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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부활을 주시는 하나님께 (고전 15:5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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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강성찬 목사

바울사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주는 은헤를 죽음에서 이김을 주심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는 죄에 대하여 죽으셨다가 사망에 머물지 아니하시고 부활하셨다는 점에서 죄에 대한 승리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의 첫 열매로 살아나심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의 마지막 부활을 보증 하셨습니다. 주시는 이란 말은 현재현으로 현재형이 계속과 반복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부활의 은총이 지금도 발생하고 있음을 보여 주며 아울러 현재형이 불변의 진리를 나타낸다는 점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시는 부활의 은총이 흔들릴 수 없는 확실한 사실임을 명확하게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이김을 주시는 이란 부활을 주시는 이란 말과 같은 말입니다. 부활을 주시는 하나님께 어떻게 하여야 할 까요

  감사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노니라 합니다. 인생 최대 최후의 문제는 죽음의 문제입니다. 독일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는 죽음에 대해 심한 공포감을 갖고 있었다합니다. 그는 자신의 손에 의해 수없이 죽어간 유대인들의 망령에 시달렸습니다. 히틀러는 한 부하에게 자신의 미래를 예언할 사람을 데려오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자 부하가 그 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예언자를 데려왔습니다. “이 사람은 미래에 대한 적중률이 100%입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예언이 빗나간 적이 없습니다. 각하의 미래를 이 사람이 분명히 예언할 것입니다” 히틀러는 자신의 운명을 예언하라고 다그쳤습니다. 예언자는 한참 눈을 감고 무언가를 생각한 후 무겁게 입을 열었습니다. “당신은 유대인의 축제일에 죽을 것입니다. 당신이 세상을 떠나는 날이 곧 유대인의 축제일이 될 것입니다”

제 아무리 위대한 인물이라도 권력자라도 죽음에 대한 공포는 다 있습니다. 암 선고를 받으시고 암과 투병하시는 분들은 이런 자리에 있고 보니 죽음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고들 합니다. 더 이상 명예도 문제가 아니고 돈도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이 문제를 해결 받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었습니까? 부활입니다. 부활이 해답입니다. 참으로 부활이 확실하다면 죽음은 잠시의 잠이요 안식일 따름입니다. 잠이나 안식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잠 자리에 드시면서 불안해하고 초조해 하고 두려움에 잠 못 드시는  이는 별로 없습니다. 이는 다시 일어난다는 사실을 믿는 믿음 때문입니다. 다시 눈을 뜨고 새로운 삶이 시작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죽음을 잠으로 표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사로가 죽었다고 보고하셨을 때 “아니라. 저가 잠을 자고 있다고. 그러나 이제 내가 깨우러 가노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때 선언하신 유명한 약속이 있습니다. “내가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자는 죽어도 살겠고”입니다. 부활은 죽음에 대한 예수님의 완벽한 처방이요 승리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승리를 입증하시기 위해 죽음에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살았으니 너희도 살리라”고 하십니다. 이 승리를 보장받은 바울 사도는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고 외칩니다. 그렇습니다. 감사할 것 밖에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은 무엇보다 이 놀라운 감사를 찬양으로 표현합니다.  55-56절은 죽음을 이긴 승리의 노래요 찬미입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사망은 이제 더 이상 우리를 이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가져온 원흉은 우리의 죄였고 율법에 의해 정죄되고 죽음을 피할수 없었으나 이제 부활의 희망으로 우리는 죽음의 지배에서 자유를 얻었다는 말입니다. 더 이상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순교자들이 죽어가며 찬미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러니 어찌 감사하지 않을수 있겠습니까? 어찌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예수 믿고 다른 것 몰라도 죽음의 문제를 해결 받고 살게 된 이 사실만으로도 영원히 감사해야 할 줄 믿습니다.

감사는 여러 형태로 드릴 수 있으며 문제 해결의 열쇠이기도 합니다.

1914년 당시 서울에 있는 정동 교회가 미화로 200달러정도의 빚을 졌습니다. 그 빚은 1893년에 시작한 교회 건축 때문이었습니다. 큰 교회 건축하다 보면 빚지지 않은 교회, 역사적으로 없습니다. 어느 주일에 목사님께서 빚을 갚기 위하여 헌금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날 걷힌 헌금이 50달러정도였습니다. 당시 교인은 이화학당 학생들이 태반입니다. 기숙사로 돌아온 학생들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몽땅 바쳐 성전건축에 이바지하자 의논했습니다.' 또 저마다 예물을 가지고 주일 밤 저녁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그들은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치네♬ 찬송을 부르면서 한사람 씩 한사람 씩 앞으로 나와 자기의 가진 것을 바쳤습니다. 동전 17달러 정도 반지 35개, 손거울, 자명종 두 개, 양말, 구두, 혼수 감으로 어머니가 주신 붉은 명주실도 바쳤습니다. 어떤 여학생은 댕기 머리를 잘라서 주님 앞에 바쳤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있는 장로님, 권사님들이 너무 감격해서 정성껏 헌금하다보니 그날 밤에 교회가 건축하다가 빚진 돈을 다 갚을 수가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부활시키시는 은총에 감사하며 함께하는 모두가 됩시다.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당시의 고린도는 가장 현대화된 문화가 시민들을 세속화시키던 대표적 도시였습니다. 돈과 사치, 부도덕과 음란이 넘쳐나던 도시였습니다. 오죽하면 “고린도인이 된다”는 말은 “방탕한 사람이 된다”는 말의 동의어가 되었다 합니다. 그런 세속화의 한 복판에서 바울의 전도로 예수를 믿은 고린도 교인들은 아직도 끊임없이 세속화의 유혹을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거기다가 이 도시는 매우 자유로운 사상이 넘치는 도시이었음에도 유독 기독교에 대해서만은 관대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사도는 사도행전 18장6절에서 이 도시에서 전도하며 대적과 훼방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핍박과 유혹에 직면하면서 적지 않은 성도들의 믿음이 흔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성도들에게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흔들리는 이유는 물론 견고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해야 견고해 질수 있겠습니까?

바울 사도는 고 그 해답을 15:2절에서 내가 전한 말을 굳게 지킨다면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합니다. 바울이 전한 말은 1절부터 강조한 복음입니다. 복음은 3-4절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죽으신 것과 죽으신지 사흘 만에 다시 사셨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예수께서 죽으셨다는 사실만이 아닙니다. 예수의 죽으심은 우리에게 죄 사함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용서받은 사람에게는 이제부터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숙제가 남습니다. 용서받은 우리가 새로운 삶의 길에서 인도되고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도록 하시려고 그리스도는 다시 사시어 우리 곁에 다가오십니다. 다시 사신 주님이 우리를 붙잡아 주시고 인도해 주신다면 흔들릴 일이 없을 것입니다. 물론 사단은 계속 우리를 흔들어 댈 것입니다. 예수님도 시몬 베드로에게 그의 타락직전에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다”(눅22:31)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런 상황 속에서도 살아 계신 주님의 임재를 묵상할 수 있다면 우리는 견고하게 설 것입니다.

전염병, 재난, 사기, 박해, 분쟁과 성도에게 계속되는 핍박을 보면 사단과 그의 동류들이 이 세상에서 판을 치는 것 같이 보여  신앙에 흔들림이 올 수 있습니다. 이런 때에 하나님은 어디에 계실가하는 의문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확실한 대답은 하나님은 한 번도 보좌를 떠나시지 않고 보좌에 앉아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 나라의 중심은 변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부활하신 주님 지금도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시며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는 이 사실을 확신 할 때 믿음 안에 굳게 설 수 있습니다.

아르헨티나의 전도자 루이스 팔라 오는 기자 회견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돌아가지 않으면 우리는 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라고 했다합니다. 하나님의 보좌와 긴밀한 관계를 가질 수 없다면, 그 보좌와의 연락선이 끊어지면, 우리는 세상을 황폐하게 만드는 심령술과 사술들에 좌지우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좌의 중심을 바라봄으로써 보죄에 앉으신 하나님과 보좌 우편의 주님을 바라볼 때 실재를 놓치지 않고 견고히 설수 있습니다.

1815년 역사적인 워털루 전쟁에서 나폴레옹은 양동 작전을 써서 웰링턴의 중심에 있는 군대를 유인하려 했다합니다. 하지만 철인 남작(웰링턴의 별칭)은 속지 않았다합니다. 그는 유리한 위치에서 모든 전황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었기 때문에 적의 전술을 금방 눈치 챌 수 있었다 합니다. 주변에 있는 장군들이 부대의 일부를 파견하자고 주장했지만 그는 냉정하게 "나는 물에 흠뻑 젖은 닭처럼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싶지 않다네." 라고 대답하며 꿈쩍도 하지 않았다합니다. 그의 군대의 중심은 흐트러지지 않았다합니다.

가끔씩 우리는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그리고 철학적으로 아주 치열한 전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때에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곳,  부활하신 주님이 계신 곳을 확신하고 부활하신 주님이 지금도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고 견고하며 흔들리지 아니하는 성도가 됩시다.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무대에는 "움직이지 않는 사람. 이 사람을 웃기면 100$를 줌." 이라는 글귀가 걸려 있었습니다.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었습니다. 3시간 동안 남녀노소가 대들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이상한 동작과 우스개 소리를 했습니다. 그러나 빌 푸콰는 완벽하게 조용히 서 있습니다. 꼼짝 않고 있기 선수권자로 기네스 복에 오른 푸콰는 백화점이나 유원지에서 워낙 움직이지 않고 있어서 때로 마네킨으로 오해를 받곤 했습니다. 그는 14살에 크리스마스 트리 앞에서 웃기려고 꼼짝 않고 서 있는 동안 자신의 독특한 재능을 발견했습니다. 어떤 여자가 그를 만져보고는 "어머, 진짜 사람인 줄 알았네" 하고 외쳤습니다. 아무것도 않고 있기란 사실 불가능합니다. '움직이지 않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푸콰는 자신의 능력의 원인을 탄력이 매우 뛰어난 피부와 극히 낮은 심장 박동수. 그리고 집중력에 돌립니다. 그러나 그는 아무리 웃겨도 웃지 않을 수 있지만, 본인도 시인하듯이 가끔씩이라도 숨을 쉬고 눈을 깜빡거리는 일은 해야 합니다.

움직이지 않는 사람은 마땅히 행동하고 말하고 움직여야 할 때 그냥 말없이 주저앉아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생각하게 합니다. 수동적으로 지내면서 어떻게 그리스도의 대사 역할을 할 수 있습니까? 주께서는 꼼짝 않고 앉아 있으라고 우리를 부르신 게 아닙니다. 행동하라고 부르셨습니다. 지금 곧 주님이 명하신 모든 것을 순종하겠다고 서약하고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모두가 되어야 합니다.

칼 힐티는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라는 책에서 행복의 원천을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발견하는 날이다”라고 말했다 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발견하는 삶이 가장 행복한 삶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22세 때 그의 일기에 “온세계가 무너진다 해도 내가 꽉 붙들고 놓을 수 없는 이념, 내가 그것을 위해서 살고 그것을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사명을 나는 찾아야 한다”고 써 놓았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우리의 사명을 일깨워 달라고 간구한 이들이 얼마나 될까요? 예수님의 사랑과 섬김을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최소한의 사명임을 자각하고 있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요?

미국에 햄크스라는 광부가 광산에서 일하다가 부상하여 두 눈이 멀고 두 손이 다 떨어져 불구의 몸이 되었다합니다. 그는 매우 절망하여 금식 자살을 계획했습니다. 그러던 때에 예일대학의 유명한 교수가 설교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방청하러 갔습니다. 그때 설교자의 “사람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이 있다” 라는 말을 듣고 설교가 끝난 후 그 교수를 만나 “나같이 눈도 없고 손도 없는 사람에게 무슨 사명이 있겠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교수는 “당신에게는 아직 입과 귀와 발이 있지 않습니까? 눈과 손은 없을지라도 있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합니다. 햄크스는 이 말에 희망을 가지게 되었고 하나님을 믿고 자기에게 입과 귀와 발을 남겨 준 것에 감사하며 스텐포드 대학에서 열심히 공부하여 미국의 유명한 강연자가 되었다합니다.

1800년대를 전후하여 영국교회와 영국사회를 부활시킨 정치가 한사람이 있었습니다. 영국의 양심이라고 일컬어지던 윌버포스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의 작사자 존 뉴턴 목사님의 도움으로 그의 나이 26세에 회심의 체험을 하고 깊은 영적인 각성을 하게 됩니다. 그는 매일 2시간씩 경건의 시간을 가지면서 그가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영국 땅에서 가장 무서운 죄악이었던 노예폐지 운동의 비전을 보여 주십니다. 당시의 영국은 노예무역으로 막대한 이익을 취하고 있었기에 노예폐지 운동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천만한 도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교회 친구들과 이런 비전을 나누게 되고 마침내 그는 그들과 클래팜이란 작은 공동체를 만들어 날마다 기도하며 이 일을 추진한 끝에 마침내 1833년 노예폐지 법령이 공포되게 되었습니다. 무려 46년 만의 결실이었습니다. 이 일의 실현을 보고 눈을 감기 전 그는 이런 말을 남깁니다. “나 한 사람은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우리는 함께 이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영광이라고 믿습니다.” 노예 폐지 선언직 후 영국의 교회당들은 새 신자들이 물밀 듯 밀려오기 시작했고 한때 그의 영향으로 국회의원 3분의 1이 복음적 신앙을 고백하기에 이르렀다합니다.

영국 출신의 아프리카 탐험가요 선교사인 리빙스턴은 늘 자신의 일을 기쁨으로 감당하며 불타는 사명감 속에서 헌신적으로 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한 번은 오지의 부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밀림 속을 지나는 긴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전진을 계속하던 중 큰 사자를 만났습니다. 날카로운 이빨을 번득이며 달려드는 굶주린 사자와 맞서 사력을 다해 싸워 겨우 그 사자를 쫓아 보냈으나 그의 온몸은 날카로운 사자의 이빨 자국과 발톱 자국으로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그때 그를 도와 일하던 원주민 소년이 피를 철철 흘리는 그를 부축하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선생님 이제 그만 포기하고 가시지요, 이러다가 돌아가시겠습니다.” 그러자 리빙스턴은 뚝뚝 떨어지는 피를 닦으며 비장한 음성으로 말했다합니다. “자, 어서 복음을 전하러 가자. 나에게 아직 복음 전파의 사명이 남아 있다. 사명의 사람은 결코 죽지 않는다.” 그의 이러한 불타는 사명감으로 어둠의 땅 아프리카에 복음의 빛이 비치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 제각기 다른 반응을 보인다합니다. 나폴레옹은 죽는 순간에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세 가지를 중얼거렸다합니다. “내 조국 프랑스…,충성스런 군인…,사랑하는 아내 조세핀…” 그의 고백에는 인생을 마감하는 아쉬움이 짙게 배어 있다하겠습니다. 베토벤이 죽음을 맞으며 읊조린 말속에서는 진한 허무와 체념이 묻어난다합니다. “친구여, 이제 희극은 모두 끝났네”  톨스토이도 죽음의 불안과 공포에 몸을 떨었다합니다. “이제 나는 어찌할 것인가” 스탈린은 임종할 때 두 눈을 부릅뜨고 왼손을 내저으며 저항했다합니다. 그러나 죽음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런 것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죽음이 있습니다. 인류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힌 한 유대인, 머리에는 가시관, 손과 발에는 못이 박혀 죽어가면서 그는 평안한 모습으로 말했습니다. “다 이루었다” 이분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며 견고하여 흔들리지 말고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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