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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난주일,종려주일] 우리의 왕이 오신다 (마 2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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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영무 목사

  예수께서는 33년의 생애를 사셨습니다.
  30년 동안은 요셉의 아들로 목수의 일을 도우며 생활하셨습니다. 그 후에는 공생애라고 부르는 마지막 3년을 사시게 되는데, 그 때는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이후로 천국의 복음을 전파하시고 백성들의 병을 치료하는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이 공생애 3년 중, 가장 중요한 기간은 한 주간입니다. 바로 예루살렘 입성으로부터 시작해서,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안식일의 다음날, 곧 요즘 말로 하면 주일 아침 새벽에 부활하시는 이 한 주간이 가장 중요한 주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로 거기에 십자가가 있고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한 주간을 수난주간, 혹은 고난주간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이 수난주간, 고난주간을 특별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이미 사순절이 시작되고 고난주간이 되면 많은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은 금식을 하고, 말씀과 기도와 묵상의 삶을 살면서 노래와 가무를 금하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입니다. 오늘을 아주 특별한 주일로 여기고 오늘부터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역사가 한 주간 시작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고난주간에 행하신 예수님의 행적을 더듬어 봅시다.
  월요일에는 성전에 들어가셔서 그 성전 안에서 비둘기 파는 자들, 돈 바꾸어 주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선언하십니다.
  화요일에는 포도원 비유와 달란트 비유 등 중요한 교훈을 제자들에게 주십니다.
  수요일엔 제사장들의 음모가 계속 진행되며, 그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까 의논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마침 문둥이 시몬의 집에 계시다가 마리아라는 여인이 들고 온 값진 향유, 나드를 통해서 자신의 장례를 준비하는 일을 경험하시게 됩니다.
  목요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우리에게 겸손의 본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 식사를 하시게 됩니다.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서 밤새 기도하시면서 “아버지여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겨 주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십니다. 얼마나 뜨겁게 기도하셨던지 마치 땀방울이 핏방울처럼 흘러 떨어지고 천사가 내려와서 그를 도왔다고 성서는 증언합니다. 가장 가까이에서 예수님을 모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피곤에 지쳐 쿨쿨 자다가 세 번씩이나 예수님이 깨울 때 부끄러움을 경험하게 됩니다. 예수께서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구나 이제는 갈 때가 되었다 때가 되었다 깨어서 일어나라”고 말씀하십니다.
  금요일 이른 새벽, 예수님은 로마 군병들에게 체포되시고,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까지 오르십니다. 그리고 골고다 정상에 세워진 십자가에 못이 박히고 매어 달리셔서 피를 다 흘리시고 숨을 거두시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안식일을 지나고 주일 새벽 아침, 예수님은 죽음의 권세, 돌문을 깨뜨리고 영광으로 부활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본문을 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먼저 그것은 왕으로서의 입성입니다. 성경 4절,5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이 4.5절 말씀은 스가랴서 9장 9절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  말씀은,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아멘.

  여기 보면,  중요한 구절이 너의 왕이 임한다는 구절입니다. 바로 이 왕은 이 땅에 오신 메시야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메시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왕으로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구약에서는 왕들이 대관식을 할 때 흔히 평화를 상징하는 나귀를 타고 왕궁에 입성함으로써 퍼레이드를 벌이고 대관식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대관식이란 무엇입니까? 관을 쓰는 것입니다. 왕자가 아버지 왕의 뒤를 이어서 왕이 되는 것, 이것이 대관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시고 은밀하게 활동하셨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인간 구원을 한 주간 앞두고 예수님은 자신을 만천하에 공개하셨습니다. 왕으로서의 권위를 가지고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모습을 통해서 말입니다.

  메시야는 세 가지 직무를 가집니다. 메시야란 말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란 뜻입니다. 구약에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는 세 종류입니다. 예언자, 제사장, 왕입니다. 예수님은 세 가지 직무를 다 담당하십니다.
  예수님은 예언자셨습니다. 오늘 성경에도 “이가 누구뇨”하고 물으니 사람들이 “그가 갈릴리 나사렛에서 온 선지자”, 곧 예언자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증거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정하는 예언자의 삶, 즉 그 분은 예언자의 삶을 사셨습니다.

  또한 그 분은 이 땅에 제사장으로 오셨습니다. 구약에서는 대제사장들이 백성들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대속죄일에 일년에 딱 한번 지성소 가장 깊은 곳에 들어가서 하나님 앞에 백성들의 죄를 빌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인류의 모든 죄를 지시고 가장 깊은 지성소에 들어가셔서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를 씻는 대제사장의 임무를 감당하시는 것입니다. 아니 그 분은 대제사장 뿐 아니라 스스로 제물이 되셨습니다. 구약에서는 염소와 소의 피로 인간의 죄를 씻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런 일을 수없이 행했지만 그것은 불완전한 속죄였습니다. 이제는 예수님, 세상의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그 분이 친히 속죄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생명을 위해서 내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 분은 이렇듯 대제사장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왕으로 오셨습니다.
  왕은 무엇입니까? 다스리는 자요, 통치하는 자입니다. 권력과 주권을 가진 자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왕으로 임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도 그를 위해 대관식을 준비해 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스스로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준비하셨고 그리고 그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모습은 위대하고 영광스러워 보이는 퍼레이드의 모습과는 거리가 멉니다.

  우리가 월드컵 4강에 진출했을 때, 축구 선수들을 태우고 강남에서 세종로까지 퍼레이드를 벌이는 장면의 중계방송을 기억합니다. 경찰의 사이드카가 선도를 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색종이를 뿌리며 축포가 터지는 등 보통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미국의 대통령이 취임을 할 때도 퍼레이드를 하고 대통령에 취임을 하는데 그 광경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영국 여왕이 행차할 때는 여덟 개의 말이 황금마차를 끌고 왕이 거기에 타고 수많은 사람이 선도합니다. 그 엄청난 모습 또한 장관입니다. 국군의 날 행사를 하나 하더라고 얼마나 위용이 당당합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모습은 그런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나귀 중에도 가장 작은 나귀 새끼를 타고 오셨습니다. 그 나귀는 키가 아주 작았습니다. 거기에 예수님이 타셨습니다. 제자들이 곁에서 걸었습니다. 발이 양쪽에 닿았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뒤뚱거리면서 가는 나귀의 모습을 생각해봅니다. 어찌 보면 초라하기도 하고 우스꽝스럽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고 예루살렘 시민들은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하고 소리쳤습니다. ‘호산나’라는 말은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말입니다. “왕으로 오시는 당신이여, 이 로마의 억압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소서”라는 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치적 메시야가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그들을 죄에서 구원할 구속주로 오신 것입니다. 열광적으로 환영하던 군중들은 몇 일도 안 되어서 다시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는 무리들이 되었습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초라하게 입성하셨습니다. 초라하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말입니다.

  어찌보면 오늘날의 복음이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저 사람들은 전염병 걸린 사람들 같아. 거기 뭐가 있어서 새벽부터 쫓아가지? 길거리에 나서서 전도까지 하지? 얼마나 하는 일이 없으면 전도지나 돌리고 있냐!”고 말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이 보면 미련해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미련한 것을 통해서 구원의 생명의 주님께로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예수님은 영원한 왕으로 우리에게 임하시고, 우리를 데리러 오셨습니다.

  유명한 작곡가 헨델 (Georg Friedrich Hndel, 1685-1759)의 대작이 있는데 바로 ‘메시야’입니다.
  헨델은 몸이 자꾸 약해졌고, 음악활동을 잘 못하다 보니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제 때 빚을 갚지 못하다 보니 사람들이 그를 고소해서 그는 그만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그 고난 속에서 그는 하나님과 깊은 친교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깊은 영감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세상의 빛을 본 곡이 그 유명한 ‘메시야’ 대곡입니다. 그 대곡을 쓰고선 그가 얼마나 감격해 눈물을 흘렸는지 그 눈물 자국이 원악보에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합니다. 그 후 헨델은 건강이 몹시 나빠졌습니다. 눈도 실명하고 맙니다. 그는 마지막 죽기 직전의 고난주간에, 자기가 지은 이 메시야를 직접 지휘하고 그 다음날 조용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 메시야 곡의 후렴 중 반복되는 부분은 “그가 다스리신다 그가 다스리신다 만왕의 왕 그가 다스리신다”입니다. 만왕의 왕 그리스도가 우리를 다스리신다는 말입니다. 다스리신다는 말이 43번이나 반복됩니다. 주님은 왕으로 오시고, 우리는 그 분께 순종하고 그 분께 다스림을 받는 백성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인생의 왕이라면 온 우주의 왕이라면 우리는 그 분 앞에 머리를 조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요즘 독도 문제나, 교과서 왜곡문제로 한일 관계가 긴장되고 있습니다만,  일제 시대 때에 그들의 교활함과 잔혹성은 대단했었습니다. 교회에서 찬송가를 부르는데, 그 중  ‘만왕의 왕’이란 가사가 있으면 못 부르게 하고 지워버렸다고 합니다. 일본의 천황만이 왕일뿐, 예수가 왕이 될 수 없기에 그랬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기에서 여러분의 인생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왕은 주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주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분께 순종해야 합니다. 오늘 성경에 보니 예수님이 왕으로 입성하시려 할 때 제자들 둘을 보내셔서 나귀 새끼 하나를 풀어오게 하십니다.
  감람산 벳바게에서 예수님 일행은 잠깐 쉬고 계시고, 제자들이 그 말씀을 듣고 건너편 마을로 가서 어미 나귀와 나귀새끼를 풀어 오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물었습니다. “아니, 그것을 왜 풀어가시오?” 제자들은 “예! 주가 쓰실 것입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주인은 가져가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 나귀를 타고 왕으로서 입성하게 됩니다.
  주님은 이미 왕으로서 주권을 가지고 계십니다. 왕은 모든 것이 당신의 소유이기 때문에 누구에게든지 필요한 것을 불러서 사용할 권한이 있는 것 아닙니까? 어찌 보면 이 본문도 이해가 안 됩니다. 이 나귀의 주인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나귀의 주인은 예수님과 안면이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이 벳바게 길을 지나다니실 때마다 아마 이집에 들리셨을 것입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께 받은 은혜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뭐든 해드리고 싶어 했지만 거절 하셨을 것입니다. 뭔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예수님을 섬기고 싶은데 방법이 없었을 것입니다. “뭐든 필요하시면 말씀 하세요. 늘 준비해 있겠습니다.” 예수님이 지나가시다가 “나귀를 끌고 오라. 주가 쓰시겠다하라” 하니 군말 없이 내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생명과 우리의 모든 재물과 우리의 재능과 은사는 주님의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인생의 주인이시고, 우리 생명의 주인인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의 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은 주님께 쓰임받기 위해서 준비된 인생입니다. 주님이 언제든지 필요로 하시면 우린 주님께 뭐든지 내어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쓰임 받는 사람은 영광스럽습니다. 정말 주님이 나를 쓰시겠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왕이시라면 우리는 주님께 쓰임받기 위해서 늘 준비된 인생들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분은 왕으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여기에는 또 한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 입성하십니다. 그분은 제자들이 기대했던 것처럼 예루살렘에 성공과 축복을 얻기 위해서 들어가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고난당하시기 위해서, 죽음을 맞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입성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자가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장로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것이다. 그리고 3일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고 종종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0장 18절, 19절에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하리니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이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자신이 죽을 것을 말입니다. 그분은 저와 여러분의 죄를 대신 감당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서 죄악의 포로된 우리를, 죄의 노예된 우리들을 자유하게 하고 해방시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5절 이하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 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 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 시키셨도다”고 말씀하셨듯이 말입니다.

  스가랴 13장 1절에서는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고 말씀합니다. 십자가상에서 흘리신 그분의 보혈이 우리와 온 인류의 죄를 깨끗하게 씻는 것입니다. 그 보혈의 샘이 예루살렘에서 열릴 것이라고 스가랴 13장 1절에서는 예언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분의 오심은 우리를 죄에서 자유케 하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 인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이 절망적인 죄의 문제를 그분이 대신 감당하시고 해결하시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고난주간을 감사로 보내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한 예수님이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시는 것은 영원한 승리를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인생은 결코 실패한 인생이 아닙니다. 그 분이 십자가에 못 박혀 있을 때 사람들은 조롱합니다. “저가 남은 구원할 수 있다고 하면서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구나”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비록 나약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리셨지만 그분은 때가 되었을 때 부활의 새벽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승리를 우리에게 약속해주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고난주간은 바로 “승리를 향한 터널”이라고 말씀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종려주일에 이미 부활의 승리를 예고하고 예언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의 새벽을 선물해 주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1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누구나 승리의 대열에 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분이 영원한 승리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과 구원의 승리를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오시는, 우리 마음의 보좌에 입성하시는 이 예수그리스도를 어떤 자세로 맞이하고 환영해야 하겠습니까?

  먼저, 우리는 봉사와 헌신으로 준비해야합니다.

  오늘 본문의 7절, 8절, 9절 말씀을 읽어 봅시다.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아멘!

  제자들이 어린 나귀 새끼를 끌고 왔는데 안장이 없어,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서 예수님이 앉으실 자리를 마련해 드렸습니다. 그리고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실 때 환영하는 수많은 무리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서 예수님이 걸어가실 길에 깔아드리고 종려나무 가지를 깔아 드렸습니다. 신랑, 신부가 입장할 때 땅을 밟지 않도록 바닥에 깔개를 까는 것처럼, 왕이 행차할 때도 흙을 밟지 않도록 귀한 주단이나 카펫을 깔아드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 여기, 헌신하고 충성하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왕에 대한 충성과 헌신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분이 왕이시라면 이제 우리는 그분 앞에 충성과 헌신으로 그분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할 것입니다. 겉옷을 깔아드린 예루살렘 시민들의 그 헌신의 마음이 바로 우리들의 마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바로 이 고난주간에 우리는 겸손의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 나귀 새끼는 겸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겸손한 모습으로 우리를 죄악에서 구속하기 위해서 평화의 왕으로 입성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겸손을 몸소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겸손의 모습을 배워야 합니다. 가장 낮아진 모습 자기를 낮추는 것이 바로 주님의 교훈입니다.

  또한 주님은 우리에게 평화를 가르쳐 주시기에 그 화해와 화평을 배워야 합니다.

  그분은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막힌 담을 허물기 위해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막힌 담을 허물기 위해서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우리도 이 고난주간에 화해와 화평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불편한 관계를 해결하셔야 합니다. 미움과 분노와 증오를 평화의 마음으로 바꾸셔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평화의 왕으로 오시는 주님을 맞는 우리의 태도인 것입니다.

셋째,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깊이 마음속에 깨달으셔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우리가 맞아야 될 채찍을 대신 맞으시고 찔려야 할 대못을 그 분의 손에 박힘 당하시고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를 대신 지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사랑을 생각하고 묵상하는 계절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그림을 보면 나무십자가가 있는데, 그 나무 십자가에 붉은 선으로 감겨 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이런 글이 쓰여 있습니다. “나는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당신은 나를 얼마나 사랑 하십니까?” 그랬더니 주님은 대답하셨습니다.  “이...만큼”, 그분은 팔을 벌리고 죽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얼마나 사랑 하셨을까요? 주님은 팔을 다 벌리실 정도로 이...만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 죽음을 당하실 만큼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영광스런 부활의 아침을 바라보시면서 이 고난의 한 주간을 지나가십니다. 여러분 앞에 시련과 환란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에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고난 후에 오는 저 부활의 동터 오르는 새벽의 아침, 새벽의 승리를 바라보면서 오늘 주님이 걸어가신 이 골고다의 길을 따라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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