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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점점 나아지는 인생 (삼하 3: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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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황요한 목사

사회학자들이나 시사평론가들은 사월이 역사적으로 많은 사건들과 일들이 있어서 사울을 잔인한 달이라고 그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만, 저는 사월을 맞이해서 우리 평안의 성도들이 신앙이 회복되고, 여러분의 영혼이 소생되는 점점 나아지는 사월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본문 5절까지 해서 2절에서 5절은 맏아들부터 여섯째까지 얻었다고 기록이 나와 있습니다. 그 부분은 오늘 말씀에서 그렇게 중요한 말씀은 차지하지 않고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과 함께 집중해야 할 말씀은 1절입니다.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가고 사울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

전쟁을 하면 할 수록, 전쟁이 오래면 오랠수록 실력차이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을 전쟁이라고 말한 것은 이제 그렇게 새로운 표현이 아닙니다. 공부하는 것도 전쟁과 비교할 수 있고, 더구나 사업은 전쟁이 아닐 수 없습니다.

홈플러스가 역전 앞에 생겨서 많은 사람들이 편리하게 쇼핑을 할 수 있는데, 엊그제 심방하면서 보니까 우리 남부시장에도 큰 건물이 하나 생기고 대형마트가 생겨서 아주 재미있는 노래와 춤을 추면서 고객들을 유인하고, 아주 엄청나게 저렴한 가격으로 손님들을 서비스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거기 가서 사는 사람도 이렇게 싸게 팔면 밑질 텐데 그러면서 사고, 그리고 사면서 요즘은 오픈하는 데가 많아서 여기저기만 찾아다니면서 쇼핑할 재미가 난다고 하면서도 장사하는 사람은 참 힘들겠다라는 자신 나름대로의 평가까지 곁들이고 있습니다.

요즘은 사업은 제로선 게임 같습니다. 니가 죽던지, 내가 죽던지, 네가 망하던지, 내가 망하던지 둘 중에 하나다. 아마 그렇게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사업들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삼천원 하는 바나나를 천원에 줄 수가 없겠지요. 유행상품이라고 하지만 정말 출혈을 하면서 사업하는 이들을 보면 한 편으로 마음에 안타까움도 있고, 사업하는 분들이 얼마나 마음에 고통이 클까를 생각도 해 봅니다.

모든 것이 전쟁과 같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남편이 직장에 갔다가 돌아올 때, 사업장에 갔다가 돌아올 때 전쟁에 나갔던 장수가 목숨을 부지하고 돌아오는 것과 같다. 그런 남편을 향해서 오늘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당신을 환영합니다. 그런 환영의 메시지가 있어야지 돌아오는 것 기다렸다가 바가지부터 긁어대면 살아돌아오고 싶은 마음이 없을 것입니다.

이제는 부부가 다 직장이나 사업을 함께 다 하는 시대이기 때문에, 이제는 조금 차원이 다르기는 하지만 이제는 전쟁이라고 하는 극심한 삶의 현장에서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인 줄로 믿습니다.

저도 때때로 위로 받고 싶고, 여러분들도 위로 받고 싶고, 위로를 받아야 하는 사람이 제대로 위로를 제 때 못 받으면 속상해서 안타까워 하고, 제대로 위로 못한 사람은 마음에 부담감과 미안함으로 어쩔 줄 몰라 합니다.

저는 오늘 전쟁이 오래면 오랠 수록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그 차이가 나는 것을 보면서 이런 차이가 왜 생길까? 이런 차이가 오는 것은 어디서부터인가를 여러분들과 함께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사울은 40세에 왕이 되었습니다. 40세에 왕이 되었을 때, 그는 준수한 외모와 모든 백성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그를 초대왕으로 세웠을 때 몇몇 비류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그를 지지하고 찬성했습니다. 사울도 기분 좋게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랬지만 시간이 가면서 오늘 본문말씀처럼 점점 사울은 약하여간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의 밑천이 드러나기 시작을 합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의 인간적인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을 합니다. 시간이 가면 갈 수록 세속적인 그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을 합니다. 모든 사람들 앞에서 잘 포장되어진 물건처럼 그러나 시간이 가면 찢어지고 뜯겨져서 이제는 속에 속 모습을 다 드러내는 것처럼, 그것을 드러냈을 때에 그것이 부끄럽지 않아야 하는데 사울은 껍질을 벗기면 벗길 수록 부끄러운 것들이 많았습니다.

처음에는 너그러웠습니다. 너 같은 베냐민 지파에서 어떻게 왕이 되겠느냐고 면전에서 비류들이 조롱할 때도 참았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면서 사울이 그릇이 크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는 어떤 어려움에 처해있는 길르앗-야베스의 사람들에게 자신이 모든 사람들 앞에서 전쟁에 참여하자고 소를 한 겨리를 찢어서 열두지파에게 보내면서 만약에 참여하지 않으면 이와 같이 되리라고 이렇게 강력한 메시지를 보낼 때, 모든 사람들은 그가 정말 백성을 사랑하고 강력한 리더쉽이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잠깐이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그의 리더쉽은 없어지고, 그의 넉넉한 마음은 점점 인색하고,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으로 바뀌어갔습니다. 생명을 걸고 자기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시기를 주님을 위해서, 국가를 위해서 바쳤던 다윗에게 백성들이 몇 마디 칭찬을 했다고, 그것이 꽁해서 다윗을 미워하기 시작하고, 창을 던지고, 군사들을 이끌고 그를 잡으러 다니는 어처구니 없는 일들을 그는 계속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갈수록 망가져 가는 것입니다. 사울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 하나님의 은혜에서, 역사에서 사울은 점점 멀어져 가는 사울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반면에 다윗은 30세에 왕이 되었습니다. 헤브론에서 7년6개월을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무려 33년을 약 40년 6개월동안 이스라엘의 왕으로 재직하면서 그는 점점 강하여 진 줄로 믿습니다. 그가 이렇게 점점 나아지는 인생이 된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첫 번째 그의 성실함에서 그 답을 찾고 싶었습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마음에서 멀어지기 시작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지도자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무엘 선지자에게 이새의 가정에 가서 기름부을 자를 찾으라고 했습니다. 예고도 없이 이새가 살고 있는 가정에 찾아갔을 때 그는 기름 병을 들고 있었습니다.

백성의 장로들과 지도자들이 사무엘 선지자가 기름병을 들고 온 것을 보고 기겁을 했습니다. 기름을 붓는 것은 왕과 예언자와 선지자들만 해당되는 일인데, 지금 40세의 왕은 시퍼렇게 살아있고, 지금 선지자 사무엘도 살아있는데, 무슨 일로 기름 병을 가지고 왔습니까? 평화입니까? 라고 물었을 때 평안이니라. 그리고 이새의 가정에 갔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름 부을 자를 찾으니 모든 자녀들, 형제들을 모으라고 했습니다. 기별이 갔습니다. 7명의 형제들이 다 소집이 되었습니다. 맏형 엘리압부터 시작해서 위에 몇 형제들은 이스라엘 군대의 장군들이었습니다. 우리로 말하면 최전방에서 전쟁을 수행하고 있던 사람들이었지만 지금 아버지가 기별을 하는데, 주의 종이 와서 기름을 부으려고 하는데, 잘하면 왕이 될 수도 있고, 잘 하면 출세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자리에서 뒤도 안 돌아보고 달려갔습니다.

일곱명이 형제들이 모였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이 기름을 붓기 시작을 했습니다. 첫 번째 아들을 보면서 마음에 흥분이 생겼습니다. 이렇게 준수하고 멋있는 아들, 바로 이 사람이다라고 생각을 하고 기름을 부으려고 할 때에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말렸습니다. 아니다. 난 두 번 실수 안한다. 사울 얼마나 준수했느냐? 다른 사람보다 어깨가 더할 만큼 그렇게 모든 사람들 앞에서 외모가 준수한 사울을 택했지만 그는 내게 갈수록 멀어지지 않았느냐?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아주 중요한 주님의 기준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한국 사회를 가리켜서 외모지상주의의 사회가 되었습니다. 흔히 얼짱, 몸짱으로 표현되는 외모, 이 외모가 따라주지 않으면 취직도 안 되고, 아무 것도 되지 않는 그런 시대, 그래서 돈을 들여서 고쳐야만 되는 시대, 외국 사람들은 한국을 비아냥 거립니다. 한국은 외모가 아니면 안 되는 사회다. 우리가 외모를 가지고 평가하는 사회라고 하는 것은 가치관에 있어서 가장 낮은 사회를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세계적으로 볼 때 선진국가의 반열에 들고 싶어하지만 우리의 가치관은 굉장히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하는 것이지요. 사실 보면 다 잘 생긴 것 같은데, 다 잘난 것 같은데, 코메디프로 나오는 몇 사람 빼고, 여러분, 아이가 태어나는 것을 보셨지요? 핏덩어리를 보셨지요?
어머니가 그런 일을 하셨기 때문에 아주 많이 봤습니다. 나중에 제가 엉터리 조수 노릇도 했잖아요.

전화가 옵니다. ‘지금 빨리 선생님 좀 불러 주십시오.’ 그러면 ‘언제부터 진통이 시작되었습니까?’ ‘어제부터요.’ ‘몇 분 간격으로 그런가요?’ ‘30분이요.’ ‘아직 멀었어요. 제가 그냥 진단 다 해가지고 내일쯤 오세요.’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그런 것 같습니다.

그 핏덩어리를 보면 옛날 그 핏덩어리는 머리도 조글조글 해 가지고 정말 볼품이 없고, 얼굴도 주글주글해서 정말 보기가 민망스럽고 무섭고 그랬어요. 옛날에 어머니들이 영양상태가 좋지 않기 때문에 아이들이 태어날 때 이쁘게 태어나는 것이 거의 없었어요. 젖을 먹으면서 한 달 두 달 석 달 먹으면서 얼굴모양, 골도 그렇게, 얼굴도 그렇고 사람 모양이 되어 갔어요.

그런데 요즘은 태어나면서부터 애들이 빵빵하잖아요. 그냥 목욕만 시켜놓으면 그냥 안아주고 싶을 만큼 이쁘지 않습니까? 너무 달라졌지요. 영양상태도 좋아졌지만, 거리에 노는 아이들 보면 다 이뻐요. 다 귀여워요. 거기에 무얼 더 고치고, 무얼 더 어떻게 한다는 말씀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가치관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은 점점 나아지게 한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는 성실함입니다. 일곱명의 아들들이 다 와서 심사를 보았는데 하나님의 마음에 차지 않았어요. 안타깝게 사무엘이 더 이상 없느냐고 그랬습니다. 일곱명을 보고도 성이 안차서 더 없느냐고 물어보니까 있기는 있는데, 말째는 들에서 양을 치고 있는데, 그것은 볼 것도 없어요. 연락도 안 했다는 것이지요.

얼른 연락해서 데리고 오라고 했습니다. 아버지조차도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이지만, 그 다윗에게 하나님께서는 기회를 주신 줄 믿습니다. 남들은 출세할 기회, 성공할 기회라고 자기의 일터에서 달려왔는데, 다윗은 소외되어 있었습니다. 말없이 봉사하는 자리에서 묵묵히 일하고 있었습니다. 요즘 같으면 그런 식으로 그렇게 일해가지고는 어느 세월에 출세 하겠느냐고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의 불꽃 같은 눈동자는 거기까지 주시하고 계신 줄 믿습니다.

미련한 자같이 보이나 지혜로운 자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은 선택되는데 관심이 있었지만, 다윗은 양떼를 돌보는 일, 자기에게 주어진 성실한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런 그를 보자마자 ‘이가 그라.’ 기름을 부으라는 거예요.

두 번째 다윗이 점점 나아졌던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았던 그의 삶에 있습니다. 골리앗이 이스라엘을 침공했을 때 장수와 군사들은 벌벌 떨었습니다. 도저히 생각해봐도 싸워서 이길 것 같지 않았습니다. 계산해 보고 승리할 것 같지 않았어요. 그래서 몸을 사렸습니다. 아무리 왕이 권면하고 나중에는 내 사위로 삼고 내 땅을 절반이나 주겠다고 그래도 죽은 다음에 사위가 무슨 소용이 있냐 그리고 몸을 사렸습니다.

요즘 사회에 대표적인 분위기가 아마도 몸을 사리는 그런 분위기가 아닌가 하고 생각이 됩니다. 괜히 열심히 하다가 다치지. 그러면서 몸을 사리는 사회. 제가 군에 갔을 때 12중대에 갔었는데, 그 중대에 처음 배치를 받고 토요일날 배치를 받고 주일날이 되었어요.

야, 주일날이 되었구나. 군대에도 그때에는 유신군대라고 그랬는데, 유신군대도 요즘은 좋아져서 교회도 마음놓고 가라고 그런다는 거예요. 기다렸습니다. 10시쯤 되니까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고, 주번하사가 소리를 지릅니다. 신자집합! 얼마나 그 소리를 기다렸는지, 그래서 뛰어나갔습니다.

뛰어나가서 서 있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안 나와요. 주번 하사가 몇 번을 하고서는 ‘야 신자 없으니까 너 혼자 가라.’ 저 혼자 교회를 갑니다. 나중에 알고 본 사실이지만 우리 중대 그 120명 중에 크리스찬이 참 많았어요. 보통 크리스찬이 아니예요. 신학대학을 다니다 온 사람, 청년회장을 한 사람, 찬양대원, 교회학교 교사를 하다온 사람, 죄송합니다만 장로님, 권사님 아들도 많았어요.

나중에 안 사실입니다. 그래서 의아해서 조금 군의 생활 익힌 다음에 ‘김일병님, 김 상병님,왜 교회 안 가세요?’ ‘야, 내 한 몸 찾아야지. 군대생활 미안해서 모든 젊은이들의 머리 속에 그 자기의 몸에 챙기고, 군대생활 한다고 하면 그 자기 몸을 사리는 그 분위기가 가득 차 있었어요.

요즘은 그렇지 않겠지만 그 때는 교회 가는 것= 매 맞는 것, 그리고 교회갔다가 오고 나면 두들겨 맞았어요. 야구방망이처럼 생긴 곡괭이 자루 있잖아요. 엉덩이 한 3- 4대씩은 맞아야 하루 일과가 끝납니다. 그러니까 교회를 가겠습니다. 라는 말은 갖다와서 맞겠습니다. 라는 말과 동의어입니다.

그러니까 군대생활 하는 것도 힘든데, 굳이 매맞으면서 교회 가랴, 그러면서 몸을 사렸어요. 주일마다 신자를 집합하면 한 사람 밖에 없었어요. 너무 안타까웠어요. 제 마음에 기도의 제목이 생겼습니다.

사회에서의 신앙이 군에서의 신앙으로도 그대로 표현될 수 있다고 하나님, 저들의 마음에 용기를 주시옵소서. 그런 기도의 제목이 생겼어요. 기도의 제목이 생겼지만 한 6개월쯤 지나가면서 우리 120명중에 3-40명이 교회를 간 줄로 믿습니다. 나중에는 교회를 너무 많이 가서 교회주번하사가 조금 교회가는 사람을 줄여달라고 부탁을 할 정도였어요.

용기가 생긴 것입니다. 다녀와서도 매를 맞아도 좋으니까 우리는 밥은 안 먹어도 예배는 드려야 합니다. 적어도 밤에 괴롭히는 고참이 그럽니다. 너 군대생활 하면서 니 몸 챙겨야지. 저는 그 때 그런 이야기를 한 기억이 나요. 울면서 그런 이야기를 한 기억이 납니다. 저는 밥은 안 먹어도 교회는 가야됩니다. 자기가 볼 때 대책이 없는 사람이지요.

밥은 안 먹어도 교회는 가야 되겠다니, 3개월을 그렇게 지내고 나니까 중대장님이 딱 보고 있다가 저 황요한이는 누가 뭐라고 해도 주일날 교회 간다. 그 다음부터는 매 맞지 않았어요. 3달 동안만 힘들었어요. 저는 그것이 시험이라고 생각을 했어요. 용문산 꼭대기에 작전을 위해서 부대가 올라갔어요. 내일 교회 가야 하는데, 오늘 산 꼭대기 가면 내일 교회 어떻게 가나 걱정을 했는데, 주일날 아침 10시쯤 되니까 주일날 아침에 무전이 왔어요.

무전병이 말합니다. 중대장님이 지금 빨리 황요한이는 교회 보내라고, 그 용문산 꼭대기에서 교회를 갔어요. 석달이 지나고 나니까 고통은 사라지고, 이제 저 사람은 교회를 가야하는 사람으로 인정을 받았어요. 교회가서 성가대합니다. 이등병 달고 가는데, 고참들이 황이병을 사랑해 주니까, 얼마나 고맙고 얼마 행복한지 그리고 돌아와서는 또 매맞고 석달을 견디기 어려웠어요. 석달 지나고 나니까 그 과정이 다 지났어요. 그리고나서는 전도가 됩니다. 그래서 다 고참들을 인도해서 3-40명이 교회를 갔습니다.

세상사람들이 여기에 있는, 골리앗 앞에 있는 하나님의 군대는 말만 하나님의 군대지, 평상시에만 하나님의 군대지, 위기가 닥쳤을 때는 다 몸을 사립니다. 그 때 다윗은 나이가 차지 않은 젊은이임에도 불구하고, 제가 가겠습니다. 하도 그러니까 장군이 왕에게까지 보고를 했어요.

왕이 다윗을 불렀습니다. 그의 기상이 고마워서 자기의 갑옷을 벗겨 주었지만, 그 용모가 준수하고, 키가 어깨가 하나 더한 사울의 갑옷이 맞을 리가 없지요. 그냥 있는 그대로 가겠습니다. 외형은 그냥 초라하지만, 다윗의 마음 속에는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니 라는 고백을 가지고 간 줄로 믿습니다.

왜 다윗이 이겼느냐는 더 이상 이야기 할 필요가 없어요. 정말 우리가 주님 앞에서 목숨을 걸을 수 있겠느냐? 정말 내가 이기적이고, 계산적인 상황에서 주님을 위해서 내가 목숨을 걸겠다고 할 수 있느냐? 다윗을 하나님이 갈수록 더 강하고 복되게 하신 이유는 다윗이 주를 위해서 목숨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점점 나아지는 세 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종을 존귀히 여기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원수를 갚는 것이 내게 있다고 하는 주님의 말씀을, 주권을 주님은 인정했습니다. 두 번씩이나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지만 그는 주변 사람들의 권유도 물리치면서 원수 갚는 것은 내게 있지 않다. 그것은 하나님의 몫이다.

그리고 내가 당신을 죽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이지 않았다고 하는 표만, 첫 번째는 그의 옷자락만 베어주는 것으로, 두 번째는 그의 칼과 물통을 들고 오는 것으로 메시지만 보냈습니다. 나는 당신을 죽일 수 있지만, 나는 당신을 죽일 마음이 없습니다. 사울은 엉엉 울었지만 그러나 그 감동과 회개도 잠깐입니다. 내면이 변화되지 않는 사람은 감동적이라 상황에서 잠깐 은혜받는 것 같지만 또 돌아서면 옛사람입니다.

네 번째로 다윗이 점점 나아지는 이유는 성령의 충만한 삶을 살았기 때문인 줄로 믿습니다. 다윗이 점점 강하여지고, 사울이 점점 약하여진 결정적인 부분이 여기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사무엘상 16장 14절이나 23절, 18장 10절이나 19장 9절에 보면 사울은 하나님의 신이 떠나고, 악령, 악신이 임하느니라. 계속해서 어떤 사건이 있을 때마다 그 사건이 일어나게 된 배경을 하나님의 신이 떠나고 악신이 임했기 때문이라고 이 사무엘상과 하의 기자는 언급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다윗이 점점 강하여지는 배경은 하나님의 신이 다윗과 함께 하신다고 선언하고 있는 줄 믿습니다. 다윗이 점점 나아지는 이유는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는 줄로 믿습니다. 성령이 함께 하는 사람 다윗과 성령이 떠나고 악령이 지배하는 사울과의 차이는 이미 결판이 난 거예요. 인생이 이미 끝난 것입니다. 성령이 함께 하는 사람과 악령이 지배하는 사람과의 차이.

마지막으로 다윗과 사울의 차이에서 다윗이 점점 나아지는 결정적인 이유는 그가 하나님 중심으로 살았기 때문인 줄 믿습니다. 다윗은 왕이었습니다. 무려 40년 6개월을 왕을 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다윗 같은 권위를 가지고 존경받으면서 통치했던 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백성들 가운데 그 존경받고 권위를 가졌던 다윗이지만 과거 자기의 조상들이 빼앗겼던 법궤를 이제 찾아서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돌아오는 길에 너무 기쁘고 즐거워서 법궤를 가지고 오는 행사를 챙기고, 준비하고, 최선을 다합니다. 성경말씀 그대로 법궤를 어깨에 메고, 그리고 자신은 법궤를 가지고 오는 그 앞에서 너무 좋아서 춤을 췄습니다.

사실 이 다윗이 왕으로써 춤을 췄다고 하는 부분은 우리의 정서로는 잘 맞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배 마치고 인사 한번 하자고 그래도, 잘 안 돼요. 저도 솔직히 잘 안됩니다. 시키면 옆 사람과 인사하십시다. 반갑습니다. 할렐루야! 은혜 받읍시다. 그 한 두 마디 하고 나서는 끝입니다.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어요. 쑥스러워서.... 일어나서 하라고 하면 잘 안 됩니다.

그런데 서양 사람들은 춤을 춘다고 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미국이나 영국 같은 경우에 예배를 마치고 친교시간에 이제 서로 형제들과 인사하겠습니다. 그러면 막 일어나서 좋아서 돌아다녀요. 너무 자연스러워요. 너무 오래 하니까 이제 그만하라고 말리지요. 우리는 잘 안 하니까 한 번 더 합시다. 그리고 한 번 더 인사합시다. 억지로 해야 되는 문화가 다르기는 해요.

왕이 지금 나가서 춤을 추고, 법궤가 지금 주의 성소로 돌아온다고 기뻐하는데 생각해 보십시오. 다윗은 왕입니다. 모든 백성들 앞에 왕입니다. 권위가 있고, 체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주 중요한 포인트를 보아야 합니다.

지금 다윗이 법궤가 오는 앞에서 춤을 춘 것은 왕으로써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야 할 어린양으로써 자기가 왕이지만 백성의 왕이지, 하나님 앞에 왕은 아니지요. 굉장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사회적으로 저는 출세하기를 바라고, 머리가 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시장도 되셔야 하고, 구청장도 되셔야 하고, 국회의원, 시의원 우리 교회에서 많이 나오셔야 합니다. 우리교회에서 무슨 의원이 나오면 우리 1200명이 단결해서 표를 줘야 하는데, 거기도 무슨 당, 무슨 당 갈라져 가지고 그런 것 보면 우리 교회도 아직 멀었다 싶습니다. 신앙은 어떤 세속적인 것을 초월할 수 있어야 되는데, 세속적인 파벌에 여전히 나는 무슨 당, 너는 무슨 당하는 것을 보면 조금 안타까워요.

그 사람의 됨됨이에 대해서는 적어도 담임목사가 밀어주니까 우리도 밀어주자. 그런 마음이 있어야 된다고 봅니다. 우리 부천시의 시장님은 장로님이신데, 참 겸손하신 분이십니다. 85만을 리더하는 대한민국의 광역시를 빼놓고는 가장 큰 시, 그 직전에 시장님은 벌써 정부 여당의 정책위 위원장이 되었습니다. 제 2인자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중요한 위치에 있는 그가 그런데 그런 분들이 저와 식사하면서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목사님, 기도해 주십시오. 시작할 때 기도하는 것은 웬만큼 다 아는 이야기인데, 식사 끝나고 또 무릎을 꿇고 기도한 번 더 해 달라는 거예요. 그것도 골방에서 둘이 있을 때가 아니라 오픈되어 있는 식당 모든 사람들이 쳐다 보는데, 그거 쉬운 일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쥐꼬리만한 명예가 있어도 얼마나 교만한지 모릅니다. 그 속에 성령이 지배합니다. 그 속에 주님의 은혜가 지배합니다. 겸손이 가능한 줄 믿습니다. 그게 의식적인 것이 아니라 그냥 자연스러운 거예요. 어깨에 별을 세 개, 네 개 달고 무릎 꿇고 목사님 축복기도 해 달라고 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세상적인 가치를 보면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육군 소위만 되어도 얼마나 건방집니까? 신앙이 없으면 그것도 출세라고 굉장히 교만합니다. 제가 어느 부대를 가니까 연대장 대령이 지휘하는 연대에 육군 중위 목사님이 군목입니다. 제가 그 분의 집회를 갔어요. 식사를 하는데, 둥근 테이블에 연대장님이 앉으시고, 제가 그 옆에 강사라고 앉았어요. 그리고 중령, 참모들이 앉았어요. 소령들도 몇 사람 앉았어요. 그런데 목사님이 없어요. 그래서 목사님은 어디 있습니까? 그 테이블이 여러개 있는데, 저 육군 중위, 소위 앉아있는 자리에 가서 앉아요.

제가 연대장님 보고, ‘우리 목사님이 왜 저기 가서 앉아 있습니까? 이리로 오시라고 그러지시요.’ 강사가 그러니까 할 수 없이 ‘목사님 오시라고 그래라.’ 그래서 내 옆에 앉았어요. 이 지휘관은 신앙이 없는 사람이예요. 계급으로, 나는 대령, 너는 중위, 그래서 너는 중위에서 먹는 자리에서 밥 먹고, 나는 중령이 먹는 자리에서 먹는다. 대령이 먹는 자리에서 먹는다. 이게 세상적인 기준이예요.

그런데 육군 소장, 중장, 하늘에 별 하나 따기도 어려운데, 세 개, 네 개를 어깨에 붙힌 그런 사람들 중에 집사님, 권사님들이 있습니다. 육군 중위, 대위 목사님을 자기 옆에 앉힙니다. 가치가 다른 거예요.

은혜가 그의 삶 속에 있습니다. 주의 성령이 함께 합니다. 무엇이 더 중요하고, 무엇이 덜 중요한지 압니다. 다윗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자기가 지금 법궤 앞에서 춤을 추다가 바지가 흘러 가는 것도 몰랐는데, 그것은 왕으로써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은혜 받아야 할 다윗이라는 모습으로 산 것입니다.

세상적인 지위가 때때로 여러분 은혜 받는데 방해가 되는 사람이 있지요? 내가 그래도 세상에서 이건데....자기의 세상적 쥐꼬리만한 지위가 은혜 받는데 장애가 됩니다. 체면 때문에... 다윗은 왕으로써의 그 모습을 벗어 버리고, 하나님 앞에 어린 아이 같이 모습을 벗어 버리고, 하나님 앞에 어린 아이 같이 기뻐 뛰면서 주의 은혜를 찬양하고 노래한 줄로 믿습니다.
주님, 다윗을 사랑하고, 다윗이 시간이 가면 갈수록 복을 받을 수 밖에 없는 모습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인생은 전쟁이라고 했습니다. 시간이 가면 갈 수록, 전쟁이 오래면 오랠 수록 어떤 인생은 점점 강하여 가고, 어떤 인생은 점점 약하여 갑니다.

인생이 마라톤이라면, 우리의 신앙이 마라톤이라면 처음에 성공한 자가 성공한 것이 아니라 시간이 가면 갈수록 강하여 지고, 가면 갈수록 나아지는 삶을 살 때에 사람이 진정한 승리자인 줄 믿습니다. 그 승리자의 삶 속에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걸 수 있는 그런 희생과 담대함을 가진 그런 오늘 이 시대에 다윗들이 평안의 공동체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일어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자비하신 주님, 이기적인 생각과 안일함으로 계산적인 삶들을 살아가면서 골리앗 앞에 무기력하게 우리의 몸을 움츠리고, 사리고 있지 않았습니까? 평소에 하나님의 이름을 외쳤지만, 정말 하나님의 이름을 나아가야 할 때에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목숨을 걸 수 있었는지, 다시 한 번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면서 성령의 충만함으로 살아가면서 하나님 앞에 어린 아이와 같은 순결함으로 살았던 다윗을 하나님은 갈 수록 점점 강하게 하셨고, 갈 수록 점점 나아지게 축복하신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평안의 모든 성도들이 이 놀라운 주의 은혜에 붙잡히게 하옵소서. 주님을 위해서 우리의 삶을 온전히 헌신할 수 있는 진정한 헌신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점점 나아지는 인생, 점점 강하여지는 삶을 예수 안에서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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