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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니 (호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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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석기현 목사

이성 간에 서로 눈과 마음이 맞게 되면 세상의 다른 어떤 사람과도 느껴보지 못했던 뜨거운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반면에 연인 사이에서 한쪽이 다른 사람에게 눈길을 주게 된다든지, 부부 사이에서 한쪽이 어떤 외간남녀와 정을 통하게 될 때, 그 미움 또한 다른 어떤 경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극렬한 것이 될 것입니다. 특히 자기 남편이나 아내가 정절을 깨뜨리고 간음을 저질렀을 경우에 그것을 용서하기란 참 어려운 일일 것이며, 잊어버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일 것이며, 더욱이 그 모든 것을 용서하고 잊을 뿐 아니라 이전보다 더 사랑해 준다는 것은 상식적인 판단으로 생각해 볼 때에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상상에 불과한 일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그와 같은 대반전이 성경에서는 같은 한 장 안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이 호세아 2장의 말씀입니다. 본문은 남편이라면 누구나 다 혐오하고 미워할 수밖에 없는 간음한 아내를 깨끗이 용서하고 잊어줄 뿐 아니라, 아예 새로이 결혼식까지 하면서 오히려 더 큰 사랑으로 맞이해 주는, 참으로 신기한 신랑을 우리에게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그 놀라운 인격과 성품을 소유하고 있는 신랑은 바로 하나님이시며, 그처럼 지극한 사랑을 받아 누리게 된 간음한 아내는 바로 이스라엘이었습니다. 당연히 미워해야 할 대상을 오히려 지극한 사랑으로 품어 주시는 이런 일은 세상의 부부 사이에서는 참으로 찾기 어려운 것이지만, 우리 주님과 죄인 사이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항상 일어나고 있는 놀라운 사건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신기한 일이 과연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이 시간 우리는 간음한 여인처럼 악하고 추한 죄인이 그 원래의 남편 되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되는 이 은혜로운 일이 개인과 가정과 사회와 교회를 통하여 계속 실현되도록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순결한 신부된 성도들이 꼭 지켜야 할 자세와 깨달아야 할 사실이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참된 성도들은 미혹하는 우상과 이단을 상대로 ‘진리의 쟁론’을 하는 시대적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본문 호세아 2장 2절부터 4절까지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 어미와 쟁론하고 쟁론하라 저는 내 아내가 아니요 나는 저의 남편이 아니라 저로 그 얼굴에서 음란을 제하게 하고 그 유방 사이에서 음행을 제하게 하라 /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저를 벌거벗겨서 그 나던 날과 같게 할 것이요 저로 광야 같이 되게 하며 마른 땅 같이 되게 하여 목말라 죽게 할 것이며 / 내가 그 자녀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음란한 자식들임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배교한 이스라엘을 향하여 「저는 내 아내가 아니요 나는 저의 남편이 아니라」고, ‘영적 이혼 상태’를 선포하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너희 어미와 쟁론하고 쟁론하라」고 하시는 말씀은 바로 그 이스라엘 중에 소수로 남아 있는 의로운 신자들을 향하여 내리시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처럼 영적으로 행음하고 있는 「어미」 즉 우상숭배로 타락하고 있는 자기 조국의 죄악을, 그 나라의 국적과 그 민족의 혈통을 이어받은 백성들 중에서 오직 ‘참된 이스라엘’로 남아 있는 경건한 신자들이 대항하고 나서야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기서 「쟁론하라」는 말은 그저 단순히 말싸움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은 ‘법적 소송을 벌이다’ 혹은 ‘고발하다’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즉 이스라엘의 참된 성도들이 그 타락해 가는 조국의 죄악된 행위를 꾸짖으면서 당장 회개해야 할 것을 강력히 촉구함에 있어서, 사람의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을 기준으로 삼고 거기에 어긋나는 모든 범죄 행위를 백일하에 고발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같은 핏줄을 나눈, 아니 그 핏줄에서 태어난 자식이 그 어미를 상대로 쟁론하고 소송해야 한다면 그 얼마나 괴롭고 고통스럽겠습니까? 하지만 그것만이 그 어미를 진정으로 구해낼 수 있는 길이라면, 자식은 그 어미와 쟁론을 벌여서라도 회개시켜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본문 3절과 4절에 이어지는 대로 「그렇지 아니하면」 이스라엘은 벌거벗김을 당하고 광야와 마른 땅 같이 목마르게 되고, 그 자녀들이 하나님의 긍휼을 입지 못하고 영영 죽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조국의 영적 죄악을 두고도 쟁론하지 아니하면 결국 그 민족과 사회와 후손의 앞날은 점점 더 무서운 저주에 빠지게 될 뿐인 것입니다.

바로 오늘날 이 조국교회의 참된 성도들이 꼭 기억해야 할 사명이 아니겠습니까? 신자나 목사가 다른 교회를 향하여 쟁론을 벌이는 것은 마치 어미를 상대로 쟁론해야 하는 자식의 경우처럼 괴롭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복음 진리에서 어긋난 길을 걷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기독교인이라는 같은 이름을 가지고 같은 기독교 교회 간판을 걸고 있다는 그 이유 때문에 그들을 상대로 쟁론하지 못한다는 것은 결코 올바른 이해와 관용의 자세도 아니며 참된 사랑의 자세는 더더욱 아닌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간음하면서 돌아다니는 어머니를 보고도 아버지에게로 돌아와서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시라고 말 한마디 하지 아니하는 자식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교계에는 교회 비판하는 소리들은 대부분이 다 사소한 ‘아디아포라’적 윤리 문제에만 집중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교회를 비판하려고 한다면 정말 중대한 문제, 교회가 하나님과의 영적 정조를 깨뜨리는 배교 행위, 바로 우상혼합주의나 이단사상에 빠지는 죄에 대하여 발 벗고 나서서 쟁론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중요한 쟁론을 하는 목사나 신학자는 너무 적고, 그 대신에 참된 교회들의 ‘눈에서 티를 찾는’ 일을 교회 비판의 주된 쟁론거리로 삼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자식이 자기 어머니의 요리 솜씨가 좀 좋지 않다고 해서 그것 가지고 어머니에게 대들고 시비를 일으킬 수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자기 어머니가 다른 남자와 사귀는 것을 본다면 그것이야말로 어머니와 싸워서라도 반드시 말려야 할 일임에 틀림없는 것입니다. 참된 성도의 교회 비판은 바로 그런 교회의 ‘영적 음행’에 집중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므로 그 ‘얼굴에 음란이 뚜렷한’ 교회들, 이단 사상을 대놓고 가르치는 교회들이야말로 진리를 사랑하는 성도들이 성경 말씀의 법 앞에 출두시켜서 엄중하게 고발해야 할 대상입니다. ‘유방 사이에 음행이 가득한’ 교회들, 우상종교들과 소위 종교일치운동을 추진하고 있는 교회들이야말로 신앙 정절을 지키고자 하는 성도들이 목소리를 높여 탄핵해야 할 대적입니다. ‘음란한 자식’들만 낳는 교회, 예수 십자가 대속의 복음이 없고 천당구원이 없는 사단의 자식들을 기독신자라는 버젓한 이름으로 이 사회에 양산시키고 있는 가짜 교회들이야말로 우리가 ‘쟁론하고 또 쟁론하면서’ 끝까지 정면 도전하고 물리쳐야 할 ‘집안의 원수’인 것입니다.

분명히 진리에서 떠난 이단이요 사신 하나님을 떠난 배교자일 때에는 비록 같은 이름을 나눈 기독신자와 교회라 할지라도 대항하고 쟁론하여 회개를 촉구함으로써, 조국의 교회와 교단들로 하여금 ‘본 남편’을 찾아 돌아오게 만드는 시대적 사명을 다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참된 성도들은 음행자와 탕자까지도 결국 돌아오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택자 사랑’을 믿어야 합니다.

본문 호세아 2장 5절부터 7절까지의 말씀에 「저희의 어미는 행음하였고 저희를 배었던 자가 부끄러운 일을 행하였나니 대저 저가 이르기를 나는 나를 연애하는 자들을 따르리니 저희가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과 내 삼과 내 기름과 내 술들을 내게 준다 하였느니라 / 그러므로 내가 가시로 그 길을 막으며 담을 쌓아 저로 그 길을 찾지 못하게 하리니 / 저가 그 연애하는 자를 따라 갈지라도 미치지 못하며 저희를 찾을지라도 만나지 못할 것이라 그제야 저가 이르기를 내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니 그 때의 내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음이라 하리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 5절에서 「행음, 부끄러운 일」이라고 비유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죄는 바로 바알과 같은 우상신을 숭배한 것이었습니다. 5절 하반절에 기록된 「떡과 물」은 생명을 위한 것이며, 「양털과 삼」은 의복을 위한 것이며, 「기름과 술」은 인생의 만족과 기쁨을 위한 필수품들이었는데,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오게 되었을 때부터 풍성하게 내려주셨던 것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바알 우상숭배에 빠진 그들은 이 모든 ‘의식주’의 은총을 받아 누리면서도 그것이 자기네들이 「연애하는 자」 즉 바알신이 그들에게 준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처럼 눈과 마음을 남편 아닌 다른 남자에게 주고 있던 이스라엘, 아니 아예 그 외간 남자를 찾아다니던 ‘아내’ 이스라엘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6절 말씀에,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을 연애하러 돌아다니는 길들을 「가시」와 「담」으로 막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우상숭배에 빠지게 된 이후부터는 그들의 인생 매사가 잘 풀리지 않고 장애가 생기고 환난과 시험이 따라오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죄인을 책망하시고 징계하시는 것은, 마치 탈선한 아내가 몰래 집을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밤새도록 문을 지키고 서 있는 남편의 마음과도 같은 것입니다. 이미 버린 아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럴 필요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보통 남편들이라면 그냥 몰래 뒤따라가서 현장을 목격하고 그 증거를 가지고 당장 이혼해 버릴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그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생을 ‘가시’로 찌르고 ‘담’을 쌓아서라도 아예 그런 우상숭배의 길로 빠져 나가지 못하도록 막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배교한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바로 그런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깨닫게 된 자들은 그제야 ‘내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야 하겠구나.’하고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잠시 탈선하여 세상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던 ‘그 때의 형편이 지금보다 훨씬 더 좋았던’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일단 한 번 택하신 자녀가 딴 짓을 하면서 돌아다니면 그를 따끔하게 징계하고 눈물 쏙 빠지도록 고통을 주어서라도 반드시 다시 돌아오게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우리 쪽에서는 변심하더라도 하나님 쪽에서는 한 번 주신 사랑을 중단시키거나 거두시는 법이 결코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때로는 엄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일견 매정한 남편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진짜 이유는, 이처럼 그 뒤에 한없는 사랑을 감추어 놓고 계시기 때문인 줄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기록된 성경 말씀을 가지고 매섭게 꾸중하실 뿐 아니라, 때로는 우리로 하여금 고통스러운 인생의 매를 맞게까지 하시는 진짜 의도는 오직 여기에만 있을 따름입니다. 주일에 예배를 빼먹고 놀러 가면 마음이 편하지 못하고, 십일조하지 않으면 사업에 구멍이 펑펑 나게 되고, 교회생활을 등한히 하게 되면 가정생활 곳곳에 시험이 끊임없이 일어나게 되는 이유는, 하늘의 아버지께서 그 자녀들이 나쁜 짓 하려고 밤에 몰래 빠져나가는 것을 막으시려고 그 문밖에 담을 쌓아 놓으시고 그 길에 가시덤불이 무성히 자라게 해놓으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런 일이 생기지 않는다면 절대로 좋아할 일이 못됩니다. 유아세례 받고 자란 아이가 중고등학생이 되면서 주일예배 출석도 하지 않는데 학교 성적은 쑥쑥 올라가고, S.F.C. 출신인 청년이 결혼 후에 오히려 신앙생활을 등한히 하고 있는데도 별 탈 없이 행복하게 사는 것처럼만 보인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짜로 불안한 조짐인 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일견 편해 보이는 인생이 계속된다면 그것이야말로 ‘너는 버린 자식이니 네 마음대로 죄 짓고 살아라.’하고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이미 유기하셨다는 명백한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택하신 자녀, 사랑하는 신부들은 하늘의 아버지께서 절대로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그 탈선한 인생을 통과하면서 이리저리 얻어맞고 상처  투성이가 되게 하신 후에라도 결국은 집 나갔던 탕자처럼 「그 때의 내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다」(호 2:7)라고 깨닫고 아버지께로 돌아오게 만드시는 것입니다(눅 15:17).
하나님께서 때때로 우리의 먹고 사는 문제에 ‘가시’를 치시거나 이루고 싶은 일에 ‘담’을 쌓으시는 것은, 비록 음행자나 탕자라 할지라도 한 번 택하신 자는 결단코 놓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변함없으신 사랑의 섭리인 줄로 깨닫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빠져 들어가고 있던 배은 배신의 길을 떠나 ‘본 남편’에게로 다시 돌아오는 감격을 누릴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참된 성도들은 끝까지 회개하지 아니하는 죄인에게 반드시 임하게 될 궁극적 심판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본문 호세아 2장 8절부터 10절에 기록하기를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저에게 준 것이요 저희가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저에게 더하여 준 것이어늘 저가 알지 못하도다 / 그러므로 그 시절에 내가 내 곡식을 도로 찾으며 그 시기에 내가 내 새 포도주를 도로 찾으며 또 저희 벌거벗은 몸을 가리울 내 양털과 내 삼을 빼앗으리라 / 이제 내가 그 수치를 그 연애하는 자의 눈앞에 드러내리니 저를 내 손에서 건져낼 사람이 없으리라」고 했습니다.
그처럼 당신께 배은하고 영적으로 음란했던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육신을 위해 공급해 주시던 것들을 끊으심으로 벌주시고자 하셨습니다. 8절에서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 「은과 금」 등 사람에게 필요한 생필품과 재물을 언급하시면서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들이 「내가 저에게 준 것」이며 「내가 저에게 더하여 준 것」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또한 9절에서 그 모든 것을 도로 빼앗아 가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도 「내 곡식, 내 새 포도주, 내 양털, 내 삼」이라고 하나하나 당신의 것이라고 재차 강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죄는 자연히 그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 또한 감사할 줄 모르는 죄로 직결되기 마련입니다. 그런 인생은 자기들이 먹고 입고 살게 된 원인을 두고서 문명이 잘 발달된 현대에 ‘재수 좋게’ 태어난 덕이라고 여기든지, 아니면 오직 자기 자신이 죽어라고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 주어진 당연한 결과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자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일찍부터 경고하시기를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신 8:17, 18)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의 축복을 기억하지도 감사하지도 않고 모두가 다 ‘자기 스스로 이룬 것’이라고 교만할 때 하나님께서 그 의식주의 축복을 빼앗아 가심으로써 벌주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가 하면 11절 이하 1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내가 그 모든 희락과 절기와 월삭과 안식일과 모든 명절을 폐하겠고 / 저가 전에 이르기를 이것은 나를 연애하던 자들이 내게 준 값이라 하던 그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거칠게 하여 수풀이 되게 하며 들짐승들로 먹게 하리라 / 저가 귀고리와 패물로 장식하고 그 연애하는 자를 따라가서 나를 잊어버리고 향을 살라 바알들을 섬긴 시일을 따라 내가 저에게 벌을 주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나오는 「절기와 월삭과 안식일」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명절이었으며 기쁨의 날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범죄한 그들은 그런 거룩한 날들을 통해 누리던 축복도 박탈당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돌아섰으니 그들이 이전에 하나님 앞에서 성일을 지키며 예배를 통하여 받던 은혜와 기쁨과 힘은 자연히 사라지게 되는 것이며 그것 역시 하나님의 징벌이었던 것입니다.

이 벌이 앞의 의식주를 끊는 벌에 비해서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입니까? 사실에 있어서는 훨씬 더 중한 벌입니다. 그들은 ‘주 안에서만 누릴 수 있는 참된 기쁨’(빌 4:4)이란 더 이상 누릴 수 없고 오직 세상 쾌락만 남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성호를 찬양하며 성도와 교제하며 교회를 섬기는 이 축복을 사람이 누리지 못하게 될 때, 그의 영혼은 남은 평생을 주리고 목마른 가운데서만 살다가 그 끝은 영벌이라는 죽음보다 더한 벌을 받게 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되면, 아까 10절 하반절에서는 「저를 내 손에서 건져낼 사람이 없으리라」고 했습니다. 또 여기 13절 하반절에 보면 「바알들을 섬긴 시일을 따라 내가 저에게 벌을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악을 보고도 오래 참으신다고 해서 우리가 방심하며 회개를 늦추어서는 아니 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진노하실 때가 오고야 말 것이고, 그때가 되면 사람이 지은 모든 죄를 다 찾아내어서 ‘그 죄 지은 만큼’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음행한 아내까지도 용서하시고 기다려 주셨던 하나님을 끝까지 저버릴 때, 그래서 하나님께서 결국 그 인생을 벌주기로 작정하시게 되면 그 저주는 더 이상 ‘아무도 막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결국은 죄인을 반드시 벌하실 것이라고 선언한 이 말씀을 결코 가볍게 듣고 넘어가서는 아니 됩니다. 지금 용서와 복을 선포해 주시는 하나님은 또한 저주와 멸망 역시 꼭 같이 경고하고 계시는 분이신 것을 조금이라도 간과하거나 깎아내려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벌에 대한 두려움 없이 무슨 참된 회개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 내릴 당연한 징벌이 없다면, 그 회개한 자에게 내려 주신다는 용서란 것이 무슨 은혜로운 일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신구약 성경을 통하여 이처럼 명백한 언어로 선언하신 저주, 죄에 대한 벌, 하나님을 배반한 간음자들이 받아 마땅한 징벌을 무슨 ‘부드러운 말’로 완곡하게 바꿀 생각을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판결을 거역하는 행위이며, 그 엄하신 모습 뒤에 있는 한없는 자비와 인애의 성품을 모독하는, 실로 무례하고 건방지기 짝이 없는 짓이기 때문입니다.
신랑을 영영 잃게 되는 무서운 심판의 날이 반드시 오게 될 것을 진정 두려워하면서, 그 하나님께서 아직 회개의 기회를 주고 계시는 이 ‘은혜 받을 만한 때에’ ‘본 남편’에게로 돌아오라고 전도할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남편 싫다고 집 나갔던 아내,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았던 아내까지도 자기 ‘본 남편’에게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려졌습니다. 실로 하나님만이 베푸실 수 있는 한없는 사랑이요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혼인잔치집의 문이 영영 닫혀버리기 전, 아직도 남편이 그 아내를 기다려 주고 있는 이 고마운 기회에 우리는 늘 회개하고 전도함으로써 자신과 가족과 이웃과 민족의 생명을 구원의 길로 이끌어 들여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참된 신자와 교회는, 할 수만 있으면 택자까지도 미혹하려고 온갖 미혹의 술수를 쓰고 있는 우상과 이단의 정체를 백일하에 드러내어야 합니다. 자기 인생에 벌어지는 시험과 환난을 통하여서, 하나님께서 택자를 끝까지 견인해 주시는 사랑의 손길을 체험할 줄 알아야 합니다. 비록 지금 당장은 회개하지 않아도 별 일 없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결국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의 날이 오고야 말 것을 기억하며 매 순간마다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택자를 향한 사랑에는 영원토록 조금도 변함없으신 하나님께서는 그래서 오늘도 매서운 경고의 성경 말씀과 따끔한 인생의 매까지 사용하시면서 우리를 불러 주고 계십니다. 이 모든 것이 원래 추하고 부끄럽기 짝이 없는 ‘간음한 여인’ 같은 우리들을 오히려 당신의 ‘정결한 신부’로 만들어 주고자 하시는 그 신랑편의 한없는 사랑과 일방적인 언약 때문인 것입니다. 우상과 이단을 대항하여 쟁변하는 용기, 하나님의 택자를 향한 사랑만을 의지하는 믿음, 그리고 반드시 있을 산 자와 죽은 자에 대한 영원한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서, 스스로 ‘지금보다 더 나았던 이전 형편’을 늘 사모하고 회개하면서, 이 악하고 패역한 세대에서 여전히 음란하게 살고 있는 인생들까지 ‘본 남편’에게로 다시 이끌어 오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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