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부활주일] 예수님의 부활 (눅 24:1-12)

  • 잡초 잡초
  • 277
  • 0

첨부 1


- 설교 : 원사연 목사

(서론)
오늘은 주님께서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여 지키는 부활주일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으로부터 출발합니다.
그래서 사도 Paul은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했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며,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믿는 성도들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들이라고"했습니다. (고전 15:14-15,19)

그런데 세상에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정하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기절상태에 있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말합니다. (기절설)
어떤 자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다른 곳으로 도적질해 갔다고 합니다. (제자도적설)
어떤 자는 (오홀르만) 아리마대 요셉이 처음에는 예수님을 자기 무덤에 장사지냈다가 추후에 생각이 달라져서 예수님의 시체를 다른 곳으로 옮겼다고 합니다. (요셉이거설)

어떤 자는 (레익교수) 부녀자들이 새벽미명에 그릇된 시각으로 인해 딴 묘를 찾아갔는데 마침 그 빈 무덤에 한 청년이 진짜 묘를 가르쳐 주려고 했으나 여인들은 그 청년을 천사인줄 알고 달아나 버렸다는 것입니다. (타묘설)
이외에도 환상설, 강령설, 착각설, 환각설 등 여러 가지 상상을 동원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정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2000년동안 온갖 박해속에서도 사라지지 않았고, 시간이 갈수록 더욱 부흥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은 진리이며 필연적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一)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경에 예언되었습니다.

고전 15:3-5에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예수님의 전생애는 성경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한 생애였습니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비롯하여 베들레헴에서 나신 일, 애굽으로 피난, 나사렛에서의 성장, 갈릴리 사역, 예루살렘 입성, 가룟유다의 배신, 십자가 수난 전후 사건 등 어느것 하나 성경의 예언 대로 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도 수없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시 16:10에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라고 하였고, 욥 19:25에는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것이라"고 했습니다. 또 호 6:2에는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3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 살리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친히 당신이 죽으셨다가 다시 사실 것을 그의 공생애동안 여러번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7절에도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박히고 제 3일만에 다시 살아 나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마 16:21, 말 8:31, 눅 9:22)

요 2:19절에는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였고, 요 2:21절에서는 "성전된 자기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구약성경에 예언되어 있었고, 주님 자신이 분명히 예언하셨는데 부활하지 않았다면 성경은 권위를 상실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당연하고 필연적 사건이므로 우리는 확실히 믿는 것입니다.

(二)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기 때문에 부활하셨습니다.

롬 6: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 있는 영생이니라"고 했습니다.
죄가 없으면 죽음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죽음의 지배 아래 놓일 수 없는 것은 죄가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인들이 담당해야 할 죽음을 대신 담당하시는 사역이요, 결코 주님 자신의 몫은 아닙니다. 그 사역이 끝나면 부활하시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주님이 지신 짐은 자신의 짐이 아니고, 대신 지고 가시는 짐일 뿐입니다. 또한 주님께 죄가 없다는 것은 성경의 명백한 증언입니다.
고후 5:21절에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희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히브리기자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고 했습니다. (히 4:15)
예수님의 무죄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과 관련된 사람들에 의해서도 입증되었습니다. 우선 예수님을 은 30에 판 가룟유다가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가서 그 은을 내어 놓으면서 "자신이 무죄한 피를 팔고 범죄하였도다"고 고백했습니다. (마 27:3-4)

또한 예수그리스도를 심문하고 재판한 빌라도가 여러번 그리스도에게서 죄를 찾지 못했다고 공언하였고 (눅 23:4, 요 18:34, 요 19:4,6) 유대인들이 계속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도록 요구하자 손을 씻으며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고 했습니다. (마 27:24)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두 강도 중 한사람은 죽어가면서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고 하였고 (눅 23:41) 예수님을 직접 십자가에 못박은 책임자였던 Rome 군대 백부장은 "이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눅 23:47)
이상의 사람들은 어느 한 사람도 예수님의 무죄를 증거할 입장이 못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의 무죄를 증거했다는 것은 예수님의 무죄가 너무나 확실하다 아니할 수 없습니다.

(三) 예수님은 생명이시기 때문에 부활하셨습니다.

어두움의 힘이 아무리 강한 것 같지만 밝은 빛이 오면 맥없이 물러가고 맙니다. 어두움은 결코 빛을 이기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사망의 세력이 아무리 무서운 것 같지만 생명의 힘 앞에는 견디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당연한 것은 예수님은 참 생명이요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누른다고 눌려있는 것이 아니고, 가둔다고 갇혀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의 필연성은 주님이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생명이 그로 말미 암아 존재합니다. 생명이신 주님이 부활하신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이시기 때문에 생명이신 주님과 접촉하기만 하면 누구든지 생명을 얻게 됩니다.

죽었던 야이로의 딸도 주님이 "달리다굼" 하시니 곧 살아났습니다. (마 5:35-43) 죽어 묘지로 가던 나인성 과부의 독자도 주님께서 "청년아! 일어나라"하시니 살아났습니다. (눅 7:12-15) 죽은지 4일이나 되어 무덤에 있던 나사로도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났습니다. (요 11:39-44)

그렇다면 생명이신 주님께서 사망에 매여있을 수 있겠습니까? 절대로 그럴수 없습니다. 주님은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무덤을 깨고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으로 주님이 생명이심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생명이신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필연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론)

성도 여러분! 오늘은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부활주일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부인할 수 없는 진리로서 지극히 당연하고 명백한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신앙이 온전해집니다.
기독교 신앙은 주님의 부활에 기초합니다. 아울러 우리는 우리의 부활에 대해서도 확신해야 합니다.
주님은 당신을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친히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심으로 우리에게 부활의 소망을 심어주셨습니다.
Paul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면서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을 줄을 앎이니라"고 말했습니다. (고전 15:58)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