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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자! (막 16: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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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오주철 목사

어느 날 교회학교 선생님이 아동부 설교 시간에 아이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여러분, 만약에 내가 집과 자동차를 팔아서 그 돈을 몽땅 교회에 준다면 천국에 가게 될까요?" 선생님의 이 물음에 아이들은 일제히 "아뇨"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만약에 내가 매일같이 교회 청소를 한다면 천국에 가게 될까요?" 아이들의 대답은 역시 "노오!"였습니다. "그럼, 내가 동물들에게 잘해주면 천국에 가게 되는 걸까요?" "아뇨!" "그렇다면 영신교회 홈페이지에서 좋은 글에 꼬리 글을 달면 천국에 가겠네요?" 아이들의 대답은 역시 "NO!"였습니다.
선생님이 다시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천국에 갈 수 있는 거지요?" 이 때 다섯 살 짜리 아이가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죽어야 가지요!"

사람은 누구나 반드시 죽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도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일이요, 그 뒤에는 심판이 있다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불교계의 이청담 스님은 그의 법어록에서 "사람은 나면서 그 시간부터 죽음의 적에 쫓기고 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죽음에 관한 문제는 종교를 가진 사람이든,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이든 모두가 동일하게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삶은 어쩌면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모든 인간의 삶은 죽음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따라서 인류 역사 이래 최대의 문제는 죽음의 문제입니다. 지금도 가장 큰 문제는 죽음의 문제입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처럼 슬픈 것이 없고, 죽는다는 것처럼 비참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죽는다고 할 때에 모두 다 인생의 허무와 절망감을 느끼게 됩니다.

어느 교도소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사형을 받으러 가는 한 죄수가 가는 도중에 조금 파인 웅덩이가 있는 것을 모르고 가다가 발을 헛디뎠습니다. 그때 그 사형수가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어이쿠, 하마터면 죽을 뻔했네" 사람이 죽으러 가면서도 죽음이 얼마나 싫으면 자기도 모르게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라고 했겠습니까?

인류 역사 이래로 무덤에 갇혔다가 살아 나온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공자나 석가나 모두가 무덤에 들어가서 한줌의 흙이 되어 역사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역사상 전무하게 무덤의 문을 열고 살아나신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이것은 역사에 유일한 일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무덤으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사흘 전에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셨다가 주일 아침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아침 우리에게 전해진 주님의 부활 소식을 마음껏 찬양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앞 뒤 좌우를 돌아보시면서 축복의 인사를 나누시겠습니다. "우리 주님이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세요"

사랑하는 여러분, 부활의 주님을 만나십시오. 주님께서는 우리의 죄악을 인하여 죽으셨지만 우리를 의롭게 하시고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부활의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놀라운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은 절망 중에서도 희망을 노래할 수 있습니다. 인생의 바다에서 풍랑을 만났을 때에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당황해 하고, 아우성칠 때에도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은 마음의 평안을 잃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환경을 바라볼 때에 우리는 부활의 주님을 바라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어둠의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고자 부활하신 임마누엘의 주님을 꼭 붙잡으십시오. 부활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사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늘날 과학적으로 증명되는 것만을 믿으려고 하는 이 세상에서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고 하는 이 문제는 과학적으로 볼 때에 거의 100%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우리들은 죽은 자의 부활을 확실히 믿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과학적으로 증명이 되어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인간의 과학보다 더 위대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를 믿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현대어 성경에서는 믿음을 정의하고 있는 히브리서 11장 1절의 말씀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무엇입니까?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확신을 갖는 게 아니겠습니까? 또한 아직 눈앞에 보이지 않는 미래의 일일지라도 우리가 기대하는 것이 반드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 게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과학으로 증명이 되어서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실제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아직 눈앞에 보이지 않는 미래의 일일지라도 우리가 소망하는 것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부활을 믿습니다. 지금은 당장에 눈앞에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 시대에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들 보다 먼저 간 부모 형제들이 다시 살아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땅의 생명이 끝나는 날 우리는 주님과 함께 부활의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의 마지막 날에 우리 모두는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믿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가 교회에 나와 앉아 있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의 부활과 죽은 자의 부활을 믿지 못한다면 그는 믿음의 사람이 아닙니다. 올바른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이 땅에 기독교는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이 지구상에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날처럼 기독교가 이 세상을 바꾸어 놓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저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 좋은 말씀들을 많이 하셨기 때문에 그를 따른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아주 탁월한 윤리적 교훈들을 많이 주셨습니다. 그러나 훌륭한 윤리적 교훈들은 다른 종교들에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약 3,000여 개의 종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 종교에는 부활의 신앙이 없습니다. 부활은 오직 기독교에만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믿는 기독교만이 참 구원의 종교라고 자신 있게 주장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그렇게 주장해야만 합니다.

요즘 많은 젊은이들과 지성인들이 종교 다원주의를 좋아합니다. 그들은 기독교만이 참 구원의 진리라고 고집스럽게 주장하는 것을 아주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이런 기독교를 향해서 "오만하다. 고집스럽다. 독선적이다. 배타적이다"라고 하면서 갖가지 언어 폭력으로 공격합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세계 60억 인구가 3,000여 개의 종교를 가지고 있는데, 각각의 종교마다 진리가 있고 신이 있고 구원이 있는 법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포용하고 상호 존중해야 된다." 아주 그럴듯한 이야기입니다. 또한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을 굉장히 높이 평가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종교 다원주의를 쫓는 많은 젊은이들과 지성인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의 흐름입니다. 이러한 생각들이 심지어는 교회의 지도자를 양성하는 신학교 교수들 가운데도 적지 않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모든 종교에는 진리가 있고, 구원이 있다" 아닙니다. 진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의 종말에 되어지는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이지 마십시오. 이런 주장은 다 기만에 지나지 않습니다. 죽음으로 끝을 본 자를 우리는 구원자로 섬길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죽음을 이기고 부활한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종교가도 구원자라고 보지 않습니다. 무덤을 놓고 경배와 찬양의 대상을 삼는 종교에 구원이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만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구원이 무엇입니까? 전 인류가 소원하는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죽음에서 우리를 건지는 것입니다. 죽음의 손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죽음에서 구원할 구원자는 죽음을 정복하고 살아나신 분이어야 합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죽음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고 말입니다. 히브리서 2장 14절 이하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라"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죽음을 이기고 우리를 죽음에서 건져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믿습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전파하는 기독교만이 참 진리요, 참 구원의 길임을 확실히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종교에도 진리가 있고, 구원이 있다는 종교 다원주의를 우리는 단연코 거부해야만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아침에 교회로 모여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이 땅의 수많은 성도들 가운데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은 아마도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좀더 깊이 들어가 보면 마음이 아닌 머리로만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리로서는 예수님의 부활을 버젓이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 고백이 그 사람의 삶과 생각과 인격을 좌우할 만큼 능력 있는 고백이 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믿는 것 같은데 사실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만일 이런 사람들이 우리들 가운데 있다면, 이 시간 마음속에 숨어 있는 의심을 깨끗이 씻어버리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을 내 인격과 삶 가운데서 철저하게 믿고 고백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철저하게 믿고, 그래서 장차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 목격하고 증언하는 사람들의 기록이 있습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만 보아도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셔서 장사된 지 사흘째 되던 날 이른 아침에 무덤 앞에서 일어난 사건이 마가복음 16장 이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 예수님의 부활을 기대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조금이라도 예수님의 부활을 기대했던 사람도 없습니다. 평소에 예수님은 "내가 죽은 지 사흘만에 살아나리라"고 제자들에게 몇 번이나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 말씀을 기억하고 사흘째 되던 날 아침 일찍 무덤 앞에서 서성거린 제자라고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전혀 기대하지도 않고 믿지도 않았던 사람들, 나중에는 이를 알고서도 믿으려 하지 않았던 사람들만 등장합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다른 복음서의 기록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도록 하고 싶은 욕심을 가졌더라면 이런 식으로 기록해서는 안됩니다. 그랬다면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함께 모여 서로 입을 맞춰 기록해야만 했습니다. 아니면 적어도 부활에 대해서 일관성 있게 기록했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각 저자마다 서로 말이 안 맞습니다. 최소한 우리를 납득시키려면 증거에 있어서 모순이 없어야 합니다.

더구나 맨 처음에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목격한 사람들이 여자들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자 분들에게는 죄송합니다만 그 당시에 여자들의 말은 참 말도 거짓말로 취급해버리는 시대였습니다. 따라서 그런 하찮은 여자들의 입을 빌려서 예수님의 부활이 증거된 사실을 그대로 기록했다는 것은 도무지 사람들이 믿도록 하기 위해서 기록한 책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합니다. 성경은 단지 자기들이 예상 밖에 발견한 사실을 보고 듣고 느낀 그대로를 적어 놓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이런 여러 정황들을 주목해 본다면 예수님의 부활이 절대 거짓말일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 11절에 보면, 부활의 주님을 만났던 막달라 마리아가 슬픔에 잠겨 눈물을 흘리고 있는 제자들을 찾아가서 예수님이 살아나셨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믿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13절에 보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나고는 예루살렘으로 허겁지겁 돌아와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외쳤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을 들은 다른 제자들도 역시 안 믿었다고 했습니다.

나중에 예수님께서는 두려움과 공포에 질려 있는 열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먼저 책망을 하십니다.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믿지 않았던 저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아직도 부활에 대해서 회의적인 분들이 있다면,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기록한 사람들의 기록을 정직한 마음으로 대해 보십시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믿도록 설득하려고 기록해 놓은 것이 아닙니다. 자기들도 안 믿었는데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엄격히 보면 이 사실을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누우셨던 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사실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빈 무덤에 대해서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만일 시체를 훔쳐갔다면 예수를 죽인 자들이 기필코 찾아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몇몇 사람들을 직접 만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자들은 엄연한 부활의 사실 앞에 침묵하고 말았습니다. 또한 대제사장들은 예수님의 부활 현장에 있었던 군인들의 입을 뇌물로 틀어막았지만, 예루살렘의 골목골목을 누비면서 예수님의 부활을 외치는 제자들과 여인들의 소리를 잠잠케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루살렘 도성에 예수의 부활을 외치며 이를 믿는 거룩한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거짓말이라면 어떻게 그 거짓말을 믿고 수천 수만 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예수님을 찬양할 수 있겠습니까? 부활 사건은 꾸며낸 이야기도 아니고, 기독교가 말하는 전설도 아닙니다. 이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철저하게 주님의 부활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심으로 예수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았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나의 부활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사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사는 놀라운 부활의 축복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런 믿음이 철저하면 우리의 삶 구석구석에 믿음의 영향이 미칩니다. 나의 사고 구석구석에 이 부활의 믿음이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보는 것이 달라집니다. 생각하는 것이 달라집니다. 문제를 다루는 자세가 달라집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다면 당연히 달라져야 합니다.

미국에 하버마스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은 예수님의 부활을 변론하는데 가장 탁월한 학자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분입니다. 그가 한번은 예수님의 부활을 부인하는 무신론자로서 유명한 앤토니 플루 박사와 함께 공개토론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버마스 박사는 예수를 철저하게 믿는 학자요, 플루 박사는 예수를 절대적으로 안 믿는 학자입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예수는 부활했는가?"라는 제목으로 토론을 벌이게 된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여러 대학에서 온 다섯 명의 교수가 심사를 맡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중립적인 입장에서 누구의 변론이 더 설득력이 있고 논리적이며 학구적인지, 그런 다음에 그 변론의 사실 여부를 평가하기로 했습니다. 이 날 공개토론장에는 많은 청중들이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열띤 토론 결과 5명의 심사위원 중 4명이 하버마스 박사에게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참석한 청중들도 하버마스 박사의 말을 듣고는 믿지 않던 사람들까지도 예수의 부활을 믿게 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미 예수의 부활에 대해 박사 학위 논문을 쓴 바 있으며, 이 주제에 대해서만도 무게 있는 책을 무려 7권이나 쓴 석학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내가 그만 위암에 걸렸습니다. 그의 아내는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병세가 악화되어 서서히 죽어가고 있습니다. 어린 자녀 넷을 둔 가장으로서 아내가 죽어 가는 모습을 본다는 것은 정말로 이 세상에서 겪을 수 있는 지옥의 고통과도 같았을 것입니다. 어느 날 아내는 2층에 있는 방에 누워서 신음하고 있고, 자기는 현관에 앉아서 깊은 고뇌에 빠져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기가 가르치는 여러 명의 신학생들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오는 전화마다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교수님, 아내가 죽어 가는 마당에 교수님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이 기쁘지 않습니까? 부활이 있다는 사실이 기쁘지 않습니까?" 이 전화를 받고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합니다. 평생 예수님의 부활을 가르치고 증거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아내가 죽어 가는 현장에서는 부활 신앙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처럼 깊은 고통에 빠져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전화를 받기 전까지만 해도 "하나님, 왜 하필이면 내 아내입니까? 왜 하필이면 내 아내가 이런 병에 걸려야 합니까?"라고 하나님께 항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하나님의 대답은 똑같았다는 것입니다. "나는 내 아들을 사흘만에 살려냈지 않느냐?" 그런데 학생들의 전화를 받고 나서 하나님의 대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깨달았다는 말입니다. "그렇지. 하나님은 예수님을 사흘만에 죽음에서 살리셨어. 그렇다면 내 아내도 반드시 하나님이 살리실 거야. 비록 육신은 죽을지라도 주님이 부활하신 것처럼 때가 되면 반드시 내 아내도 부활할거야. 그리고 나도 죽을 것이고 나중에는 부활할거야. 그러므로 내가 왜 낙심하고 깊은 고뇌에서 헤매겠는가?"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죽어 가는 사람을 앞에 놓고 예수님의 부활 신앙이 어느 정도 나에게 힘과 기쁨과 소망이 되는지는 차원이 다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철저히 믿어야 되는 이유는 어떤 상황에서도 그 부활 신앙 때문에 우리가 좌절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죽음 앞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 앞에서도 우리는 생명 되신 주님을 찬양할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주님 안에서 우리는 더 힘있게 우리의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철저히 믿는다는 것은 나의 부활 신앙이 나의 삶 전체를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만이 부활의 영광을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부활하심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나도 장차 부활할 것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우리 주님과 함께 부활의 영광을 바라볼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두 번째로, 예수님의 부활을 담대하게 전해야만 합니다.
1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본문 15절을 다같이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여기에서 복음이란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모든 인류가 부활할 수 있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모든 예수 믿는 자들이 영원히 살 수 있다고 전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래서 빈 무덤을 본 자들은 남녀 할 것 없이 예수님의 살아나심을 증거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난 자들도 나중에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어디를 가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부활의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오순절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직접 빈 무덤을 보지 못했고 예수님을 만난 적도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에서 부활하셨다고 소리치며 외쳤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주님의 부활하심을 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만이 이 땅에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주님 안에서만 이 땅에 참 평안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두 가지 안목으로 역사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이 세상의 죽음과 고통, 죄악과 전쟁, 기아, 모순을 놓고 세상을 보는 눈입니다. 이런 것을 놓고 세상을 보면 이 세상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아무리 높은 자리에 앉아 있고, 좋은 집에 살아도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역사를 보는 다른 안목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출발점으로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놓고 이 세상을 보면 죄는 반드시 정복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악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능력 앞에서 심판을 받는 날이 올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고통 하는 수많은 죄인들이 용서받고 영생을 얻는 축복의 날이 올 것입니다. 이 더럽고 악한 세상은 하나님 앞에 심판 받고, 주님께서 영원히 영광을 받으시는 그 나라가 올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중심으로 놓고 보면 이 세상은 희망이 있습니다. 주님만이 희망이요, 소망입니다. 앞으로 이 세상에 태어날 모든 인류의 소망은 예수 한 분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믿는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을 열심히 전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부활하신 주님과 날마다 동행하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살아 계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일 먼저 찾은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살펴보면 여러 가지 은혜스러운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나서 빌라도나 그 당시의 실세인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을 찾아가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승리를 선포하기 위해서 지붕위로 올라가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시자 마자 제일 먼저 막달라 마리아를 만나 주셨습니다. 소망을 잃고 슬퍼하며 눈물 흘리고 있던 초라한 여인, 막달라 마리아를 먼저 만나셔서 왜 우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마리아의 눈물을 보신 것입니다. 이분이 바로 부활하신 주님입니다. 부활의 주님은 그녀의 눈물을 보셨습니다. 슬퍼하는 여인, 세상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여인, 아무런 소망이 없어 보이는 여인, 그를 만나신 분이 부활의 주님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문을 걸어 잠그고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고 있는 제자들을 찾아 오셨습니다. 두문불출하고 소망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는 제자들을 찾아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한 후, 마음속에 가책을 이기지 못해 번민하면서 갈릴리 바다로 도망치다시피 한 베드로를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일으켜주셨습니다. 쓰라린 기억들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끌어안아 주셨습니다. 이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부활의 주님이 찾아가신 사람들을 가만히 보면, 그분이 어떤 사람들과 동행하기를 원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세상을 사는 조건들이 다양하지만 인간의 실존 밑바닥을 보면 대동소이합니다. 우리도 막달라 마리아처럼 눈물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인생의 좌절을 맛본 사람입니다. 인생의 무서운 시련 앞에 고통 하는 사람들입니다. 내 힘으로 일어설 힘이 없어 주저앉을 때가 많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제자들처럼 실패한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믿었던 것이 다 날아가 버린 허무를 느끼기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기억하십시오. 이럴 때 부활의 주님은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약할 때 주님은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실패하여 주저앉아 있을 때에 주님은 곁에 와 계십니다. 이 분이 부활의 주님이십니다.

물론 예수님이 부활하신 직후에는 예수님을 만나고 동행하는 것이 쉬웠습니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몸으로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 손에는 못 자국이 있고 옆구리에는 창 자국이 있었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음식도 나누고, 귀에 들리는 말로 서로 대화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주님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더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를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 나를 찾아와서 손바닥을 내밀고, "바로 나다. 보아라."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우리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예수님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영으로 계십니다. 나는 주 안에 있고, 주는 내 안에 있습니다. 어디서나 주님은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우리는 주님과 한 시간도 따로 떨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은 살아 계셔서 오늘도 이 우주를 충만케 채우시는 만유의 주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중요한 사실은 우리는 날마다 때마다 주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는 부활 신앙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나도 부활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될 것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현대인들의 비극이 무엇인지를 아십니까? 하나님과 상관없이 사는 삶에 너무 익숙해져 있습니다. 하나님과 상관없이 자신의 신분을 만드는데 너무 익숙해져 있습니다. 우리가 힘들어하는 이유는 자신의 신앙과 생활이 전혀 관계없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들을 때에 그렇게 기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기쁨이 실제 생활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현실로 돌아오면 되어 있는 것이라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여전히 해결해야 할 문제, 먹고 살아갈 걱정, 돌보아야 할 가족이 그냥 그대로 있습니다. 주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셨음을 믿지 못하기 때문도 아닙니다. 문제는 살아 계신 주님과 지금의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기에 괴로운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삶은 부활신앙으로 이어지는 모습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장차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어느 교회 목사님이 신앙생활 열심히 하는 여자 집사님 댁에 심방을 갔다고 합니다. 마침 예수 믿지 않는 남편이 집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꼼짝없이 예배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예수 믿지 않는 남편이 있으니까 목사님은 예배 후에 그 남편을 전도할 마음으로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이제, 예수 믿으세요. 교회에 나오세요." 그 남편이 목사님에게 묻습니다. "교회에 나가 예수 믿으면 천국에 가나요?" "물론이죠. 교회 나와 예수 믿으면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그랬더니 그 남편이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그럼 전 절대 교회에 나갈 수 없습니다." 목사님은 이상해서 다시 물었습니다. "왜죠?" 그 남편이 왈 "여기서도 저 사람과 살기 싫은데 천국에서도 같이 살아야 하잖아요!"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을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전했습니까? 여러분은 예수 믿고 영원히 사는 진리를 아시는데 여러분의 믿지 않는 가족, 친구, 이웃에게 어떻게 보이셨습니까? 부활과 영생을 믿는 우리는 타인에게 기쁨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를 통해서 저들에게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게 해 주어야 합니다. "저 사람이 믿는 예수를 나도 믿고 싶다", "저 사람이 가는 천국에 나도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사람의 참된 모습일 것입니다.

이제 저는 켄 가이어(Ken Gire)가 쓴 아름다운 기도문을 읽어드리면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 모든 것이 너무나 뿌옇게 보일 때, 당신조차도 뿌옇게 보일 때, 그리고 당신의 목소리가 이상하고 낯설게 들릴 때, 제가 눈물을 씻고 당신이 제 곁에 서 계신다는 것을 보게 해 주시옵소서.
제가 왜 우는지를 알고 싶어하시고, 제 상처가 무엇인지도 알고 싶어하시고, 제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고 싶어하신다는 것을 보게 해 주시옵소서.
감사합니다. 부활의 주님. 거기에 계심을 감사합니다.
그리고 결코 저를 떠나시거나 버리시지 않고, 제 삶의 가장 어둡고 추운 때에도 함께 계심을 감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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