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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하신 주님을 따르는 자 (눅 24: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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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임영수 목사

할렐루야!!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예배드리는 성도 여러분에게 충만하게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부활의 감격을 맞이한 지 한 주간이 지났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부활절을 맞이하여도 아무런 감격이 없고 감동이 없다는 것입니다. 무감각한 심령들이 되었습니다. 사실 생각하면 우리 주님께서 나를 위하여 고난 당하시고 또 부활하셨다는 것은 몇 일이고 밤을 지새우면서 감격해야 할 사건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교인들은 감동도 감격도 없고 그저 ‘또 부활절이라고 하는 날이 되었구나’ 하는 식으로 관심이 없습니다.
지난주일 우리들은 부활감사헌금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절반 가량이 그저 형식적인 헌금을 하였습니다. 정말 주님께서 나 위하여 고난을 당하시고 또 나 위하여 부활을 하셨다는 것을 믿는다면 그와 같은 형식적인 헌금을 할 수는 없습니다. 작년이나 재작년 수준이 아니고 10년 전이나 똑같다면 어찌 그 헌금이 정성된 헌금이라고 할 수 있으며 어찌 그 믿음이 성장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까? 어찌 그가 진정으로 주님의 부활을 감사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 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마11:17)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각박하고 메마른 세상이 되었다고 하여도 우리들의 신앙마저 메말라서는 안됩니다. 우리들의 믿음마저 감동과 감격을 잃어서는 안되겠습니다. 항상 주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아 멘>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 오후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누가복음 24장의 내용을 요약하여 보면

① 평소에 예수님을 믿고 따르던 몇몇의 여인들이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여 가지고 예수님의 시신에 발라드릴 목적으로 예수님의 무덤에 올라갔습니다. 가면서도 이 여인들은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을 열어 줄 것인가” 하는 걱정을 하면서 갔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예수님의 무덤 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장사지내는 풍습은 우리나라와 달라서 언덕에다가 굴을 파고 굴 안에 시신을 장사지냈습니다. 그런데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라는 사람이 자기를 위해 준비하였던 새 무덤에 예수님을 장사지냈던 것입니다.
여인들은 돌문이 열려져서 놀라움을 금할 길 없는 마음으로 무덤 안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간 데 없고 예수님이 누우셨던 곳에는 예수님의 시신을 쌌던 세마포만이 있었습니다. 이 때 천사들이 나타나서 하는 말이
(눅24:5) “이르되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여인들은 허겁지겁 달려와서 제자들에게 이 말을 전하였지만 오히려 제자들은 이 여인들의 말을 허탄한 듯이 듣고 믿지를 않았습니다.

② 이 때 이 여인들의 말을 들은 베드로가 뛰어서 예수님의 무덤에 올라갔습니다. 현장에 가서 확인하여 보니까 정말 여인들의 말 대로였습니다. 베드로는 이상하게는 생각하였지만 그냥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③ 바로 이날 오후에 되어진 일이 오늘 본문 말씀인 13절 이하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두 사람의 제자가 어깨가 축 늘어져서 깊은 슬픔에 잠긴 채 엠마오로 향해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이 말씀의 두 제자는 12제자중의 두 명이 아니고 평소에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 중의 두 사람으로서 글로바와 누가였습니다. 그들의 발걸음은 매우 무거웠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가고 있었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였을까요?
“여보게 그 여인네들이 하는 말이 정말 맞는 말일까?”
“에이 이 사람, 정신 없는 소리하지 말게, 사람이 한 번 죽으면 그만이지 다시 산다고 하는 말이 어디 있는가?”
“그렇지만 이상한 일이잖은가? 예수님의 시신을 누가 훔쳐간 것인가? 그리고 베드로가 가서 보니까 사실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러면서 저들은 고개를 갸웃둥 거리면서 길을 가고 있었는데 그때 한 사람이 따라와서 동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신들이 지금 하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하고 말참견을 하였습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그분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이셨지만 두 사람들은 예수님인지 알아보지를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말하기를
“여보시오 당신은 예루살렘에서 오면서 예루살렘에 파다하게 퍼진 소문을 듣지도 못하였습니까? 나사렛에서 출생한 예수, 그분은 말과 일에 능하여 우리는 그분이 우리나라를 해방시켜줄 구원자라고 믿고 있었는데 박해자들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 오늘 아침에는 여인들이 무덤에 갔다가 그 분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그분이 부활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때에 같이 가시던 예수님이 엄숙히 책망을 하시면서 “이 둔하고 선지자들의 말을 더디 믿는 자들이여 메시아가 세상에 와서 고난을 받고 난 후에 영광을 받는다고 한 성경을 너희가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시면서 구약성경에 예언된 예수님에 대한 말씀을 자세히 풀이해 설명하여 주었습니다.
그 순간 저들의 마음속에 뜨거워짐을 느꼈지만 그분이 예수님이신 것은 알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길을 가다가 한 여관에서 저녁식사를 같이 할 때 예수님께서 식사를 위하여 축사를 하시는데 뭔가 깨달음이 왔습니다.
“아! 이분이 바로 예수님이시구나 예수님은 정말 부활하셨구나!” 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예수님은 홀연히 사라지고 계시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은 엠마오로 가던 발걸음을 돌려서 예루살렘으로 달려갔습니다. 예루살렘에 와 보니 벌써 다른 제자들도 모여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이 두 사람도 자기들이 엠마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를 하면서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 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열 번이나 나타나셨고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후 예수님은 40일 후에 승천하셨고 예수님의 약속대로 열흘 후 오순절날에 성령이 강림하셔서 제자들은 놀라운 능력을 받아 예루살렘의 거리에 나가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당황한 것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 제사장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별의별 조치를 다 취하였지만 제자들은 “우리가 보고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도다” 라고 하면서 매를 맞아도, 죽임을 당해도, 굴하지 않고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 하다가 11제자 모두 순교를 당하였는데
베드로는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순교를 당하였고
도마는 인도에서 힌두교도 들에게 잡혀서 도끼로 찍혀서 순교를 당하였고
야고보는 예루살렘에서 목 베임을 당하여 순교를 당했습니다.
요한은 밧모섬으로 유배를 당하여 그곳에서 순교하였습니다.
그토록 나약하고 의심하던 제자들이 부활의 메시지와 함께 생명을 내건 증인이 되었다고 하는 이 역사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되겠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 중에 우리가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3년씩이나 동고동락 하였지만 주님의 부활하신 사실 앞에서 당황하고 의심하고 그러면서 자신들의 어느 믿음의 경지에 이르기까지 몹시 갈등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도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면서도 이 제자들과 같이 믿음이 없이 갈등을 느낄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부활하신 사건은 곧 내가 이후의 어느 날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모델이라고 하는 엄청난 소망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부활신앙에 대하여 의아해 하거나 막연해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오늘 이 아침 시간에 이와 같은 애매하고 불확실한 신앙에서 확신 있는 믿음으로 변화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이제 본문 말씀을 통해서 몇 가지로 생각하면서 은혜 받고자 합니다.


1. 우리는 생활 속에서 주님과의 동행을 체험해야 합니다.

본문 15절 말씀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 인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들과 동행을 하시는데도 그분이 주님이신 것을 몰랐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길을 걸으면서도 주님을 느끼지 못하고 걸어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곧 오늘의 우리들이 주님을 믿고 산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성도라고 하면서도 우리들의 생활 현장에서 감각적으로 주님을 인식하지 못하고 사는 생활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려도 예수님을 느끼지 못하는 예배와, 어려움 속에서도 예수님이 나와 함께 동행하고 계시다는 그 임마누엘을 느끼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어느 날 죄악에 빠져 들어갔을 때에 예수님이 이미 내 죄를 용서하셨다는 확신을 갖지 못하고 영혼의 평안을 얻지 못하는 사람들을 가르친 것입니다.
(막8:18)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치 못하느냐” 라고 주님께서 패역한 세대를 책망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의 눈은 보라고 있고 귀는 들으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눈을 가지고도 주님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가슴이 있어도 주님을 느끼지 못한다면 어떡합니까? 보지 못하는 이유를 성경 욥기17:7절 말씀에 “내 눈은 근심으로 하여 어두워지고 나의 온 지체는 그림자 같구나” 라고 하였습니다.
근심에 빠지면 볼 것을 볼 수가 없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은 앞으로의 살아갈 생활에 대한 근심과 염려로 그들의 눈이 어두워져서 주님을 몰라보았습니다.

요20:13-14절에는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에 가서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진 것을 보고 너무나 당혹스럽고 슬퍼서 엉엉 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주님께서 마리아의 등뒤에 서 계셨습니다. 너무 슬픔에 빠져도 눈이 보이지 않습니다.
(요일2:11)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
미움이 눈을 가리우면 모든 것이 미웁게 보이지만 이쁘게 보이는 사람은 나쁜 일을 해도 이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움의 감정을 가지면 분별력을 잃어버립니다.
(애5:16) “오호라 우리의 범죄 함을 인하여 우리 마음이 피곤하고 이러므로 우리 눈이 어두워졌나이다”
죄를 지으면 영혼이 어두워진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을 보니까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 당황해 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평소에 그들에게 하신 말씀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의심의 마음을 가지면 모든 사물은 올바르게 판단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들의 영적 분별력을 흐리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영적으로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게 하는 방해물이 무엇입니까?
우리들의 근심, 걱정, 슬픔, 미움, 범죄, 욕심, 의심들입니다. 이런 것들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제거되지 않으면 영의 눈이 어두워서 밝히 볼 수가 없습니다.
(엡1:18)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히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 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영의 눈이 밝아지면 하나님이 왜 나를 부르셨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 후에 우리들이 얻을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운 기업이 어떻게 준비되었는지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의 눈이 어두워져 있으면 신령한 하나님의 세계를 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과 동행을 하면서도 알아보지 못했고, 풍랑에 시달리던 제자들은 주님이 물위로 걸어오실 때 유령이라고 하였으며 베드로는 디베랴 바다에서 고기 잡을 때 예수님이 찾아오셨지만 알아보지를 못하였습니다.
지금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은 주님이 함께 계시지만 저들은 몹시 두렵고 불안한 상태였기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 거기 나타나시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눈을 크게 뜨십시오 그리고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대속의 어린양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분은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으신 분입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부활의 모델로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분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분은 오늘도 임마누엘이 되셔서 나의 생활 현장에 함께 살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 멘>
내 마음속에 계시고, 내 가정에 계시고, 이 사회 속에, 우리의 생활 어디든지, 오늘 이 예배의 대상이 되셔서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 멘>


2. 말과 행동이 일치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본문 18-25절 사이에 보면 예수께서는 두 제자들에게 당신들이 하는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냐고 물었을 때에 그중 한 사람이 정확하게 예수님과 지금까지의 사건 내용을 설명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선지자로 오신 것과 그는 말씀과 일에 능한 얘기며, 미워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십자가에 죽은 이야기며, 그리고 부활했다는 여인들의 말과 두 제자가 그것을 확인하였다는 이야기를 정연하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의 아쉬움을 말하였는데 “우리는 그분이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되기를 소원하였다” 고 까지 얘기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내용에서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입으로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바르게 전하면서 그의 발은 엠마오로 향하고 있다는 모순성입니다. 입으로는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면서 발걸음은 인간 편에서 자아 중심적으로 낙망하고 실의에 빠져서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날도 자기는 구원의 확신이 없으면서 말로는 성경을 줄줄 외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행동은 세상 향락에 빠져서 세상사람과 같이 행동하면서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생활은 엠마오로 향해 가면서도 입술로는 주님을 믿는다고 신앙생활을 한다고 외치고 다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들은 예수님의 주변 이야기는 줄줄줄 말하면서 그들의 발걸음은 지금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입으로는 예수님을 부르면서 발걸음은 딴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모순 속에서 빨리 되돌아 나와야 합니다. 이런 이중성에서 탈피하여야 합니다.
제자들은 믿을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는데도 믿지 못하였습니다.
① 선지자들의 예언이 수없이 있었고,
② 예수님께서도 죽은 다음 3일만에 다시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셨고,
③ 여인들이 무덤에 가서 본 것을 증거 하였으며,
④ 베드로와 다른 제자가 다녀와서 같은 말을 전해 주었습니다.
이와 같이 충분한 근거와 증인이 있음에도 믿지를 못하였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충분한 근거와 증인이 있는데도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3. 부활의 주님을 만난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1) 마음이 뜨거워 져야 합니다.

본문 32절 말씀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마음이 뜨거워 져야 합니다.
속죄의 감격으로 뜨거워 져야 합니다.
성령의 임하심으로 뜨거워 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뜨거워져야 합니다.
주님이 주신 사명감으로 뜨거워 져야 합니다.

(2) 신령한 영의 눈이 열려져야 합니다.

본문 31절 말씀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저희 눈이 밝아져 그 인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눈이 열려서 예수님을 바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근심과 걱정에 싸여서 낙심과 좌절 속에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성경말씀을 잘 풀어서 설명하여 주었습니다. 그 말씀을 들을 때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 졌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믿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으며,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면서도 우리 심령에 하나님의 은혜의 성령이 임하여 있어도 깨닫지 못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이와 같이 심령의 문이 닫혀져 있고 영안이 닫혀져 있는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축사하시고 주시는 떡을 먹고서야 눈이 밝아져서 주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이십니다.
(요6: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생명의 근원 되시는 예수님을 통하여 영안이 열려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3)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그의 인생길이 180도로 변화되어 되돌아 오늘 길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 고 하셨기 때문에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실의와 좌절에 빠져서 고향으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세속의 길이요, 정욕과 낙망과 불신앙의 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두 사람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길은 신앙의 길이요, 주님의 뜻을 따르는 길이요, 소망의 길입니다.
그렇게도 그립던 고향집을 지척에 두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올라가는 길은 어려운 길이요, 고난의 길이요, 순교의 길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마음이 뜨거워져 영의 눈이 열렸는데 아직도 근심과 걱정 속에 사로잡혀 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지체하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달려가서 ‘우리도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라고 증거를 하였습니다. 이것이 완전히 변화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는다고 입으로는 말하면서 행함이 뒤따르지 않으면 잘못된 신앙입니다.

결 론 : 오늘의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는 누구를 막론하고 자기가 지켜야 할 자리가 있습니다. 그 자리를 벗어나지 말고 지켜야 합니다. 성도의 자리, 신앙의 자리, 임원의 자리를 지키고 엠마오로 내려가는 상태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들은 믿음의 자리를 잘 지키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믿음과 신앙이 내려가지 말기를 바랍니다.
내려간다는 것은 두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①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것과,
②형편과 사정이 나빠지는 것입니다.
엄격히 생각한다면 두 가지 다 같은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내려갔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모습을 보고 낭패와 실망에 빠져서 다시 살길을 찾아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에는 예루살렘을 떠난 사람들이 잘 되었다고 기록된 곳이 없습니다.
①눅10:30절 말씀 예루살렘에서 한 사람이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서 가진 것을 모두 빼앗기고 죽음 직전까지 가게 되었다가 선한 사마리아 사람 때문에 살아났습니다.
② 구약 왕하2:36절 이하의 말씀에 시므이라고 하는 사람은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을 벗어나지 말라고 한 것을 어기고 나갔다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③ 룻기1장에는 나오미와 그의 가족이 기근을 피하여 모압 땅으로 갔다가 환난을 만났습니다.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아들 말룐과 기룐 둘도 죽어서 며느리 둘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룻을 데리고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을 때에 다시 축복을 회복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엠마오 길은 세상길입니다. 타락의 길입니다. 세상길로 향하던 두 사람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서 변화되어 되돌아 온 것처럼 오늘의 우리들도 지금까지 세상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하나님께로 향하여 올라가는 생활로 변화되어 영원토록 주님과 함께 하는 생활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도 여러분들이여!!
오늘 교회에 오실 때에 무슨 마음을 가지고 오셨습니까? 여러분 중에는 예수 없는 예배를 드리는 분들도 있습니다. 오늘부터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꼭 붙잡고 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 어떤 형편, 어떤 이유에 있어서든지 간에 기쁨의 예수, 생명의 예수, 소망의 예수와 함께 여러분의 생활 현장에서 날마다 날마다 승리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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