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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날마다 부활의 주님과 함께 (요 20: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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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임경택 목사(종로교회)

우리는 나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대신 지신 예수님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 대신 지신 십자가 때문에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잠시 동안의 즐거움 때문에 그 주님의 은혜를 잊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잠시 동안의 높임 받음의 쾌감 때문에 . . . 잠시 동안의 육신의 쾌락 때문에 . . 십자가의 은혜를 잊을 때가 많습니다. 조금의 물질을 더 모르려고 주일을 범하고 십일조를 범할 때가 있습니다. “잠시동안 때문에 . . .”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잠시 동안의 높임 받음이, 잠시동안의 쾌락이, 조금의 물질을 더 모으는 것이 십자가의 사랑보다 귀하고 가치있냐?
그것이 그렇게 목숨 걸만한 가치가 있냐?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영적 물질적 그 은총을 누리는 것은 나의 능력 때문이 아닙니다. 나를 위해 대신 죽음 당하신 하나님의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때문입니다.

핀란드 북서부의 스칸디나비아에 한 어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사랑하는 아들과 함께 고기잡이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그 날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폭풍이 몰아쳤습니다. 배가 나뭇잎처럼 이리저리 표류했습니다. 칠흑 같은 밤을 . . . 어부는 파도와 강풍에 맞서 몇 시간을 싸웠으나 방향을 잡지 못하고 기력을 잃고 헤멥니다. 희망을 잃었습니다. 바로 그때 저 먼 곳에서 크고 강한 불기둥이 솟구치는 것입니다. 그곳에 육지가 있음을 감지하고 희망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부는 사력을 다해 불기둥이 있는 곳으로 노를 저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곳은 바로 자신이 사는 마을이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집으로 향하는데 아내가 남편을 맞으러 나오며 통곡하는 것입니다. “여보, 제 실수로 우리 집에 불이 나서 세간을 몽땅 태웠어요. 이를 어떡하면 좋아요. 미안해요” 그 때 어부는 아내에게 “여보, 고맙소. 당신이 실수로 불이 난 것이 나와 아들의 목숨을 구했소. 불이나지 않았다면 우리는 모두 침몰했을 것이오.” 이 이야기는 실화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횃불처럼 태우시면서 우리 죄인을 살려 주신 것입니다.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구원을 주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부활주일은 기독교 최대의 날입니다. ‘부활’이 우리 기독교의 힘입니다. 만약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기독교가 세상에 흔한 일반적인 한 종교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 부활절은 일년에 한번 계란 나누고, 칸타타하고 즐거워하는 절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잘못하게 되면 예수님 부활을 말로만 이야기하는 것으로 끝 날 수가 있습니다. 부활을 아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될 것입니다.

‘부활’은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믿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말로는 예수님의 부활을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예수님이 아직도 무덤 에 누워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가는 교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석가나 마호멧처럼 이미 죽은 한 교주를 기리는 명절로 보내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살아계신 그 주님과 교제를 나누며 그분의 명령을 듣고 지키며 살아계신 그 분에게 매일의 삶을 통해서 헌신하며 살아가는 성도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부활이 믿어지기 까지는 많은 고뇌가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부활 당시에도 ‘예수님 시체 도난설’이 나돌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너무 사모했기 때문에 환상속에 나타난 것이라는 ‘환상설’도 있었습니다. ‘기절설’ 등 . . .

기독교 신앙에는 도저히 합리적으로 인간의 사고로서는 인지되고 동의되고 납득되어지지 않는 문제들이 많습니다. 말씀으로 창조, 동정녀탄생, 부활 . . 그 중에 ‘부활’은 오직 기독교만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사건입니다.
성경은 신비의 책입니다. 기독교는 신비로 가득합니다. 모든 것을 믿음의 눈으로 보지 않으면 볼 수 없고 믿지 못할 일들입니다.

일본의 유명한 신학자 우찌무라 간조에게 어떤 대학생이 찾아와서 질문 했습니다. ‘저는 성경에 나오는 기적들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물위로 걸으셨다는 이야기, 부활하신 이야기 등은 정말로 내 이성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황당한 이야기나 이해할 수 없는 기적 등은 빼놓고 다른 내용으로 성경공부를 하면 안 될까요?’ 그때 간조 선생님은 “학생, 성경에서 사람의 이성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기적들을 다 제거하고 성경공부를 한다면 성경에는 딱 두 장만 남는다네. 그것은 성경의 앞 뒤 표지뿐이지!”

성경에 예수님이 벳세다 언덕에서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두마리로 5000명을 먹이고도 12광주리 남았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라든지 물로 포주주를 만드신 이야기. . .등등 죽은자를 살리신 이야기 등등이 가득합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예수께서 죽었다가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말은 더욱 믿기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를 믿고 성경을 믿는 것은 어떤 노력으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믿음은 선물이라고 말씀합니다. 은혜로 주시는 선물입니다. 또 성경은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살후3:2)라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은혜를 받아들이는 자에게만 믿음이 효력이 있는 것입니다. 엡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1. 부활의 신앙을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삽니다. 부활의 신앙을 가진자와 갖지 못한자입니다. 부활의 신앙을 갖지 못한 사람은 보지 못한 것은 절대로 믿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매사에 의심도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참으로 고집이 센 사람들입니다. 보아야만 믿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참 답답한 사람들입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믿지 않기 때문에 보이는 세상만을 위해서 살아가다 보니 돈과 명예와 권세 . . 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은 육신적입니다. 현실적입니다.
삶의 목적이 없습니다. 어떻거나 이 세상 뿐 입니다. 인생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무엇 때문에 사는지를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보이는 현세만을 위해 살아가기 때문에, . . .과욕을 부립니다. 그것이 그들의 삶의 목적이기 때문에 빠른 시일 내에 그런 목표를 달성해야 합니다. 질병이나 죽음이 다가오면 불안해합니다. 무덤 앞에서 절망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황에 방임하며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고”....(엡4:19)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 각 하는 자라"(빌3:19) 물질로 만족을 얻으려 하지만 쉽게 안 되기 때문에 불안해합니다. 조급하게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과로합니다. 그러다가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그러다가 삶의 공허와 갈등 속에서 몸부림칩니다.

그러나 부활의 신앙을 가진 사람은 평안합니다. 욕심이 없습니다. 명예, 물질 권세에 목숨을 걸지 않습니다. 모든 수고가 헛되지 않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뜁니다. 소망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고전15:57-58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 고 하여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은 하늘나라의 보상을 믿기에 이 땅에서 언제나 성실하게 그리고 선하게 살아갑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약속한 '부활의 약속'을 믿기 때문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는 약속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을 보십시오. 그들에게는 그런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생명을 위협하는 핍박 속에서도 화형의 불길 앞에서도, 사자의 이빨 앞에서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담대히 찬송하며 순교의 길을 걸었던 것입니다.

2.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슬픔이 사라진다

요20장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변화 된 사람들이 나옵니다. 막달라 마리 아와 몇몇 여인들, 열 명의 제자들과 무명의 제자들. 그리고 도마입니다. 이들은 한결같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눅23장 27절에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향하실 때 그 뒤를 따라간 무리들 가운데는 가슴을 치며 슬피 우 는 여자의 큰 무리가 섞여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 여자들의 무리 속에 이 막달라 마리아가 끼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누구보다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안식일 준비일이 다하여가므로 예수님의 시체를 십자가에서 내려 장사 할 수 있는 시간이 불과 한두 시간밖에 안 남았을 때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와 또 몇몇 여인네들이 예수님의 몸을 씻기고, 향료를 그 몸에 덮고, 베옷을 싼 다음 새 무덤에 모셨습니다. 보통은 이틀이나 삼일에 할 장례를 한 두시간 안에 처리했습니다. 그래서 더욱 마음이 아팠고 슬펐습니다. 이틀 밤을 뜬눈으로 세우고 사흘째 되는 날 이른 아침에 향유를 들고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시체가 사라진 것입니다. 마리아의 마음은 너무 슬픔이 커서 기절할 지경입니다.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여자여. 왜, 울고 있느냐? 너는 누구를 찾고 있느냐?” 하시는 것입니다. 그때 마리아는 “여보세요 만일 당신이 그분을 옮겨 가셖다면 어디다 모셔 두었는지 제게 알려 주세요 제가가서 그 분을 모셔가겠습니다." (겁에 잔뜩 질린 목소리) 그때 예수님은 평소에 자주 듣던 사랑스런 목소리로 ”마리아야!“하고 부르셨습니다. 마리아는 그 음성을 듣고 “선생님”하고 소리쳤습니다. 마리아의 얼굴에는 기쁨으로 가득했습니다.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얼굴이 되었습니다.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었습니다. 시30편11절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라고 말씀하신대로 주님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시는 분이십니다. 슬픔을 기쁨으로, 실패를 성공으로, 낙심 실망을 희망으로 . . .그 주님을 만나십시오. 그 주님 앞으로 나오십시오. 여러분의 슬픔의 베옷을 벗기시고 춤을 옷을 입히실 것입니다. 매일의 축제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오늘 기쁨으로 살지 못하고 날마다 슬픔 속에 사는 자가 있습니까?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을 들으면 달라집니다. 들으십시오.
요16:20에 “너희는 근심하겠으나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예수님께서 죽으시기 12시간 전에 마지막으로 남기신 유언과 같은 말씀들 중의 한 말씀입니다. 세상에는 근심과 슬픔이 많이 있습니다. 매일 매일 따스한 그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경을 읽는 중에, 예배중에, 설교를 듣는 중에, 찬양, 기도를 하는 중에. . .

3.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두려움이 사라진다.

인간의 본능 중에는 두려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어른이 되면 두려움이 없을까요? 더 많습니다. 조금만 가슴이 이상해도, 혹시 내 심장에 이상이 생긴 것은 아닐까? 소화가 되지 않으면 혹시 위암에 걸린 것은 아닐까? . . 직장을 갖게 되면 이 직장을 잃지는 않을까 두려워합니다. 사업을 하면 부도를 내지 않을까? . .

11명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후에 공포에 짓눌려 있었습니다. 방문을 걸어 잠그고 두려움에 떨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기적을 일으킬 때는 우쭐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의지했던 선생님이 가장 중범들에게나 내리는 십자가의 형벌로 돌아가시자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능력의 예수님도 십자가에 죽으셨는데 발각되면 군중들이 그냥 두겠습니까? 그래서 더욱 온 몸이 떨렸던 것입니다. 바로 그 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을 찾으셨습니다. “샬롬,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그리고는 주님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너희에게 먹을 것이 없느냐? 가지고 와 보라”고 하시고는 제자들 앞에서 잡수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을 증명해 보여 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21절). 그리고는 “성령을 받으라. 만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하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만일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 받지 못할 것이다.” 제자들은 그 말씀을 듣는데 두려움이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진실로 성실히, 청조하면서 들으십시오. 마음의 두려움이 지게 될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두려워 합니까? 두려워 하지 말 것을 두려워 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왜 두려워 합니까? 성경은 무지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요일3:8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에수를 믿으면서도 마귀를 두려워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무지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만유의 주재로서 이미 마귀의 사망권세를 깨뜨리셨습니다. 요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성도여러분들 믿음에 흔들림 없이 당당하십시오. 고전15: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4.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의심이 사라진다.

현대인은 누구나 의심이 많습니다. 지성적이기 때문입니다. 의심에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같은 세상에서는 의심 없이 살아가다가 속고 사기 당하는 일들이 많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합리적으로 비판적인 부분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매사에 의심만 하고 믿는 구석이 없다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추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추진은 신뢰를 바탕으로 추진하는 것입니다.
도마는 열명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외출 중이었습니다. 돌아오자 다른 제자들이 모두 당당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도마에게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고 . . 그러나 도마는 믿지 않았습니다. 도마는 직접 예수님을 나져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의심이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의심이라는 말을 달리 표현하면 비판적이고 지성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도마는 지성적인 비판적인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늘 의심으로만 사는 사람에게 의심은 곧 불신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볼때, 의심의 눈으로 보면 성경이 성경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차의 유리창에 코팅을 하면, 안이 보이지를 않는 것과 같습니다. 안개가 짙어지면 앞이 보이지 않아 교통사고가 나기가 쉽습니다. 예수님은 마15:14절에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긍정적인 의심 곧 무엇을 창조하는 의심은 필요하지만 부정적이고 파괴하는 의심은 피해야 될 것입니다. 31절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 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 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 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 려 함이니라.”
도마와 같이 의심하는 사람은 만사를 자기 잣대를 가지고 재어보고 믿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절대 믿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도마에게 나타나셔서 요20: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직도 의심을 가지고 있는 분이 계십니까? 아직도 자기도 모르게 자꾸 회의적인 생각 때문에 끌려 다니는 분이 계십니까? 도마처럼 예수님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28절).
도마는 그때부터 믿음의 사람이 되었고 나중에 인도에 가서 복음을 외치 다가 순교했다고 합니다.
부활주일을 맞아 이시간 이 자리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부활의 신앙을 . . .그리고 슬픔을, 두려움을, 의심을 떨쳐버리시기 바랍니다.
부활의 주님을 믿는, 부활의 주님과 매일의 삶 속에서 승리의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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