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행 6:8-15)

  • 잡초 잡초
  • 814
  • 0

첨부 1


- 설교 : 김성덕 목사

사무엘 선지자가 이새의 여덟 아들 중 말째 다윗에게 기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삼을 때에 삼상16:7절에
[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 고 합니다.
여호와는 중심을 본다고 하는데 그 중심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바로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충성심을 말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101:6절에
[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거하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수종하리라 ] 고 노래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사람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그것도 성령충만하여 충성된 자를 통해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의 역사는 성령의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사도행전은 사도들을 통해 복음이 세계적으로 확산되어지는 이면에는 평신도 사역자들의 협력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사도들이 기도와 말씀 전하는데 전무하기 위하여
평신도 중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일곱 일군을 세웠습니다.
이들은 구제를 전담했을 뿐만 아니라
복음이 이방 세계로 뻗어나가는데 가교 역할을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루살렘 교회 일곱 일군 중 스데반을 소개하면서 스데반의 핍박을 시작으로 초대교회에 다시 핍박이 일어난다는
예고의 신호탄을 보내고 있습니다.
오늘 스데반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럼 스데반은 어떤 사람입니까?
8절에 [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
스데반은 은혜와 권능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이 말은 내적 자질과 외적 능력을 갖춘 일군이라는 말입니다.
초대교회 일곱 일군 세울 때에 기준이
행6:3절에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고 5절에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 입니다.
그리고 본문 8절에 은혜와 권능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스데반에게 성령, 지혜, 믿음, 은혜, 권능,
즉 5가지 중요한 신앙인격을 소유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스데반은 신앙인격을 온전히 갖춘 일군인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헬라파 유대인과의 변론에서도 당당한 지성인이었습니다.
우리교회에도 이런 내적 자실과 외적인 능력을 갖춘 일군들이 많이 일어나기를 !
그리고 스데반이 큰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다는 본문의 증언은
우리에게 놀라움을 안겨주기에 충분합니다.
사도행전 1장 1절에서부터 시작하여 본문에 이르기까지
이와 같은 표현이 누구에게 사용되었는지를 살펴보면,
그 놀라움의 정당성을 인정하게 됩니다.
먼저 행2:22절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어라 너희도 아는 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
그런가 하면 행2장:43절과 5:12절은 각각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습니다.
[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
[ 사도들의 손으로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 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
본문에 이르기까지 기사와 표적-즉 놀라운 일과 기적을 행한 자는
예수 그리스도요, 그리고 그분의 제자였던 사도들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셨던 성자 하나님이시기에
그분이 기사와 표적을 행하신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사도들은 무려 3년 동안이나
밤낮으로 주님과 함께 살았던 주님의 제자들이었습니다.
인류 역사 상, 이 세상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수년 간 그 분과 동거한 자들은 그들이 유일하였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을 통하여 주님의 표적과 기사가 드러난다는 것
또한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달랐습니다. 이 때의 시기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다시 말해 오순절에 초대교회가 태동한 이후
불과 1년여밖에 지나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그러니 스데반이 주님을 영접한 것은 아무리 길어도 1년 이상이 아니었습니다. 믿은 지 1년 정도라면 초신자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셨던 기사와 표적,
사도들을 통하여 나타났던 기사와 표적이 놀랍게도,
겨우 1년 남짓한 신앙경력에 불과한 스데반을 통하여서도
똑 같이 나타났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다음주일부터 살펴볼 행7장에는 스데반의 설교가 나오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사도행전 2장과 3장에 소개되고 있는
사도 베드로의 설교보다 모든 면에서 훨씬 뛰어남을 알게 됩니다.
신앙의 연륜으로는 1년 정도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러나 신앙 수준에 관한 한 그는 이미 사도와 대등하거나 더 우위에 있습니다.
이와 같은 스데반의 모습은 눅13:30절 주님의 말씀을 연상케 해줍니다. 
[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
신앙의 연륜,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믿은 지 오래 된다고 해서 반드시 믿음이 출중한 것도 아니오, 초신자라고 해서 믿음의 경지가 얕은 것도 아님을
주님께서 친히 밝혀 주셨고, 스데반이야말로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참된 신앙이란 얼마나 오래 믿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주님께 집중하느냐로 결정됨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스데반이 믿은 지 1년밖에 안 되는 초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통하여 표적과 기사가 나타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사도들을 능가하는 설교를 행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온 영혼을 다해 주님께 집중하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그가 얼마나 주님께 집중하는 자이었는지는 조금 후에 확인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일곱 일군 중 스데반을 먼저 소개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성도의 신앙생활의 모델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누구를 모델로 삶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물론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모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님을 닮고 싶고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예수님처럼 행동하는
예수님을 닮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자시오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예수님보다는 우리와 똑 같은 사람으로서의
모델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모델이 바로 스데반입니다.
오늘 스데반이 우리의 신앙의 모델이 되어 스데반을 닮아가려는 애씀 속에 우리 또한 주변 사람들이 닮고 싶어하는 신앙의 모델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정 지숙이라는 여성도의 간증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뇌성마비 1급 장애를 가진 주부입니다.
솔직히 말이 주부이지 살림은 우리 신랑이 도맡아 하고 있습니다.
신랑도 소아마비 1급 장애자이지만 일반인 못지 않게
1인 3역(전업주부, 간병인, 신문기자)을 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2003년 10월 첫 만남에서부터 무엇에 이끌렸는지
만난지 한 달만에 지금의 신랑에게 시집을 와서
장애인 시설 17년 생활을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그리워하던 자유와 사랑을 한 번에 얻으니
정말 제가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 시어머니는 아들이 셋이 있으시지만 손수 진지를 해 드십니다.
윗 동서는 없고 아랫 동서는 멀리 인천에 살기에 중간인 저는
가까이 살고 있어도 제 자신이 무용지물처럼 느껴지기만 합니다.
작년 추석 저와 신랑은 계량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인사를 갔었지만 어머니 집에 들어가려면 계단을 올라가야 해서
전동 휠체어에 앉아 마당에서 인사만 드리고 왔습니다.
며칠 후 가슴 뭉클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 명절이라고 왔는데 밥 한 끼 못 차려 먹인 것이 가슴 아프구나.
내가 힘만 있어도 너를 업고 들어갔을 텐데... ] 라고 하신
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제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금년 설 명절에는 집 뒤편을 돌아 아주버님 방을
전동 휠체어로 지나쳐 어머니 집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흙 묻은 바퀴 때문에 방에 들어가기가 죄송했지만
오히려 어머니는 이 못난 며느리를 반기셨습니다.
꾸부정한 허리로 주방에서 일하시는 어머니를 보고 있자니
염치없는 마음과 감사함이 엇갈렸습니다.
자식들이 많아 속 썩으셔도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시는
인자하신 우리 어머니, 저는 예수님 닮은 우리 어머니를 꼭 닮고 싶습니다.
우리도 주변에서 닮고 싶어 하는 신앙의 사람되시기 바랍니다.

스데반을 통하여 민간에 큰 기사와 표적이 나타나니
헬라파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에서 큰 변론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능히 당치 못하더라고 합니다.
왜? 사람들이 스데반과 변론을 할 때 능히 당치못했겠습니까?

9절 말씀을 먼저 보세요
[ 리버디노,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이라는 각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으로 더불어 변론할새 ]
여기에 <리버디노>란 말이 나오는데 이 사람들은 본래 유대인이었으나 B.C. 53년 폼페이(Pompeii)가 시리아전쟁을 하면서
유대 땅을 토벌할 때 로마에 노예로 팔려갔던 사람들입니다.
그후 그들은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후19년에 로마에서 추방당하자
그중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와서 회당을 건축하였습니다.회당이란 유대인들의 예배와 교육의 센터를 말하지요.
그들의 회당을
'해방된 자의 회당(Synagogue of Libertine)'이라고 불렀습니다.
해방된 자의 회당은 오늘날로 말하면
< 구원받은 성도의 교회 >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리버디노, 즉 해방자들. 나라를 빼앗기고 노예가 되었던 그들,
그러나 다시 해방되었을 때 그들은 그 해방을 감사하면서
해방자들이라고 불리며 해방자의 회당을 건설하여
그곳에서 예배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해방을 얻었으나 참된 해방을 아직 얻지 못했습니다.
본문 9절에 나오는 이 리버디노, 즉 리베르틴들,
해방자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스데반의 전도를 들을 때 변론하면서 대적했습니다. 결국 스데반을 핍박하고 죽이는 일에 함께 동참하는 사람들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참된 해방을 얻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백성이라고 자처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몰랐고 더구나 성령의 은혜를 몰랐습니다.
그러니 자연적으로 저들이 붙들고 있는 전통 때문에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스데반과 변론하지만 당하지 못하고
스데반을 시기하고 죽이는 일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교회 안에도 교회는 나오지만 진정한 자유함을 얻지 못한 교인들
혹 종교적 열정은 있어도 성령의 은혜를 받지 못하면
복음전파에 방해를 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은 전통을 붙들고 있는 자가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자가 승리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스데반과의 변론을 당하지 못하는 리버디노들
이론으로 안되니 시기와 모함을 하게 됩니다. 어떻게 스데반을 모함합니까?

[ 사람들을 가르쳐 말시키되 이 사람이 모세와 및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 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가로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스려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
리버디노와 같은 해외로부터 귀환한 유대인들이 세운 회당에서,
어떤 사람들과 스데반 사이에 신앙 논쟁이 붙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구세주 되심을 부인하는
리버디노와 같은 유대인들임은 두말 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들이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스데반을 이길 수 없음을 깨닫자,
그들은 마치 스데반이 하나님을 모독한 것처럼
사람을 내세워 모함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단 신성모독으로 판정이 나기만 하면 합법적으로 죽여버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백성과 장로 그리고 서기관들을 충동질하여
스데반을 끌어다가 산헤드린 공회 재판정에 세웠습니다.
초대교회의 등장으로 자신들의 종교적 기득권이 침해될까 우려한
유대교의 장로와 서기관들이 사도를 비롯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해 왔음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을 죽이고자 끌어오는 데에는,
이번에는 백성들까지 가담하였습니다.
주님을 부인하는 자들이 백성들마저 충동질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 속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공회나 대중의 지지를 받아야 우리의 신앙이 인정 받는 것 같지만
반드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도리어 공회와 대중이 하나님의 역사에 방해를 놓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도대체 그들이 어떤 식으로 충동질했기에 백성들이 그런 일에 가담케 되었는지는, 그들이 세운 거짓 증인들의 거짓 증언 내용이 밝혀주고 있습니다.

거짓 증인들은 스데반이, 14절에
[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헐어버릴 것이라 ] 설교했다는 위증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로 인하여 백성들은 스데반을 죽이려할 정도로 충동질을 당하였습니다. 백성이란 익명의 절대다수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왜 절대다수인 그들이 성전을 헐어버린다는 말을 듣고서 그토록 분개했겠습니까?
그들이 모두 깊은 신앙을 지녔기에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으로 그렇게 했겠습니까? 물론 그들이 모두 유대인일진대,
적어도 명목상으로는 그들 역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자 하나님을 못박아 죽일 정도로
실은 하나님과 무관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소수의 충동질에 의해 신실한 하나님의 종인 스데반을 집단적으로 죽이려 한 이유는 전혀 다른 데 있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예루살렘을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지순례 차 이스라엘을 여행하면서 예루살렘에 들어가 보면
예수님과 관련된 유적지 부근은, 대부분 오래 전부터
그곳에서 살아온 아랍인들의 가게가 차지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만약 아직까지 유대교를 신봉하면서
예수님의 구원자 되심을 부정하고 있는 이스라엘 정부가,
예루살렘 내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유적지를 모두 폐쇄하거나 헐어버리려 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전세계적으로 격렬하게 반대하고 나설 기독교인을 제외하고,
예루살렘 내에 살고 있는 사람 가운데 이스라엘 정부의 그 같은 결정에 가장 크게 반발할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이겠습니까?
두말 할 것도 없이 아랍상인들일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요. 구세주이심을 믿어서이겠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 지는 그들의 안중에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단지 자신들의 돈벌이를 위해 반발할 것입니다. 기독교 유적지가 폐쇄되면 매년
이스라엘을 찾는 수백만 명의 성지 순례객들의 발길이 끊어질 것이고, 그로 인해 타격 받을 자신의 돈주머니로 인해
그들은 이스라엘 정부에 격렬하게 대항하고 나설 것입니다.
2천 년 전의 상황도 똑 같았습니다.
이스라엘 전역에 퍼져 사는 남자들은 일년에 의무적으로 세 번은
반드시 예루살렘 성전을 참배하고 제사를 드려야만 했습니다.
게다가 세계 각처에 흩어져 살던 디아스포라 유대인에게도
예루살렘 성전 순례는 신성한 의무였습니다.
따라서 매년 수백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찾아
그곳에 머물면서, 소나 양을 잡아 제사를 드리기 위해
지출하는 경비는 실로 엄청난 금액이었고,
그것은 고스란히 예루살렘 사람들의 가장 중요한 수입원이 되었습니다. 간단히 말해 예루살렘 사람 대부분이 예루살렘 성전 덕에 먹고사는 셈입니다. 이것이, 예수가 성전을 헐어버릴 것이라고 스데반이 말했다는
소수의 거짓 소문에 절대다수의 백성들이 그토록 충동 당한 이유였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돈주머니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예루살렘 성전이 없어져버린다면,
경제적 손실이 막대할 것임이 불을 보듯 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함하여 공회 앞에 세우고 거짓 증인을 내세워 모함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데반이 거짓 증인들에 의해 모함을 당할 때
그 모습이 어떠했는가 하면

15절 [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 고 합니다.
공회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았을 것입니다.
[ 스데반이 열 받을 건데 어떻게 나올 건가?
어떤 반응과 표정을 보일까? ] 모두 궁금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의외의 놀라운 일이 법정 안에 일어납니다.
분노를 떨어야 하고 창백해져야 하고 겁에 질린 얼굴이어야 하는데
되려 천사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죄를 짓고도 자기가 억울하다고
법정 소란을 피우고 오리발을 내밀며 악을 씁니다만
그러나 스데반은 경우도 다를 뿐만이 아니라
모함을 당하고 거짓 증인들이 득세를 하는데도
그의 얼굴에는 상상할 수 없는 천사의 얼굴이 빛나고 있습니다.

누가가 사도행전을 기록하면서
왜 천사의 얼굴과 같았더라 고 기록했을까요?
천사의 얼굴이 모델이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천사의 얼굴과 같다는 말은
하나님이 함께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니
사람들 보기에 천사의 얼굴과 같아 보인 것입니다.
그리고 누가가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고 주석함으로써 스데반의 평온함과 담대함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일 가족 여러분
우리도 어떤 형편 가운데서도 아무리 억울한 일 당한다 해도
오늘 이 장면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얼굴이 되게 하소서 !
평온함과 담대함을 잃지 않게 하소서 ~!

이렇게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 같았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떻게 모함 속에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을 수 있습니까?
우리의 영혼이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께 집중할 때
우리는 언제나 천사와 같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형편없는 존재일지라도
우리가 집중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위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순간이라도 주님을 외면할 때
우리는 곧 악마의 모습으로 전락해버리고 맙니다.
주님께로부터 천국의 열쇠를 주리라는 극찬을 받은 직후에
주님에 의해 사단으로 매도당한 베드로를 굳이 들것도 없습니다.
우리 각자가 이미 이에 대한 증인들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의 영혼을 주님께 집중할 때와 반대로 주님을 외면할 때,
그에 따라 우리 자신이 얼마나 무섭게 돌변하는지
우리 자신이 그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끝까지 주님을 향해 집중하므로
죽음의 순간에서까지 천사의 얼굴을 잃지 않았던 스데반이라 할지라도, 주님을 향해 집중하기 이전에 그의 삶이란,
악마 같은 표정의 무리들과 본질적으로 무슨 차이가 있었겠습니까? 반면에 악마처럼 스데반을 돌로 쳐죽이는 무리라 할지언정 <9>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향해 집중하기만 하면,
어찌 스데반처럼 그 삶이 천사와 같이 승화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스데반을 돌로 쳐죽이는 바로 이 현장에서 스데반 죽이기에 앞장섰던 악마와 같은 표정의 청년 사울도
그는 그 이후 주님께 자신의 온 삶을 집중하므로
천사와도 같은 위대한 사도 바울이 되었음을 행9:에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군사 전문가에 의하면,
전쟁에 참전한 군인 중에 정면을 집중하며 총을 쏠 수 있는 군인이
전체 군인의 10%만 되면 그 전쟁은 승리가 보장된다고 합니다.
이 말은 영화의 화면과는 달리 실제 전장에서는,
거의 모든 군인이 정확하게 앞을 보지 않고
그냥 총을 쏘아대기만 한다는 의미입니다.
전쟁이란 결코 영화가 아니지 않습니까?
빗발치듯하는 총탄 속에서 아차 하면 목숨이 날아 가버리지 않습니까?
단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이 말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얼마나 무서우면 정면을 바로 보지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이기기 위해서는 도대체 앞에 무엇이 있는지,
적군이 어디에 있는지, 정면을 향해 집중해야만 합니다.
전방을 집중하지 않고 이기는 방법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신앙도 이와 똑 같습니다. 정면으로 주님을 향해 집중하며 살아가는 자가 10%만 있으면 이 세상은 넉넉하게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돈지갑을 아버지로 삼아
돈지갑에만 집중하는 다수가 아닌,
하나님을 아버지로 삼고
하나님께 집중하는 소수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이 바로 그 좋은 예입니다.
악마의 표정을 한 절대다수가 아니라,
혼자지만 천사와 같이 끝까지 하나님께만 집중한
스데반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는 펼쳐나갑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스데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핵심이 무엇이겠습니까?

스데반이 내면의 성령의 충만함이 그의 얼굴을 타고 나타났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지 못하지만 성도를 통해서
예수님의 얼굴을 보려합니다.
우리의 신앙인격이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이 충만해서
우리의 얼굴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하심이 반사되어 지길 바랍니다

스코틀랜드의 유명한 신학자 중의 한 사람인 <제이니> 박사는
그가 가르치는 학생들이 그가 매일 천국에 갔다오는 줄 알 정도로
늘 행복한 얼굴빛을 한 매우 경건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가 어떻게 날마다 행복해 보이는지 그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어느 날 그는 학생들에게 그리스도인의 기쁨을 설명하면서
[ 기쁨이라는 것은 하나의 깃발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에 깃발이 나부낄 때는 왕이 성에 계시다는 것을 나타내듯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기쁨은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표시입니다 ]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얼굴에는 항상 평온함과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평온함과 기쁨은 내 속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표식이요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받게 되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넘치게 되는
천상의 평온함과 기쁨인줄 믿습니다.
이 평온함과 기쁨을 소유한 자들이 되어
우리도 닮고 싶은 얼굴의 소유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