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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난주일] 슬픔으로 얻어지는 것 (고후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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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박세종 목사

욥기 2:7-9절을 읽겠습니다.
"사단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울러가서 욥을 쳐서 그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게 한지라.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사람에게 시련이 닥칠 때 보편적으로 이런 반응을 나타냅니다.
"사람을 욕하고 죽으라"
그 마음이 거칠어집니다.
원망하게 됩니다.
반항적인 모습을 나타냅니다. 
왜 왜 왜 이런 시련을 주시는가?
하며 화를 내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악으로 대하시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바로 이럴 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올바르게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고의로 재난을 만드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일부러 병들게 하지도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재미가 있어서 실패를 당하거나 아픔이 되는 여러 가지의 일들을 절대로 만드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시는 것일까요?
이 문제를 속시원하게 답해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후련한 대답을 찾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어쨌든 사람이 당하는 모든 고난은 하나님께서 만드시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고통은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위대한 설교가였던 필립 부룩스는 만일 자신에게 왜 이 세상에 고통이 발생하는 가를 설명하라면 차라리 두 귀를 막고 질문 자체를 못들은 것으로 여기겠다 하였습니다.

확실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통과 슬픔은 우리를 미워하시기 때문에 내리신 하나님의 형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아무리 훌륭했었던 성인이었을 찌라도 그들도 고통과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신앙인들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생각이 있는데 심장마비, 암, 교통사고 그밖에 갑자기 생겨나는 사고가 반드시 하나님의 형벌이라는 생각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고통받는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이상하게 들릴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만일 손바닥을 바늘로 푹 찔러도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면 이게 더 심각한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고통은 괴로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두 번째로는> 조금만 어려움이 있어도 아! 이거 내가 잘못해서 내 죄 값이지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그렇게 처참하고 비참하게 죽이시면서 "아! 내 인생은 실패작이었어! 나에게 주어진 사명을 잘 담당하질 못해서 나는 이렇게 죽는다. 내가 죽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셨나요?

어떤 분은 자녀나 배우자를 잃고 상심한 가운데 사시는 분이 계십니다.
어떤 사람은 60년이 넘도록 함께 사시는 분들도 계신데 왜 어떤 사람은 30대 40대에 심지어 20대에 혼자 남아야 합니까?
그런 분에게 "넌 그게 너의 죄 값이야! 네가 인간답게 살지를 못해서 그런거야!"하고 그 누가 손가락질을 할 수 있겠습니까?
집사님이세요?
권사님이 그럴 수 있습니까?
사실 이럴 때 할 수 있는 말이 있다면 오직 하나
"할말이 없습니다"입니다.
그 누구도 설명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면 왜 신앙인에게 고통이 오는 걸까요?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고통을 허락하신 것일까요?
첫째> 고통은 우리 영혼을 순수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고통은 쓸모 없는 것들을 다 녹여 버립니다.
그리고 주님만을 의지하며 살게 하는 순수한 힘이 있는 것입니다.
슬픔이 옵니다.
괴로움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을 롬 8:26에서 "우리를 도우시는 성령님께서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신다"
여기 "말할 수 없는 탄식이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짓이겨지는 아픔
번민하는 것.
한숨을 짓는 것, 뼈아픈 고통이 온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이 왔느냐 하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가슴을 두드리며 자신을 탓하기에 앞서서 우리는 사람답게 그저 슬퍼해야 합니다.
괴로워해야 합니다.
너무 너무 고통스럽다고 울부짖고 뒹굴어야 합니다.

슬픔을 표현할 수 있다면 너무나도 좋은 것입니다.
실컷 울 수 있어도 좋습니다.
어디에 도망가서 숨어있어도 좋구요 한숨이 터진들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평생을 한숨이나 짓거나 울부짖어서는 안됩니다.
이 한숨을 찬양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반문할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입니까?

내 사랑하는 아내가 내 남편이 저 차디찬 얼음 땅속에 묻혀 있는데 어떻게 나보고 찬송하란 말입니까?
어떻게 그럴 수 있냐구요?

그럴 수 있습니다.
사 61:3에 보면
"희락이 기쁨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리라" 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약속입니까?

슬픔대신 희락을 재대신 화관을 근심대신 찬송을 찬송의 옷을 주셨네

뉴욕 어느 병원에 가면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함"
이라는 글이 벽에 붙어 있습니다.
그 내용이 이렇습니다.

"나는 목적을 이루려고 하나님께 힘을 구했는데
대신 약해져서 겸손과 순종을 배웠습니다.
나는 더 큰일을 하려고 건강을 구했는데
건강대신 병을 얻어서 알지 못한 사람들의 고통을 위로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행복 하려고 부를 구했는데
오히려 가난하기에 지혜를 얻었습니다.
나는 사람에게 찬양 받으려고 높아지려 했는데
대신 낮아져서 섬김을 배웠습니다.
내가 구했던 것을 얻지 못했으나
너무 많은 것을 소유하였습니다."

말하지 못했던 것까지도 모두 응답을 받았습니다.
나는 너무 행복한 사람입니다.

위대한 선지자들도 모두 고통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고난 받는 십자가의 종"이셨습니다.
이분들은 분명히 위대하신 분들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여 주신 분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에게 찾아온 고통은 오히려 이분들을 더 위대한 인물이 되게 하였습니다.

위대한 사람이 되려고 일부러 차도를 횡단보도 아닌데서 건넌다거나 농약탄 물을 마신다거나 그러진 마세요.
망치로 내리 치면서
쇳덩어리가 그 모양이 바뀌어집니다.
나무를 뚫는 못의 아픔이 나무에게 있을 때 한 채의 집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잊지 마세요!
고통은 나를 더 위대하게 만들어 주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시 119:67에 보면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하였습니다.

두 번째로> 고통은 있으나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은 주시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고전 10:!3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않으신다"

어떤 분들은 대화 중에 "안된다"는 말을 사용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대체로 똑똑하신 분들이 그런 말을 잘하시더군요.
안된다. 안된다.
그러나 사람이 살아가면서 안되는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왜냐구요?
안되는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질 않기 때문입니다.
십리 길은 어렵지만 한 걸음씩 한 걸음씩 나아가 보면 그 길은 쉬운 길이 되는 것입니다.
참고, 참고 잘 참으면서 한 걸음씩 하루씩 살아 나가면 슬픔도 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 하였습니다.
마 28:20에서는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언제나 함께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아니! 유행가 가수들도
어머나 어머나 이러지 마세요 하면서도
세월이 약이겠지요 하면서
쨍하고 해뜰 날 돌아온단다 하는데
"말할 수 없는 탄식 중에서도 우리를 도와 주시는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어찌 이길 수가 없겠습니까?"
단지 안된다 하고 가슴의 문을 스스로 닫았기 때문입니다.
이젠 절대로 안된다 하지 마세요!
된다! 된다! 된다! 다시 해보자!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지난번에 미국에 부흥회 갔을 때 제 발에 향수를 뿌리셨던 분을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분을 제가 3번 만나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함께 식사하는 것이 너무나도 소화가 안될 정도로 우는 소리요. 들리는 건 한숨 내 쉬는 소리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식사 후에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도와주셔서 이 고난의 터널을 지나 승리케 해달라고 그리곤 얼마 후에 그 교회에 두 번째로 부흥회를 가게 돼서 또 그 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첫 질문이 뭔지 아세요?
아 목사님!
지난번에 저 잘되라고 기도해 주셨는데 왜 아직도 이 모양입니까?
이거 누구 잘못입니까?
저 새벽기도도 열심 냈구요
교회 일도 열심히 했는데요
그럼 누구 잘못이라는 거예요!
그러고 나서 얼마 전에 교회에 세 번째로 부흥회를 가게 됐습니다.
아! 또 그 사람 만날까봐! 사방을 살피는데 아니나다를까 톡 튀어나오면서
목사님! 목사님하고 부르시는데 심장이 다 멈춰서는 줄 알았습니다.
저 남선교회 회장 됐습니다!
그러구 보니까 인물이 달라졌어요
머리도 올백으로 넘기고
그러면서 목사님 제가요 금은방을 열었는데요 지금은 라스베가스에 3군데나 금은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뭐라 그랬겠어요? 할렐루야!
할렐루야! 그 말 밖에 더 할말이 없더군요.

음식이 나왔는데도 한 스푼도 먹지 않으면서 자신의 절망을 털어놓고 한숨쉬던 저 분이 남선교회의 회장님이 되시고 사장님까지 되셨으니 아이들도 그 고나 중에서도 공부를 잘해서 영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답니다.

이기지 못할 고난은 없구나!
마음을 바꾸자!
안된다에서 된다로 바꾸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안되는 일을 주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줄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이 있기에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되었고 절대로 안된는 일이 없다는 소망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고난주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슬픔과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며 더 큰 소망을 가질 수 있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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