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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부활 신앙을 가지고 사십시오 (마 28: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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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한규 목사 (분당샛별교회)

< 왜 하나님은 죽음이 있게 하셨을까요? >

며칠 전에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있었습니다. 아빠를 배웅하던 초등학교 1학년 딸이 아빠를 조금 더 보고 싶다고 아빠가 운전하는 트럭을 따라 가다가 넘어져서 트럭에 치여 죽은 것입니다. 아마 그 아빠는 살고 싶은 생각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도 먼저 죽은 딸을 위해서라도 아빠는 열심히 살아야 할 것입니다.

얼마 전에 둘째 딸 한나가 학교에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차를 타고 교회로 가다가 그 모습을 보고 나도 모르게 “한나야!”하고 불렀습니다. 그러자 한나가 순간적으로 골목길 차도를 건너 뛰어오려고 했습니다. 뒤에서는 차가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다급하게 한나에게 “오지 말라!”고 소리친 적이 있습니다.

골목길이나 아파트 단지 내에서는 차를 절대 서행해야 합니다. 급한 경우에도 철저히 방어 운전을 하고, 아이들이 갑자기 튀어나올 것을 항상 대비해야 합니다. 그리고 승합차를 가지고 후진을 할 때에는 절대 조심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매일 교통사고가 없게 해 달라고 우리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일이 자녀를 사고로 잃는 일입니다. 그때에는 어떤 위로도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평생 마음에 상처를 가지고 삽니다. 이번 사건에 대해 어떤 네티즌은 댓글을 썼습니다. “왜 하나님은 고이즈미 같은 사람은 죽게 하시지 않고 착한 아이를 죽게 하셨을까? 그것을 보면 하나님은 없는 것이 분명하다.”

< 죽음이 있어야 삶이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

왜 하나님은 죽음이 있게 하셨을까요? 너무 엄청난 질문이라 대답하기는 힘들지만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보면 이렇게 생각도 해봅니다. 죽음이 있어야 사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한 청년이 타 주에서 공부를 하는데, 큰 자격시험을 앞두고 열심히 공부하는 자식을 위해 부모가 시험 전날 전보를 띄웠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결코 용기를 잃지 말기를 바란다. 너의 어머니와 아버지가(Your mom and dad).” 그런데 우체국 직원이 말을 잘못 알아들어서 마지막 구절을 Your mom's dead(너의 어머니가 죽었다)라고 보냈습니다.

결국 아들은 시험을 포기하고 12시간을 자동차를 몰고 집으로 왔습니다. 그런데 집에 도착하니까 어머니가 그를 맞이했습니다. 곧 그는 전보가 잘못된 것을 알고 안도하며 말했습니다. “어머니! 저는 오늘 인생의 두 가지 큰 경험, 즉 죽음의 고통과 삶의 환희를 한꺼번에 경험했어요. 지금 어머니가 살아계신 것만 해도 감사해요.”

어떻게 보면 죽음이 있기에 삶의 기쁨과 행복과 감사를 더욱 느끼게 됩니다. 또한 죽음이 있다는 사실은 사람을 얼마나 겸허하게 만드는지 모릅니다.

어떤 분이 몸이 아파 병원에 갔더니 암이라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마음속에 삶에 대한 후회가 밀려왔습니다. “좀더 용서하며 살 걸, 좀더 베풀며 살 걸, 좀더 건강을 돌보며 살 걸...” 지옥에 가면 사방에서 가장 많이 들리는 소리가 ‘껄껄껄 소리’라고 합니다.

집으로 돌아오는데 열심히 살았지만 행복하게 살지 못한 삶이 원망스러웠습니다. 악착같이 돈을 모으고 아파트를 넓혔지만 가족들과 여행 한번 하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되었습니다. 이틀 후, 마음의 준비를 하고 병원에 입원하려고 갔는데 의사 선생님이 말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엑스레이를 다시 살펴보았는데 암이 아니라 작은 종양이었습니다.”

갑자기 삶에 밝은 햇살이 밀려오는 것 같았습니다. 세계가 다르게 보였습니다. 우주 만물이 다 아름답게 느껴졌고, 들풀의 합창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전봇대가 새롭게 보였고, 항상 마시던 공기가 그렇게 상쾌한 줄 처음 알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소중하게 보였고, 행복이 무엇인지 조금 알 것 같았습니다. 미움과 질투와 남을 판단하는 마음이 없어지고, 허영심과 욕망이 사라지고,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그분은 “이제부터 하나님을 잘 섬기고, 가족과 이웃을 사랑하며 살자!”고 굳게 다짐했습니다.

우리가 그런 새 삶을 얻은 감격으로 살면 어떻게 교만한 모습을 하고 남과 싸우며 살려고 하겠습니까? 사람이 욕심을 부리고, 염치없이 살고, 교만하게 사는 큰 이유는 아직도 죽음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이 교만하지 않도록 죽음이 있게 하셨을 것입니다. 죽음이 가르쳐주는 가장 큰 교훈은 겸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평소에 겸손하기를 힘쓴다면 죽음이나 죽음과 같은 고통은 현저히 줄어들 것입니다.

어느 날, 소설로 유명해지면서 타락의 길을 걷던 프랑스 작가 빅톨 위고의 외동딸이 센 강에서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위고는 딸의 죽음 앞에서 자기의 타락한 삶을 후회하며 통곡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장례식 후, 위고는 딸의 방에서 딸이 자기에게 보낸 편지를 발견했습니다. “아빠! 이제는 꼭 집에 돌아오세요. 집에는 하나님과 어머니와 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만약 아빠가 집에 돌아오지 않으면 아빠를 돌아오도록 제가 이곳을 떠날래요.”

결국 위고는 그 딸의 편지를 읽고 자기의 타락한 생활을 완전히 정리한 후, 봉사의 삶을 실천하며 뭇 사람의 존경을 받고, 나중에 프랑스 정부의 교육부장관까지 지냈습니다. 나중에 그가 자서전을 통해 고백합니다. “저는 딸의 죽음으로 새 삶을 찾았습니다. 죽음은 고통스럽지만 인생의 교훈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입니다.”

< 부활 신앙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

죽음은 있어야 합니다. 죽음은 현실입니다. 살아 있는 사람이 반드시 죽게 됩니다. 남이 죽는 것을 보다 보면 어느새 나의 차례가 옵니다. 하나님이 죽음이 있게 하신 것은 악한 의도 때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서 부활을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믿고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 죽음은 영생으로 들어가는 관문일 뿐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현실로 인정하고 부활 신앙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부활 신앙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우리는 부활 신앙을 가진 성도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오늘 본문을 통해서 몇 가지만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자신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십시오.

본문 1절 말씀을 보면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 본 사람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한 마리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자세히 보면 우리에게 큰 도전을 주는 말씀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주님의 부활을 제일 먼저 보여줄 사람은 12제자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베드로에게 먼저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전에 일곱 귀신이 들렸던 비천한 여인이었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그녀는 로마군인에게 몸을 파는 창녀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치유 받고, 그 후 주님을 가장 사랑했고, 주님의 무덤도 제일 먼저 찾았기에 그녀는 역사상 가장 먼저 주님의 부활을 목격하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름 있고, 재능 있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추구하는 자의 것입니다.

당시에 여성들의 지위는 형편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역에 여성들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누가복음 8장 1-3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복음 사역을 도왔던 3명의 여성의 이름이 나옵니다.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그리고 수산나입니다. 그 3명의 대표적인 여인을 비롯해서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예수님의 사역을 도왔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사실 열두 제자만큼 소중한 사람들이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수고한 여인들이었습니다.

지난 몇 년간 우리 요삼일육선교회(John316 Mission)를 통해서 나름대로 많은 선교와 구제를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우리 교인들도 물론 수고했지만 우리 교인 외에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수산나와 같은 은밀하게 헌신하는 분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을 비롯해서 여러분들이 함께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헌신했기에 수많은 선교사님들의 사역에 동참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쓰십니까? 대개 보면 유명한 사람보다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쓰십니다. 사실 사람은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성경을 보면 믿음이 좋던 사람들도 다 넘어진 전력이 있었습니다. 불의 선지자 엘리야도 죽음의 위협에서 광야로 도망가 자살을 생각했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실상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희망은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붙잡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잡아주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잡아주시면 부족하고 보잘것없는 사람도 얼마든지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힘이 있고 유명한 사람들이 건설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개 조용히 헌신하는 이름 없는 헌신자들을 통해서 건설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보잘것없는 존재처럼 느껴져도 자신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큰일을 이루시고, 큰 뜻을 펼치기를 원하십니다.

가끔 가다 우리 권사님들 모이는 자리에 가서 제가 감사 표시를 하면 권사님들이 항상 하시는 말씀이 “내가 무슨 도움이 되느냐? 별로 하는 일도 없는데...”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저는 권사님들이 계신 것만 해도 든든합니다. 권사님들이 행복해하는 모습만 봐도 힘이 납니다.

부모님께 효도하는 자녀는 반드시 축복받듯이, 연로하신 어르신들을 잘 모시는 교회는 반드시 축복받는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러므로 어르신들은 교회에 와서 대접받는 자리에 가만히 앉아만 계시는 것도 교회에 큰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르신들도 “내가 이렇게 중요한 존재이구나! 내가 이렇게 큰일을 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현재의 위치에서 그 자리에 있는 분들 중에 쓸데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내가 우연히 그 자리에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 필요해서 그 자리에 있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넘치는 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2. 현재의 위치에서 새롭게 출발하십시오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왔을 때 주의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말했습니다. 그 천사의 말이 5-7절에 나옵니다. “너희가 예수님을 찾는구나! 예수님은 말씀대로 살아나셨다. 빨리 제자들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예수님이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서 계실 것이니 거기서 뵙도록 하라.” 그리고 10절 말씀을 보면 다시 예수님이 직접 나타나셔서 다시 한번 말씀하셨습니다.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왜 주님께서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했을까요? 갈릴리 지역은 우리나라로 말하면 두만강 인근 지역으로 아주 멸시와 천대를 받았던 곳입니다. 가깝고 화려한 도시 예루살렘에서 만나면 더 좋고, 그게 아니면 예루살렘 인근 촌락 중에서 12제자 외에 주님의 제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베다니에서 만나면 더 좋은데, 왜 그 먼 갈릴리 시골 지역까지 가서 만나자고 했을까요?

갈릴리는 예수님의 복음 운동이 시작된 곳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갈릴리에서 만나자는 것은 그곳에서 첫 사랑을 회복하고 다시 시작하자는 뜻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절을 맞이할 때마다 “첫 사랑을 회복하고 다시 시작하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현재의 위치에서 다시 좋은 일을 계획하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때로 어려움이 있어도 좋은 일을 포기하지 말고 좌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늦었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이 탓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환경 탓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본 탓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부터 부활하신 주님과 다시 시작하면 반드시 좋은 길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사실 우리에게 있는 고난도 마음을 새롭게 먹고 다시 시작하라는 하나님의 사인입니다.

오래 전에 한 아버지에게 사랑하는 외아들이 있었습니다. 이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다 해주었습니다. 이 아들이 대학에 들어가자 아버지는 논 팔고 소 팔아 아들의 등록금을 대주고 돈이 필요하다는 연락이 오면 빚을 내서라도 대주었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그 아버지의 은혜도 모르고 객지에서 탕자처럼 놀러 다녔습니다.

어느 날, 아들 소식을 듣게 된 아버지는 자기가 아들이 돈을 달라는 대로 다 주는 것이 아들을 위한 길이 아님을 깨닫고 더 이상 돈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얼마 후에 화가 난 아들이 전보를 보냈습니다. 당시 전보는 10자를 넘지 말아야 했기에 이렇게 보냈습니다. “굶어죽을 상황임. 아들.” 그 전보를 받고 아버지는 마음이 아팠지만 답신을 했습니다. “굶어죽어도 모름. 아버지.”

그 전보를 받고 화가 난 아들은 아버지와 인연을 끊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의 분노를 지닌 채, 살기 위해서 닥치는 대로 일을 했습니다. 그 후 20년이 지났습니다. 삶이 안정되고 자기도 자식을 키우면서 그 자식이 하는 모습을 보니까 점차 아버지 생각이 났습니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아버지의 전보를 받고 마음의 분노가 생겼지만 그 전보를 받은 이후로 자신의 삶이 변화된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결국 아빠와 인연을 끊은 지 20년 만에 고향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이미 아버지는 그 1년 전에 세상을 떠났고, 유서 한 장을 남겼습니다. “아들아! 너를 기다리다가 먼저 간다. 네가 분발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그렇게 전보를 보냈다. 전보 후에 너를 하루도 잊어본 날이 없고 하루도 고통스럽지 않은 날이 없었다. 정말 너를 사랑했다. 부디 이 애비를 원망 말고 행복하게 살기 바란다.” 그 편지를 보고 이 아들은 아버지가 자기 가슴에 대못을 박은 줄 알았는데, 오히려 자기가 아버지 가슴에 대못을 박은 것을 깨닫고 대성통곡을 했다고 합니다.

이 아버지의 마음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새롭게 분발하고, 새롭게 출발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고난도 허락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축복을 보류하고 잠시 외면하시는 것 같은 이유는 “좀더 분발하라!”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고난 중에 하나님의 가슴에 대못을 박지 말고 고난 중에 무엇인가 새롭게 할 일을 찾아 다시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부활절은 죽었던 나의 비전을 살리고, 내 헌신과 사랑과 용서를 살리고, 행복한 가정생활과 교회생활을 위해 다시 출발하는 날로 삼아야 합니다.

3. 기쁨과 평안을 가지고 사십시오.

오늘 본문 8절 말씀을 보면 두 여자들은 무덤에서 주님이 부활했다는 소식을 듣고 무서움도 있었지만 큰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을 빨리 떠나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가려고 할 때 주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평안하뇨?”하고 말씀하셨고, 11절에서는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장면은 우리가 부활의 능력을 가지고 기쁨과 평안이 넘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도전을 줍니다.

저는 신앙생활 초기에는 인상을 쓰면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인상을 쓰면 쓸수록 신앙이 깊은 줄 알았습니다. 웃어도 약간 미소만 지어야지 경건한 교회 안에서 크게 웃으면 마치 죄를 짓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하면서 진지하게 인상 쓰는 것보다 미소를 품고 기쁨이 넘치는 모습을 하는 것이 더 깊은 신앙의 증거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한 미국 선교사님이 한국에서 설교하는데 강단 아래를 보니까 성도들의 표정이 어둡고, 심각하고, 마치 싸움하러 나온 표정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통역 목사님에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저렇게 성도들의 표정이 어두운데 제 설교가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나요? 계속 설교해도 되겠습니까?” 그때 통역 목사님이 할 말이 없어서 “아마 십자가를 묵상해서 그럴 겁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진지하게 묵상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묵상한 후에는 부활의 영광까지 바라보고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100미터 달리기를 하는데 80미터까지만 달리면 아무리 빨리 달려도 소용이 없듯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십자가까지만 묵상하고 부활의 영광까지 생각이 미치지 않으면 뭔가 중요한 것이 빠진 셈이 됩니다.

진짜 믿음은 얼굴과 언어에 나타나 있습니다. 항상 기쁜 얼굴, 기쁨이 넘치는 언어생활이 있어야 합니다. 어려워도 기뻐해야 합니다. 왜 어려워도 기뻐할 수 있습니까? 부활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소망이 있었기에 빌립보서 1장 21절에서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문화에서는 죽음과 관련된 것은 대개 “재수 없다!”고 합니다. 집 근처에 공동묘지가 들어서면 땅값이 떨어진다고 질색을 합니다. 그러나 서양에서는 묘지 근처가 조용하고 좋다는 이유로 오히려 땅값이 비싼 경우도 많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엘리베이터에도 4층은 영어로 F라고 적어 놓습니다. 집 호수도 101호, 102호, 103호는 있는데 104호는 생략하고 105호로 넘어갑니다. ‘넉 사(四)’자와 ‘죽을 사(死)’자는 전혀 다른데도 그런 미신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하면 ‘목사(牧師)’란 말은 절대 쓰면 안 됩니다. ‘나무에 목매 죽은 사람’이란 뜻으로 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런 식으로 하면 ‘사(士,師)’자 들어간 신랑감과 결혼하면 집안이 쫄딱 망해야 합니다.

우리는 헛된 미신에 사로잡히지 말아야 합니다. 문제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더 죽을 일만 생기고, 죽음과 불행의 그림자가 신나서 찾아옵니다. 우리 성도는 죽음을 십자가와 관련시키고, 죽음 이후에는 부활의 찬란한 영광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항상 기뻐하고, 마음의 평안을 가지고, 범사에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죽음과 불행의 사자가 오다가도 놀래서 도망칠 것입니다.

찬송가 2장의 영광송은 후대에 곡이 붙여졌지만 가사는 초대교회 때 사도들이 순교하기 위해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마지막으로 부르던 찬송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께 찬송과 영광을 돌려보내세/ 태초로 지금까지 또 영원무궁토록 성삼위께 영광 영광.” 죽음의 형장에 끌려가는 사람이 “성삼위께 영광을 올리세!”라고 찬송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그것이 바로 부활 신앙의 힘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힘과 능력과 평안과 기쁨과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말기 암 환자들의 마지막 길을 섬겨주는 사역을 호스피스 사역이라고 합니다. 그 사역을 하는 한 목사님의 얘기에 의하면 그분 시설에 들어오는 환자들의 평균 입소 기간은 25일이라고 합니다. 그 기간 동안 환자들은 잠을 못 이루는 경우가 많은데, 그 이유는 고통 때문이 아니라 공포감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때 의지할 대상이 없으면 엄청난 공포감이 밀려온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자신을 맡긴 사람은 평안하게 임종을 맞이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당해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 세상에서도 끝까지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고, 세상을 떠난 후에도 영원히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때를 따라 우리의 모든 필요와 일용할 양식도 채워주실 것입니다. 공중의 새도 하나님께서 기르시는데 우리는 그 새들보다 귀하지 않으냐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 주님이 오늘도 예배하는 우리와 함께 하심을 생각하며 우리는 항상 기뻐하며 담대하게 살아야 합니다.

오사마 빈 라덴을 추종하는 알 카에다 조직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죽는 순간까지 싸웁니다. 온 몸에 폭탄을 안고 죽는 하마스 자살 폭탄 지원자들을 보십시오. 그 조직에는 당장 자살 폭탄이 되려고 10-20명가량의 청년들과 여자들도 대기하고 있습니다. 이방 신앙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용감한데, 참된 신앙을 가진 우리는 더욱 용감하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신 우리의 아버지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셔서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고 계십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이 세상을 성공적으로 살 수 있도록 지혜와 명철을 주시고, 모든 위험과 사단의 유혹에서 지켜주시고, 우리 영혼에 부활의 소망을 일깨워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당해도 두려워하지 말고 항상 철저한 부활 신앙을 가지고 담대하고, 넉넉하고, 평안하고, 또한 열심히 사는 복된 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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