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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의 임재로 너를 부른다 (막 15:3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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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 양수 목사

1. 성경을 기록한 목적 - (요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 예수님은 그리스도(메시야, 구세주), 그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이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도 우리는 그 분이 메시야임을 알게 된다. 예수님은자신의 모든 생애를 통해 그것을 증명하기를 원하셨다. 오늘 십자가의 이 처참한 죽음을 통해서도 그것은 증명된다.
우리는 생각한다. 오히려 반대 아닌가? 죽었다고 하는 것은 메시야가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어떻게 죽음이 메시야임을 증명한단 말인가?
             
2.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자 벌어진 일- 어둠이 찾아온 것
  (눅23:44) “때가 제 육시 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되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시간부터 돌아가실 때까지(정오-3시까지) 해가 빛을 잃고 어둠이 찾아왔다.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계실 때, 또 운명하셨을때 해는 빛을 잃고 천지는 어두워졌을까? → 이것이야말로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1) 예수님은 하나님, 하나님의 아들, 창조주, 메시야이시다.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 예수님과 성령님과 함께 하셨다. 
θ은 예수님과 함께 피조물을 만드셨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만물을 만드셨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만물을 붙드신다.
(골 1:15-17) “만물이 그(예수 그리스도, 그 아들)에게서 창조되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히1:3) “이는(예수님이)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오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이 창조주임을 말한다.
  왜 해가 빛을 잃고 온 세상이 어두워졌을까? 해를 만드시고 오늘도 그것을 붙드시는 창조주이신 그 분이 오늘은 십자가에 걸려있다. 십자가에서 모진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태양이 빛을 잃은 것은 그 태양을 붙들고 계신 분이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피조물인 자기를 만드신 주인이 돌아가셨는데 어찌 슬퍼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2) 예수님은 죽음을 넘어가게 하는 하나님의 어린양
구약의 맥락- 애굽의 10가지 재앙 중에서 9번째 재앙이 흑암이었다. 10번째는 장자재앙.
애굽 전체에 퍼진 흑암은 10번째 재앙의 전조였다. 그 흑암은 어린양의 죽음의 전조이기도 했다. 장자재앙이 임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양을 희생물로 잡아서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면 죽음의 천사가 그 집에 들어가지 않고 넘어가게 하셨다. 그것이 유월절이다. 어린양의 피는 모든 죽음과 어둠을 물러가게 하였다.
  수백년이 흘러서 다시 유월절이 돌아왔다. 그리고 오늘, 그 예루살렘 도시 밖, 골고다 언덕에서 어린양이 십자가에 제물로 드려지고 있다. 예수님의 보혈은 믿음으로 나아오는 모든 이들의 마음 문의 문설주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자국을 남겨놓았다.
예수님의 죽음, 어린 양과 같이 사람들의 마음의 문에 발라진 보혈, 해가 빛을 잃고 어둠이 임한 이 모든 것은 우리에게 증언한다. “예수님은 나의 구원자”

3. 긴 십자가의 고통 가운데서 우리 주님은 소리친다.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것처럼 가슴 아픈 고백은 없다. 이것만큼 절망적인 절규는 없다.
  우리는 안다. 예수님과 그 분의 아버지 하나님은 본질상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였다는 것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나의 뜻은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새벽마다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셨다. 아버지와 언제나 친밀한 교제를 나누셨던 그 분. 이 낮고 낮은 곳에 오셨지만 예수님은 언제나 아버지와 함께 하였다. 그렇게 두 분은 사랑하셨고, 친밀한 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이제 오늘, 그 날 오후 갈보리에서 어둠이 십자가를 덮었을 때 ,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깊은 계곡이 가로막는다. 영원을 함께 계시다가 그 날 처음으로 예수님께서는 혼자가 되셨다. 버림받으셨다. 고아가 되셨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있는 마지막 힘을 다해 부르짖었지만 예수님은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한다. 침묵만 흘렀다. 채찍질과 못질과 가시면류관, 십자가는 예수님에게 육체적인 고통을 주었다. 무리들과 군병들, 강도의 조롱과 멸시 천대는 예수님에게 감정적인 굴욕감을 주었다. 그리고 십자가를 뒤덮는 짓누르는 어둠과 침묵은 예수님께 영적인 고립감을 맛보게 하셨다. 육체적인 고통, 감정적인 굴욕감보다도 예수님의 가슴을 더 찢어 놓았던 것은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영적 고립감이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순간만 버림받은 것이 아니라 죽은 다음에도 하나님께 버림받았다. 사도신경에 보면 (우리는 빠져있지만) 다른 나라의 거의 대부분의 사도신경에는 “예수님께서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표현이 있다. (He descended into hell) 지옥이 어떤 곳일까? 왜 예수님은 지옥까지 내려가셨던 것일까? 지옥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이다. “하나님이 없기에 하나님의 긍휼을 바랄 수 없는 곳이다. 하나님이 없다는 사실이 가장 고통스런 짐으로 느껴지는 곳이 지옥”이다.
  골고다에 계시는 동안 예수님께서는 그 곳, 지옥까지 내려가셨다. 아버지에게 철저하게 버림받고 미로 같은 그 어둠 속에 계셨다. 
  오늘 예수님은 “하나님 어찌하여 어찌하여...?”라고 질문한다. 예수님은 한 번도 이렇게 기도해본 적이 없다. 언제 예수님이 “하나님 하나님 왜?” 라고 기도하셨는가? 그런데 왜 지금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왜?”라고 기도하는 것일까?

  ※ 그것은 우리의 고통을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기도한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내게 이런 고통이, 이런 짐이, 이런 아픔이, 이런 어려움이 찾아온 것입니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라는 질문은 인간이 던질 수 있는 가장 고통스런 질문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아셨다. 우리가 고통에 처하면, 우리가 무거운 짐에 짓눌리면, 내 육체가 병들고 내 가족이 병들어 허물어지면, 내 가정에 물질의 어려움이 오면, 관계의 어려움이 오면 우리가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그렇게 절망한다고 하는 것을 아셨다. 주님은 그 아픔을 통해서 오늘 우리의 고통과 침묵과 대답없음과 어둠과 괴로움을 이해하셨다.

  ※여러분은 오늘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는가? 가정의 물질적인 어려움 때문에 하나님 앞에 울부짖고 있는가? "하나님 하나님 어찌하여 우리 가정이 왜 이렇게 물질로 인해서 어려움을 겪는 것입니까?“ 무슨 아픔, 무슨 어려움, 무슨 시험으로 인해 여러분은 ”하나님 왜 이렇습니까?“라고 부르짖고 있는가? 하나님은 내 아픔을, 내 절망을, 내 고립을, 이 침묵을 아시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가 삶 속에서 겪고 고통속에서 외치는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나의 아픔을 모르지 않고 알고 계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이 짊어지고 있는 그 모든 것을 우리 주님은 이미 겪으셨기에 우리의 아픔을 알고 계십니다.

4.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가시 면류관에 찢겨진 머리의 상처를 보았다. 굵은 대못에 박혀 구멍나고 찢겨진 당신의 손과 발의 살점을 바라보았다. 채찍에 맞아 그물처럼 갈라진 그 등을 알고 계셨다. 주님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찢겨진 자신의 몸을 바라보셨다.
  예수님의 머리 속에는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마지막 식사를 하던 그 순간이 떠올랐을 것이다. 식탁위에 놓여진 빵, 그것을 뜯고 찢어서 제자들에게 주면서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이것은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그리고 주님은 다시 십자가에서 찢겨진 몸을 바라보았다.

  ※빵처럼 이리저리 찢겨진 몸, 우리의 몸속에 들어가서 살을 만들고 피를 만들고 살게 만드는 그 양식, 그 빵과 같이 우리의 영혼을 살게 만드는 예수님의 몸, 자신의 전부를 뜻하는 몸을 부서뜨려 우리의 영혼속에 주신 예수님의 사랑. 그 희생. 그 은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는 5,000명밖에 먹이지 못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갈라진 하늘의 양식인 예수님의 몸은 지구상의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실수 있을만큼 귀하다.
   
5. 예수님의 몸이 십자가에서 찢겨지고 마지막 숨을 거두셨을 때 성전의 장막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졌다. 하나님과 인간의 사이,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의 사이를 갈라놓았던 그 휘장은 예수님의 몸처럼 찢어졌다. 찢어진 사이로 지성소의 모습이 보인다. 그 곳은 지극히 거룩한 곳, 하나님께서 그 곳에 계셔서 말씀하시겠다고 하셨던 곳,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의 상징인 그곳이 개방되었다. 성소 밖 뜰까지만 올 수 있었던 사람들이 이젠 거룩하신 그 하나님 앞에 올 수 있게 되었다. 성소의 휘장같이 찢어진 예수님의 몸을 통해 이제는 누구든지 존귀하신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할 수 있게 된 것, 하나님 앞에 해 놓은 일이 아무것도 없으면서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가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게 된 것, 성경을 읽고 묵상하면서 내 맘 가운데 성령의 조명을 간구하며 성령님을 초청할 수 있는 것, 병실에서 아픈 몸을 침대에 누이면서 나에게 찾아오셔서 나를 고쳐주시고 나의 아픔을 어루만져 달라고 말할 수 있는 것, 찬양하며 이 자리에 성령님의 임재를 간구하며 내 영혼을 맡길 수 있는 것...
  이 모든 이유는 우리 주님의 몸이 찢겨졌기 때문이다. 주님의 은혜가 있기에 우리는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있다.

  하나님은 나를 반겨 주십니다. 하나님은 나를 피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나를 밀쳐내지 않으십니다. 휘장은 찢어졌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던 모든 장애물은 걷혔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여러분을 부르고 계십니다.
“나의 임재 안에 들어오라. 나와 함께 하자.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내가 너를 만나 너의 아픈 소리를 듣겠다. 나한테 얘기하렴.”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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