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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일편단심 민들레가 되십시오 (대하 16: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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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한규 목사

< 마지막까지 성공해야 합니다 >

서울의 한 교회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한 경찰서장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분이 경찰병원의 과장으로 발령받았습니다. 일의 성격상 거의 좌천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일을 당하고 그분은 낙심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이렇게 충성했는데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합니까? 하나님은 정말 살아 계십니까?”

결국 이분은 교회를 떠났습니다. 목사님의 위로도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한달쯤 지났을 때 그분이 ‘좌천 감사헌금’ 100만원을 들고 목사님을 찾아와 말했습니다. “목사님! 면목이 없습니다. 저번에 저는 좌천된 줄 알았는데, 하나님은 그 일을 통해 저를 살려주셨습니다.” 알고 보니까 그분이 전에 있던 경찰서 지역에 탈옥수 신창원이 나타났는데, 그 신창원을 잡지 못해서 후임 경찰서장이 파면을 당하고 자신은 보직 변경으로 파면을 면한 것입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좌천할 때도 있고, 실패할 때도 있습니다. 그때도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는 줄 믿고 감사해야 합니다. 물론 성도는 신이 아닙니다. 어려움이 심하면 신앙이 흔들릴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시인의 말대로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있습니까? 가끔 우리의 신앙이 흔들릴 때도 있지만 주님을 향한 우리의 깊은 속마음은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일편단심 민들레처럼 충성심이 변함없는 성도를 가장 기뻐하십니다. 삶에서 처음도 중요하고, 과정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마지막입니다. 처음 성공하고 마지막에 실패하는 것보다 처음 실패해도 마지막에 성공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는 충성을 포기해서 처음 된 자로서 나중 된 자가 되지 말고, 끝까지 충성해서 나중 된 자로서 처음 된 자가 되어야 합니다.

< 아사 왕의 처음 성공과 마지막 실패 >

오늘 본문은 끝까지 충성하는 삶의 중요성을 잘 말해주는 본문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아사 왕은 역대하 14-15장을 보면 총 41년간 왕으로 있었는데 초기 35년 동안은 훌륭하게 통치를 잘했습니다.

재위 10년쯤 되었을 때, 아사 왕은 우상숭배의 단을 훼파하는 1차 종교개혁을 일으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나라에 몇 년 동안 평안을 주셨습니다. 그 후 구스(에티오피아)의 세라 왕이 100만 대군과 병거 300승을 몰고 쳐들어왔습니다. 그때 아사 왕은 기도로 그 대군을 물리치면서(대하 14:9-15) 하나님의 은혜를 확실히 체험했고, 은혜가 아주 충만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 즈음에 선지자 아사랴를 통해서 “오직 하나님만 섬기라!”는 말씀을 듣고(대하 15:1-7), 아사 왕 15년에 2차 대규모 종교개혁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우상을 없애고, 제단을 수리하고, 우상숭배 하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죽이기로 언약을 갱신하고(12절), 심지어는 자신의 어머니 마아가가 우상숭배를 하자 태후의 위까지 폐위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아사 왕 35년까지 20년 동안 태평성대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20년 동안 태평성대가 문제였습니다. 점차 아사의 신앙은 약해졌습니다. 만사형통할 때 더 기도하고, 더 겸손해야 하는데 그는 하나님을 멀리했습니다. 신앙을 멀리하자 곧 큰 환난과 기도제목이 생겼습니다. 즉 아사 왕 36년에 북 이스라엘의 바아사 왕이 침략해 예루살렘 북쪽에 라마를 건축하며 나라의 중요한 길목을 막고 유다를 압박한 것입니다.

옛날에 그런 일이 벌어졌으면 그는 즉시 하나님께 기도부터 했겠지만 믿음이 약해지니까 그는 이방 왕을 의지하는 인간적인 방법을 썼습니다. 그래서 성전 곳간과 왕궁 곳간의 은금을 취해 아람 왕 벤하닷에게 뇌물을 주고 뒤에서 북 이스라엘을 치도록 부탁했습니다. 그래서 아람 왕 벤하닷은 이스라엘의 후미 몇 개의 성을 쳤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바아사 왕은 라마 건축을 그만두고 후퇴했고, 아사 왕은 바아사 왕이 후퇴하며 남긴 건축 재료로 게바와 미스바를 건축했습니다(대하 16:1-6).

겉으로 보면 아사의 치밀한 전략으로 인한 승리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인간적인 방법을 결코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특별히 아람 왕 벤하닷의 원조를 받으려고 성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금을 조공으로 바친 행위는 치욕적인 행위였습니다. 구스 왕의 백만 대군을 물리칠 때의 웅대하고 멋있는 신앙은 이미 사라진 상태였습니다.

<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신앙 >

그 아사 왕의 모습을 보고 한탄한 한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 9절에 나오는 하나니입니다. 하나니는 아사 왕에게 나와서 말했습니다. “왕이여! 왕은 구스 대군과 싸울 때도 믿음으로 이겼는데 지금은 아람 왕을 의지하면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이제 왕의 망령으로 앞으로 전쟁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 얘기를 듣고 아사 왕은 진노해서 하나니를 비롯해서 그의 동조자 몇 사람을 옥에 가두었습니다. 믿음을 잃어버리자 귀까지 막힌 것입니다. 또한 재위 39년에는 심한 병에 들었어도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의사만 찾다가 결국 재위 41년에 죽게 됩니다(11-14절). 결국 그는 신앙으로 시작했다가 육신으로 마치게 되었습니다. 이 아사 왕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어떤 신앙을 원하는지 몇 가지 교훈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신앙을 원하십니까?

1. 갱신의 신앙

아사 왕이 제 1차 신앙 갱신에 나서자 하나님은 유다에 몇 년간의 평화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구스 왕의 백만 대군을 물리친 후에 2차 신앙 갱신을 하자 하나님은 유다에 장기간의 평화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신앙갱신에 나설 때 환경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우리는 이런 은혜 체험을 많이 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저에게 있는 이 약점을 고쳐보겠습니다.”하고 힘써 실천하면 신기하게도 무엇인가 깨진 부분이 복원되고, 막힌 부분이 뚫리고, 병든 부분이 고쳐집니다. “하나님! 제가 꼭 끊어야 할 이것을 끊겠습니다”라고 각오하고 그것을 끊으면 그동안 자신을 얽매었던 사슬도 신기하게 끊어집니다. 그것이 바로 갱신의 축복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시면 나태하게 되지 말고 그때에도 끊임없이 신앙을 갱신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축복이 지속적으로 우리 곁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만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면 역사는 일어날 것입니다. 구스의 백만 대군을 물리치듯이 우리도 각종 문제를 물리치고 하나님의 가장 복된 존재가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온갖 우상을 철폐하며 우리의 신앙을 날마다 새롭게 갱신하는 것입니다.

요즘 시대에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변화입니다. 변화되지 말아야 할 것은 변화되지 말아야 하지만 변화되어야 할 것은 변화되어야 합니다. 끊임없는 배움을 통해 자신을 갱신시켜야 합니다. 지금은 학력 사회가 아니고 실력사회입니다. 옛날에는 한번 좋은 대학을 나왔다는 기록만으로, 한번 고시에 합격한 것으로, 한번 취득한 자격증으로 평생을 먹고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무한경쟁시대가 되었기 때문에 끊임없이 배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새 왜 부흥회와 간증집회의 열기가 식었습니까? 요새는 인터넷만 딱 치면 그분이 했던 집회가 그대로 동영상에 뜹니다. 10년 전이나 5년 전이나 가는 곳마다 비슷한 얘기를 하는데 누가 거기에서 새로운 감동을 얻겠습니까?

성령님은 날마다 새로운 말씀을 주시고, 날마다 새로운 체험을 주시는 분입니다. 과거의 한번 했던 체험으로 인생 전체의 승부를 내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과거에 교통사고로 거의 죽었다가 살아난 체험을 해도 현재의 은혜 체험이 없으면 공허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한 것입니다(고전 15:31).

현재의 나에게는 현재의 새로운 은혜 체험이 필요합니다. 고인 물은 썩기가 쉽습니다. 계속 말씀을 접하지 않으면 나태하게 될 수 있고, 계속 헌신하지 않으면 신앙이 후퇴할 수 있습니다. 끊임없이 갱신하지 않으면 처음 된 자가 나중 되고, 끊임없이 갱신하면 나중 된 자가 처음 될 것입니다.

2. 귀가 열린 신앙

선지자 하나니가 책망의 말을 하자 아사 왕은 크게 노해 하나니를 옥에 가두었습니다. 왕이 그 말을 듣고 기분이 나쁜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래도 평소에 충성스런 선지자가 전하는 바른 말이라면 아사 왕은 그 말을 듣고 회개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사 왕은 신앙을 잃어버리니까 귀까지 닫혔습니다. 그처럼 하나님 말씀에 귀가 막히면 사람 말에도 귀가 막히게 됩니다.

역사를 살펴보면 왕들의 비참한 말로는 대개 귀가 막히는 것부터 시작됩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는 타락하는 왕에게 마지막으로 회개를 촉구하는 최후의 사자를 보냅니다. 그 최후의 사자는 왕이 그때까지 가장 신임하고 헌신하던 측근의 신하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왕은 다른 사람의 말은 듣지 않아도 그 사람 말만은 들어야 합니다. 그때 회개하면 그 왕은 대개 성군이 됩니다.

왜 다윗이 성군이 되었습니까? 밧세바 사건으로 인한 간음과 살인죄에 대해서 나단 선지자가 책망했을 때 “아니, 왕을 이렇게 모욕해! 도대체 왕을 뭐로 알아!”라고 하면서 나단 선지자를 옥에 가두지 않고 눈물로 회개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아사 왕도 하나니 선지자의 말을 듣고 자신의 잘못을 회개했다면 다윗 왕처럼 성군이 되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누구나 한때는 잘못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사 왕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이 장면을 보면 하나님 관계가 잘못되면 사람관계도 잘못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 관계는 사람 관계의 증거이고, 사람 관계는 하나님 관계의 증거입니다. 그처럼 사람 관계가 막힌 사람은 대개 하나님 관계도 막혀 있고, 하나님 관계가 막힌 사람은 대개 사람 관계도 막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열린 마음과 열린 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특별히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았다는 것은 예배에 대한 감격이 사라지고 더 이상 하나님 말씀이 잘 은혜롭게 들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무서운 징조는 말씀의 단맛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잘못된 마음을 가지면 말씀을 많이 아는 것이 오히려 문제가 됩니다. 가끔 자신이 아는 예화가 나오고, 자신에게 익숙한 성경 본문이 나오면 말씀이 시시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때 시시하게 들으면 동시에 은혜의 문은 닫히고 그때에도 진지하게 들으면 동시에 은혜의 문도 열립니다. 그런 의미에서 목회자가 같은 목회자의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는다는 것은 보통 축복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도 다른 분들의 설교를 들을 때는 항상 마음을 열고 듣습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은혜의 첫 걸음은 말씀에 귀가 열리는 것입니다. 귀가 막히면 잎만 무성한 열매 없는 신앙이 될 수 있습니다. 만약 말씀에 대한 감격과 기쁨이 없다면 다시 한번 하나님께서 첫 사랑과 열린 귀를 회복시켜 달라고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요새 가장 큰 문제는 무엇입니까?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말씀을 덮어놓고 받아들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베뢰아 교인들처럼 “정말 그런가?”하고 성경을 펴놓고 말씀을 가려듣는 진지한 구도자의 자세는 필요합니다.

문제는 말씀을 자기의 생각으로 판단하고 듣지 않으려는 자세입니다. 대개 보면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 사람이 남이 자기 말을 듣지 않는다고 불평합니다. 자녀들을 키울 때나 주일학교 아이들을 관찰해 보면 여지없습니다. 친구나 선생님 말을 잘 듣지 않는 아이가 오히려 남이 자기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오해도 잘하고 상처도 잘 받습니다.

결국 “어떤 사람이 축복 받느냐? 아니면 버림 받느냐?”의 차이는 “귀가 열려 있느냐? 아니면 닫혀 있느냐?”의 차이로 귀결됩니다. 성공한 사람은 “내가 이렇게 성공했다!”는 거드름으로 귀가 닫힐 수도 있고, 실패한 사람은 “내가 이렇게 실패했다고 우습게보나?”하는 자존심으로 귀가 닫힐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성공한 사람은 교만한 사람이고, 실패한 사람은 겸손한 사람인 줄 압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실패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공한 사람 중에도 겸손한 사람이 많고, 실패한 사람 중에도 교만한 사람이 많습니다. 교만은 성공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교만은 인격과 관련이 있고, 신앙과 관련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공해도 겸손하게 말씀을 잘 받고, 실패해도 겸손하게 말씀을 잘 받는 것입니다. 귀가 열리면 축복의 문도 열립니다. 반면에 귀가 막히면 고통의 문이 열립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 중의 하나가 충고를 달게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 일을 잘하면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있게 될 것입니다.

3. 일편단심의 신앙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아사 왕처럼 은혜로 시작했다가 육신으로 마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요즘 많은 교회들이 세습으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또한 많은 교회들이 전임 목사님의 퇴임 후에 생기는 문제로 전임 목사님 파와 후임 목사님 파가 싸워서 수많은 교인들이 졸지에 원수가 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은혜로 시작했다가 육신으로 마치는 안타까운 모습들입니다. 은혜로 시작했으면 끝까지 은혜로 마쳐야 합니다.

선지자 하나니는 은혜로 시작했다가 육신으로 마쳐가는 아사 왕을 책망할 때 본문 9절에서 말했습니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행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 구절에서 ‘전심으로’라는 말에는 3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는 ‘최선을 다해서’라는 뜻입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최선을 다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성공도 중요하지만 그 성공을 지키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만하면 됐다!”라고 하지 말고 현재의 그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특별히 자기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성도는 교회 일에도 충성해야 하지만 교회 밖의 일에도 충성해야 합니다. 성도는 가정생활, 교회생활, 일터생활의 삼위일체가 다 좋아야 합니다.

둘째는 ‘집중해서’라는 뜻입니다. 옛날에 한 기업가가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는 표어를 내걸고 사업을 했습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정말 할 일도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다 하려고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지금은 전문가를 요구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자기가 남보다 잘할 수 있는 일과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에 집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더욱 필요한 표어는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지만 중요한 일에 집중하자!”라는 표어입니다. 하고 싶은 일에 다 손을 대면 결국 실패하게 됩니다.

셋째, ‘일편단심으로’라는 뜻입니다. 공동 번역에서는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야훼께서는 당신께 일편단심인 사람에게 용기를 주시려고 온 나라를 두루 살피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일편단심으로 하나님만을 섬기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대개 보면 일편단심으로 하나님을 섬긴 사람들이 결국 최후에 축복받는 자가 되고 최후의 승자가 됩니다. 특별히 일편단심 민들레처럼 충성하는 사람이 되려면 무엇보다 긍정적인 시야를 가져야 합니다.

저는 편식을 하는 편입니다. 그러면 어떤 분은 “우리 목사님은 입맛이 까다롭다!”고 합니다. 저는 편식은 하지만 음식으로 불평해본 적은 결혼 13년 동안 한번도 없었습니다. 오뎅국 한 냄비를 해 놓고 3일 동안 똑같이 주어도 맛있게 잘 먹습니다. 김치찌개 한 냄비 해놓고 3일 동안 똑같이 주어도 맛있게 잘 먹습니다. 미국에서 공부할 때는 4년 동안 닭튀김과 볶음밥을 주식으로 삼고 버텼습니다.

그러면 “우리 목사님은 까다롭다!”라고 말하기보다는 “우리 목사님은 싼 것도 잘 먹는다! 반찬이 없어도 잘 먹는다! 편하다!”라고 말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제가 아내에게 식사하면서 가끔 하는 말이 있습니다. 반찬 가짓수를 줄이라는 말입니다. 보통 새롭게 3가지를 해줍니다. 그러면 아이들 먹는 것도 다르니까 최소한 5가지 이상 반찬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2가지만 해주면 좋겠는데 보통 3가지를 새롭게 해주니까 항상 미안합니다. 그래서 가끔 반찬 수를 줄이라고 하니까 요새는 정말 2가지만 해줄 때가 많습니다. 그래도 맛있게 잘 먹습니다.

사실 편식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반찬 투정하고, 까다롭게 구는 것이 아니라면 좋게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목사님은 한 가지만 찾으면 끝까지 찾아! 뭐든지 한 가지 했다고 하면 끝까지 해! 새로운 것만 찾지 않고 기존 것에 충성을 잘하셔!” 그렇게 생각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무엇이든지 한 가지에 끝까지 충성하는 사람이 보기가 좋습니다. 선교사님을 위해서도 한번 후원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기도하고 후원하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저는 그런 편식은 있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요새는 갖가지 우상숭배와 갖가지 기복주의의 반찬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문제에 있어서만은 “오직 예수!”하고 절대 편식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보다 일편단심 민들레와 같은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 일편단심 민들레가 되십시오 >

어떻게 우리는 일편단심을 가질 수 있습니까? 어느 곳에든지 오래 있다 오면 약점이 보입니다. 어떤 배우자든지 오래 살다 보면 약점이 보입니다. 그때 그 약점을 창조적인 관점으로, 긍정적인 관점으로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 한 가지, 일편단심으로 충성하려면 자신의 충성을 잊어버려야 합니다. “내가 이만큼 충성하는데.... 내가 이만큼 중요한데...”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어디에 가든지 최대한으로 기여하고 최소한으로 기대해야 합니다. 알을 하나 놓고 온 동네가 시끄럽도록 “꼬끼요!”하는 암탉과 같은 성도가 되지 말고, 백 가지 일을 잘하고도 묵묵히 충성하는 황소와 같은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사실 자기를 드러내는 것보다 자기를 감추는 것이 더 복된 일이고, 더 행복한 일이고, 더 신나는 일입니다. 춘향전에서 이도령이 과거에 장원급제해서 바로 사또에게 와서 마패를 들이밀지 않고 마패를 숨기고 실패한 사람처럼 행세할 때 얼마나 신나겠습니까? 자기 안에 권세가 있어도 잠시 그것을 감추는 것은 더 신나는 일입니다.

선교를 위해서 최대한 헌신해도 은밀하게 하면 그 헌신이 자신에게는 영적인 마패가 됩니다. 지난주에 한분이 몽골 선교차량을 위해 은밀하게 헌신했습니다. 우리 선교 팀이 그 일로 얼마나 큰 격려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조용히 헌신한 사람은 그 일을 생각할 때마다 영적인 마패로 생각하고 얼마나 흐뭇하고 신나겠습니까? 결국 행복은 조용히 헌신하는 사람의 것이고,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누구보다 축복하실 것입니다.

이천년 전,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는 겨울이었습니다. 더욱이 베들레헴은 해발 600m의 고산지대에 있기 때문에 한밤중에 목자들이 양을 지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목자들은 성전에 바쳐질 희생양(제물)을 돌보면서 들판에서 밤을 새웠습니다. 그처럼 묵묵히 충성했기에 그 많은 쟁쟁한 유대인들 중에서 목자들이 최초로 구주 탄생의 복음을 듣게 된 것입니다.

묵묵히 충성하면 어디선가 복된 소식이 들려질 것입니다. 생각지도 않게 사업 파트너가 “거래하자!”고 전화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때로 어려운 일이 있어도 충성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그때 내가 충성스런 사람임을 증명해야 합니다.

누가 복된 사람입니까? 교회 부흥기에 교회를 찾아 재밌게 즐기는 사람보다 교회 침체기에 교회를 지키고 기필코 교회를 일으키는 사람이 훨씬 복된 사람입니다. 성도는 어떤 경우에도 인간적인 목적에 의해 움직이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따라 움직여야 합니다.

형통한 날에 충성을 과시하는 것은 충성이 아닙니다. 고난 중에서 묵묵히 섬기는 것이 진짜 충성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재미로 다니지 말고 의미로 다녀야 합니다. 예배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심지어는 교회에 내 고정 좌석까지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예배가 다 끝나고 아무도 없을 때 목회자는 그 자리만 바라봐도 기분이 너무 좋습니다. 그런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옛날에 한 목사님이 경북 봉화에서 부흥회를 했습니다. 그런데 집회 때에 한분이 분명 눈은 떴는데 코를 골고 있었습니다. 너무 이상해서 가까이 가서 보니 눈 사이에 성냥개비를 받쳐 놓고 졸고 있었습니다. 너무 기가 막혀서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집사님! 집사님은 눈에 기둥을 받쳐놓았으니까 기둥 집사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나중에 진짜 그 교회의 기둥 집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졸려도 예배에 나와야 합니다.

미국 텍사스의 한 한인교회에서는 한분이 예배에 참석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졸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찬송 중에 너무 심하게 하품하다가 그만 턱이 빠졌습니다. 그때 한 전직 레슬링 선수가 그 턱을 붙여주었는데, 그분도 나중에 은혜 받아 교회의 큰 일꾼이 되었다고 합니다. 밤을 새워 졸려도 예배에 참석해야 합니다. 꾸준히 예배에 참석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런 분도 큰 은혜를 주시고 큰 일꾼으로 만드실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일편단심으로 좋은 일을 고수하는 것입니다. 힘들어도 일편단심으로 충성하고, 누가 시기해도 일편단심으로 충성하고, 누가 오해해도 일편단심으로 충성해야 합니다.

오늘날 성도들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입니까? 후반전이 약한 것이 문제입니다. 가난할 때는 기도도 많이 했고 어려울 때는 충성도 많이 했는데, 오히려 조금 살게 되니까 불평하고 원망하고 판단해서 결국 아사 왕처럼 되는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충성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독실한 존재는 오직 한 마음을 품고 결국 하나님의 축복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지금 하나님은 지금도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 전심으로 하나님을 추구하는 일편단심 민들레를 찾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해서 지금보다 더욱 충성함으로 축복받는 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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