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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손가락 (출 8: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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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피영민 목사

1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에게 명하기를 네 지팡이를 들어 땅의 티끌을 치라 하라 그것이 애굽 온 땅에서 이가 되리라 17 그들이 그대로 행할쌔 아론이 지팡이를 잡고 손을 들어 땅의 티끌을 치매 애굽 온 땅의 티끌이 다 이가 되어 사람과 생축에게 오르니 18 술객들이 자기 술법으로 이같이 행하여 이를 내려 하였으나 못 하였고 이는 사람과 생축에게 있은지라 19 술객이 바로에게 고하되 이는 하나님의 권능이니이다 하나 바로의 마음이 강퍅케 되어 그들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

서론

출애굽기 8장을 통해 원래는 두 번째 재앙인 개구리 재앙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어 보려고 하다가 묵상하는 중에 출애굽기 8장의 주제가 개구리 재앙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 번째 재앙인 ‘이의 재앙’에 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세 번째 재앙인 이의 재앙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애굽왕 바로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하신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주라는 명령을 들었지만 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주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남자만해도 노동력 인구가 60만인데 그 노동력의 손실은 애굽에게 있어서도 큰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을 쉽게 놓아주겠습니까? 결국 바로왕은 마음을 강퍅하게 해서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아니했습니다. 마음이 강퍅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애굽에 10가지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바로왕이 마음을 강퍅하게 할 때마다 10번씩이나 재앙을 내리셔서 결국은 바로왕을 굴복시키고 이스라엘 백성은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해방을 얻게 되었습니다.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구원의 책이요 자유의 책이요 해방의 책입니다. 출애굽기의 주제도 역시 구원이요 해방이요 자유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유를 원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우리는 자유를 원해야 합니다. 어떤 것으로도 눌려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영적으로도 눌려서는 안 되고 정치적으로도 눌려서는 안 됩니다. 또한 경제적으로도 눌려서는 안 됩니다. 눌리고 압박당하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을 원해야 합니까? 자유를 원해야 합니다. ‘나를 지금 누르고 있는 것, 속박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이것이 영적인 세력인가? 이것이 인간적인 세력인가? 이것이 정치적인 세력인가?’를 잘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를 누르고 있는 그 핍박의 원인을 찾아내고 그 핍박의 원인으로부터 자유함을 원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자유가 인간의 능력으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 구원과 해방이 인간의 능력으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모세가 자기의 능력으로 해방을 이루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들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시므로 결국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참 자유와 참 구원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열 가지 재앙 가운데서 오늘 생각하고자 하는 것은 세 번째 재앙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십니다. “모세야 너는 네 지팡이를 네 형 아론에게 주어라 그래서 아론이 그 지팡이를 가지고 애굽땅의 티끌을 치게 되면 티끌이 다 변하여 이가 될 것이라” 여러분 이 아십니까? 이가 톡톡 몸을 깨물면 가렵고 긁으면 살이 불어오릅니다. 한두 마리만 몸에 있어도 괴로운데 애굽 온 땅의 먼지가 이로 변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 이들이 사람과 생축에게 오르니 얼마나 고통스럽습니까? 이 세 번째 재앙은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 번째 특징은 하나님이 다른 재앙들
은 미리 경고를 주셨지만,  세 번째 재앙은 미리 경고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수가 변하여 피가 될 것이다.” “개구리가 너희 밥상과 침상에 뛰어오를 것이다.” 라고 경고해 주셨던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재앙과는 달리 이의 재앙은 아무런 경고도 없이 신속하게 떨어졌습니다. 두 번째 특징은 첫 번째 재앙과 두 번째 재앙까지는 애굽의 술객들도 똑같이 따라서 했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그 기적을 행하면 술객들도 똑같은 기적을 행했습니다. 그런데 이 세 번째 기적을 보고 애굽의 술객들이 뭐라고 말을 합니까? 출애굽기 8장 19절에 “술객이 바로에게 고하되 이는 하나님의 권능이니이다.”고 합니다. 여기 하나님의 권능이라고 우리말로 의역된 원래의 영어는 “This is the finger of God”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손가락입니다.”라는 말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세 번째 재앙을 중심으로 해서 하나님의 손가락이 어떤 것이냐 하는 것을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손가락은 손에 붙어 있으니까 하나님의 손을 같이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가락, 하나님의 손, 이것이 오늘 생각하고자 하는 주제입니다. 사람의 손가락도 얼마나 많은 기능이 있습니까? 손가락으로 글씨를 쓰고 그림도 그리고 젓가락질도 합니다. 손가락으로 피아노도 칩니다. 손가락으로 길도 가리키고 손가락으로 맛도 찍어봅니다. 인간의 손가락도 엄청난 기능을 행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손가락은 얼마나 더 큰 기능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오늘 읽은 본문은 출애굽기에 있습니다만 먼저 출애굽기 이외에 다른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손가락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출애굽기 이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손가락

출애굽기 이외에 다른 성경의 기록에는 하나님의 손가락이 세 가지 기능을 행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첫째로는 하나님의 손가락은 두 돌비에 율법을 기록한 손가락입니다. 신명기 9장 10절에서 모세가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두 돌판을 내게 주셨나니 그 판에 글은 하나님이 친수로 기록하신 것이라” 하나님이 친히 손가락으로 두 돌 위에 기록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아 내려온 그 두 돌비에 인간이 지켜야 될 최고의 법을 친수로 써서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가락은 우리 인간에게 법을 주시는 손가락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이 법을 자꾸 넘습니다. 이 법을 자꾸 어기고 침범을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손가락은 심판을 합니다. 이것이 두 번째 기능입니다. 다니엘서 5장에 보면 바벨론 왕 벨사살이라고 하는 자가 귀인 천명을 모아가지고 왕궁에서 파티를 벌였습니다. 술파티를 벌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보통 술잔으로 마시면 술맛이 없는지 느브갓네살왕이 예루살렘을 함락시킬 때에 성전에서 빼앗아가지고 온 여호와께 제사를 지낼 때 쓰는 귀한 금그릇과 은그릇을 꺼내 와서는 거기에다 술을 마시면서 우상을 찬송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갑자기 벽에 사람 손가락 같은 모습이 나타나더니 벽에 글씨를 쓰는 것입니다. “메네메네 데겔 우바르신” 이 벨사살왕은 히브리어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무슨 뜻인지도 모릅니다. 다만 사람 손가락이 나와서 글씨를 쓰고 있으니까 깜짝 놀라고 얼굴빛이 창백해지고, 넙적 다리가 녹는 듯 하고 두 다리가 떨리게 됩니다. 그리고 “도대체 저 언어를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이냐?” 그러니까 “바벨론에는 다니엘이라고 하는 히브리 사람이 있습니다.”해서 다니엘을 불러 옵니다. 그래서 다니엘이 왕 앞에서 해석을 합니다. “메네라고 하는 것은 셈을 센다는 뜻으로 하나님이 왕의 시대를 세셔서 이제 끝나게 되었습니다. 데겔이라고 하는 것은 무게를 잰다는 뜻으로 왕이 하나님의 저울에 올려놓고 보니까 부족함이 보여서 이제 왕의 시대는 끝나게 되었습니다. 우바르신이란 나눈다고 하는 뜻인데 왕이 망령된 짓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왕의 나라를 둘로 나누어서 메데와 바사에게 줄 것입니다 고로 왕은 오늘 부로 멸망할 것이고 왕의 나라는 나뉘고 왕은 하나님께
부족함이 보여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벨사살 왕은 그날 죽임을 당하고 다리오 왕이 이어서 왕위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내용이 다니엘서 5장에 기록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고로 하나님의 손가락은 하나님의 거룩한 법을 어기는 자에게 심판하는 그런 능력이 있는 손가락입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행전 13장에 사도바울이 일차 전도여행을 할 때에 바보 섬에 도착을 했습니다. 바보섬에서 바울이 총독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데 남자 무당이 거기 옆에서 자꾸 방해를 하는 것입니다. 남자무당을 박수라 하지 않습니까? 박수 엘루마라고 하는 자가 바울에게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고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하고 자꾸 방해를 하니까 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사도행전 13장 11절에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리니 네가 소경이 되어 얼마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박수 엘루마가 더듬거리고 갈 길을 얻지 못했습니다. 고로 하나님의 손가락은 법을 주실 뿐만 아니라 법을 어기는 자에게 심판하는 손가락입니다.

그러면 법을 어기고 나서 “나는 죄인입니다.” 하고 벌벌 떨고 있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손가락은 어떤 손가락입니까? 용서와 은혜를 주시는 손가락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예수님께 데리고 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께 “율법에는 간음한 여인은 돌로 치라고 했는데 이 여인을 돌로 치리이까 용서해 주리이까?”하고 묻습니다. 이것은 아주 못된 질문입니다 예수님에게 딴죽을 걸어 궁지에 빠뜨리려는 질문입니다. 그들은 만약 예수님이 용서해라 하면 율법을 어기는 이단이라고 고소할 것이고 돌로 치라 하면 자비가 없고 사랑도 없는 지도자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대답해도 걸고 저렇게 대답해도 걸려는 못된 그런 의도를 가지고 예수님께 간음한 여인을 데리고 온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이 무릎을 굽히시더니 손가락으로 땅에 뭔가를 쓰십니다. 그러기를 두 번이나 하십니다. 그리고 일어나서 뭐라 하십니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먼저 아무
죄 없는 사람이 돌로 쳐라” 아 그러니까 돌을 들고 서 있던 사람이 어떻게 합니까? 아이고 갑자기 팔이 가렵네 하면서 하나씩 없어지더니만 아무도 안 남고 결국은 간음한 여인과 예수님 둘만 남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8장 11절에 “나도 너를 정죄치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말씀하시고 그 여인을 용서하셨습니다. 그리고 여인에게 바르게 살라고 교훈을 하신 사건이 요한복음 8장에 기록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고로 하나님의 손가락은 죄를 짓고 그로 인해 떨고 있는 자,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에게는 용서하시는 손가락이요 치료하시는 손가락인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귀신에 눌린 자에게는 해방하는 손가락입니다. 누가복음 11장 20절에 “네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쫒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여러분 중에 귀신이 시키는 대로 끌려 다니는 사람은 하나님의 손이 임하여 해방함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손가락은 법도 주시고, 심판도 하시고, 구원도 하시고, 악한 영으로부터 해방도 하시는 능력인 것입니다.

2. 이스라엘 백성의 의문

그런데 오늘 출애굽기 8장에 나타난 하나님의 손가락은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느냐?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출애굽기 8장에 볼 때에 마음속에 의문이 있었을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이 나타나서 우리가 좋아진 것이 뭐가 있냐? 우리가 전에는 그래도 노예생활을 해도 재료를 애굽 사람이 다 주고 해서 벽돌만 찍어내면 되는 것이었는데 저 모세와 아론이 나타나더니 그만 우리 스스로 재료도 가서 구해야 되니 더 괴로워지게 되지 않았느냐? 저 모세와 아론이 나타났다고 해서 우리 아들들을 낳으면 하수에 던져 죽이라는 것이 없어진 것이 아니지 않느냐?’ 하는 의문이었을 것입니다. 거기에다 재앙으로 인해 애굽의 하수가 변하여 피로 변하고 물이 악취가 나서 마실 수가 없
는데 그 재앙이 애굽 사람에게만 내렸습니까? 이스라엘에게도 같이 내린 것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은 억압에다 재앙까지 같이 당합니다. 다시 말하면 첫 번째 재앙, 두 번째 재앙은 애굽만 당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도 똑같이 당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속으로 의문이 생겼을 것입니다. 제가 만약 이스라엘 백성이면 저는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거 하나님 따르는 것이 이런 것이냐 야 도대체 가만히 보니까 물이 피로 변하고 개구리 재앙도 내고 하는데 애굽 술객들도 똑같이 따라하는 것을 보니까 하나님과 애굽신과 무슨 차이가 있느냐? 아니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서 여호와를 따르려고 하는데 여호와를 따르는 것이 이렇게 괴로움을 받고 또 애굽에 내린 재앙으로부터 면제 되지도 않고 하니 여호와의 백성이 된다는 것과 애굽 백성이 된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느냐?’ 이렇게 의문을 가질 법도 한 것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떠시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의문을 일격에 날려버린 것이 바로 ‘The finger of God’ 입니다. 하나님의 손가락이 나타나더니 이런 의문을 일격에 박살을 내버렸습니다.

3. 출애굽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손가락

출애굽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손가락은 세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손가락은 능력(power)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손은 능력의 손입니다. 기적도 일으키는 능력도 있습니다만, 하나님의 손은 애굽 술객들이 말한 대로 여호와의 권능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손가락은 권능의 손가락입니다. 하나님의 손과 손가락은 단순히 기적만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천지를 창조하신 능력이요 천지를 보호하시는 능력이요 사람과 만물을 통치하시는 위대한 능력인 것입니다 시편 102편 25절에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하늘을 보시면 태양도 있고 달도 있고 별도 있고 구름도 있습니다. 누가 만드신 것입니까? 하나님의 손으로 직접 만드신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손은 창조의 능력의 손입니다. 그리고 창조하신 것을 보존하시는 하나님이시기도 합니다. 만물이 전부 원자가 있기 때문에 원자끼리 부딪히면 만물이 원자폭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존하시지 않습니까? 욥기 14장 15절에 “주께서는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아껴 보셨나이다.” 주님이 아껴 보시지 아니하면 불로 다 날아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껴보시고 보존하십니다. 그리고 주께서는 그 손가락으로 사람도 통치하시고 만유를 통치하시고 역사를 통치하시는 것입니다. 에스라서 8장 22절에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 권능과 진노를 베푸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배반하는 자에게 진노를 베푸신다는 말씀은 하나님이 통치하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손은 창조(Creation)의 손, 보존(preservation)의 손, 통치(government)의 손입니다. 이 세 가지를 합치면 섭리(providence)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섭리는 창조, 보존, 통치의 세 가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손은 섭리의 능력이 있는 손이시라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만유를 보고 역사를 보면 하나님의 손가락의 흔적을 다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손가락은 구별성이 있습니다. 애굽의 술객의 능력과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 구별된 것은 하나님의 손가락이 나타난 세 번째 재앙부터입니다. 그러니까 애굽의 술객들도 “아이고, 이것은 여호와의 손가락이기 때문에 우리가 따라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손가락이 나타나니까 애굽의 신과 여호와의 신이 현격하게 차이가 납니다. 애굽의 신은 수준차이도 나고 질적 차이도 나고 능력에도 압도적인 차이가 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가락은 애굽의 신은 거짓신이요, 열등신이요, 귀신이요, 악신이지만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신이요 진실하신 창조주 보존자 통치자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을 딱 구별해 냈던 것입니다. 여호와의 손가락은 이스라엘 백성과 애굽 백성도 구별합니다. 거기 출애굽기 8장 23절을 읽어봅시다. “내가 내 백성과 네 백성 사이에 구별을 두리니 내일 이 표징이 있으리라 하셨다 하라” 하나님의 손가락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마에 있으니까 애굽 사람들하고 완전히 구별이 되는 것입니다. 첫 번째 두 번째 재앙까지는 구별이 되지 않았습니다. 세 번째 재앙, 하나님의 손가락이 나타날 때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별이 되는 것입니다.

구별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했습니까? 보호하셨습니다. 그래서 네 번째 재앙부터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성경을 통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피, 개구리, 이, 파리 의 재앙이 애굽을 덮쳤을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났습니까? 8장 21절에 “네가 만일 내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면 내가 너와 네 신하와 네 백성과 네 집들에 파리 떼를 보내리니 애굽 사람의 집집에 파리 떼가 가득할 것이며 그들의 거하는 땅에도 그러하리라 그날에 내가 네 백성의 거하는 고센 땅을 구별하여 그곳에는 파리 떼가 없게 하리니 이로 말미암아 나는 세상중의 여호와인줄 네가 알게 될 것이라” 세 번째 재앙까지는 애굽과 이스라엘이 같이 당했지만 네 번째 재앙부터 열 번째 재앙까지는 하나님이 애굽에만 내리시고 이스라엘 백성이 거하는 고센 땅은 면제해 주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손가락은 이렇게 구별해서 보호해 주시는 손가락인 것입니다. 고센 땅 경계에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신기했겠습니까? 자기 땅에는 파리가 한 마리도 없고 경계에서 팔을 내밀어 보면 파리떼가 붙었을 테니 말입니다. 얼마나 신기하고 놀라웠겠습니까? “어떻게 이렇게 경계가 져서 저 땅에는 파리가 득실거리고 이 땅에는 파리가 없는가?”하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손가락이 임하니까 이렇게 구별되어
서 보호의 은혜를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여 우리를 자유케 해주옵소서 우리를 누르는 것은 저 애굽왕 바로니이다. 자유를 주십시오! 해방을 주십시오!” 했지만 그들의 능력으로 무슨 해방이 됩니까? 모세의 능력으로 구원이 일어났습니까? 어림도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능력으로 자유를 얻고 해방이 되고 출애굽이 되었습니까? 어림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의 능력으로 자유를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도 마귀에 눌려 있고 정치적으로도 눌리고 경제적으로도 눌리고 이모저모 눌려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힘으로는 자유와 해방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귀신으로부터 여러분이 자유할 능력이 있으십니까? 안됩니다. 그러면 무엇으로부터 무슨 능력으로 우리가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손가락이 우리를 딱 찍어서 구별하시고 보호하시고 그리고 그 전능하신 능력으로 역사하셨기 때문이 우리는 마귀로부터 해방되고, 우리를 지배하는 귀신으로부터 해방되고, 우리를 누르고 있는 죄로부터도 해방된 줄로 믿습니다.

침례교회의 정신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자유입니다. 우리 침례교는 “자유”를 추구합니다. 그래서 국가의 왕이 종교를 가지고 이거 믿어라 저거 믿어라 명령하고 국가가 말하는 것을 안 믿으면 핍박하고 죽일 때에 침례교회는 “순교를 당할지라도 성경 그대로 믿겠습니다. 왕은 정치나 잘 하시오 신앙 문제는 종교문제는 우리가 성경을 중심으로 우리 양심대로 하나님을 섬기겠습니다. 고로 국가교회 만들지 마시고 종교의 자유를 주시오.”라고 용감히 말했던 것입니다. 침례교는 장로교, 감리교와 달리 우리는 국가교회를 인정치 않습니다. 침례교회의 정신은 자유(Spirit of liberation)입니
다. 우리는 자유를 원합니다. 우리를 누르는 어떤 것으로부터도 해방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엇으로부터 무슨 능력으로 해방됩니까? 하나님의 손가락이 우리에게 임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가락이 그 능력이 우리에게 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 가지를 주의해야 합니다.

첫 째로 하나님의 손가락이 우리 위에 임한 것을 영안이 열려 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손이 우리 위에 임하여 있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영안이 안 열려서 하나님의 손을 보지 못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모세야 내가 내 손이 너와 함께해서 능력을 줄 테니까 너는 출애굽의 지도자가 되라”고 말씀하셔도 모세처럼 “저는 못합니다. 내가 입이 둔한데 난 못합니다.” 하나님의 손을 보지 못한다면 사명자도 자기 사명을 회피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의 손이 자기 위에 함께 한 것을 보지 못하면 자기들의 지도자를 원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고 딴죽 걸고 자기들의 지도자는 꺾어 버리고 자기들을 구속하고 있는 원수는 찾아가서 “지푸라기라도 주시오” 하고 비는 이런 꼬락서니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됩니까? 자기들 위에 임한 하나님의 손가락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애굽의 바로왕처럼 하나님의 손가락이 안 보이는 사람은 하나님하고 싸워서 이길 줄 알고 싸우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머리로 바위에 대고 박치기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한번 박치기 한 후에 머리가 깨지고 나서도 정신을 못 차리고, 열 번 씩이나 박아서 다 깨져도 완악한 마음을 버리지 않았던 사람이 바로 바로왕입니다. 하나님의
손이 벌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으면 아예 처음부터 내가 하나님과 싸워서는 이길 수 없다 하고 그냥 보냈으면 저 좋고 남 좋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다 좋을 것인데 왜 그런 어리석을 짓을 하다가 저도 망하고 심판받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손가락을 보지 못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고로 여러분 영안이 열려서 여러분 위에 임한 하나님의 손을 보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우리 위에 임한 하나님의 손이 어떤 종류의 손인가를 잘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심판의 손일 것입니다. 벨사살 왕을 심판한 것처럼 그리고 박수 엘루마를 심판한 것처럼 심판의 손가락으로 와 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내 머리 위에는 하나님의 손이 심판의 손가락으로 와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견딜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을 이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은 빨리 엎드려서 하나님께 회개하고 예수 믿어 죄사함 받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왜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자기 머리로 바위와 박치기하는 짓을 계속하겠습니까? 어리석은 짓입니다.

그러므로 세 번째로, 자기 머리위에 심판의 손이 와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회개하시고 예수 믿으시고 하나님을 따라 섬기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 나는 죄를 지어서 “아 내 마음은 참 지금 어쩔 수 없고 내 마음이 참 슬프고 괴롭고 하나님 앞에 양심의 가책이 많이 되고 우 주여 어떡합니까?”라고 마음에 두려움이 있는 성도들은 요한복음 8장에 간음한 여인을 도와준 그 용서의 손이 와 있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믿으시고, 용서 받으시고, 위로를 받으시고, 격려를 받으십시오.

결론

그러나 우리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이 구별하시고 보호하시고 능력 주셔서 우리 앞에 원수를 물리치고 장애를 물리쳐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그런 하나님의 돕는 손길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 하나님의 돕는 손길은 우리를 붙들고 계십니다. 우리를 날마다 붙들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 손을 자꾸 놓는 것이지 하나님은 우리 손을, 우리를 절대로 놓지 않으십니다. 천국 갈 때까지 놓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그 손을 잡았다가 놨다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위에 임한 이 하나님의 손을 다시 강하게 붙드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람이 어떻게 자유를 얻고 해방을 얻습니까? 하나님의 손을 의지하고 그 능력이 역사할 때 자유와 해방이 있는 것입니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영혼의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영혼의 자유를 누리시고 인생 살면서 자유롭게 살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손을 붙들 때 가능한 것입니다.

사람은 죽기가 무서워서 종노릇하고 배고플게 무서워서 벌벌 떨 때 노예가 되는 것이지 하나님의 손을 붙들고 나는 자유자라 할 때에는 뭐가 두렵겠습니까? 죽으면 더 좋은 것이죠. 시편 120편부터 134편까지는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고 합니다. 123편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에서 성전에 올라가면서  “종의 눈이 그 상전의 손을, 여종의 눈이 그 주모의 손을 바람같이 우리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며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기를 기다리나이다.” 노래했습니다. 여종의 손이 주모의 손을 바라듯이 우리는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구별하시고, 우리에게 전능의 능력으로 역사하셔서 해방과 자유를 주신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가락을 붙드시고 바라보시고 그 손의 도우심을 얻어 승리하시고 치료받게 되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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