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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승리자 예수 (고전 1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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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권영국 목사 (높은뜻숭의교회)

오늘 아침 온 누리에 승리의 나팔소리가 울러 퍼지고 하늘과 땅에 모든 피조물들이 기뻐하고 춤추며 노래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영원한 승리의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이 승리하셨습니다.

전후좌우에 계신 분들과 서로 인사합시다.
“예수님이 승리하셨습니다.” “승리하신 예수님을 찬양 합니다”
이 시간 우리 모두 “예수 승리 내 승리”, “예수 부활 내 부활” 로 받아들이시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보여주는 사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천지 창조이며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4:17에서 이 둘을 하나로 묶어서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 라고 기록했습니다.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능력을 그 분이 만드신 만물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처럼 부활이 일어난 것을 아무도 보지는 못했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보고 만지고 함께 음식을 먹었던 수많은 목격자들의 증언으로 우리는 부활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부활은 믿을 수 있는가?” 저는 기본적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것을 믿는 다면,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수 있다는 것을 믿는 데 전혀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 것도 없는 가운데서 만물을 만드신 분에게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이라고 문제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믿는다면,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며, 그분의 말씀과 행동은 모두 진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데 문제 될 것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윌로우 클릭 커뮤니티 교회의 리스토로벨 목사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의문을 풀기 위해 의학/ 과학/ 역사학/ 변증학/ 분야에 최고의 전문가들을 찾아가서 무신론자들이 주장하는 여러 가지 이론들로 질문하고 그들의 대답을 들었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기절했다. 제자들은 환상을 보고 속았다. 시체가 무덤에서 사라진 것은 사실인가? 예수는 부활 후에 정말로 사람들 앞에 나타났는가? 부활을 뒷받침하는 다른 정황들은 있는가? 이런 의문들에 대해 객관적인 데이터를 제시하며 부활이 역사적이며 과학적인 사실임을 증명하는 책을 썼습니다. 저는 <예수 사건>이라는 이 책을 읽으면서 기독교가 이성적인 분석과 정밀한 조사의 토대 위에 얼마든지 세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초신자들과 교회를 오래 다녔지만 아직도 부활 사건을 믿지 못하는 성도들에게 꼭 일독을 권하고 싶습니다.

교회를 오래 다녔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의 신앙은 냉냉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현실적이며 세속적인 그리스도인들 역시 부활신앙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죽었다가 다시 사셨고 지금 여기 살아 계신다고 믿을 때, 신앙은 비로소 뜨거워지게 됩니다. 천국을 보는 눈이 열리며 비로소 하나님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수 있게 됩니다.

기독교를 파괴하려면 먼저 쇠망치를 부활에 대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활이 없는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의 메세지는 만세를 통해서 언제나 부활절의 메시지로 전파될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에게서 무엇보다 승리자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무엇에 대해 승리하셨을까요? 3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사단에 대해 승리하셨고, 둘째 죄에 대해 승리하셨고, 셋째 죽음에 대해 승리하셨습니다.

1. 사단에 대한 승리
사단은 예수님의 탄생에서부터 십자가에 죽으시기 까지 예수님을 공격하고 넘어뜨리려했습니다. 특히 마지막 한 주간 동안 가장 치열한 싸움이 전개되었습니다. 사탄은 3가지 면에서 예수님이 틀림없이 실패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첫째, 주님이 육체적 고통 때문에 죽음을 피할 줄로 생각했습니다. 십자가에 고통은 지금까지 인간의 육체가 당한 어떤 고통보다도 심한 고통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참다 참다 결국은 십자가에서 내려 올 것으로 믿었습니다.

둘째 순종에서 실패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순종하는 데는 문제가 없겠지만, 모든 율법을 범하지 않고 존중하면서 사는 데는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죽음의 순간이 오면 실패하리라 생각했습니다.

셋째 믿음에서 실패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죽음, 그것도 십자가의 죽음은 참으로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갯세마네 동산에서 얼마나 씨름하셨던지 모세혈관이 터져서 흐르는 땀에 피가 배어나왔습니다. “아버지,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이 장면을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그는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

주님은 아버지께로는 무엇이나 가능한 줄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 아버지의 뜻임을 알았을 때에도 아버지에 대한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아버지를 경외하셨습니다. 마귀는 아들의 비명 소리조차 외면해 버리고 아들을 죽이려 하는 그 아버지 앞에서 주님의 신뢰가 깨어질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죽음 앞에서도 주님은 아버지의 영광만을 찾으셨습니다. “아버지, 마지막으로 아들을 영화롭게 만들어 아버지의 영광을 나타내게 해 주옵소서.” 주님은 아들이 영화롭게 되는 길은 아버지를 영화롭게 만들어 드리는 것임을 아셨습니다. 그렇다면 아버지를 영화롭게 만들어 드리는 길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아버지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주님은 이렇게 기도를 끝내셨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귀는 물러서지 않고 끈질기게 주님을 공격했습니다. 특히 우리 죄가 주님께 전가되고 주님과 성부 하나님 사이에 완전한 단절이 일어날 때 예수님이라도 아버지에 대한 믿음이 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 예수님은 마귀의 이 3가지 시험을 어떻게 받으셨습니까?
마귀는 예수님이 적어도 한 가지 아니면 전부를 실패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승리를 굳게 믿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어떻게 되었습니까? 마귀가 승리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 주님께서 승리하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육체적인 고통을 하나도 생략하지 않으시고 다 받으셨습니다. 그것을 피할 수 있는 권세가 있었지만 우리와 같이 되시기 위해 결코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십자가를 피하지 않고 끝까지 감당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을 부인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말씀은 <다 이루었다>습니다. 이것은 아버지께서 맡기신 모든 일을 다 이루셨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순종의 완성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절대 순종, 절대 믿음, 절대 사명을 통해 사탄의 극렬한 시험을 최종적으로 무너뜨리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심으로 승리를 완전히 쟁취하셨습니다. 원시복음이라고 말하는 창 3:15에는,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고 했습니다. 인류 역사상 여자의 후손은 유일하게 처녀의 몸에서 출생한 예수님 한 분뿐입니다. 사탄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예수님의 발꿈치에 상처를 낸 정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사탄의 머리를 완전히 짓밟은 것입니다. 싸움은 예수님의 승리로 끝이 났습니다. 사탄은 패배자가 되었습니다.

이 시간 사탄이 넣어주는 잘못된 생각이나 습관 때문에 아직도 사탄의 사슬에 매여 고통당하시는 분은 없습니까? 대장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사탄을 이기셨기 때문에 사탄은 결코 우리를 이길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외치고 높이는 곳에 사탄은 조금도 발붙이지 못합니다. 오늘도 사탄의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2. 죄에 대한 승리
주님이 죄 가운데서 우리를 건져 주신 것만도 감사하지만 사실 그것만으로 끝난다면 그 구원은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에서 건져냄을 받은 후에, 죄를 짓지 않고 죄를 이기고 살아갈 능력이 없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실제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죄와의 싸움에서 패배주의에 빠져있는 것이 사실이다. “믿는다고 별수 있어, 세상에서 죄 안 짓고 어떻게 사나? 다 이렇게 사는 거야. 내 아버지의 온전하심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이런 말씀은 좀 과격해. 그냥 한번 해본소리지 뭐. 그것 가지고 진짜 우리를 심판 하실려고.”

여러분 정말 그렇습니까? “사람은 다 똑같지, 죄 안 짓고 살 수 없어.”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예수님께서 내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또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씀 하신 것은 지키지도 못할 것을 괜히 폼으로 한번 해본 소리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에서 건져 내시는 능력만 아니라 우리에게 죄를 이기는 능력까지도 주셨습니다. 그런데 죄를 이기는 능력은 우리에게 있지 않고 오직 예수님에게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능력을 나의 능력으로 삼을 수만 있다면 죄를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뿐만 아니라 그의 부활까지도 함께 믿는 것입니다. 예수와 함께 죽은 사람은 반드시 예수와 함께 삽니다. 그러므로 예수와 함께 살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와 함께 죽어야 합니다. 죄를 이기는 부활의 능력은 오직 예수의 십자가에서 자신을 못 박고, 예수와 함께 무덤에 장사지낸바 된 사람만이 경험하는 능력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롬6:5)

그러므로 십자가와 부활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에게는 십자가의 흔적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부활을 보고, 부활을 통해 십자가를 보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핵심은 부활이고 부활의 핵심은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안에 영원히 함께 거하시며, 우리에게 죄를 이길 능력을 주시기 위해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의 구원도 헛것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끊임없이 회개하고 용서함을 받아도 죄를 이겨낼 능력이 없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십자가는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입니다.

오늘 세례는 바로 그것을 우리에게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례란, “나는 예수와 함께 장사되었다가 예수와 함께 다시 살아났다”는 분명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머리에 물을 뿌리는 것은 나의 옛사람이 물아래 장사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사는 것은 과거의 내가 아니고 내 안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사는 것입니다. 나는 이제 내 뜻과 내 능력으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내 안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뜻과 능력으로 살아가는 존재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전에 내 혼자 힘으로 끊지 못했던 악한 습관도 이제는 예수님의 능력으로 끊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았는데, 이제는 내 안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보여지고 느껴지고 알게 되고 또 그것을 하고 싶은 욕망이 생기고 그리고 그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까지 받게 됩니다. 바울은 갈2:20에서 그것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세례에는 <예수님과의 연합>이라는 중요한 상징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제부터 <과거의 나>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 무덤 속에 장사 지냈음을 날마다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이제 내가 사는 것은 <과거의 나>가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대신해서 사는 것임을 고백합시다. 내 안에 사는 분이 내가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라면, 우리는 더 이상 죄 된 자리와 지난날의 실패에 머물지 말고, 승리자 예수의 능력으로 일어납시다.

3. 죽음에 대한 승리
인간의 가장 강력한 적, 최후의 적은 죽음입니다. 그 앞에서는 누구도 설 수 없습니다.
“너, 죽을래? 살래?” 그러면 무엇이든 다 내어놓아야지. 강도의 칼 앞에 자기 생명 내 놓고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천하를 가진들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죽으면 모든 것이 다 사라져 버리는데.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의 권세아래 눌러 살았습니다. 죽음의 눈치만 보며 그 호령 앞에 숨도 못 쉬고 시키는 대로 하고 살았습니다.

사탄은 이 죽음을 자신의 가장 강력한 무기로 삼아 온 인류에게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 대었습니다. “내 말대로 안하면 다 죽여 버리겠다.” 사탄의 이 한마디에 사람들은 사탄이 시키는 대로 죄를 지었습니다. 어리석게도 사람들은 살기 위해 죄를 지었는데 그것은 사는 길이 아니라 더욱 사망의 굴레를 뒤집어쓰는 꼴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죄는 죽어야 끝이 난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죄는 그 값을 다 치루어야 끝이 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가 요구하는 모든 것을 완전히 충분하게 치루셨습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사망 권세를 완전히 깨트리셨습니다.
이제 사망은 더 이상 힘을 쓸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알고 기쁨에 넘쳐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고전15:55)

오늘 새벽,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사탄은 예수님에게 완전히 패배했고 예수님은 영원한 승리자가 되시어 사탄을 무장해제 시키셨습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사는 우리에게 사탄은 더 이상 죄와 사망의 화살을 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죽음을 두려워하는 분들은 아직도 죽음의 권세아래 눌러 사는 분들입니다.
그분들은 내 죄의 값을 완전히 치루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지불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엄청난 피 값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우리는 더 이상 “너, 죽을래?” 라는 사망의 협박이 무섭지 않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로서 효력이 끝났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감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세상이 그들을 감당 하지 못합니다.

여러분, 살기가 힘드십니까? 그 일이 죽을 만큼 힘이 드십니까? 그래서 정말 죽을 것 같습니까? 무슨 일이든 죽음을 걸고 한번 해 보십시오. 정 안되면 마지막에는 죽기밖에 더하겠습니까? 그리고 죽어 봤자 우리에게는 부활이 약속되어 있지 않습니까? 죽음을 이미 이긴 사람들인데 죽어 봤자 아닙니까? 십자가에서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이제부터 무슨 일을 만나든 나는 살 일 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나 권영국이는 예수 영접하고 세례 받던 그날 예수와 함께 무덤에 장사지냄으로 끝이 났습니다. 장례식 절차만 뒤로 남겨 놓았을 뿐이지. 실질적으로는 그때 이미 끝난 것입니다.
육체의 장막이 무너지지 않으면 천국에서 영원히 살 부활의 옷을 입을 수 없습니다. 죽음이 없으면 다시 사는 것도 없습니다. 죽음은 이 땅을 사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이 낡고 불완전한 옛 옷, 육체에서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이 땅에 모든 피조물들이 간절히 소원하는 것 아닙니까? 그래야 천국에서 입을 영원한 새 옷으로 갈아입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세상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진정한 자유를 맛볼 수 있습니다.
사망의 굴레에서 벗어난 사람만이 진정한 자유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 감히 이 사망의 권세를 짓밟고 이길 수 있습니까?

부활하신 예수의 영을 모시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죄를 이기시고 사망 권세를 물리치신 승리자 예수님은 오늘 내 안에 거하십니다. 그분을 모신 자들마다 그분을 주로 고백하는 자들마다 그분의 승리를 내 것으로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순한 과거의 사실이 아니라 내 눈 앞에 사실이 되어야 합니다.
부활은 단순히 외우고 그치는 교리나 신조가 아닙니다. 내 생명의 기초입니다. 지금 여기서 우리가 실험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또한 부활은 근거도 없이 하늘만 쳐다보며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예수의 영, 곧 부활의 씨앗을 품고 있습니다. 오늘도 성도들의 삶 속에서 그리고 지상에 세워진 교회를 통하여 부활의 능력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 2000년 전 일어난 그리스도의 부활만 기념하지 말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지금도 내 삶 속에서 살아 역사하심을 증명하는 날로 삼아야 합니다. 지금은 부활을 비웃고 부인하는 세상에서 부활을 증명해 줄 더 많은 목격자와 증인들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여러분은 부활의 증인들이 되실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을 통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도록 그리하여 그들 또한 부활의 사람들로 변화될 수 있도록 이제부터 사는 날 동안 <부활의 능력>을 실험하며 <예수 승리!>를 외치며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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