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부활주일] 같이 죽어 다시 살아나기를! (빌 3:10-16)

  • 잡초 잡초
  • 222
  • 0

첨부 1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이 제2차 전도여행 중에 세운 유럽 최초의 교회입니다. 자주 장사 루디아의 집에서 시작된 빌립보 교회는, 또한 사도 바울이 특별한 마음으로 사랑했던 교회이기도 합니다. 바울이 저들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얼마나 사랑했든지,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를 사모하며, 이 일에 하나님이 증인>이시라고 고백할 정도였습니다.

그런 사랑에 부응이라도 하듯, 빌립보 교회 성도들 역시, 사도 바울을 끝까지 돌보고 책임졌던 아름다운 교회, 순전한 성도들이었습니다. 저들은 바울이 순교 당하던 마지막 순간까지, 그를 위해 기도했고 또 아낌없이 후원했던 정말 주 안에서 한 몸 이룬 형제자매들이었습니다. 사도 바울과 빌립보 교회 성도들, 저들은 특별한 사이였습니다.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이 누구보다 사랑하는 빌립보 성도들에게 친필로 적어 보낸 편지입니다. 바울이 순교하기 약 5년 전쯤, 로마 감옥에서 적어 보낸 편지라고 전해집니다. 당시 바울의 나이는 이미 60대에 접어 든 뒤였습니다. 그러므로 빌립보서는 바울의 유서 같은 편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럴 경우, 이 편지를 읽은 독자들은 대개 그동안 이루어 놓은 일들에 대한 평가와 반성, 그리고 고별사 등을 기대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주신 본문을 보니, 이것이 사도 바울의 마지막 편지일까 의아할 정도로 그 내용이 진취적이며 또한 젊습니다. 직접 들어보겠습니다. / 3:12-14 / (읽기) / 무어라 합니까? 천하의 사도 바울이 아직 얻은 것이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많은 일들을 이루어 놓은 바울이 하는 말, 난 아직 이룬 것도 없다는 겁니다. 해서 아직도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갈 뿐이라는 겁니다. 아직 내 인생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기에,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또 달려갈 뿐이라는 겁니다. 정말 도전이 되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3차에 걸친 전도 여행을 통해 수많은 교회를 세우고, 수많은 사람들을 전도했던 사도 바울이, 여러 서신을 통해 기독교 신학의 기초를 놓아주신 바울이, 아직도 붙잡지 못했다고 고백하는 <푯대>란 무엇을 말하는 걸까? 대체 그 푯대란 것이 무엇이기에 노 사도를 계속해서 달리게 만드는 것일까? 그 답이 12절에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 그렇습니다. 이것이 푯대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 그것이 푯대라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 12절 중간에 <오직>이란 단어가 보이는군요. 오직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간다!, 일단 거기 <오직>이란 단어에 표시하시고요. 그 다음 13절을 보니, <오직>이란 단어가 또 나오는군요. <오직 한 일>, 거기 <오직>도 표시하시고요, 두 <오직>을 하나로 연결해 두실까요?

여기서 먼저 주목할 점은, 두 가지 일이 아니라 오직 한 일이라고 고백한다는 점입니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사도 바울을 사로잡아 여전히 달리게 만드는 그것은, 오직 한 일이라는 겁니다. 그랬습니다. 사도 바울이 죽을 때까지 놓을 수 없었던 인생의 목표, 그것은 오직 한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오직 한 일>은 또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13절에 답이 있습니다. 13절의 끝 대목, <앞에 있는 것> 무슨 뜻인가? 오직 한 일이란 앞에 있는 그 것이라는 뜻입니다. 해서 앞에 있는 오직 한 일을 잡으려고,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오직 푯대를 향하여, 난 오늘도 달려간다는 겁니다. 아멘!

사랑하는 여러분, 뒤에 있는 것에 매몰되거나, 뒤에 있는 것에 붙들리거나, 뒤에 있는 것에 현혹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좋은 기억이든 나쁜 기억이든 상관없습니다. 뒤에 것에 붙들린 사람, 내일이 없습니다. 자꾸만 과거로 퇴행하는 사람, 오늘이 불행합니다. 아니오, 뒤에 것은 잊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오직 푯대를 향하여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힘차게 달려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2
그러나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사도 바울이란 사람은 본디,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 사라져야 한다고 진심으로 믿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울에게 갑자기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그를 사로 잡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에게 내 증인이 되라는 소명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랬습니다. 사도 바울이 먼저 주님을 찾아간 것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먼저 주님을 붙들었던 것 아니었습니다. 주님이 먼저 사도 바울을 찾아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를 사로잡으셨던 겁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 잡힌바 되었다는 말의 정확한 뜻입니다. 그런데 일단 그리스도께 예수께 사로잡히게 되자, 사도 바울의 가슴 속에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이 넘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전에 세상에 속해 살 때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기쁨, 해서 지금 감옥에서 써 보내는 빌립보서이건만, 그 안에 기뻐하라는 말이 수십 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주님께 사로잡히고 나니, 하루하루의 삶이 기쁨으로 충만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죽어 마땅한 죄인을 용서해 주신 십자가의 사랑을 생각만 해도 눈물이 흘렀습니다. 이 죄인을 용서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할 수 있도록 사도의 직분까지 허락하신 주님을 생각하면 할수록, 사도 바울은 다른 일을 생각할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께 사로잡힌 후로 그는 오직 한 일에만 집중했던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 한 분만을 사모하며, 그 분의 십자가를 자랑삼아, 평생을 집중했던 것입니다.

존경하는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 오늘도 나를 찾아오십니다. 부디 어떤 이유로도 그 분을 거부하지 마시고,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나를 찾아오시는 부활하신 주님을 깊이 만나시기 바랍니다. 오직 그 분께만 사로잡힌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3
놀라운 점은 일단 그리스도 예수께 사로잡히고 나자, 그 분을 점점 더 알고 싶어진다는 점이었습니다. 오직 그 분만을 더 깊이 알고 싶어졌습니다. 정말 그랬습니다. 주님께 사로잡힌 사도 바울, 주님만 더 알기를 원했고, 주님처럼 살기를 원했고, 주님 가신 길을 따라가기를 원했습니다. 한 마디로 인생의 가치관이 변한 것이지요.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실까요? / 3:7-9 / (읽기) / 주님 만나기 전에 그토록 자랑스럽던 것들이 주님 만나고 나니까 아무 것도 아니더라는 겁니다. 내가 그렇게 자랑했던 내 육신의 일들, 알고 보니 한 줌의 흙이요, 아니 배설물이었다는 겁니다. 해서 이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발견되고 싶다는 겁니다. 새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겁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의 소원대로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더니 드디어 이런 놀라운 고백을 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 3:10 / (읽기) / 같은 구절을 공동번역 성경은 이렇게 풀어줍니다. 비교하며 잘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리스도와 고난을 같이 나누고, 그리스도와 같이 죽는 것입니다. 아멘!>

서술어만 따라가 볼까요? 내가 바라는 것은, 알고, 깨닫고, 나누고, 같이 죽는 것이라는 겁니다.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리스도와 고난을 같이 나누고, 마침내 그리스도와 같이 죽고 싶은 마음, 문제는 이 중에 마지막 마음입니다. 알고 싶고, 깨닫고 싶고, 나누고 싶은 것까지는 그래도 따라할 만 합니다. 그런데 같이 죽고 싶다니요, 아니 다 먹고 살려고 하는 일인데, 어찌 같이 죽자고 하십니까? 반문이 절로 나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분명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와 같이 죽고 싶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님과 같이 죽고 싶다, 그리스도와 같이 죽고 싶다, 내가 주님과 함께 죽을 수만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그것이 사도 바울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난 아직 살아있다, 해서 그 거룩하고 숭고한 죽음, 아직 이루지 못한 십자가 소명을 향하여 계속 달려가야 한다는 겁니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러 가야 한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간은 모두 한번 죽어야 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입니다. 문제는 누구와 함께 살다가 누구와 함께 죽느냐는 겁니다. 무엇과 함께 살다가 무엇과 함께 죽느냐는 겁니다. 어떤 이는 주님 대신 평생 돈만 알다가, 돈의 능력만 뒤좇다가, 돈과 함께 고통당하다가, 그렇게 돈과 함께 죽습니다. 어떤 이는 주님 대신 권력만 알다가, 권력의 힘만 뒤좇다가, 권력과 함께 고통당하다가 권력과 함께 죽습니다. 어떤 이는 늘 술과 함께 살다가, 술과 함께 고통당하다가, 술과 함께 죽어갑니다. 어떤 이는 담배와 함께, 어떤 이는 꽃뱀과 함께, 어떤 이는 사탄과 함께 노닐다가, 그냥 그렇게 죽어 갑니다.

존경하는 여러분! 기왕에 한번은 죽는 것, 오직 우리 주님과 함께 사시다가 주님과 함께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죽으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가 평소에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평소에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내 인생 최대의 관심사가 곧 그리스도 예수, 나의 주님이어야 합니다. 그런 분들, 평소에 그리스도의 능력을 깨닫고 체험하게 됩니다. 그런 분들, 고난이 닥쳐와도 그리스도와 함께 거뜬히 이겨냅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그리스도와 함께 아버지의 나라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2005년도 부활주일에 드리는 축복의 말씀, 꼭 그리스도와 함께 사시다가 그리스도와 함께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아멘!

# 4
그런데 더욱 놀랍고 감사한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성도들에겐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11절 보실까요? / 3:11 / (읽기) 공동번역 성경으로 다시 읽겠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기를 바랍니다.>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한다!> 그는 오직 같이 죽어 다시 살기를 소망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점에 있어서 한 치의 의심도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을 수만 있다면,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해서 그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습니다. 죽음 너머의 푯대를 바라보았기에 그는 순교의 자리에 담대하게 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해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게 되었던 것인데요, 여기서 죽음을 넘어선 부활에 대한 확신과 소망을 고백한 사도 바울의 또 다른 서신 한 구절을 찾아 읽겠습니다. / 고전 15:35-49 / (읽기) / 이번 부활절기에 자주 꺼내 읽으면서 죽음과 죽음을 넘어서는 영원한 생명에 대하여 깊이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 5
다시 빌립보서의 본문으로 돌아오십니다. 빌립보서 3장 15절과 16절인데요, 15절의 첫 단어, 그러므로 이군요. 우리의 사도 바울,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께 붙잡힌 성도이므로, 그러므로, 이제 다른 생각하지 말고, 오직 이 한 생각으로 앞을 향해 나아가라고 권면하는 중입니다. 특히 16절의 말씀이 정말 은혜가 되는데요, 한번 읽겠습니다. / 3:16 / (읽기) / 괜찮다는 겁니다. 지금까지 잘 했다는 겁니다. 혹 실수가 있었어도 지금부터 잘 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흔들리지 말고, 겁먹지 말고, 돌아서지 말고, 그대로 앞을 향해 나아가라는 겁니다.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아멘!

정말입니다. 그동안 정말 잘 하셨습니다. 너무 너무 수고하셨습니다. 저는 우리 동광 가족들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릅니다. 우리 장로님들, 정말 귀한 분들이십니다. 우리 권사님들, 집사님들, 우리 청년들, 어린 아이에 이르기까지 어쩜 그렇게 사랑스러운지요, 해서 드리는 말씀, 사랑만 해 주시기 바랍니다. 좀 잘 했다고 칭찬해 주시기 바랍니다.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괜찮으니, 이제 앞을 향해 담대히 나아가자고 그렇게 격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특히 지난 24년의 세월을 하루 같이 이 동광 제단을 지켜 오신 동광의 1세대 어르신 여러분,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정말 애 많이 쓰셨습니다. 그러나 아직 뒤에 것을 자랑할 때가 아닙니다. 우린 아직 다 얻지 못했습니다. 우리 아직 다 이루지 못했습니다. 우리 아직 다 잡은 것도 아닙니다.

일단 뒤에 것은 잊으시기 바랍니다. 오직 앞에 있는 것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세워주시는 새로운 푯대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동광 역사에 처음으로 허락하실 희년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 주께 합당치 못하다 하셨습니다. 오직 주님께 집중하며, 우리 주님과 함께 살다가, 우리 주님과 함께 죽으십시다. 그렇게 같이 죽어 다시 사십시다. 주 성령께서 함께 하실 줄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의 아름다운 고백을 함께 나누며, 말씀 마당을 닫겠습니다. / 빌립보서 1:20-21 / (읽기) / 함께 잠시 명상 기도하며, 성만찬 준비하겠습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