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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불신과 확신 (눅 24: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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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우갑 목사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단어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불신과 절망' 이라는 단어입니다. '절망'이란 말은 '기대했던 바가 이루어지지 않으므로 실망하여 자기 정신을 잃어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목표나 결과에 대해 그리고 신뢰하던 일에 대해 의심하거나 회의가 커지면 곧 절망에 이르게 됩니다.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도 먹을 수 없다면, 청량감 넘치는 생수를 앞에 두고도 물에 대한 불신 때문에 마실 수 없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마찬가지로 부활은 인류 최대의 선물이며, 하나님의 구원의 증표로 주신 사건입니다. 우리 인류의 죄와 죽음을 없이 하시며, 영생을 주시며, 부활에 동참할 수 있다는 확실한 증표입니다. 이런 놀라운 복음을 듣고도 불신하여 믿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인간은 죽음과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로만 여기고 산다면 황혼이 가까울 수록, 중한 중에 들었거나 이 세상살이가 고달플수록??절망만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 중에도 "나는 확신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또한 그런 말은 하지 않아도 확신 없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교인은 더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구원과 부활의 확신이 없어 엉뚱한 일에 몰두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왜 부활의 확신이 없이 살아가는 것일까요? 이 대답을 우리는 꼭 찾아내야 합니다. 그것은 구원받은 자의 축복과 영원한 생명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구원받은 자란 예수님을 분명한 지식으로, 마음으로, 입술로 시인하고 믿고 구세주로 영접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모신 자는 자신의 능력과 전혀 관계없이 그 속에 성령이 주장하게 됩니다. 이것이 곧 생명있는 믿음입니다.

기독교의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과 용기와 모험과 신뢰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삶을 사는 이유는 그것이 큰 확신과 신뢰를 통하여 마음에 안정과 안심을 주기 때문입니다. 특히 지적으로 불협화음이 높아졌고 주변이 굉장한 속도로 변화해 가고 있는 이 시대에서는 확신과 안정을 가져다 주는 믿음이 요청되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의 말과 같이 아리송하고 불확실한 세대 속에 살고 있는 오늘 우리들에게 확신의 삶이 시급히 요구되고 있습니다. 종교가 이러한 요구에 응답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종종 종교가 자신에게 위안이나 용기나 확신을 주지 않기에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을 종종 만납니다. 이런 사람은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고 해석하면서 어느 종교도 자신에게 확신을 주지 못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종교를 택하는 것이 마치 아이스크림의 다양한 맛을 골라서 먹듯이 사람마다 각자 자기 입맛에 맞게 고를 수 있는 어떤 것입니까? 종교마저도 상대적이라는 말입니까? 이런 분위기 속에서 기독교까지도 도매금으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즉 기독교도 인간들에게 확신과 신뢰를 심어주지 못하여 확고하고 안정된 삶을 살지 못한다고들 합니다.

50년대 노벨 문학상을 받았던 라게르크비스트의『바라바』라는 작품은 휴머니즘의 극치를 표현하는 작품입니다. 그 작품에 의하면 바라바는 강도 중에 강도로서 체력이 탁월하여 상대방 강도단의 두목의 아버지를 죽임으로서 상대방을 제압하고 폭력단을 평정하는 인물이 됩니다. 그는 의리도 있었고 강인한 민족주의 정신도 가지고 있었으나 로마에 항거했다는 이유로 사형수의 운명이 되었다가 예수님 대신에 살게된 강도였습니다.

그 후 그는 노예의 신분이었지만 로마까지 가게되고 귀족의 집에서 좋은 대우를 받으면서 살고있었습니다. 그곳에서 크리스천의 사랑과 신앙적 충정에 깊은 감명을 받게됩니다. 그러면서도 십자가에 달려있던 예수님의 초췌한 모습 때문에 그를 구세주로 믿지는 못합니다. 어느 날 크리스쳔들이 죄악의 도시인 로마를 불지르고 있다는 소문을 접하고 그들이 하는 일이라면 나도 해야한다는 신념으로 그도 불지르는 일에 앞장을 섭니다. 그는 결국 방화범이면서 크리스천이라는 죄목으로 십자가에서 공개처형을 당하게 됩니다. 그는 크리스천들과 함께 죽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면서도 예수를 구주로 믿지 못하는 자신을 슬프게 생각합니다. 바라바는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 기도를 드립니다.『당신이 만일 그리스도시라면 나도 기억해 주시지요』라고. 그 말의 뜻은 믿지도 못하면서 그렇다고 믿음을 포기할 수도 없는 애절한 영혼의 절규라고 할 것입니다.

사실 우리 주변에는 『바라바』와 같이 믿고 싶지만 믿지 못하는 수많은 지성인, 사상가, 철학자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감사한 것은 지성은 갖추지 못했어도 예수가 구주로 믿어진다는 것은 축복이요, 그가 부활했음이 믿어진다는 것은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부활의 소식은 들었으나 믿지 못하고 예루살렘으로부터 10Km 떨어진 엠마오라는 촌으로 걸어가던 두 사람에게 부활의 주님이 나타나셔서 회의와 절망으로 가득 차 있던 그들에게 확신과 소망을 주심으로 그들이 어떻게 『부활의 증인』으로 변화되어 가는가를 섬세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와 같이 부활의 소식은 듣고 알고는 있으나 확신이 없어서 싸늘하게 식어진 자신의 무력감 앞에 갈등하는 분은 안 계십니까? 오늘 우리에게 전해지는 말씀을 듣고 성도여러분들은 불신에서 확신으로 변화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절망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

예수의 부활 사건이 전해진 바로 그 날 오후 황혼이 짙게 드리워진 고즈넉한 시골길을 침울하게 걸어가는『엠마오의 두 제자』 한 폭의 그림이 머리 속에 그려지지 않습니까? 사실 이 두 제자는 어느 누구에게도 비난받을 인물이 아닙니다. 그들은 너무나 인간적이고 너무나 평범한 휴머니스트였기 때문입니다. 인본주의에 충실하고 상식에 충실했던 엠마오의 두 제자에게 부활은 믿어질 리가 만무했습니다. 왜냐하면 부활은 인간의 상상이나 상식이나 생각을 뛰어넘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바라바』이상의 생각을 하지 못했고 승천하기 전의 제자들의 생각을 넘지 못하였습니다. 11제자들까지도 승천직전까지 그들의 관심은 이스라엘 회복에 있었음을 감안할 때 조금도 이들을 비난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 24:31』 이 말은 그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얼마나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기들의 전 생애를 걸고 따라갔는데 너무도 허망하게 십자가에 달리는 것을 보고는 얼마나 실망과 허탈감이 컸을까를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스승의 죽음으로 그들의 꿈도 희망도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믿음이 없다고 나무랄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모습이 바로 나 자신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첫 사랑의 감격도 부활의 소망도 은혜의 감격도 잃어버리고 껍데기 신앙만 붙들고 힘없이 맥없이 신앙생활 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를 위해서는 목숨까지라도 바치겠다는 베드로의 기개는 어디로 가고 축 처진 어깨에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초라한 모습을 보일 때가 어디 한 두 번이었습니까? 자조와 자포자기로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도 슬픈 기색을 띠면서 살아갈 때가 얼마나 자주 있었습니까? 주위 사람들은 은혜를 체험하고 간증과 기쁨의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일로 치부하며 실의와 절망의 날을 살아간 적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물론 그들은 예수의 부활 소식을 들었음이 분명합니다(24:1-12, 22-24절 참조). 그럼에도 믿지는 못했습니다. 왜 믿지 못했을까요? 그들의 눈이 가려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비극입니다. 예수님이 그들 곁에 와 계셨지만 그들이 알아보지를 못했습니다.

부활의 주님은 지금 여기에 와 계십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과거의 주님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분은 내 심령에 들어오셔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질병, 가난, 불신, 절망, 불안, 미움, 시기, 질투, 고통을 몰아내기를 안타깝게 원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위해 언제나 초청에 응할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영안을 떠야겠습니다. 영안이 밝아질 때 부활의 주님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불신과 회의에서 빠진 제자들이 어떻게 확신으로 바뀌어 졌습니까?

그런데 그들이 드디어 예수를 알아보기를 시작했습니다(31-32). 그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첫째 - 떡을 떼어 주실 때였습니다. 30-31절에 보면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들에게 주시매 저희 눈이 밝아져 그 인줄 알아보더니』라고 하였습니다. 흔히 성찬식은 『보이는 말씀의 축제』라고 합니다. 성찬식은 우리의 영안을 열어 주는 귀한 예식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둘째 - 말씀하실 때입니다. 32절에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하였습니다. 대화를 말합니다. 주님과의 대화는 우리의 흐린 영안을 밝혀 줍니다. 그것은 영적인 눈이 열렸기 때문에 당황하지 않고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 성경을 풀어주실 때입니다. 32절에『성경을 풀어 주실 때』영안이 열려집니다. 성경은 영적인 책입니다. 성경만 열심히 읽어도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 의미를 잘 모르고 읽으면 능력은 그만큼 감소됩니다. 루터가 신학자로서 성경을 많이 읽고 알고 있었지만 로마서 1장 17절 말씀을 깨달을 때까지는 큰 능력 있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을 풀어 주는 것이 설교입니다. 설교를 듣는 중에 우리의 영안이 열려질 수 있어야 합니다.

넷째 - 마음이 뜨거워질 때였습니다. 교제도 중요하고 성찬도 중요하고 대화도 중요하고 설교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지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말씀의 지식도 중요하고 깨닫는 지혜도 중요하지만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영안이 열려진 그들은 어떻게 변했습니까? 첫째, 곧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33절). 행동하는 신앙으로 바뀌었다는 말입니다. 둘째,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34-35절). 회의하던 신앙이 확신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절망이 소망으로 바뀌었습니다. 부활은 확실히 모든 절망을 소망으로 되돌리는 출발점이 됩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가 주님을 만나 부활의 증인이 되었던 것처럼 이 시간 이 후로 부활의 힘찬 증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처음 예수를 만날 때의 그 감격과 기쁨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이것을 중생의 체험이라고 합니다. 예수를 전혀 모르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으로 발견했을 때의 그 감격과 기쁨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로부터 신앙의 유산을 전수 받은 분들은 이런 체험을 못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도 그 마음 속에 잔잔한 기쁨과 확신이 있고 남이 모르는 독특한 체험을 느끼고 있습니다. 오래오래 달궈지는 돌 솥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은근한 기쁨이 그의 생애 전반을 통하여 잔잔히 흐릅니다.

모든 운동 경기 중에서 역전승하는 게임이 가장 짜릿합니다. 1982년도에 아시아 야구선수권 대회에서 한국팀이 지고 있다가 9회에 김재박 선수의 절묘한 스퀴즈 번트와 한대화 선수의 홈런으로 숙적 일본을 물리치고 역전 우승을 한 적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열광하고 선수들은 부둥켜안고 기뻐합니다. 이유는 다 진 줄 알았는데 역전승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게 기막힌 역전 드리마를 연출하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역설적인 진리를 믿는 위치까지 자라나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 제자가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내려간 이유는 예수님이 수치스럽게 죽었고 이제는 그분을 통해 구원의 희망이 사라졌기 때문에 절망 속에서 엠마오로 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먼저 걸어가는 방향이 다릅니다. 자신들의 꿈과 희망을 바라보며 올라갔던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라는 작은 마을로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에서 낙담한 저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정치, 경제, 종교와 문화의 중심지를 향해 올라갑니다. 나의 가능성을 펼칠 수 있는 더 많은 기회와 환경이 제공되는 곳으로 올라갑니다. 그러나 지금 이 두 사람은 중심지에서 주변의 보잘 것 없는 작은 마을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저들의 모습 속에서 인생과 역사의 주인공에서 주변인으로 전락해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 죽은 대화와 생명 있는 대화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나누고 있는 대화를 보십시오. 슬픔과 죽음의 대화, 생명이 없는 대화를 길가면서 나누고 있습니다. 인생길을 걸어가면서 아무런 소망이나 미래가 없는 대화를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대화라는 것은 연령에 따라서 그 주제가 다릅니다. 나아가서 어떤 경험 후에 나누는 대화인가에 따라서 죽은 대화와 생명 있는 대화를 구별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인생길에 예기치 않는 일로 인해서 낙담과 절망 가운데 빠질 때가 있습니다. 삶이 자꾸 움추러들고 주변인으로 물러서게 되고 숨어버리게 됩니다. 대화를 해도 희망적인 것이 없습니다. 원망과 탄식의 대화가 계속 이어집니다. 그리고 웃고 다니는 것 같아도 슬픈 빛이 그 얼굴에 나타납니다.

오늘 여러분의 대화는 생명이 살아나는 언어가 넘치고 있습니까? 우리의 걸음이 희망 차고, 새로운 도전을 향해서 담대하게 나아가며 힘있게 걸어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자주 주저앉고 좌절하게 됩니까?


엠마오로 가는 길은 실패자의 길이요 절망의 길입니다. 그런데 절망의 길에서 낯선 나그네를 만났습니다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길 위에 오셨다고 했습니다. 길이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을 뜻하는데 우리 삶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오십니다. 그 길은 승리자의 길이 아닙니다. 성공한 사람들이 가는 길도 아니고 부자들이 걸어가는 길도 아닙니다. 그 길은 실패자의 길입니다. 가난한 자의 길입니다. 웃음보다는 한숨과 눈물이 있는 길입니다. 이처럼 힘없이 걸어가는데, 그 길을 찾아주시고 가까이 오셔서 대화하시며 격려하는 분이 계십니다. 어디든지 가리지 않고 찾아오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마지막 부분으로 가면서 이 제자들의 삶과 표정과 걸음이 바뀌어집니다.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던 발길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저들의 대화가 바뀌어집니다. 아울러 표정도 밝고 확신에 차며 새로운 변화로 가득 차게 됩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역사가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들의 삶이 기대되고 새로운 희망의 길로 나아갈 뿐 아니라 슬픔과 낙담이 변하여 기쁨과 확신에 가득한 삶, 그래서 우리의 얼굴에 맑은 모습이 비쳐치는 그러한 변화 말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이 제자들의 변화에 초점이 모아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이 제자들과 같은 모습이 나의 모습이라고 생각되어진다면 우리는 이 제자들의 모습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제자들의 변화가 오늘 우리의 변화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패한 자의 삶을 성공으로 바꿔주신 주님이십니다. 오늘 소망이 되는 말씀은 주님이 오셔서 실패한 자의 삶을 성공으로 바꿔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들과 함께 동행했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장 기쁜 소식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이 계신 역사와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역사의 굴곡과 아픔을 철저하게 체험했던 백성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이 오늘 엠마오로 가는 삶의 주변인으로 변해가고, 낙심과 슬픈 표정이 저들의 삶에 머물러 있고 죽음과 절망의 대화만이 가득한 저들과 함께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질문하십니다. 그들의 실패와 좌절에 관심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나에게 오셔서 동행하시는 예수님을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눈이 너무 어두워져 서 못 봤다고 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문제와 슬픔과 낙담에만 모든 것이 모아져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눈은 영의 눈, 믿음의 눈을 의미합니다.

2) 두 종류의 눈이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두 종류의 눈이 있습니다. 하나는 육체의 눈이고 하나는 영혼의 눈입니다. 육체의 눈은 사물을 보고 산하를 보고 하늘과 땅을 보는 눈입니다. 육체의 눈은 신기해서 눈 속에 30만개의 회로가 있고 안구에는 1억 만개의 신경세포가 있어서 거리나 광도, 색상을 자동 조절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파스칼이 지적한대로 그 눈으로는 지극히 큰 것도 못보고 지극히 작은 것도 못 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눈으로는 우주를 볼 수 없고 아메바 같은 미생물도 볼 수 없습니다. 아무리 눈을 치켜 떠도 눈 위에 붙어있는 자기 눈썹도 못 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또 하나의 눈이 있는데 그건 영혼의 눈입니다. 육체의 눈은 완전치 못하지만 영혼의 눈은 하나님을 보고 영원한 세계까지 볼 수 있는 눈입니다. 그런데 이 눈은 죄를 범하는 즉시 어두워집니다. 창세기의 아담의 눈도 범죄하자 어두워 졌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 제자의 눈도 어두운 상태입니다.

15절에, "예수께서 가까이 가셔서 그들과 함께 걸으셨으나 그들의 눈이 가리워져서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꿈이 깨어지고 낙심되어서 인생 길을 걸어갈 때 우리와 동행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상실감, 좌절, 낙심, 분노, 두려움, 불안, 불신, 원망, 미움 등이 따라옵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 주위에 있는 다른 것들을 보지 못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정말 어려울 때 함께 있어서는 안될 것이 우리 주위에 있습니다. 비록 우리 주님이 우리의 고난과 슬픔의 현장에 계셔도 알지 못하여서 좌절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삶의 장애가 있고 비록 실패하고 잠시 어둠 속에 있다해도 인도자 되신 주님만 따라 살 수 있기 바랍니다. 그분을 따라가는 사람은 누구든지 성공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그 다음, 더 좋은 방법은 감긴 눈이 떠지면 더 좋습니다. 오늘 이 본문에 보니까 예수님이 그들에게 성경을 풀어주시고 떡을 떼어 주시니까 눈이 밝아졌다고 합니다. 주님은 이들에게 하나님의 약속과 능력을 생각하게 하는 이벤트를 만들어 주십니다. 이 일 후에 이들의 눈이 밝아지고 다시 깨닫게 되어 변화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음식을 함께 잡수시며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실 때에 일어났습니다.

내적인 변화의 역사가 있어야 영의 눈이 떠집니다. 눈은 겉만 치료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내적인 변화의 역사가 있어야 영의 눈이 떠집니다. 생명은 어떤 것이든지 공통점이 있는데 생명은 안으로부터 생겨나서 밖으로 나오는 겁니다. 봄이 되니까 모든 생명체가 안에서 움터서 밖으로 나옵니다. 밖에서 안으로 들어 사는 생명체는 없는 법입니다. 우리 심령 속에 주님의 말씀이 들어오면 변화가 생깁니다. 영의 눈이 밝아져서 곁에 계신 주님을 볼 수 있게 됩니다.

본문에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어주실 때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우리 몸이 뜨거워질 때는 몸에 열이 있을 때, 매운 음식이나 뜨거운 음식을 먹을 때, 운동을 하거나 갑자기 무안을 당할 때 몸이 뜨거워집니다. 그런데 본문에 제자들은 마음이 뜨거워졌다고 했습니다.

동물의 경우 온도조절 능력에 따라 두 종류로 나눕니다. 하나는 온혈동물인데 기온변화에 따라 체온이 변하지 않도록 조절하는 능력을 가진 동물입니다. 또 하나는 냉혈동물인데 외계의 온도와 함께 변하는 어류나 파충류 등입니다. 그래서 냉혹하고 몰인정한 사람을 냉혈동물이라고 비꼽니다. 이것은 마음의 온도가 식은 것입니다. 마음이 얼음처럼 차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온혈 동물과에 속합니다. 몸도 따듯하지만 마음도 뜨거워져 사랑과 감격과 기쁨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냉혈인간이 아니라 온혈인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영의 문이 떠지는 내적인 변화가 있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소망과 위로를 줍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너를 도우리라' 이와 같은 말씀은 부활의 약속을 통해서 우리 인생의 엠마오로 가던 방향을 바꾸어 주시는 주님을 가장 가까이 만나는 상징과 의미가 되지는 않을까요?

말씀은 우리에게 소망과 위로를 줍니다. 말씀은 약한 자에게 힘을 줍니다. 말씀은 죄인에게 구원의 길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고 불을 붙여 뜨겁게 해줍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에게 말씀이 없었다면 그들은 영혼은 그대로 식어버렸을 것입니다. 다시 뜨거워진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길에서 만난 예수님과 뜨거워진 체험을 증거했습니다. 이제는 모든 것이 새롭게 변했습니다. 무거워진 걸음이 가벼워졌습니다. 의심이 변하여 확신이 되었습니다. 냉혈성 인간이 뜨거운 신앙인으로 소극적 신앙이 적극적 신앙으로 변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뜨거워진 사람이 되어 이 교회와 사회와 세계의 역사를 뜨겁게 만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님은 약속대로 부활하셨습니다. 약속대로 우리와 동행하시고 반드시 우리를 다시 찾아오실 것입니다. 우리의 눈에서 눈물을 씻기시고 우리의 억울함을 들어주시며 우리의 수고를 갚아주실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분들이 있습니까? 이제는 돌이킵시다. 눈물에서 웃음으로, 낙심에서 소망으로, 두려움에서 평안으로......

헨리 나우웬은 그의 책 『기도의 삶』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환희의 삶을 살아라. 내가 살아있는 하나님이니 너희도 그 죽음의 자리를 떨치고 생명으로 나아오라. 나 있는 곳에는 생명이 있고 변화가 있고 진보가 있고 꽃핌이 있고 무엇인가 새로운 것이 있다.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하겠다."

정체된 자리를 벗어나 용감하게 늘 새로운 방향으로 믿음의 걸음을 내딛는 삶, 믿음이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내가 걸어보지 않은 내 앞의 저 땅이 안전한 땅이요 하나님의 땅이요 거룩한 땅임을 믿고 거기에 자기 몸을 맡기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두려워 말고 걸음을 내딛으십시오. 미리 다 그려진 지도를 바라지말고 뜻밖의 일이 벌어지게 두십시오. 무엇인가 새로운 것이 자라게 하십시오. 그것이 믿음의 걸음인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걷는 삶입니다.
미스바교회 성도여러분!

회의와 확신과의 차이는 죽음과 생명의 차이입니다. 절망과 희망의 차이입니다. 냉혈동물과 온혈동물과의 차이입니다. 즉 차가운 가슴으로 싸늘한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내일을 보던 우리의 마음이 따뜻한 감동으로 세상을 보고 미래를 품는 차이인 것입니다. 상실감으로 아파하던 마음과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채워져서 충만해진 기쁨과 감사의 마음의 차이인 것입니다.

확신하는 부활 신앙으로 승리하는 삶을 사시기를 복빌어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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