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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눅 2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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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문기태 목사

(눅 24:1)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예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눅 24:2)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기운 것을 보고
(눅 24:3)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뵈지 아니하더라
(눅 24:4) 이를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눅 24:5)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눅 24:6)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눅 24:7)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 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눅 24:8) 저희가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눅 24:9)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모든 다른 이에게 고하니

어떤 사람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쉽게 만나고 그 능력을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예배를 통하여 예수님을 경험하고 영적 공급을 풍성하게 받아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아갑니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교통이 날마다 이어지고 기도의 응답이 풍성합니다. 질병의 고통을 만나서도 치유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의 사랑을 자주 경험합니다. 따라서 살아계신 하나님, 은혜를 넘치게 공급하시는 예수님, 역사하시는 성령님을 날마다 생활속에서 경험하므로 확신과 기쁨이 넘치는 행복한 신앙생활을 합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도무지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지를 못합니다. 기도의 응답도, 예배의 성공도, 치유의 능력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신앙이 생활에 별 영향을 주지도 못하는 것 같아 늘 안타깝습니다. 그렇다고 열심이 부족한 것 같지도 않고 주를 향한 사랑이 뒤지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예배에 거의 빠지는 일도 없고 봉사와 교육 등 모든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신앙의 연조나 교회를 위한 수고 등 무엇하나 뒤쳐지게 하지도 않는데 왜 이렇게 하나님을 경험하는 일에는 밀리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인들 역시 예수님을 누구보다도 더 사랑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열심도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무덤에 장사한 후에 그 누구보다도 먼저 무덤을 찾아온 여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실패하였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믿음을 하나님께 인정받고 하나님을 늘 경험하며 부활하셔서 지금도 살아계시는 예수님을 날마다 만나는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이들의 실패를 거울삼아야 할 것입니다.

안식 후 첫날 새벽에 누구보다도 먼저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으리라는 것을 전혀 예상치 못했습니다. 여인들은 큰 돌로 막아 놓은 무덤의 문을 누가 열어줄 수 있을까? 를 걱정하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무덤에 당도하니 무덤의 문은 활짝 열려 있었습니다. 무덤안으로 들어가보니 예수님의 시체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여인들은 시체를 누가 치운줄 알고 예수님을 잃어버렸다고 근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여인들의 곁에 서 있었습니다. 바로 천사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여자들은 놀랍고 두려워서 바닥에 엎드렸습니다. 그러자 천사들이 말하기를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하였습니다.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5절). 이 말슴은 참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귀한 말슴입니다.

교회 안밖에는 아직도 본문의 여제자들처럼 살아나신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고 있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이들은 누구못지 않게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열심히 믿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향한 열심도 누구못지 않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용감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나는 중요한 일은 거의 성공하지 못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능력을 경험할 가능성도 거의 없습니다. 참 안타깝습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부활의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여야 근심과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는 축복을 경험하며 평안과 기쁨속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까?

1. 산 자 가운데서 찾을 때 부활의 예수를 만날 수 있습니다.(5)

여인들은 예수님을 만나려고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수의를 입고 누워있는 시체속에서 예수님을 발견하려고 했습니다. 무덤속에는 예수님이 계시지 않았습니다. 수의는 개켜져 있고 예수님은 아무리 자세히 들여다보아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벌써 사망권세를 이기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번짓수가 틀렸던 것입니다. 죽은 자들을 모아놓은 동네에는 예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산 자, 그중에서도 영원히 사시는 이에게 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전에 이미 말씀하시기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만나려면 무덤으로 찾아올 것이 아니라 갈릴리로 가서 기다려야 했습니다. 여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나려고 하면 무덤이 아닌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가시는 갈릴리 동네로 찾아가야 했습니다.

(마 22:32)은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말슴하십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 자의 하나님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들 사이를 뒤지고 다녀서는 만날 수 없습니다.
#비행기 안에서 만난 이슬람교도와 기독교인이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이슬람교도의 자랑--우리의 멕카에는 어마어마하게 화려한 마호멧의 무덤이 있다우---그러자 그리스도인이 맞받았습니다. "그것이 이슬람과 기독교의 차이라우! 우리의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셔서 무덤이 비었고 지금까지도 살아서 역사하신다우!"

여러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아무리 찾아도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종교를 창시한 교주의 죽은 뼈나 화려하게 치장한 무덤 또는 죽은 몸에서 나온 사리같은 것을 자랑하는 이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우리는 오직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사신 그리고 우리에게도 부활의 새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의 생명의 능력을 자랑할 뿐입니다.
초대교회 당시, 로마는 크리스천들에대한 핍박이 극에 달했습니다. 그들은 크리스천을 백성들이나 농락하며, 유혹하는 범죄집단으로 생각했고, 무서운 방법으로 크리스천들을 죽였습니다.

부활절 가까이 올 무렵, 한 어머니와 그녀의 아들이 크리스천의 지하 모임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습니다. 아들은 어머니의 가슴에서 벌벌 떨며 울었습니다. 원형 경기장 안에서 사자에게 찢겨 죽는 벌이 내려졌습니다. 그들은 원형 경기장에 덩그러니 놓여졌고, 잠시 뒤에 사자굴의 문이 열렸습니다. 굶주린 사자들은 으르렁거리면서 달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어린 아들은 무섭게 달려드는 사자를 보고서 어머니의 품에 꼭 안기면서 울부짖었습니다.
"엄마 무서워요!"
어머니는 아들의 몸을 꼭 안아주면서 조용히 말했습니다.
"애야! 부활하신 우리 주님을 이제 만나볼 시간이란다. 눈을 꼭 감고 조금만 참아라. 그러면 곧 눈앞이 밝아 올거야."
여러분도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죽은 이들속에서 예수님을 찾지말고 지금 살아서 역사하시고 말슴하시는 산 예수를 찾아 만나기 바랍니다.

2. 현재속에서 찾을 때 부활의 예수를 만날 수 있습니다.(3)

부활의 예수님은 과거가 아닌 현재의 삶 속에서 찾아야 만날 수 있습니다. 마태28장 5절에서는 천사가 말하기를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 내가 아노라' 하였습니다. 여인들의 기억속에는 아직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채로 존재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더 이상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채 누워잇지 않고 죽은 자 가운데서 이미 살아나셨습니다. 과거에 매여 있으면 지금 살아 역사하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제자들에게는 여전히 어제의 예수,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기억만 잇었습니다. 예수님이 사망을 이기고 이미 부활하셨음에도 어제 죄의 형벌을 대신 받으며 죽으신 예수님의 기억에만 사로잡혀 잇었습니다. 눅 23장 55절에는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따라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두었는지를 보고 돌아갔다고 기록되었습니다. 이들은 눈여겨 보았고 또렸한 기억에 의지하여 예수를 찾았습니다.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만나는데 그 기억이 방해가 되엇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2000년전의 팔레스타인 지역을 돌아다니시던 예수님을 더듬어 찾고 있습니다. 물론 성경속에 나타난 예수님의 기사를 통해 예수님을 이해하려고 하는 시도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지금도 살아서 우리 가운데 계시며 부활의 능력을 나타내시며 지금 우리중에 임재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또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알고 이제껏 믿어왔던 어제의 예수님의 기억이 너무 명확하여 오늘의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는 경우도 잇습니다. '내가 전에 다니던 교회에서 믿던 예수님은 점잖은 분이신데 여기에 와보니 너무 강력한 분으로 바뀌었네. 이상하다. 뭔가 잘못된 것 아니야? 나는 점잖은 예수님이 멋있는데.. ' 중요한 것은 오늘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새롭게 다가오시면 과거의 예수님에 매여있지 말고 오늘 나에게 새롭게 말슴하시고 새 일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붙들면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잇습니다. 그러나 어제에 매여 있으면 믿음은 절대 성장하지 않습니다. 오늘 하나님께 쓰임받을 수도 없습니다.

1800년대를 전후하여 영국교회와 영국사회를 부활시킨 정치가 한사람이 있었습니다. 영국의 양심이라고 일컬어지던 윌버포스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amazing grace의 작사자 존 뉴턴 목사님의 도움으로 그의 나이 26세에 회심의 체험을 하고 깊은 영적인 각성을 하게 됩니다. 그는 매일 2시간씩 경건의 시간을 가지면서 그가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영국 땅에서 가장 무서운 죄악이었던 노예폐지 운동의 비전을 보여 주십니다. 당시의 영국은 노예 무역으로 막대한 이익을 취하고 있었기에 노예폐지 운동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천만한 도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교회 친구들과 이런 비전을 나누게 되고 마침내 그는 그들과 클래팜이란 작은 공동체를 만들어 날마다 기도하며 이 일을 추진한 끝에 마침내 1833년 노예폐지 법령이 공포되게 되었습니다. 무려 46년 만의 결실이었습니다. 이 일의 실현을 보고 눈을 감기 전 그는 이런 말을 남깁니다. "나 한 사람은 아무것도 할수 없지만 우리는 함께 이 일을 할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영광이라고 믿습니다." 노예 폐지 선언직후 영국의 교회당들은 새 신자들이 물밀 듯 밀려오기 시작했고 한때 그의 영향으로 국회의원 3분의 1이 복음적 신앙을 고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3. 말씀을 기억할 때 부활의 예수를 만날 수 있습니다.(6)

여인들이 그리고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한 큰 이유는 말슴을 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잊고 느낌에만 의존하다보니 부활의 놀라운 새역사가 그들의 눈앞에 펼쳐졌는데 깨닫지 못하고 잇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근심하고 있었습니다.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정말 기뻐하야 할 그 때에 울고 잇었습니다. 천사들은 반복하여 예수님이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라고 강조합니다.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 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눅 24:7)"
지금 내가 느껴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의 말슴입니다. 지금 되어지는 상황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께서 하신 말슴입니다. 반드시 말씀대로 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말씀이 가리키는 방향에 시선을 집중해야 합니다. 말씀을 잊고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여제자들은 8절에 예수의 말슴을 기억하고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 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리었다고 기록되엇습니다. 말씀을 기억하게되니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 만져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체험이 아니고 말씀입니다. 중요한 것은 느낌이 아니고 말슴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 오감이 아니고 예수님이 하신 말슴입니다.

오늘도 많은 제자들이 말슴에 의지하여 따르기보다는 오감을 더 의지합니다. 예수님의 말씀보다는 자기의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을 더 신뢰합니다. 질병이 낫도록 기도해달라고 하여 예수님의 이름으로 질병이 떠나도록 명령하고 하나님의 말슴에 의지하여 기도해주면 즉시로 무언가 느낌에 신경을 집중합니다. '에이, 나는 기도를 받아도 뭐 불같은 것이 뜨겁게 내리지 않지? 그리고 기도받았어도 여전히 아프잖아. 그럼 그렇지 기도발이 안받났나봐' 하고는 실망하고 더이상 믿음을 보이지 않습니다. 또는 당시에는 믿음으로 충만하여 감사하고 확신을 가지다가도 환경이 어려워지고 시간이 조금 지나도 달라지는 것이 없으면 믿음은 사라지고 낙심에 사로잡힙니다. 끝까지 말씀을 붙들려고 하는 이가 적습니다.

주님은 말씀을 통해 분명히 약속하셧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막 16:17,8) "

끝까지 말씀을 붙잡고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사단이 뭐라고 미혹해도 말슴을 의지하여 물리쳐야 합니다. 성경속의 믿음의 사람들을 보십시오. 요셉은 형들에 의해 노예로 팔려갈 때도,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감옥에 갈 때도, 왕의 신하가 은혜를 잊고 찾아오지 않았어도 그리고 많은 세월이 흘러 20년이 되도록 감옥에서 아무런 기약없이 답답한 시간을 보낼때에도 꿈을 통해 반복하여 확신을 품게 해주신 주님의 약속을 붙들고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총리에 오르고 능력을 발휘하고 존귀하게 쓰임받을 기회를 붙잡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결코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를 찾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그 분의 생명을 나누어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머지 않아 우리는 그와 함께 죽음이 완전히 정복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가 신령한 몸을 입고 부활사셨은즉 우리 역시 썩을 몸이 썩지 아니할 새 몸으로 덧입게 될 것입니다. 이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세상을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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