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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둠에서 빛으로 (요 9: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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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박 봉수 목사

  요한복음은 다른 세 복음서와는 여러 면에서 차이를 보입니다. 그래서 다른 세 복음서 곧 마태, 마가, 누가 복음은 관점이 같다 해서 공관복음이라 하고, 요한복음은 이 세 복음서들과는 다르다 해서 제 4복음서라고 부릅니다.

  여러 가지 차이 가운데 하나가 이적(Miracle)이라는 말 대신에 표적(Sign)이라는 말을 쓴다는 점입니다. 공관복음서에서는 이적이라는 말을 씁니다. 이에 비해서 요한복음에서는 표적이라는 말을 씁니다.

  이적이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능력을 세상에 나타내 보이시는 사건을 말합니다. 죽은 자를 살리신다든지, 물 위를 걸으신다든지, 풍랑을 잔잔케 하신다든지, 병자를 살리시는 사건들을 복음서에서는 이적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여느 사람들과 달리 하나님의 권능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드러내신 사건들이라는 뜻입니다.

  이것과 비교해서 표적이라는 것은 이를 대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믿음이 생기기를 바라는 구체적인 의도를 담고 있는 사건을 말합니다. 물론 표적도 기적 사건이긴 합니다. 병을 고친다든지,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다든지, 죽은 자를 살리시는 기적 사건들 형태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 표적에는 주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메시지가 담겨있습니다.

  그래서 표적은 표적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뒤에 긴 표적에 대한 주님의 설명이 따라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사람들이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을 통해서 믿음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적 사건이 모두 표적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믿음을 갖게 하려는 의도가 담긴 기적 사건만이 표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표적이라는 기적 사건을 통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표적에서 기적 사건에만 집중해서는 안 됩니다. 그 표적을 통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고 계시는 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이 더욱 굳건해 져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표적이 나옵니다. 먼저 이 표적의 기적 사건을 살펴보겠습니다.

  한 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 거리를 지나고 계셨습니다. 길거리에서 날 때부터 소경인 사람과 마주치게 되셨습니다. 그 때 제자들이 주님께 이 사람이 소경이 된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질문에는 답하지 않으시고 이 소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이 나타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그리고 그 말씀대로 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소경의 눈에 바르시고는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이 소경이 말씀대로 씻고 눈을 뜬 모습으로 주님께 왔습니다.

  이제 이 소경이 눈을 뜨게 되자 사람들의 다양한 반응이 나타납니다. 특히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에 눈을 뜨게 했다고 꼬투리를 잡고 주님을 공격합니다. 소경의 부모를 다그칩니다. 이 소경이 끝내 자기들 말에 따르지 않고 주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자 내어 쫓았습니다.

  우리는 이제 이 표적을 통해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찾아보아야겠습니다. 이 소경이 눈 뜬 사건은 단순한 이적이 아니고 표적이기 때문입니다.

어둠에서

  1절에 보면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신지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출생이후 한 번도 빛을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어둠 가운데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여기 40-41에 의미 있는 표현이 나옵니다.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서 두 가지 점을 지적하고 계십니다.

  하나는 영적인 소경이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본문의 이 소경은 나면서부터 보지 못해서 평생을 어둠 가운데 살아왔습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으로 소경이 되어 영적 어둠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소경의 문제로 시비를 걸고 있는 바리새인들이 대표적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죄가 사람들을 영적 소경이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죄 때문에 영적으로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창 3:1-11장을 보면 인간의 영적 눈이 어떻게 고장이 나게 됐는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 죄가 심령에 들어왔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막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그러나 뱀에게 속아서 그 말씀을 어기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순종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 불신앙 불순종으로 죄가 저들의 심령 속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눈에 이상이 오는 질병 가운데 “백내장”이 있습니다. 우리 눈의 수정체가 혼탁해 져서 물체가 흐려지게 되고 점점 볼 수 없게 되는 질병이랍니다.

  이렇게 우리 수정체가 혼탁해 지는 것처럼 우리 심령에 죄가 들어오면 우리 영안이 흐려지게 됩니다. 그래서 점점 영적으로 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서서히 영적인 어둠 속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둘째, 하나님을 볼 수 없게 됩니다.

  창 3:8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죄가 저들의 심령 속에 들어오게 되자 저들은 하나님이 두려워 하나님의 낯을 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두려워 하나님을 뵈올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저 깊은 바다 심해에도 물고기들이 살고 있답니다. 바다 위쪽에서 떨어지는 물고기 사체나 유기물 조각들을 먹고 산답니다. 그런데 이 물고기들에게는 빛이 없는 중에서도 살아가야 합니다. 수심 200미터만 내려가면 거기서부터는 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심해 물고기들은 시력 외에 다른 감각기관이 발달했고, 대개 눈이 퇴화되거나 아예 눈이 없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점점 영적 어둠이 깊은 곳으로 들어가게 되면 점점 영적 눈이 기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하나님이 두려워 피했지만 점점 하나님이 계신지 조차도 의식하지 못하게 됩니다. 나아가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하나님을 대적하게 됩니다.

  셋째 세상을 보는 눈에 문제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영적 눈에 문제가 생겨서 하나님을 제대로 볼 수 없게 되자 또 다른 문제가 생겨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제대로 볼 수 없게 됩니다. 이 또한 영적 눈의 고장입니다.

  창 3:12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자기 아내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 2:23을 보면 아담이 이렇게 말했었습니다.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요즘 말로 “그대는 나보다 더 소중한 사람이요.. 내 생명보다 더 귀한 사람이라”는 고백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랑을 고백했던 아담이 이 여자 때문에 내가 이 모양 이 꼴이 됐다고 책임을 전가하고 있습니다. 뼈 중의 뼈는 어디가고 내 인생을 망친 철천지원수라고 원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됐습니까? 서로를 보는 눈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지난달에 LG 카드가 30-40대 기혼 남녀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다시 태어나도 현재 배우자와 다시 결혼하겠느냐 는 물음에 남성은 65.2%가 그렇다고 대답했는데 비해서 여성들은 33.3%만 그렇다고 대답했답니다. 결혼을 후회하느냐는 물음에 남성은 12.6%가 그렇다고 답했는데 비해서 여성은 23.7%가 그렇다고 답했답니다. 이혼을 생각해 본 일이 있느냐는 물음에 남성은 27.8%가 그렇다고 답했는데 비해 여성은 43.4%가 그렇다고 답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부부들의 자화상입니다. 대체로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하고 사는 부부가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서로를 소중하게 볼 수 있는 눈이 병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창 4장을 보면 이 눈이 더욱 심각하게 고장이 나는 사건이 기록되어있습니다. 가인이 하나님께서 자기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동생 아벨의 제사를 열납하시자 동생을 시기하게 됐습니다. 점점 미워하게 되고 급기야 동생을 죽이게 됩니다. 동생을 동생으로 보지 못하고 경쟁자로 보게 됩니다. 동생을 보는 눈이 고장난 것입니다.

  창 11장을 보면 바벨탑 사건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인간이 교만해졌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동원해서 인간 중심의 악한 문화를 만들고 자연을 착취하고 하나님을 대적하게 됩니다. 시체말로 뵈는 것이 없어진 것입니다. 영적 소경이 된 것입니다.

빛으로

  오늘 본문을 보면 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게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소경이 눈을 뜨게 됐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 사건은 표적입니다.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 소경은 육적 눈을 떴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영적인 눈을 떴다는 것입니다. 본문이 이 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7절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이 눈뜬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지금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잡을 빌미를 찾고 있을 때입니다. 그들 앞에서 이렇게 답했다가는 큰 화를 당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이 눈뜬 사람은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영적으로 눈을 떴기 때문입니다. 본 것을 보지 못했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사람의 육적인 눈을 어루만져서 고쳐주시면서 사실은 이 사람의 영적인 눈을 어루만져 고치신 것입니다. 나아가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에게 영적인 눈을 뜨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영적인 눈을 떠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이 어떻게 눈을 뜨게 됐을까요? 본문10-11절에서 눈 뜬 사람이 분명하게 대답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묻되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예수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인 눈을 뜰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볼 수 있는 길도 하나입니다. 오직 예수입니다. 예수 때문에 영적 눈을 뜨게 되고 예수 때문에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요 1:4-5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예수 그리스도가 빛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안을 보게 해주는 빛은 저 태양으로부터 오지만 우리의 영안을 보게 해 주는 빛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말씀입니다.

  요 1:9를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 빛이 세상에 비취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 빛이 비추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가 빛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영적 어둠을 물리칠 길이 열린 것입니다. 영적으로 눈을 뜨고 볼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런데 빛이 비취고 있다고 다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선 영적인 눈이 치료되어야 합니다.

  소경이 먼저 그 눈이 밝게 된 것처럼 우리의 영안이 밝아져야 합니다. 보고 싶어도 보여야 볼 수 있습니다.

  청년 하나가 우스개를 합니다. 한 참 밥을 먹고 있는데 뛰어 들어와 허겁지겁 밥을 먹습니다. 어느 정도 먹고는 인사를 하는 겁니다. “목사님 계셨습니까? 배 좀 채우고 나니까 이제 보입니다...”

  왜 보이지 않을까요? 바로 죄 때문입니다. 아담 하와가 불신앙 불순종으로 죄가 그 심령에 들어온 뒤에 볼 수 없었던 것처럼 우리 심령 속에 죄가 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어야 죄 사함을 받게 됩니다. 그래야 보이게 됩니다.

  다음으로 눈을 떠야 합니다.

  눈이 정상이라도 눈을 감고 있으면 보이지 않습니다. 보려고 눈을 떠야 볼 수 있습니다.

  요 9:35를 보면 주님께서 눈 뜬 사람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 주님께서 이제 갓 영안을 뜬 사람에게 겨우 선지자라고 고백한 사람에게 다시 믿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 때 이 사람이 믿는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영적으로 감았던 눈을 뜬다는 것은 바로 믿음을 말합니다. 우리가 잘 보려면 눈을 크게 뜨는 것처럼 영적으로 잘 보려면 우리가 작은 믿음이 아니라 큰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보는 사건은 믿음의 사건입니다. 우리가 믿으면 영적으로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이 땅에는 영적으로 소경인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영적인 어둠 가운데 헤매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영적으로 눈을 뜰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영적으로 보다 잘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보시고, 주님이 허락하신 아름다움 사람들을 보시고, 저 복된 세상을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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