없는 것이 아닌 것처럼 우리의 육신의 안목으로 영의 세계를 볼수없다고 해도 반드시 영적 세계는 존재하며 인간은 죽어도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 다시 살게 창조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을 볼 줄 아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내일을 못 보는 하루살이의 눈을 버리고 우리는 부활을 보는 신령한 눈을 가져야 합니다. 

  세속적 철학 때문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서를 기록할 당시에 헬라의 철학이 사람들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헬라철학은 학문적 입장에서 설명하려고 합니다.
  즉 합리적이어야 하고 과학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헬라사상은 과학과 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부활불가론을 주장합니다. 과학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사람이 죽으면 다시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학적이지 않다는 것 때문에 부활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의 처녀탄생이나 부활 사건은 반복되지 않는 과거의 단일회적 사실입니다. 때문에 사물을 관찰 분석 실험하여 귀납법적으로 어떤 결론을 얻어내야 하는 과학적 방법으로 설명할 수 없는 성질의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의 부활은 과학의 대상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 여부의 증인이 필요한 사실인 것입니다.

  미국생물학 학회장 A.C 아이비박사는 우리가 알고있는 과학지식이나 생물학지식을 근거로 부활을 부인하는 것은 과학적 태도라고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누가 예수 부활을 증인입니까?
  예수를 죽인 후 로마의 정규군이 예수의 무덤을 파수했고 그 무덤은 로마황제의 이름으로 봉인이 되어 있었는데 예수가 부활했다는 로마 병들의 공식보고를 받은 유대국회는 그 사실을 시인하고 뇌물을 주어 도난설을 날조했습니다.(마 28:12-15)
  유대당국이나 로마당국은 종교적 정치적 이유로 생전의 예수보다 예수부활 신앙운동을 흑사병같이 싫어했습니다. 그러기에 유대인들이나 로마 당국은 예수의 부활이 거짓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예수의 시체를 찾으려 했을 것입니다.
  요새말로 예수 부활이 거짓이었다면 유대 산헤드린 국회는 예수의 무덤을 파내서 사체 부검을 해서 제자들이 전하는 예수 부활이 거짓이라고 밝혀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요 예수가 살아났다는 것을 그들 자신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역사적인 사건들이 모두 예수 부활의 증거들입니다.
  인류가 소유한 기록 가운데 사복음서 보다 성스럽고 진실 된 피 묻은 기록은 없을 것입니다. 특히 요한복음의 거의 절반은 예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일주일간의 기록입니다.  사도행전의 수백명의 순교자들은 예수의 부활증인들이었습니다.
  인류 증언사 가운데 일찌기 예수 부활의 증인들보다 진실되고 다수의 순교자를 낸 사건은 없습니다. 공모 사기사건이라면 무슨 댓가를 바랐을까요. 금생과 내세, 영육간에 백에 하나도 유익이 없는 일을 위하여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순교를 해야 할 심리적 도덕적 동기가 설명이 안됩니다. 안식일이 주일로 바뀌고 할례가 세례로, 회당이 교회로 바꿔진 사회학적 이유도 부활의 역사성 이외에 근거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예수의 부활이 아니면 말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크리스찬들이 부활의 증인들입니다.
  예수 부활 사건은 유대인들이 주장했던 것처럼 제자들의 사기극이 었다면 그 사기극이 2000년 동안 계속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사람들은 과학적이 아니라는 이유로 부활을 부인하지만 예수의 말씀과 부활의 사실은 어느 과학보다 절대적입니다. 지금 지구상에서 과학분야의 박사학위를 가진 사람들 3분의 2가 예수의 부활과 사람의 부활을 믿는 크리스챤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세속적 철학에 바탕을 두고 있는 부활 불가론자들에 대하여 이렇게 반문합니다.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하느냐?”
  헬라 철학 사상은 죽은 자는 살 수 없다는 것이었지만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 볼 때 부활을 믿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은 너무도 분명하고 확실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전 15:16절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부활 사상의 실제적 증거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당시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너무도 확실한 것이었습니다.
  왜냐면 바울 자신이 생생하게 체험하고 경험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예수를 죽이는 일에 앞장섰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예수가 죽은 후에도 부활을 전하는 제자들을 가혹하게 박해하면서 예수의 부활 사실을 부정했던 장본인입니다.
  그런데 그가 부활 옹호론 자가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 부활의 목격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반대하고 핍박하고 이단시했던 예수에게 완전히 매료되어 자신의 삶을 완전히 불태워드린 사람이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그를 그렇게 변화시켰던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뿐이 아니고 다른 제자들 모두 똑같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확실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곧 사람이 부활할 수 있다는 증거라고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사람의 부활이 없다면 예수님도 부활하지 않았을 것이고 예수의 부활은 곧 사람들도 부활 때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산다는 부활론은 기독교의 핵심적인 진리입니다.
  일반적으로 세상 사람들은 죽은 자의 절망을 말합니다.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막연하게 내세를 믿으면서도 그들에게는 부활의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인간을 가장 절망시키는 죽음에 대하여 확실한 선언을 합니다. 그것은 사람이 죽어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믿는 자들의 소망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을 믿어야 합니다.
  요 11:25-26절의 말씀을 읽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주안에서 우리가 죽을 지라도 새로운 육체로 다시 부활하여 몸과 영이 함께 영원한 천국에서 영원히 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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