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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다시 사신 그리스도 (마 28: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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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철 목사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다. 이 혁명은 역사적으로 "전 국민이 자유로운 개인으로서 자기를 확립하고 평등한 권리를 보유하기 위하여 일어선 혁명"이라는 평가를 받지만 종교적으로는 세속 군주들이 국가의 확장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하여 막대한 재산을 소유하고 있는 카톨릭 교회를 핍박하게 된다.

그러면서 당시의 사회주의 학자들이 새로운 종교를 만들려고 했다. 기독교에 대치할 수 있는 종교를 만들려고 그 당시에 카톨릭의 중요한 자리에서 권세를 갖고 있던, 그러면서도 그들과 협조적이었던 "딸레랑"이라고 하는 주교를 찾아갔다고 한다.

"어떻게 하면 이상적이고, 사람에 게 호감을 주고, 많은 사람이 따라 오고, 우리 인류를 위하여 크게 봉사할 수 있는 그런 종교를 만들 수 있습니까? 기독교를 능가하는 그런 종교를 만들 수 없습니까?"하고 물었다.

그때 그가 말하기를
"그것은 간단하지"
"그것이 무엇입니까?"

"자네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언제쯤 다시 산다고 얘기를 한 다음에 자네가 만약 예수님처럼 살아나면 아주 훌륭한 종교가 될 것일세"

기독교는 아무도 모방할 수 없고, 따라올 수 없고, 비슷하게라도 만들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한 분만이 우리를 위해 죽으실 수 있고, 살아나실 수 있는 것이다. 죄인 된 우리 인간은 다 죽어도 우리를 못 살린다.  죄인된 육신은 기껏해야 육신만을 살릴 뿐이다. 하나님의 아들, 죄 없는 분의 죽음이 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죽음이 가치가 있고, 또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무덤에서 살아나실 수가 있는 것이다. 주님의 부활은 하나님이 하신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덤에 삼일 동안 계신 후에 부활하신 이 날은, 인류 역사에 처음 있는 일이고 우리 온 인류에게 생명과 소망을 주는 가장 귀하고 복된 날이다.

이 복된 예수님의 부활로 우리는 어떤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인가?

1.  죄를 의로 바꾸신 예수님

예수님의 부활은 나를 위한 부활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려 보여 준 기적이 아니다. 이미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 천지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그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겠는가? 주님은 바로 나를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사람의 몸으로 사시다가 죽으시고 우리를 사망권세에서 건지시기 위하여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부활의 길을 열어 놓으신 것이다.

사 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사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그는 우리를 위해서, 우리의 질고, 우리의 슬픔, 우리의 죄악, 우리의 허물을 대신 지시고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죄악의 삶이 있는 우리의 앞날은 절망과 저주밖에 없다. 우리는 이미 게임이 끝이 났다.
이제 그런 나를 위하여 그가 하늘의 보좌를 비우시고 역사 속에 오셔서 우리를 위한 삶을 시작하시게 된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악을 우리의 모든 저주를 주님은 해결하셨다. 죄를 해결했다는 것은 이제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모든 문제는 죄 아래 있는 것이다. 죄의 유산이다. 모든 문제의 어머니는 죄이다. 죄의 어머니는 사탄이다.

재 작년에 강원도 강릉에서 메마름에 산불이 났다. 저 울진까지 불길이 번져 나갔지 않았는가? 아주 죄는 불길과 같은, 불과 같은 성격을 갖고 있다. 첫째로 불은 다 태운다. 죄는 다 태운다 내 영혼도 태우고 하늘의 복도 태우고 건강도 태우고 기쁨도 태우고 모든 것을 다 재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여러분 성경을 보라. 에덴동산도 태워 버린다. 이스라엘도 태워버리고 국가도 태우고 소돔성도 태워 버리고 죄는 다 재로 만들어 버린다.

그 다음, 죄는 아름다운 숲을 다 망가뜨린다. 불길이 번져서 그 강원도 산의 그 아름다움을 다 태워버렸다. 은혜도 행복도 사랑도 아름다운 가정의 숲도 다 태워버리는 것이 죄악인 것이다. 사람이 무엇 때문에 불행해지고 어려워지는 것인가? 이 죄악이라는 것, 죄의 힘인 것이다.

세 번째는 죄는 번져나간다. 계속 번져나가지 않는가? 조그만 불길이 다 태우듯이 그전에 미국에 보면 한달 동안 태웠던 그런 불길도 있다. 옐로우 스톤이라 하는 공원에 계속 불길이 번져 나가듯이 죄는 번져나 가는 것이다. 이번에 구제역처럼, 한 마리 소가 나라에 계속 번져나가는 것이다. 충청도에 강원도에 경기도에 다 번져 나가듯이 에덴동산에서 시작하여 이 땅에 들어온 죄는 온 세계로 번져나가서 자자손손 번져 나가고 불길처럼 번져나가는 것이다. 이것을 해결할 자가 없다.

죄의 능력 앞에 그 불길이, 용서하고 가만히 둘 곳이 없다. 다 번져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롬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 죄에서 누가 우리를 구원하여 낼 것인가? 죄는 새까만 것이다. 불에 탄 것처럼 푸른 숲을, 건강한 숲을 새까맣게 만들었다.

이 새까만 사망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이 땅에 빛이 비추어서 어두움을 몰아내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오늘 주님은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지배하는 죄와 사망의 어두움을 몰아내는 줄로 믿는다.

2.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신 예수님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 있다고 한다. 그것이 곧 절망이라 말한다.
무슨 죄, 무슨 죄 하지만 절망 이상 무서운 죄가 있을까?

절망은 아무런 희망도 없다는 이야기다. 소망이 없으니 살아갈 삶에 대한 건전한 기대를 갖지 못한다. 나를 무력화시킨다. 나를 기대하고 힘 주시는 하나님 의도를 저버리고, 내 삶을 참되게 만들어 가지 못한다. 소망을 갖지 못하니 하나님의 섭리하심도 바라지 못한다. 결국 내 삶을 이 땅에 고착시킨 채 인간의 술수와 잔 꾀로 내 삶을 망가뜨리고 마는 것이다.

너무 많은 현대인들이 절망이라고 하는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여러분! 하루 아침에 자신의 기술이 무용지물이 된 사람들이 지금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어느 날 눈을 뜨고 나니까 갑자기 자신의 경력이 전혀 쓸모 없는 것으로, 수십 년을 쌓았던 그 경력들이 전혀 쓸모 없는 것으로 판명되고 말았다. 그래서 명예 퇴직이라는 미명 하에 일터에서 내몰리고 있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모든 것이 너무 허탈하다. 삶의 중심도 한꺼번에 이렇게 쉽게 무너지고 말았다.

사랑하는 여러분! 2천년 전 예수님을 따르던 청년들의 모습도 그랬다. 예수님을 따라 다니던 친구와 형제,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님을 따르던 그 제자들이 주님을 잃었을 때를 생각해 보라. 그들은 철저하게 절망했다. 모든 의욕을 잃어버렸다.

그러던 저들의 삶에 기적의 체험이 일어났다. 모든 사람이 마지막 원수인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는 드라마의 한 기도에서 저들은 알지 못하게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 인생의 싸움에서 최후로 싸워야 하는 실전의 대상이 무엇인가? 바로 죽음의 문제이다. 예수께서 생전에 말씀하시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그 말씀이 현실로 이루어져서 그 드라마의 한 주인공이 된다고 하는 것, 저들은 상상도 못했다. 설마 그럴까? 그러던 것이 보시라. 우리 주님께서 무덤에서 살아 나셨다!

주님께서 인간의 마지막 원수인 죽음을 정복하셨다 죽음을 박차고 일어나셨다. 온 세상을 뒤흔들어 놓은 이 사건은 일순간의 그 무엇에서 모든 절망을 정복하는 희망으로 꿈틀거렸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안에 역사 하던 모든 말씀들이 희망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2천년이 지난 이 아침. 인간들은 아직도 비극적인 사실에 직면하고, 속박과 굴레, 낙심과 죽음, 불안과 염려, 고달픔에 살아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주님께서 인류를 위하여 죽음을 정복하셨고, 그 분이 이루어 놓은 생명의 샘은 아직도 바닥나지 않았다. 기갈되지 않는다. 아직도 부도나지 않았다. 아직도 우리 속에는 부활의 주님과 접속만 되면 이 모든 파산을 정복 할 수 있는 우리 속에 영성이 살아있음을 믿는다.
내 사랑하는 형제여! 믿음의 동역자인 여러분에게 나는 지금 단호하게 말씀드린다.

이제 절망은, 그리고 죽음은 더 이상 부활의 주님 앞에서는 절망이나 공포의 대상이 될 수가 없다. 주께서 부활 하셨다! 여러분! 주님께서 부활하셨다! 그 집에서 부활하셨다. 그 가정에서 부활 하셨다! 그 심령에서 부활하셨다! 그 자녀 속에 부활하셨다! 그 부부 속에 부활하셨다! 이 나라 속에 부활하셨다! 이 민족 속에 부활하셨다!
이제 부활의 삶을 사는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시는 삶의 능력에 의해서 지배를 받게 된다. 또 다른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눈을 뜨기 바란다. 지혜가 오기를 바란다. 믿음에 붙잡히기를 바란다.

3.  평안을 기원하시는 예수님

마 28:9~10 예수께서 저희를 만나 가라사대 평안하뇨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10)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주님께서는 무서워 말라고 했다. 그들의 평안을 기원하고 있다.
그 평안은 빛으로 오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이다.

몇 년 전 뉴욕에 정전이 되니 사람들이 다 나와서 도적질하고, 강도질하고, 온갖 죄를 저지르는 것을 보면 세계 경찰 국가라는 사람도 별 수가 없다. 불 나가고 캄캄해지면 별 수가 없다. 오늘 현대인들이 이렇게 지성인이요, 문화인이지만 주님이 우리 마음에 거하지 않는 모든 심령은 캄캄하고 어둡다.

별의 별일을 오늘 현대인들은 다 행하고 있다. 어린아이 마음도 캄캄하고 청소년의 마음도 캄캄하고 가정주부의 마음도 캄캄하고 오늘 이 사회는 너무나 캄캄하다. 우리가 어디를 가야할지 모르는 것이다.

바로 그런 어두움 속에 주님께서 오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 인생의 길을 비추고, 영원한 길을 비추고, 내 마음을 비추고, 내 생활을 비추고, 우리의 가정을 비추어 주시고, 어두움의 모든 세력을 다 몰아 내는 줄 믿는다. 술 취하고, 음란하고, 방탕하고, 악하고, 게으르고 이 모든 것은 어두움의 세력이다.

옛날에는 부부싸움을 칼로 물 베기라고 했는데, 요사이는 칼로 사람을 베기라 한다. 2000년 한 해 동안 부부 싸움을 해서 죽은 사람이 수 십 명이고 입원한 사람이 수 만 명이라 한다. 왜 그런가? 사람 사이가 어둡고 가정이 어둡다. 부부사이가 어둡다. 결혼은 해도 마음은 어두운 것이다. 좋은 집에 살아도 심령은 어둡게 살아가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예수의 빛이 가정에 들어 오기만 하면 그런 세력은 다 물러갈 줄 믿는다. 주님의 빛이 가는 곳에 사랑이 있고, 감사가 있고, 소망이 있고, 거룩함이 있고, 기쁨이 있는 줄 믿는다. 주님은 사망의 깊은 어두움에서 우리를 건져 주셨다. 사람은 죽는다. 죽음의 불안과 공포에서 다 떨고 고민하고 있다. 요사이 모두가 오래 살려고 얼마나 몸부림을 치는가? 얼마나 불안해하고 있는가?

그 모든 것은 주님의 빛을 받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삶을 주시며 평안하기를 기원하고 계신다.

주 안에서 평안하라. 나를 향한 다시 사신 주님의 기대와 소망, 온전히 오늘 여러분에게 이루어져 회복의 복락이 부활절 아침에 함께 하시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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