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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로암미, 암미 (호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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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석기현 목사

사랑은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가장 대표적인 소재이지만 그런 사랑 이야기가 들어갈 때 반드시 함께 따라오는 것이 있는데 바로 미움입니다. 만약 두 사람의 관계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으로만 일관하게 되면 극중의 인물들은 마냥 행복할지 몰라도 보는 시청자에게는 별 재미없는 이야기가 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영화나 드라마를 시청할 때에 그렇다는 것이지, 자기 자신의 러브 스토리도 그처럼 사랑과 미움이 왔다 갔다 하는 불안한 것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자기를 사랑한다고 해 주던 사람이 갑자기 자기를 미워하게 된다는 것은 연인들에게 있어서는 최악의 상황이며 가장 괴로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은, 사랑과 미움을 한 사람에게 준다는 것은 이처럼 그 관계를 어렵고 괴롭게 만드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하나님께서 바로 그런 분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구약 성경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사이를 두고 바로 그런 ‘애증(愛憎)(love & hate)의 관계’로 묘사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호세아서입니다.
호세아는 남북 분열 당시 북조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사역했으며,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선포하면서도 또한 하나님의 은혜의 구원을 동시에 선포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악에 대한 미움을 자동적으로 수반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는 사랑과 직결될 수밖에 없는 것인데, 그처럼 전혀 어울릴 수 없을 것 같은 이 두 가지가 하나님의 구원 역사 속에서 어떻게 절묘하게 결합되는지를 아주 명쾌하게 증거해 주는 것입니다.
저는 이 시간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일견 조화될 길이 없어 보이는 이 ‘하나님의 미움’과 ‘하나님의 사랑’이 믿는 자에게 어떻게 역사하여 완벽한 구원을 이루게 되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악을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철저한 공의 때문에 사람은 자기가 죄인인 것을 분명하게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사람의 죄를 얼마나 적나라하게 드러내시는지를 확연히 보여줍니다. 우선 본문 호세아 1장 1절과 2절에 기록하기를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가 이어 유다 왕이 된 시대 곧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왕이 된 시대에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 여호와께서 비로소 호세아로 말씀하시니라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행음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호세아서가 씌어진 시기를 가리켜 여로보암 2세가 북조 이스라엘의 왕이 된 때라고 했습니다. 그의 조상은 바로 악명 높은 아합 왕가를 멸절시키고 새로운 정화의 기운을 불어 넣은 예후였는데, 그는 비록 바알 우상숭배를 일단 타파하기는 했지만, 여호와 신앙에 그 우상숭배 의식의 잔재를 그대로 도입하여 남겨 두는 치명적인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우리 사람 생각에는 그래도 같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니까 비슷한 신앙이라고 여겨질지 모르지만, 적어도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던 것이 확실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런 이스라엘의 모습을 두고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행음함이니라」고 치열하게 책망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처럼 우상과 타협하는 신앙생활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오히려 불신자보다 더 싫어하시고 치를 떨 수밖에 없는, 실로 가증스러운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그들로 하여금 깨닫게 해 주시기 위하여 그야말로 기상천외의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그것은 호세아 선지자로 하여금 「가서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이 말씀이 비유적인 뜻인지 아니면 문자적인 것인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호세아서 전체의 문맥을 볼 때 호세아의 아내가 된 고멜이란 여인은 실제 인물로서 음란한 성품이 있는 여인 내지는 아예 창녀였을 가능성까지 있다고 판단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처럼 복잡하고도 어려운 결혼을 호세아에게 명령하신 이유는, 바로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꼴을 보여 주고 있는지를 호세아 자신이 피부로 느껴지도록 절실히 깨닫고 그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생생하게 전하도록 만들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이 호세아의 결혼생활에 더 기가 막힌 장면들이 나타납니다. 본문 3절로부터 9절에 「이에 저가 가서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취하였더니 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매 /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 이름을 이스르엘이라 하라 조금 후에 내가 이스르엘의 피를 예후의 집에 갚으며 이스라엘 족속의 나라를 폐할 것임이니라 / 그 날에 내가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이스라엘의 활을 꺾으리라 하시니라 / 고멜이 또 잉태하여 딸을 낳으매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 이름을 로루하마라 하라 / 내가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을 긍휼히 여겨서 사하지 않을 것임이니라 / 그러나 내가 유다 족속을 긍휼히 여겨 저희 하나님 여호와로 구원하겠고 활과 칼이나 전쟁이나 말과 마병으로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 고멜이 로루하마를 젖뗀 후에 또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매 /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이름을 로암미라 하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고 했습니다.

이제 음란한 여인 고멜과 결혼하게 된 호세아는 그 사이에서 자녀 셋을 차례로 보게 됩니다. 원문에 보면 첫 아들에 대해서는 「그에게 아들을 낳으매」라고 되어 있으나 둘째로 낳은 딸과 셋째로 낳은 아들에 대해서는 ‘그에게’란 말이 빠져 있습니다. 이것은 그 둘째와 셋째는 호세아의 친 자식이 아닐 가능성까지 있음을 시사 해 주는데, 바로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는 2절에서 호세아더러 그 결혼을 통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고 말씀하신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자녀들이 태어났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참으로 이상한 이름들을 지어주도록 명하셨습니다. 첫째 아들에게는 「이스르엘」이란 이름을 지어주라고 하셨습니다. 그 지명은 바로 우상숭배에 앞장섰던 아합과 그의 아들들이 죽임 당했고, 장차 예후의 집안 역시 이곳에서의 전쟁을 통해 멸망 받게 될 것이라고 예언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호세아의 첫아들은 이스라엘의 멸망의 상징 바로 그 자체가 되었던 것입니다.

둘째로 태어난 딸에게는 「로루하마」란 이름이 주어졌습니다. 이것은 ‘긍휼 없음’이란 뜻의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살육 당하게 하실 뿐 아니라 그런 와중에서도 조금도 긍휼을 베풀어 주시지 않겠다는 뜻으로서, 첫 번째 저주보다 더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셋째로 난 아들에게는 「로암미」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그 이름의 뜻은 본문 9절이 부가 설명하는 그대로 아예 「내 백성이 아님」이란 뜻입니다. 물론 ‘무긍휼’보다도 훨씬 무서운, 최악의 저주 단계 그 자체를 가리키는 이름인 것입니다.

이처럼 호세아 선지자는 음란한 여인을 아내로 두어야만 했고 그 사이에서 자기 자식이 아닐지도 모르는 아이들을 낳으면서 거기에다가 그런 저주스러운 이름들까지 지어주어야 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체험을 통하여 호세아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바라보는 공의로운 하나님의 심정이 어떠한지를 깨닫도록 하신 것이었습니다. 신앙의 절개를 지키지 않고 우상종교와 혼합된 모습의 이스라엘이란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눈으로 보기에는 정말로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심정이란 그야말로 음란한 여인이나 창녀를 자기 아내로 둔 남편과 같은 것이었으며,  그 결과 이스라엘에게는 ‘멸망, 무긍휼,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자’로 점점 더 악화되는 현실만 남아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이 그 자신이 지극히 나쁜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먼저 깨닫지 않는다면 그 최악의 상태에서 호전될 길은 전무합니다. 불치의 병에 걸린 사람이 자기 몸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고 고집을 부리면 치료를 시작도 할 수 없습니다. 종교에 있어서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악을 철저히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공의가 없으면, 사람은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구원을 필요로 하는 존재인 것조차 깨달을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고 자기를 곁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만 비교할 때에는 전혀 인정되지 않았었지만, 이 완벽하신 하나님의 눈앞에서는 자기의 죄라는 것이 실로 창녀와 같이 부끄러운 것이며 음란한 여인과 같이 더럽고 악한 것이라는 사실을 똑바로 보고 겸손하게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죄인된 우리가 이처럼 악을 미워하시는 공의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완전타락’을 먼저 깨닫고 고백하고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손길을 바라게 되어야만 참된 구원의 길이 열려지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이외의 그 어떤 종교도 사람을 가리켜 이처럼 철저하게 죄인이라고 정죄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경전은 그저 애매모호한 추상적 사상을 나열하든지 기껏해야 권선징악을 가르치고 있을 뿐이지, 사람 자신이 근본적으로 이처럼 추악한 죄인이라고 적나라하게 꼬집어서 지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종교는 인본주의 종교이며, 따라서 사람이 싫어할 말은 아예 입 밖에 내지도 않고 경전에 넣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른 진단이 없는 종교에 바른 치료가 있을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환자에게 무조건 다 건강하다고, 아무 문제없다고 좋은 말만 해 주는 사람이 진짜 의사일 수가 있겠습니까? 그 의사는 고칠 실력이 없든지, 아니면 그 환자를 불쌍히 여기는 사랑이 없든지 둘 중에 하나일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오직 참된 종교, 여호와 종교만이 사람을 가리켜 ‘너는 죄인이다’라고 매섭게 질책합니다. ‘악에 대한 미움’ 바로 이 하나님의 철저한 공의 앞에서 스스로의 죄에 대하여 부끄러움을 느끼고 음행을 저지른 자처럼 수치스러움을 깨닫게 됨으로써 그 미움 뒤에 기다리고 있는 구원의 사랑을 향해 나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택자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사람은 구원의 감격을 최대로 체험하게 됩니다.

본문 호세아 1장 10절부터 2장 1절까지의 말씀은 지금까지의 내용과는 너무나도 극단적인 대조를 보이고 있습니다. 기록하기를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 같이 되어서 측량할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 전에 저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저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사신 하나님의 자녀라 할 것이라 / 이에 유다 자손과 이스라엘 자손이 함께 모여 한 두목을 세우고 그 땅에서부터 올라오리니 이스르엘의 날이 클 것임이로다 / 너희 형제에게는 암미라 하고 너희 자매에게는 루하마라 하라」고 했습니다.

이 문단의 첫 마디인 「그러나」라는 한 마디 접속사 이후부터는 그야말로 같은 하나님께서 하고 계시는 말씀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그 분위기가 그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일순에 싹 바뀌고 있습니다. 바로 앞의 5절에서는 ‘이스르엘’ 멸망의 골짜기에서 활이 꺾이고 피를 흘리게 될 것이라던 이스라엘이 여기 10절에 와서는 「바닷가의 모래 같이 되어서 측량할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백성이 될 것이라고 축복을 받고 있습니다. 바로 조금 전에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다」라고 ‘로암미’로 불렸던 바로 그 꼭 같은 이스라엘이 이제는 「너희는 사신 하나님의 자녀다」라는 뜻을 가진 ‘암미(내 백성)’라는 정반대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무언가 문장이 잘못되든지 원래 이어진 문단이 아니지 않느냐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극단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그런 기상천외한 회생의 구원이 주어진다면 한 마디라도 무슨 이유가 있어야 할 것인데, 그런 것도 없이 그냥 순식간에 모든 것이 뒤바뀌어져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런 세상이 뒤집힌 것과 같은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왜 그처럼 음란죄로 인하여 멸망 받아 마땅했던 이스라엘이 눈 깜짝할 사이에 그 축복을 측량도 못할 하나님의 자녀로 둔갑하게 된 것이겠습니까?
그 해답은 바로 11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에 유다 자손과 이스라엘 자손이 함께 모여 한 두목을 세우고 그 땅에서부터 올라오리니 이스르엘의 날이 클 것임이로다」라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여기 「두목」이라고 번역된 말은 ‘통치자, 지도자’라는 뜻인데 바로 오실 메시아를 가리켜 예언한 말씀입니다.

장차 유다 지파를 통해 나타날 메시아야말로 절망적인 이스라엘에게 유일한 그러나 완벽한 구원자가 되실 것이라는 사실을 호세아 선지자는 1장 서두에서부터 일찍이 암시를 해왔습니다. 1절에 보면, 호세아 선지자는 본인이 북조 이스라엘의 선지자임에도 불구하고 남조 유다의 왕들을 먼저 언급하고 있습니다. 또 한창 이스라엘에 대한 저주가 진행되고 있는 와중에도 7절에 보면 「유다 족속」은 하나님의 긍휼을 입을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호세아가 자기 민족의 그 절망적인 상황에 대하여 유일한 구원의 희망을 오직 장차 ‘유다’ 지파를 통해 오실 메시아 그 한 분에게만 집중시키고 있음을 명백히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 메시아가 오시면 그 분은 비단 유다 족속뿐 아니라 북조 이스라엘도 함께 구원의 길로 인도하실 것을 호세아는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때가 되면 「이스르엘」의 날도 클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 단어는 4절에서는 ‘하나님이 흩으신다’는 뜻으로 쓰였지만,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모으신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 정죄 받았던 그 두려움이 컸던 만큼, 이제 구원받게 된 감격 또한 더욱 크게 됨을 가리키는 명칭인 것입니다.

누가 보아도, 또 스스로 생각해도 도무지 구원받을 이유나 가망성이 전무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일방적으로 한 순간에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것은 순전히 하나님께서 스스로 독생자를 메시아로 보내어 주심으로써 가능하게 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의 피값으로써 모든 인생의 죄를 대신 갚아 놓으시고, 그 구원의 길에 이스라엘 백성을, 그리고 우리를 그냥 공짜로 불러 주신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참된 구원은 ‘오직 은혜’요 ‘전적 은혜’에 의한 것일 따름입니다. 원래는 「로루하마(긍휼 없는 자)」라 불리던 자매가 바로 이 때문에 하루아침에 「루하마(긍휼 얻은 자)」라고 불리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단 한 점이라도 이스라엘 백성 쪽의 어떤 조건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여기서 신자의 구원받은 감격이 솟아나오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로암미’에서 ‘암미’로 넘어 가는 과정이 우리의 노력에 의하여 조금 조금씩, 우리의 선행 때문에 당연히, 혹은 우리가 수도(修道)한 만큼에 비례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그렇게 자신의 공로에 기인해서 완성되는 구원이라면 거기에는 이와 같은 큰 감격이란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저 어떤 보람이나 성취감 따위, 순전히 자기중심의 만족감만 남아 있게 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 인위적이고 인본주의적인 구원이라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진정으로 감사하고 찬미하고 영광을 돌리게 할 아무 동기도 이유도 없어지는 것이 자명합니다.

하지만 참된 구원은, 도무지 구원받을 이유라고는 털끝만큼도 없었던 우리에게, 스스로는 아무런 힘을 쓸 수 없는 전적으로 무력한 우리에게, 아니 영벌 받아 마땅하고 입이 열 개라도 할 말 없던 음란한 여인 같은 우리에게, 아무 이유도 없이 그저 하나님께서 스스로 작정하시고 스스로 충족시켜 버리신 대속의 조건에 의해, 그야말로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공짜로 내려온 것입니다. 그것은 정말 ‘말도 안 되고 이치에 맞지 않을’ 정도로 죄인에게는 전혀 뜻밖의 사랑이며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던 은혜였습니다. 그러니 그런 일방적인, 그런 무조건적인 구원을 받게 된 신자 쪽에서의 반응이라는 것은 그저 감사와 감격 외에는 다른 것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저 우리는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를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라고 놀라며, 그저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주 돌아가셨다는 것이 웬 말인가?’라고 충격적인 감사에 휩싸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기의 원하는 것을 신으로부터 얻어 내려고 하는 ‘장터 종교’에서는 어떻게 이런 감사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거기에는 신과 흥정하는 줄다리기만 있고 ‘주시는 만큼 바치겠다.’는 냉정한 계산만 있을 따름입니다. 자신의 성찰과 선행을 통하여 구원 받겠다고 하는 ‘셀프 서비스 종교’에 그 무슨 감격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거기에는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지 아니하는 끝없는 방황과 자신의 악함을 고백하지 아니하는 교만만 가득할 뿐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오직 주께로부터 왔으며 전부를 오직 주께로부터만 받은 줄’ 아는 성도의 입에서는 그런 얄팍한 흥정이나 외식적인 염불 대신에 오직 감격에 넘치는 감사와 찬송만이 하나님을 향하여 늘 터져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조건 때문에 사랑하는 세상의 사랑과는 달리 아무 조건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악조건과 역조건만 가득 차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택자를 ‘내 백성’이라고 불러주시는 그 사랑을 피부로 느끼고 마음으로 맛보는 가운데, 늘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애증(愛憎)’이라는 것은 사람 관계에 있어서는 변덕이며 변심이며 괴로움과 고통을 유발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미움은 이처럼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애증입니다. 어떤 죄도 미워할 수밖에 없는 공의와, 어떤 죄라도 용서해 줄 수밖에 없는 은혜는 일견 서로 상반되는 것처럼만 보입니다. 그런 까닭에 세상의 다른 어떤 종교도 이 두 가지 속성을 동시에 발휘하는 신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종교들은 원래가 사람이 만들어낸 인본주의 우상종교이며, 그런 까닭에 사람의 생각에 모순처럼 보이는 것들을 그들의 교리나 경전에 애당초 포함시킬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종교들은 기껏해야 공의나 긍휼, 둘 중에 하나만을 강조할 수 있을 뿐이었으며, 사실상 그렇게 나누어 놓고서도 그 하나하나를 제대로 완성시키지는 못했습니다. 우상종교의 공의는 기껏 사회정의 정도의 수준에서 끝날 뿐, 각 사람 속에 있는 근본적인 인생의 악을 공의롭게 드러내지는 못했습니다. 인본주의 종교의 긍휼은 기껏 이웃 사랑의 수준에서 끝날 뿐,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대신 죽으심으로 나타낸 이 놀라운 긍휼, 이 무궁한 은혜의 비슷한 것에도 미칠 수가 없었습니다.

오직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 종교만이 이처럼 공의와 은혜를 완벽하게 조화시키면서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식을 무조건 엄하게만 다스리는 아버지가 좋은 아버지일 리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식이 잘못하는 것까지도 아무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그냥 방임시키는 아버지가 진정 자식을 사랑하는 아버지가 되는 것도 역시 아닙니다. 진짜 훌륭한 아버지, 진짜 좋은 아버지라면 사랑하는 자식인 까닭에 그 자식이 저지르는 잘못을 미워하면서 고쳐 주려 할 것입니다. 또한 그 자식을 사랑하는 이유도 그 자식이 무엇을 잘해서가 아니라 그냥 자기 자식인 까닭에 무조건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가 바로 그처럼 훌륭하고도 좋으신 아버지이십니다. 악을 지극히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통하여 자신이 절망적인 죄인(‘로암미’)이라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고 회개하면서, 당신의 택자(‘암미’)를 한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뜨겁게 체험함으로써 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하늘에 계신 우리 구원의 아버지께 돌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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