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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우리의 소망 (고전 1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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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부활절은 성탄절과 더불어 기독교의 가장 큰 명절입니다. 성탄절은 구세주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고, 부활절은 그가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과 부활은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교리입니다. 탄생은 메시아를 보내주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된 것이요, 죽음은 구주께서 우리를 죄에서 속량하셨다는 것이요, 부활은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 시간 저는 부활절을 맞이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우리의 소망”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증거 함으로써 성도님들과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적으로 명백한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것은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사도들과 주님을 따르던 여자들이 그 증인들입니다. 유월절인 금요일 아침 9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서는 그 날 오후 3시에 운명하셨으며, 아리마대 요셉의 새 무덤에 장사되셨습니다. 유대인의 무덤은 바위를 파서 만든 것인데, 그 안에 시신을 넣어두고 입구를 커다란 돌로 막았습니다.

안식 후 첫날 곧 일요일이 새벽이 되었습니다. 해가 뜰 무렵에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가 예수님의 몸에 향품을 바르기 위해서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길을 가면서 그들은 서로 말하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무덤에 이르러 보니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수직하던 자들이 저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습니다. 천사가 여자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고 했습니다.

그 날 저녁에, 제자들이 방문을 닫고 앉아 있는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들 가운데 서서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이 영을 보는 줄 알고 놀라고 무서워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셨습니다. 또 이르시기를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셨습니다.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렸더니 제자들이 보는 데서 잡수셨습니다.

마침 그 자리에 도마가 없었습니다. 도마가 돌아오자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도마는 그들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했습니다.

그로부터 여드레를 지나서 도마를 비롯해서 제자들이 다 함께 방에 모여 있을 때였습니다. 방문이 다 닫혔는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가운데 서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셨습니다. 그런 다음, 도마에게 이르시기를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도마가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하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고 하셨습니다. 그 후에도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해변으로 제자들을 찾아 오셨으며, 감람산에서 오백 여 성도들이 보는 데서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 후에 예수님께서는 육신의 동생인 야고보에게 나타나셨으며, 그리고 기독교인들을 체포하려고 다메섹으로 달려가던 사울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그는 유대교의 골수분자로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증오했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순교할 때 그 자리에서 증인 노릇을 했습니다. 그 정도로는 성이 차지 않아서 대제사장에게 가서 기독교인들을 체포할 수 있는 권한을 받아 군졸들을 거느리고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다메섹 가까이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하늘로서 해보다 더 밝은 빛이 그를 둘러 비추었습니다. 그 빛이 얼마나 강렬했든지 사울은 그만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그 때 소리가 들리기를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고 했습니다. “주여, 뉘시오니이까” 그러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하셨습니다. 그 날 이후로 사울은 회심하고 자기가 핍박하던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이 같은 급작스러운 변화는 예수님의 부활이 아니고는 설명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을 버리고 도주했던 제자들이 어떻게 예루살렘 성전과 큰 거리에 서서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전할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죽고 부활하지 못하셨다면 어찌 사도들이 하나같이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일이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오늘날 기독교가 전 세계에 전파되고,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어 새 삶을 얻는 것은 죽음에서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고 살아나셨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와 죽음을 청산하셨음을 의미합니다.

아담 이후로 이 땅에 태어나고 죽은 사람의 수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으리만치 많을 것입니다. 이 땅에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한번 죽기 마련입니다. 이에 대하여 히브리서 9장 27절에는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예외는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죽음의 원인을 육신의 노화나 질병이나 사고에서 찾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으며, 죽음의 원인이 아담의 범죄에서 비롯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아담이 범죄하기 전에는 죽음이 없었습니다. 에덴동산은 상함도 없고 해함도 없고 죽음도 없는 낙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담의 범죄로 인해 이 세상에 죽음이 생겨났으며, 죽음은 인간들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되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기 죄 때문에 죽으신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죄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완전하신 인성을 갖고 계셨으나 죄가 없으셨으므로 자기의 죄 때문에 죽으실 이유가 없으십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 인생들과 다른 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죽은 지 사흘 만에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인류 역사상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이는 예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석가나 공자, 마호메트와 같은 성인들이 하나같이 죽음 앞에서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들의 무덤은 지금도 남아 그들이 죽음에게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천하를 정복했던 알렉산더 대왕도, 유럽을 지배했던 나폴레옹도, 중국을 통일했던 진시황도 다 죽어 무덤에 누워 있습니다. 세계적인 대 재벌들도 죽음 앞에서는 예외가 아닙니다. 죽음 앞에서 큰소리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전국에 흩어져 있는 묘지의 수가 약 2천만 기에 달하며, 한해에 여의도 면적의 1.2배가 묘지로 변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매년 늘어나는 묘지 때문에 고심하고 있습니다. 이 땅의 수많은 무덤은 사람이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존재임을 말없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무덤을 크고 화려하게 장식하건, 화장해서 가루를 산과 강에 뿌렸건 간에 죽음에게 삼킨바 되었다는 점에서는 차별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은 텅 비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고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23)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 준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24)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행 2:)고 증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은 그가 우리의 죄를 청산하셨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을 부활장이라고 하는데, 부활에 관한 위대한 교리를 설명해 줍니다. “17)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8)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려고 죽으셨는데, 만일 죽고 살지 못하셨다면 그가 우리의 구세주이신 것을 입증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인 사실을 입증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믿음은 토대를 상실한 집과 같아서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우리는 여전히 죄인으로서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으므로 이제 우리의 죄가 깨끗하게 청산되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4장 25절에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누가 성도님들에게 “당신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셨으므로 나는 나의 모든 죄가 완전히 용서 받았다는 사실을 믿습니다”라고 대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죽음과 관련해서는 무엇이라고 답할 수 있을까요? 예수 믿는 사람들은 죽지 않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도 죽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이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죽음의 성격을 살펴보면, 그리스도인들과 비 그리스도인들이 전혀 다릅니다. 비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죄에 대한 심판이지만, 그리스도인에게는 더 이상 죄에 대한 심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영원한 천국으로 들어가는 관문에 불과합니다. 죽음의 저주가 제거되었으므로 하나의 통과 의식과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죽은 것을 죽었다고 하지 않고 잠잔다고 하는 것입니다. 잠자는 것은 깨어날 것을 전제로 합니다. 여기서, 잠자는 것은 우리의 육신입니다. 한 평생 수고함으로 피곤해진 육신이 깊은 안식의 잠을 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은 천국에서 깨어나서 주님과 함께 거하게 될 것입니다.

언제까지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까지입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실 때, 천국에 간 성도들을 데리고 오실 것입니다. 그 때 무덤 문이 열리고 잠자던 육신이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성도들은 부활한 신령한 몸을 갖고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죽음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는 곧 그를 믿는 성도들의 승리요, 그의 부활은 곧 성도들의 부활의 보증이 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고린도전서 15장 20절에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에 대한 확실한 보증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추석이 되면 햅쌀로 밥을 지어 먹습니다. 햅쌀로 지은 밥을 먹으면서 우리는 추수철이 되어 대대적인 추수가 시작될 것을 예감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보면서 장차 성도들의 부활을 확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절망의 역사를 소망의 역사로 바꾸었습니다.

인류 역사를 전쟁사라고 합니다. 얼마나 전쟁이 빈발했으면 그렇게 말할까요? 피치 못할 사정으로 전쟁을 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겠으나 대부분의 전쟁이 권력자들의 야망에서 비롯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결국, 죽고 다치고 피해를 보는 것은 힘없는 백성들입니다.

그런가하면 인류의 역사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억압하고 착취해온 역사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양반과 상놈의 제도가 철폐된 지가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미국에서는 불과 150년 전만 해도 노예제도가 시행되고 있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강대국들은 약소국들을 침략해서 착취합니다. 우리나라는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36년 동안 식민 지배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요즘 우리나라와 일본이 독도를 놓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것도 같은 선상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나라가 강대국이라면 일본이 감히 독도를 자기 땅이라고 우기지 못할 것입니다. 양심이나 법이 있지만, 이해관계 앞에서 양심은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실제로는 주먹이 법보다 가깝습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여성들과 아이들의 인권이 유린당해 왔습니까? 지금도 우리 사회에는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인신매매에 희생당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에서는 어린 아이들이 인신매매의 표적이 되어 있습니다.

이번에 서남아시아의 쓰나미 재난이 발생했을 때 인신 매매범들이 부모를 잃어버린 어린이들을 수백 명이나 납치해 갔다고 합니다. 요즘 우리나라의 중고등학교에서 일진회인지 뭔지 하는 폭력모임이 있어서 선량한 학생들이 괴롭힘을 당한다고 합니다. 십대의 청소년들이 벌써부터 악한 어른들 흉내를 냅니다. 이와 같은 인간 사회의 추악함을 들추어내려면 끝이 없을 것입니다. 이 세상은 밝은 면보다는 어두운 면이 훨씬 많습니다. 양심 세력보다는 불의한 세력이 더 큰 소리를 냅니다. 이와 같은 현실은 우리를 낙심케 하고 절망케 만듭니다.

그러나 이 세상이 악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의 첫 아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쳐 죽였습니다. 인간들이 얼마나 악했든지 하나님께서는 대홍수로 인간들을 멸하셨습니다. 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을 내려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셨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말씀하기를 “6) … 그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7)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벧후 3:)고 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인류 역사는 절망의 역사에 불과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인류 역사는 좋은 방향으로 개선되어 나가리라는 소망을 가질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가정은 사랑의 보금자리가 되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개인의 심령은 탐욕과 미움이 지배하는 지옥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사정이 다릅니다. 이 세상에서는 아무 소망도 찾을 수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산 소망이 있습니다. 아프리카에 가서 흑인들을 사냥해다가 미국 등지에 팔아넘기는 노예선의 선원이었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우리가 잘 아는 이 은혜로운 찬송을 작사한 존 뉴톤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인정도 눈물도 없었던 존 뉴톤이 예수 안에서 변화 받아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봉사의 삶을 살았습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로마 세계는 노예제도가 성행했으나 교회 안에서는 주인과 노예가 한 형제로서 포옹했습니다. 한번은 사도 바울이 한 사람을 만나 전도했는데, 알고 보니 그 사람은 신실한 그리스도인인 빌레몬의 집에서 도망쳐온 오네시모라는 노예였습니다. 오네시모는 사도 바울을 만나 예수님을 믿어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빌레몬에게 편지하기를 “이 후로는 종과 같이 아니하고 종에서 뛰어나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몬 1:16)고 했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주인과 종이 따로 없고 서로 사랑하고 섬기는 관계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만 국가 간의 전쟁이나 분쟁을 종식시킬 수 있습니다. 메시아께서 다스리실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이사야 선지자는 이같이 묘사했습니다.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지 아니하리라”(사 2:4)

부활의 주님께서 만왕의 왕으로 다스리시는 그 날이 오면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이 현실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 날을 앞당기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은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빛이 임하면 어둠이 물러가듯이, 복음의 빛이 비칠 때 악과 불의가 사라집니다.

주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의 평화로운 상태에 대하여 성경은 이르기를 “6)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7)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8)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9)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 11:)고 했습니다.

이리와 같고, 표범과 같고, 사자와 같고, 곰과 같고, 독사와 같이 사납고 거칠고 자기만 아는 사람이라도 예수님께서는 얼마든지 양과 같이 온순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으로 만들 수 있으십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고 다시 살지 못하셨다면 지금까지 말씀한 내용은 한갓 공상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인류의 역사는 끝없는 절망과 어둠의 나락으로 추락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기에 성경의 예언대로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의가 불의를 이기고, 사랑이 미움을 이기고, 생명이 죽음을 이겼음을 온 세상에 밝히 드러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멀리 떨어져 계신 것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하신 약속은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는 것이었습니다. 몸으로는 떠나 계시나 영으로는 우리와 늘 함께 하십니다. 다시 말씀하면, 성령 안에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오늘 부활절을 맞이해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축하하는 성도님들의 심령에 기쁨이 충만하시길 바랍니다. 아울러 주님 강림하시는 그 날까지 부활의 주님을 힘입어 날마다 악을 이기고 시험을 이기고 죽음의 세력을 이기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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