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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누굴 보낼꼬? (사 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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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 흥규 목사

<하나님 체험을 향하여>
미국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 합니다. 어떤 다이빙 선수가 밤늦게 수영장으로 갔습니다. 다이빙 연습을 하기 위해서 갔던 것입니다. 아무도 없는 수영장은 때마침 정전이 되어서 칠흑같이 어두웠습니다. 간신히 다이빙대 위에까지 올라갔지만 밑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은 아무 생각 없이 두 손을 높이 들고 심호흡을 하면서 물밑으로 낙하를 하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유리창 너머로 검푸른 달빛이 비치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람이 두 손을 들고 옆으로 벌린 모습이 달빛에 반사되어 수영장 벽에 희미한 그림자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둡기 짝이 없는 실내 수영장 벽에 새겨진 그림자는 영락없이 십자가 모양이었습니다.

이 때 이 남자는 희미한 달빛 아래로 자기가 뛰어내리려고 했던 수영장 물을 보았더니 물은 하나도 없고 콘크리트 맨바닥만 있었습니다. 관리인이 물을 새로 갈기 위하여 남김없이 빼냈던 것입니다.

순간 이 남자는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수영장 내부로 흘러 들어온 달빛이 만든 십자가 그림자가 이 사람을 살려주었던 것입니다. 이 사람은 즉시 다이빙대 위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자신의 평생을 드리겠노라고 감사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이 살아 있는 신앙이 되려면 이와 같은 체험이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살아서 우리의 삶속에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체험해야만 합니다. 기독교는 이론의 종교가 아니라 체험의 종교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철학자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철학자가 서재에 앉아서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분이시다 연구만 해서 우리의 머리나 우리의 이론 속에 갇힌 하나님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구체적인 삶속에 일일이 개입해주신 하나님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의 신앙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만난 체험이 있는 신앙이 되시길 바랍니다.

<이사야의 소명과 응답>
본문 말씀은 주전 739년 경에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을 머리로만 알고 있지 않았습니다. 시각, 청각, 촉각, 미각을 총동원하여 신비하고도 거룩한 하나님의 모습을 직접 체험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사야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습니다.

오늘 이사야의 소명 장면을 통하여 여러분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다 들으시고 결단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1) 이사야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때: 웃시야 왕이 죽었을 때
우리는 제일 먼저 이사야가 소명받은 시기를 살펴 봐야합니다. 본문 1절 말씀에 보면 이사야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소명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대부분의 성서학자들이 이 구절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역대기하 26장에 보면 웃시야 왕은 유다의 역대 왕들 가운데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가장 큰 번영을 이룩해 놓은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웃시야는 '아사랴'라고도 불렸는데(왕하 15: 1) 52년 동안의 재위 기간 동안 여러 가지 군사적인 결단과 사회 개혁, 건축 공사 등을 통하여 솔로몬왕 다음으로 태평성대를 이룬 왕으로서 알려졌습니다. 바로 이런 까닭에 열왕기하 14: 21의 말씀을 보면 웃시야가 나이 열 여섯에 왕위에 올랐는데 '유다의 온 백성'이 웃시야를 왕으로 삼았다고 했습니다. 온 백성이 흠모하고 따랐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온 백성이 신뢰하고 따랐던 웃시야가 죽었을 때 온 유다 백성들은 당연히 국가의 장래에 대해서 걱정했을 것입니다. 솔로몬 시대에 필적할 만 했던 평화와 번영이 과연 웃시야 사후에도 지속될 것인가? 특히 웃시야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웃시야의 아들 요담에 대해서 백성들 사이에 불신이 팽배해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사야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시기가 유다 민족이 국가적 위기에 빠져 있었을 때임을 잊지 마십시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평화시에 일꾼들을 부르신 경우도 더러 있지만 거의 대부분이 위급한 시기였습니다. 하나님은 세계와 국가와 사회와 교회와 가정이 위기에 빠질 때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저는 지난 9월 23일(목) 자 국민일보의 1면 기사를 보고서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지난 해 하루 평균 30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자살이 20-30대의 사망원인 1위로 꼽혔다는 것입니다. 통계청의 발표에 따르면 작년 한 해 동안의 자살율은 IMF 사태 직후인 1998년보다도 훨씬 더 높은 수치라고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내일에 대한 희망을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위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희망을 선포할 일꾼들을 부르십니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습니다. 할 일도 많습니다. 앞으로 우리 교회가 거룩한 비전을 가지고 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하나님은 어려운 시기에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교회 안에서도 많은 일꾼들을 찾고 계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이사야는 어떤 과정을 거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으며 그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했습니까?

(2) 이사야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과정
①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했을 때 이사야는 자신의 죄성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이사야는 하나님의 성전 안에서 놀라운 환상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차 있었습니다. 하나님 옆에는 여섯 날개를 가진 스랍들, 즉 천사들이 하나님을 수종들고 있었습니다.

여섯 날개를 가진 스랍들은 성경 전체에서 오직 이사야 6장에서만 출현하는 아주 특별한 존재들입니다. 이사야가 본 환상에 따르면 이 스랍들은 먼저 두 날개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광채에 눈이 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그 다음에 두 날개로 발을 가렸다고 하는데 이것은 생식기 쪽, 즉 부끄러운 부분을 가렸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두 날개로 스랍들은 날아다니면서 하나님 수종드는 일을 했습니다.

또 이사야가 들으니 여섯 날개를 가진 스랍들이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서로 화답했습니다. 3절에 보면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라고 노래했습니다. 히브리인들은 무엇을 강조할 때 같은 말을 반복하는 습관이 있었는데 '거룩하다'는 말이 세 번씩이나 반복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지극히 거룩하신 분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스랍들이 우렁차게 부르는 노랫소리 때문에 성전 문지방의 터가 흔들렸고 성전 안은 신비한 연기로 가득 찼습니다. 이사야는 장엄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했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압도되었습니다!

여러분, 이사야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위대한 환상을 보았을 때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5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이사야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압도되었을 때 가장 먼저 발견하게 된 것은 자신의 정확한 실상이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지극히 거룩하신 분임에 반하여 자신은 지극히 추한 죄인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거룩함(holiness)과 죄성(sinfulness)은 도저히 양립할 수 있는 양극인데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보았을 때 이사야는 자신의 죄성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자신이 죄인인 것이 무엇보다도 입술의 부정함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은 우리의 입술이 깨끗지 못하다는 사실에서 여실히 나타납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3: 2은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체험하게 될 때 우리는 먼저 우리의 입술이 부정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 의식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우리의 죄인 의식 역시 비례해서 높아집니다. 비행기를 타고 높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땅위에 있는 만물은 점점 작아집니다. 마찬가지로 거룩하신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면 체험할수록 우리가 죄인이라는 의식 역시 비례해서 깊어집니다!

이사야는 장엄하기 이를 데 없는 하나님의 환상을 보고 나서,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압도되었을 때 자신은 이제 곧 망할 수밖에 없다고 부르짖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제일 먼저 우리의 옛 자아가 깨어져야 합니다. 우리의 죄된 옛 모습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샅샅이 드러나서 부서져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그릇으로 쓰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② 이사야의 죄악은 부정한 입술을 깨끗케 함으로서 용서되었습니다.
자신의 죄악으로 괴로워하는 이사야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6-7절 말씀을 보십시오.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에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인간이 죄인이라고 하는 사실은 우리가 날마다 사용하는 언어에서 가장 잘 나타납니다. 우리는 입술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하기보다는 이웃을 비방하고 흉보는 일에 더 많이 씁니다. 여러분, 모든 죄악이 먼저 입술로부터 시작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신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 먼저 우리의 입술이 거룩한 입술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쓰실만한 그릇이 되기 위해서 우리의 언어가 정결해야 합니다.

이사야가 세상 말만 전하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역자로 부름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은 먼저 그의 입술을 정결케하셨습니다. 천사 중 하나가 제단에서 빨갛게 타고 있었던 숯불에 달군 부집게를 이사야의 입에 댔습니다. 그 뜨거운 부집게를 이사야의 입에 대는 순간 이사야의 악은 사라지고 이사야의 죄는 용서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입술이 정결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쓰실 수 있습니다. 언어가 깨끗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이 쓰실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다 입을 통하여 나타나기 때문에 먼저 성령의 불세례를 통하여 우리의 입술이 깨끗해져야 합니다.

제단에서 달구어진 부집게가 이사야의 입술에 닿았을 때 그의 입술이 정한 입술이 되었고 모든 죄악이 사라졌던 것처럼, 제단으로부터 흘러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러분의 입술이 깨끗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불길같은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입술이 정결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③ 이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순종했습니다.
이사야는 성전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압도되었을 때 제일 먼저 자신의 죄를 깨달았습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의 불세례를 통하여 입술이 정하게 되었으며 모든 죄악을 용서받게 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쓰실만한 그릇으로 변화되었다고 생각되었을 때 하나님은 갑자기 이렇게 스랍들에게 묻습니다. 8절 말씀을 다같이 보십시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 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나님은 일련의 정화 과정을 거쳐서 이사야를 새롭게 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그의 입술을 깨끗케 하심으로 하나님의 말씀 전할 준비를 갖추도록 하셨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하나님을 시중들고 있었던 스랍들, 즉 천사들에게 물으십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스랍들에게 물으신 하나님의 말씀이 이제 이사야의 귀에도 선명하게 들려왔습니다. 여러분, 입술이 정결해지면 귀가 열립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지 못하는 이유는 딴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입술이 정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제단에서 달구어진 거룩한 화저로 그의 입술이 깨끗해졌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이사야가 응답했습니다. "주여, 제가 여기 있사오니 저를 보내소서!" 우리가 듣는 말씀과 드리는 예배가 살아있는 말씀과 살아 있는 예배가 되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말씀과 예배에 응답하고 결단해야 합니다.

죄렌 키에르케고르(Soren Kierkegaard, 1813-55)의 비유 중에 이런 비유가 있습니다. 한 떼의 오리들이 오리 목사가 설교하는 오리 교회로 뛰뚱뛰뚱 걸으며 갔습니다. 오리 목사가 설교 시간에 하나님께서 오리들이 날을 수 있는 날개를 주셨다는 사실을 찬양했습니다. 이 날개가 있는 한 오리가 가지 못할 곳은 없으며 오리가 이루지 못할 과제도 없다는 사실을 역설했습니다. 오리 목사는 설교의 클라이맥스에 오리들이 이 날개만 있으면 하나님 계신 천국까지도 날아올라갈 수 있을 것이라고 자랑했습니다. 예배당 안에 있던 오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일제히 "아멘!"으로 화답했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오리들은 "야, 오늘 참 좋은 말씀 들었다"를 연발하면서 뛰뚱걸음으로 다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오리들의 생활 중에 예전과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메시지가 오리들의 생활 속에 끼친 영향은 하나도 찾을 수가 없었다는 말씀이지요. 

여러분, 키에르케고르가 이 우화를 통하여 이야기하고 싶었던 요점은 말씀을 듣고 예배를 드리기는 드렸는데 말씀이나 예배가 우리의 실제 생활에 그 어떤 도전이나 변화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꼬집고 싶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예배를 드림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부분은 그 말씀을 생활 속에 적용하고 실천하고자 하는 결단입니다. 말씀을 듣는 것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과 예배의 단 하나라도 우리 생활 속에 적용되어서 우리 가정과 사회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시는 음성을 듣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체험해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초라하게 서 있는 죄인된 우리 자신의 실상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부정한 입술이 하나님의 제단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으로, 뜨거운 성령의 능력으로 깨끗해져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소명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문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으면 책임적으로 응답해야 하며 하나님의 뜻을 우리의 생활 속에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내가 누굴 보낼꼬? "주여, 제가 여기 있사오니 저를 보내주소서!>
낸시(Nancy)라는 사람은 휠체어에 의지해야만 하는 장애인이었습니다. 그녀는 매주 지역 신문에다 조그만 광고를 냅니다. "여러분 중에 외롭거나 문제가 있으면 저에게 전화를 주세요. 저는 휠체어 신세를 지고 있는 장애인인데 집밖으로 거의 나가지 못한답니다. 문제가 있을 때 우리는 서로 대화를 통하여 문제를 함께 풀 수 있을 것입니다."

낸시는 생명의 전화에 자원 봉사하는 상담자같이 전화로 이웃을 돕는 일을 기꺼이 떠맡았습니다. 낸시는 매주 거의 30명 이상의 상처받고 낙심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전화 상담을 해주고 있다고 합니다.

낸시가 이와 같은 선행을 베풀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녀는 한 때 인생에 절망해서 자살을 하려고 아파트 발코니에서 뛰어내렸는데 죽지는 않고 큰 허리부상만 입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병원에 입원해 있는 어느 날 밤에 예수님께서 낸시에게 찾아와 말씀하셨습니다. "낸시야, 너는 그동안 건강한 육체는 가지고 있었다만 영혼은 불구였단다. 그러나 오늘 이 순간부터 너는 몸은 비록 불구의 몸이 될 것이지만 영혼만큼은 건강한 영혼을 가지게 될 것이다."

낸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즉시 응답했습니다. "주님, 지금부터 저의 일생을 주님께 드리겠습니다. 비록 저의 몸은 불구이지만 이제 영혼은 건강해졌으니 이웃을 돕는 일에 저의 삶을 기꺼이 바치겠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그냥 조용히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감사의 마음으로 외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요? "주님, 제가 여기 있사오니 저를 보내주소서!" 여러분이 이와 같이 응답하는 순간 비로소 진정한 예배는 시작될 것입니다!

오늘 제가 비록 하나님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어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러분들에게 세 가지 질문을 묻습니다. 큰 소리로 "주님, 제가 여기 있사오니 저를 보내주소서!" 하고 대답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는 상처받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고달픈 삶에 지친 영혼들을 위하여 내가 누굴 보낼꼬?" 《청중: "주여, 제가 여기 있사오니 저를 보내주소서!》

"군선교, 학원선교, 병원선교, 국내선교, 해외선교, 등등 선교를 위해서 많은 일꾼들이 필요하다. 이 귀한 선교 사역을 위하여 내가 누굴 보낼꼬?" 《청중: "주여, 제가 여기 있사오니 저를 보내주소서!》

"내리 교회에는 교회 내부와 이웃과 세상을 위해서 필요한 일꾼들이 너무나 많다. 내리 교회의 사역을 위하여 내가 누굴 보낼꼬?" 《청중: "주여, 제가 여기 있사오니 저를 보내주소서!》

오늘 여러분이 응답하신 그대로 주님의 귀한 사역을 위하여 아름답게 쓰임받는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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