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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난주일] 좁은 길을 택한 예수 (마 7: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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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노강국 목사

오늘은 종려주일인 동시에 수난주간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예상하시면서도 이 길을 피하지 아니하시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 예수님의 모습을 회상하는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실 때,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하며 맞이하던 날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아울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날이 들어있는 주간이라 수난주간이라고 말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십자가의 길로 들어서신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가 피상적으로 생각하면 대수롭지 않은 일인 듯싶지만, 막상 우리 자신에게 이러한 종류의 희생이 요구된다면 그리 쉽게 받아들여지지만은 아닌 모습이라고 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 있겠지만, 굳이 오늘 본문의 말씀과 견주어서 표현한다면 “좁은 길을 택하신 예수님”의 모습이라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그 당시, 예수님에게는 죽지 않을 수 있는 넓은 길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수많은 군중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면서 예수님을 맞이하던 군중들의 힘을 등에 업고 조금만이라도 정치적 제스처(gesture)를 쓰면서 스스로의 이미지(image) 관리만 하였더라도 아주 세련된 지도자의 자리를 굳힐 수 있었으리라 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렇게 칭찬받는 넓은 길을 택하지 아니하시고, 시련과 고통과 죽음의 십자가라는 좁은 길을 택하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가르침을 우리는 예수님 스스로에게 적용하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으리라 봅니다.

오늘 본문은 이다음에 나오는 15절 이하의 말씀과 더불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결론적 말씀인 동시에 경고성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이 부분은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13-14)라는 말씀이고, 또 하나는 “거짓 선지자를 조심하라”(15-23)는 말씀입니다. 이 둘의 경고말씀의 공통점은 그 “결과”에 대한 예수님의 진단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즉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하는 이유가 14절에 나와 있는데 그것은 “생명의 길”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또 거짓 선지자에 대한 마지막 판단의 말씀이 22-23절에 나타나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아무리 많은 능력과 이적을 행할지라도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알아주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이 경고말씀들은 무엇보다도 “결과를 염두에 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오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3-14절의 말씀을 다시 읽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좁은 문 - 생명으로 인도 - 좁고 협착한 길 - 소수의 무리가
넓은 문 - 멸망으로 인도 - 크고 넓은 길 - 다수의 무리가

이 말씀 속에서 느껴지는 것은 무엇입니까?

“크다-작다 / 많다-적다 / 넓다-좁다 / 다수-소수”의 상반되고 극단적인 표현을 봅니다. 이러한 표현은 자연히 “쉽다-어렵다”라는 행동에 대한 표현을 유도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좁은 문”의 “좁다”는 뜻은 무엇일까요?

“좁다”라는 말을 설명하는 “협착하다”는 헬라어로 “테틀림메네”(tethlimmene)라는 말인데 이 말의 의미는 두 가지라고 합니다. 하나는 “좁게 한다”(make narrow)라는 뜻입니다. 이는 사람들이 밀쳐서 길이 좁아지는 경우를 말합니다. 어떤 유명한 사람이 길을 갈 때, 사람들이 모여들어 갈 길이 좁아지게 되는 그러한 경우를 말합니다. 두 번째 의미는 “압박 가운데서 짓누르는 경우”(pressed upon)를 말합니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짓누르고 핍박하면 그 사람이 점점 심리적으로 위축되고 죄여드는 경우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좁은 문이나 협착한 길이라는 것은 자연적으로 생겨진 길이라기보다는 인위적으로 좁혀진 길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2차 대전시 독일의 교회를 보십시다. 그 당시 독일 교회는 양분되어 있었습니다. 히틀러의 정치를 따르는 국가 교회와 히틀러(A. Hitler)를 반대하는 고백 교회로 나누어졌습니다. 둘로 나눠졌다고는 하지만, 그 차이는 엄청났습니다. 히틀러를 지지하는 국가 교회가 독일 전체 교회의 90%였고, 나머지 10%만이 히틀러를 반대하는 고백 교회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90%의 국가 교회에 속한 사람들은 주일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고백 교회에 속한 사람들은 신앙의 탄압과 방해를 받았습니다. 심지어 목사나 교수들은 교회나 신학교에서 쫓겨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1910년부터 1945년까지의 일제 강점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대부분 교회가 일본의 천황에게 신사참배를 하였습니다. 그 결과, 이들은 주일날에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반대로 극히 소수의 교회나 성도들만이 신사참배를 거부하였습니다. 그 결과, 이들의 교회는 문을 닫아야 했고, 여기에 속한 신자들은 공식적으로 예배를 드릴 수 없었습니다. 좁은 문이요, 협착한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오해해서는 안 될 한 가지 모습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려운 일이나 하기 힘든 일이라고 해서 무턱대고 좁은 길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히틀러는 “위험하게 살라!”라고 그 당시 독일의 젊은이들에게 외쳤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히틀러의 이 말에 매력을 느껴 히틀러를 따랐다고 합니다. 힘들고 어렵고 위험한 일이 물론 좁은 길일 수도 있겠으나, 이에 대한 기계적인 적용은 위험하다는 것 또한 알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예레미야서에 보면, 예레미야가 제시한 생명의 길은 어떤 길입니까? 그것은 이방나라 바벨론에게 항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인간적으로나 민족적으로 볼 때, 상당히 비굴한 것이요, 민족적 수치요, 민족을 배반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예레미야는 증거 합니다. 반대로 사망의 길은 어떤 길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벨론에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예루살렘 성에 거하고자 하는 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성안에는 하나님의 집인 예루살렘성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우리 가운데 있는데, 어떻게 이방민족이 여기를 점령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 예레미야 당시의 유대인들의 생각이요 신앙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이 바로 애국하는 길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이 길을 택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는 사망의 길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좁은 길이란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것은 판단의 기준을 하나님께 두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는 길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만을 따르는 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성경과 역사에 준하여서 좁은 길에 대한 이해와 자세를 확인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삶과 신앙의 자세는 어떤 것일까요? 네 가지 정도로 이 길의 의미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자세란 신앙생활에 있어서 늘 긴장을 갖는 자세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즉, 신앙생활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늘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과의 긴장 관계를 지니는 모습이어야 할 것입니다. 즉 “내가 믿는 하나님은 나를 믿고 계신가?”를 질문하면서 이에 대한 대답으로서의 삶을 신앙의 고백으로 삼고 살아가는 삶을 말한다고 하겠습니다.

둘째로, 좁은 문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신앙의 세계에 있어서 반드시 많은 사람이 따른다고 옳은 것이라고 여기고 사람의 수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상식이 통하는 가운데에서는 많은 사람이 따르는 길이 옳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갈등이 유발되는 상황에서는 반드시 많은 사람이 가는 길만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2차 대전 당시의 독일의 경우나, 일제 강점기의 우리 한국의 크리스천의 경우를 보더라도 그러합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고 따라 간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부화뇌동(附和雷同, blind following)하여 따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좁은 길은 고독한 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지향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은 그래서 고독한 길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적당히 타협했다면, 그 당시 유대 사회에서 랍비로서 종교적 지위와 명예와 인기도 충분히 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러한 길을 버리고 십자가의 길을 택하신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세 번째로 좁은 문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는 길입니다. 좁은 길이기에 동행하는 사람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참으로 외로운 길인 것입니다. 앙드레 지드(Andre Gide)는 이 예수님의 말씀을 배경으로 “좁은 문”이란 소설을 썼습니다. 거기서, “당신과 내가 함께 걷기에는 이 길은 너무 좁은 길”이라는 표현으로 좁은 길을 묘사했습니다.

우리의 삶에 때로는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 할 때가 있기에, 옆에 함께 해 줄 사람이 생기지 않는 그러한 영적 세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라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 10:37-38)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좁은 문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며 그 뒤를 따라 간다는 단순한 말씀입니다만, 여기에는 겪어야 할 인간적인 고뇌와 외로움이 함께 주어져 있는 모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좁은 길이 영생, 곧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네 번째로는 이러한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자에게 주어지는 유익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다음에 이 문으로 들어오는 사람에게 유익한 길잡이가 되어준다는 사실입니다. 좁은 길을 걷는 사람에게는 그 길에 자기의 발자취가 남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발자취는 다른 사람들이 이 길을 걷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오고 가는 넓은 길에는 발자국을 남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의 발자국이 남게 됨으로 내 발자국은 거기에 휩쓸려 없어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좁은 길에는 그 길을 걸었던 사람의 발자국만이 남아 있게 됨으로 그 좁은 길을 걷는 다른 사람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이정표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우리의 주님이 걸어갔던 그 길에 나의 발자국도 함께 있는 것을 본다면 우리의 삶이 정말 값지게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좁은 길은 우리에게 귀한 모습을 남게 해 줄 수 있는 복된 길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렇게 좁은 길을 택하시고 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증인된 모습은 다른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예수님의 이 좁은 길을 뒤따라감으로써 증거하는 증인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바로 이러한 좁은 길을 걸어가야 할 운명적 존재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는 이 좁은 길을 능히 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의 성령께서 동행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인간적으로 우리는 이 좁은 길을 함께 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굳이 앙드레 지드의 표현을 빌려서 말씀드린다면, “당신과 내가 함께 걷기에는 너무 좁은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길을 먼저 가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영은 함께 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좁은 길이라도 능히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길을 능히 감으로 우리도 예수님처럼 좁은 길에 귀한 발자국을 남길 수 있도록 하십시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시여!

예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염두에 두시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 오늘, 우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가르치신 이 예수의 말씀을 묵상합니다. 당신의 아드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말씀입니다. 당신의 아드님께서 이 말씀을 지키기 위해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감내하신 줄 압니다. 우리 역시, 이 말씀을 달게 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당신의 아드님이 가신 이 좁은 길을 우리도 선택하고, 그 길을 가기를 사모하고 좁은 문으로 들어설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을 홀로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아버지의 영으로 동행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홀로 걷는 이 좁은 길에서 만나는 당신의 모습을 우리의 발자국에 담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보다 뒤에 오는 자들이 용기를 갖고 이 좁은 길을 또한 걸을 수 있도록 하여주시옵소서. 좁은 길을 걷고자 십자가를 지신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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