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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난주일,종려주일] 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 (갈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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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광호 목사

누구도 고난을 즐거워할 사람이 없습니다. 더욱이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배하며 기도하고 찬양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얻기 위함입니다. 우리 인생의 문제를 해결 받고 평안하고 형통한 삶을 누리기 위해서입니다. 누구도 고난과 죽음을 위해서 하나님을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난 주 ‘복 있는 사람의 형통을 누리라’는 제목의 말씀 들었습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복 있는 사람이며 그에게는 형통의 복이 임함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복 있는 사람이 되기를 사모하며 또 그 길을 걷기로 결심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살 때 복 있는 사람의 형통을 누리며 살게 될 것입니다.

복 받기를 소원하고 결심할 수 있어도 고난을 결심하거나 죽음을 결심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또 한다고 해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고난과 죽음을 결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꺼이 고난과 죽음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로 주님의 고난과 죽음의 은혜로 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 중에는 하늘에 속한 사람이라는 제목의 책을 읽어 보신 분이 계실 것입니다. 이 책은 한 번 읽기 시작하면 중단하지 못하고 계속 읽게 되는 책입니다.
베스트셀러인 ‘하늘에 속한 사람’은 중국의 신사도행전적인 기적과 복음의 역사를 만들어낸 윈형제라는 사람의 이야기 입니다. 그 책을 읽는 독자들은 그의 간증을 읽으며 큰 충격을 받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온통 충격적인 고난의 이야기입니다.

그 고난의 이야기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74일간의 금식 투쟁 속에 겪는 윈형제의 고난은 죽음의 지경에까지 그를 끌어내렸습니다.
간수들의 모진 고문의 고통은 물론이고 수감되어 있는 사람들로부터 받는 모욕은 견딜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의도적으로 그들은 윈형제에게 오줌을 누었습니다.
간수들의 전기 봉은 입안에 쑤셔 박혀지고 윈형제는 실신하여 쓰러집니다. 깨어나면 오물덩이 위를 기어가게 합니다. 당시 몸무게가 30키로밖에 되지 않는 그의 고통은 거의 죽음의 지경이었습니다.
그때 그는 베드로의 편지를 묵상했습니다.
“그는 모욕을 당하셨으나 모욕으로 갚지 않으시고 고난을 당하셨으나 위협하지 않으시고 정의롭게 심판하시는 분에게 다 맡기셨습니다.”(벧전2:23)
예수님의 약속의 말씀도 묵상했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고 인자 때문에 너희를 배척하고 욕하고 누명을 씌울 때에 너희는 복이 있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 놀아라. 보아라. 하늘에서 받을 너희상이 크도다.”(눅6:22-23)

무엇을 위한 고난입니까? 무엇 때문에 죽어야 하는 것입니까?
윈형제의 투쟁은 복음을 위한 투쟁이었습니다. 그리고 고난과 죽음을 결심한 그의 투쟁 속에는 강한 성령의 개입하심과 역사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윈형제는 죄로 죽었던 자신을 멸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친히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자기의 몸에 채웠던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5)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모든 인류의 죄를 짊어지신 고난이었고 그의 죽음은 죽은 자를 살리시기 위한 생명을 위한 죽음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받으신 고난과 십자가의 죽으심은 바로 죄인된 나를 위한 고난이며 죽으심입니다.
그분이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고 생명의 길로 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과 죽음을 두려워하듯 왜 예수님인들 고난과 죽음이 두렵지 않으셨겠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에 고난과 죽음을 즐기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도 우리와 같이 나약한 인간이셨지만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그토록 무서운 고난과 죽음의 십자가를 택하시고 받아들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선택은 철저히 하나님의 뜻에 있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선택의 순간, 예수님은 갈등과 번민으로 기도하셨지만 결국 자기의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선택했습니다. 그 길이 비록 고난이며 고통이고 참기 어려운 아픔의 길이라 할지라도, 마침내 죽음의 길이었음에도 예수님은 그 죽음의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시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왕이 되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루살렘 입성은 승리의 입성도 아니었습니다. 왕의 행렬처럼 환영받고 칭송받는 입성도 아니었습니다. 단지 스가랴의 예언을 성취하시기 위한 입성이었습니다. 자신을 사람 앞에 드러내신 것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겟세마네에서 땀이 피가 되도록 힘겨운 기도 속에서도 끝내 하나님의 뜻을 구하셨습니다. 빌라도의 법정에서 모욕을 받으시며 골고다 언덕 위에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것도 모두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거룩한 발자취였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위해 이 땅에 오셨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던 것입니다.

다메셋 언덕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회심한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라”고백합니다.
또한 고백하기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철저히 주님의 뒤를 따라가고자 바울은 결심하고 고난과 죽음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이것이 제자의 길입니다.
바울은 복음 때문에 고난을 받았고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 가운데서도 결코 원망하지 않았고 함께 하시는 성령의 역사와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로마에 가면 바울의 참수터가 성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목을 베어 순교했는데 바울의 목이 떨어져 세 번 굴렀고 그 자리에 샘물이 터졌다고 합니다.
사나 죽으나 나는 주님의 것임을 고백한 바울의 복음 전도의 삶과 순교는 영원히 성서를 통해 증거될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선명히 기억되어질 것입니다.

저는 성 프랜시스의 기도문중에 이런 기도문이 있습니다.
"주 예수님, 제가 죽기 전에 두 가지 은총을 내려 주옵소서.
첫째, 영혼과 육체의 고통을 겪어서 당신의 십자가의 고난의 맛을 보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영혼과 육체의 고통을 주어서 당신의 십자가의 고통이 얼마나 어려웠는가를 몸으로 깨닫게 해 주시옵소서.
"두 번째는 당신이 우리 죄를 위하여 그처럼 참으셨던 일, 그 불타는 듯한 사랑을 간직할 수 있게 하옵소서." 우리를 사랑하는 그 불타는 사랑으로 인하여 십자가를 참으셨는데 나도 그 같은 불타는 사랑을 가지게 해 주옵소서.

오늘 우리가 묵상하고 기억해야 할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깨달아야 할 진리입니다.

1. 죽음을 정복하는 길은 죽음이라는 진리입니다.

죄의 결과로 들어온 죽음은 인생의 제일 큰 원수요 마지막 원수인데 이 죽음을 정복하고 생명과 부활을 주시기 위해서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고 오셔서 죽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대신 죽어 주시고 우리 대신 심판을 받으심으로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주셨고 심판에 이르지 않게 해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5장24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예수님이 말씀 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죽어 주시고 우리 죄를 위하여 피를 흘려주시고 우리 대신 심판을 받으신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면 영생을 얻고 생명의 부활을 얻게 되고 죽음이 없는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한복음12장24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담의 범죄로 사망의 종이 되었던 우리가 마지막 아담인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하여 영생을 얻게 되고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겨지게 된 것입니다.

죽음을 정복하려면 죽음이 있어야 됩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태복음10장39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죽으심으로 죽음을 정복하셨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을 때 우리를 두렵게 하는 죽음을 정복할 수 있습니다. 영생을 얻고 천국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은 내가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옛사람이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3절 이하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 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6장11절에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이와 같이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산 자로 여기며 순간 순간 살아야 합니다. 죽지 않고는 부활의 새 생명으로 살수가 없습니다.

죽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일에 아무 소용도 없고 가치도 없습니다. 죽지 않은 옛사람은 아무리 잘 나고 착하고 재주 많고 지식이 많아도 하나님께는 무가치 한 것입니다. 오히려 거침돌이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아담 안에 있던 옛사람이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십니다.
내가 죽는 다는 것은 나의 자아가 죽는 것이며 내 뜻이 죽는 것이며 내 삶의 목적이 죽는 것입니다.

날마다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삶이 되어야 하는데 순간 순간 우리는 내가 살아서 내 의지와 내 경험과 내 주장과 내 고집을 부리는 것입니다. 믿음의 긴장을 조금만 늦춰도 여지없이 내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믿음의 긴장에서 풀리면 옛사람의 좋지 않은 습관과 성질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순간도 방심할 수 없습니다.

칭의와 구원은 단번에 순간적으로 이루어져 변함이 없지만, 이 새사람의 생활 즉 성화(聖化)된 생활은 순간 순간 믿음의 긴장 속에서 이루어져 나가야 합니다.

아무리 성화된 성도라도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산 자라는 믿음의 긴장 속에서 풀어지면 죄악의 옛 성품이 다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6장13절에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했습니다.
끊임없이 성도는 의의 병기가 되기 위해 믿음의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합니다.

조지 밀러(George Miller)는 큰 진리를 깨닫고 말하기를 "나는 어느 날 죽었습니다. 조지 밀러에 대해서도 죽고, 세상이나 친구들의 칭찬이나 책망에 대해서도 죽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죽은 사람은 욕을 해도, 꼬집어도, 송곳으로 찔러도 모르는 것처럼 우리 옛 사람은 죽었다는 믿음으로 살 때 불쾌할 것도 없고 실망할 것도 없고 억울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또 칭찬 듣는다고 우쭐하거나 교만 할 것도 없고, 책망이나 비방을 듣는다고 실망하거나 불쾌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다같이 한번 입으로 시인합시다. "나는 죽었다." 자기 이름을 넣어서 "0 0 0는 죽었다."
이제 나는 죽었습니다.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계실 뿐입니다.


2. 내가 많이 죽으면 남을 많이 살린다는 진리입니다.

"죽으면 한번 죽는 것이지 많이 죽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라고 의문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많이 죽는다는 것은 내가 희생하고 죽어지는 범위가 넓고 시간이 길면 그만큼 나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생명을 얻고 살아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 갈 때에 법궤를 맨 제사장들이 요단강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물이 갈라졌습니다. 그들이 요단강 한복판에 굳게 버티고 서 있을 때에 많은 백성이 가나안 땅으로 건너갔습니다. 제사장들이 강에서 올라오자 요단강이 합해져서 아무도 건너올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요단강은 죽음을 상징합니다. 제사장들 즉 교회의 지도자들이 죽음 한 가운데 굳게 버티고 서 있을 때 많은 사람이 생명을 얻어 가나안 땅 천국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죽음을 거쳐야 나도 살고 남도 살리게 됩니다. 죽음을 거치지 않고 생명을 살리는 역사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2장24절 말씀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한 말씀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우리 많은 죄인들이 살아나게 될 것을 의미 하지만 이 말씀은 또한 우리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내가 죽으면 많은 사람들이 살아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한 알의 밀 알갱이가 낮은 땅속으로 떨어지기 싫고 습기 차고 냄새나는 땅속에 썩어져 죽기 싫어해서 가만히 있으면 사는 것 같지만 실상은 죽는 것이요 많은 생명의 열매를 거둘 수 없는 것입니다. 죽음이 없이 생명이 살아나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임을 고백하는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사는 성도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사나 죽으나 나는 주님의 것임을 고백하며 주를 위해 삽니다. ‘
내가 육체 가운데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서 사는 것임을 고백합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이며 앞으로 한 주간 고난주간을 지내게 됩니다.
이 한 주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분의 거룩한 죽으심으로 인해 우리가 살게 되었음을 깊이 묵상하며 고백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으심으로 죽음의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을 때 우리를 묶는 모든 죽음의 두려움을 정복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죽으면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매일 십자가에 자기가 죽는 성도의 삶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합니다.
그의 몸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퍼져 나갑니다.
그의 걸음에서 동행하시는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만약 당신이 스스로에 대한 권리를 하나님께 드린다면 하나님은 당신을 가지고 거룩한 실험을 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실험은 언제나 성공한다.”

하늘에 속한 사람 윈형제의 삶이 바로 그런 삶의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하나님께 드리기로 결단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역사하시는가를 오늘도 하늘에 속한 사람, 윈 형제를 통해 보여주고 계십니다. 누군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은 위대한 사람들이 아니라 위대하신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약한 사람들이다.’

많이 죽으면 많은 생명을 살릴 수 가 있습니다.
많이 죽으려면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야 합니다. 내가 살아서는 헛된 욕망의 삶을 추구할 뿐입니다. 그러나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면 많이 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고난의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죽으심으로 나를 살리셨듯이 내가 죽을 때 남을 살릴 수 있습니다. 많은 죽으면 만이 살립니다.
이제 내가 살아도 주 위해 살고 이제 내가 죽어도 주 위해 죽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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