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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를 믿는다는 것의 의미 (눅 7: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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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최종천 목사
 
우리 삶의 모든 일들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하는 시구가 있는 것처럼 때때로 우리 삶은 마치 우리를 속이는 것처럼 마음에 원하는 것과 정반대 방향으로 흘러갈 때가 있습니다.

어제 저녁에 많은 비가 내렸습니다. 물론 지금은 이렇게 날씨가 개었지만 오늘 주일까지도 비가 내린다는 예보까지 있었습니다. 마음속에 참 갑갑한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마음에 드는 생각이 있으니 하나님께서 비가 옴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역사하시나 보자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즉 우리의 삶의 일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에 대해서 우리는 기대할 수 있음을 생각합니다. 우리의 삶의 상황과 그것이 과정으로 이루어져 최종적인 결과에 이르게 되는 길은 언제나 같지 않습니다. 맑은 날을 원했지만 비가 오고 흐린 날이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흐린 날이 되고 비가 오는 날이 되어도 맑은 날보다 기도했던 더 큰일을 이룰 수도 있는 것이 우리 인생의 일입니다.
따라서 우리 인생에서 주어지는 어떤 상황과 상황을 과정 삼아 이루어지는 결과라는 것은 전혀 다를 수 있으니 우리는 현재 내게 주어지는 어떤 일에 우리는 낙심하거나 낙망할 필요는 없다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보통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어떤 우연한 기회에, 우리들의 생각에 우연한 기회 즉 예기치 않았던 어떤 순간 예수님을 만나기도 합니다. 또 때로는 눈물과 고통과 아픔과 시련 끝에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생의 우연이나 한계라는 것이 결국 우리들에게 있어서 주 예수를 만나게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우리에게 축복이요 은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어떤 아픔과 고통보다도 더 큰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기회가 되면 그것을 통해서 우리의 모든 고통과 슬픔들이 일거에 우리들에게 씻겨져 나가고 하나님의 더 큰 은혜를 체험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게 되면 나인이라고 하는 성에 과부 여인이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그야말로 고대 사회가 그러하듯이 과부 여인으로서 참 어려운 삶을 살게 됩니다. 성경을 보면 구약 성경에 특별히 배려해야 될 사회적인 약자가 있습니다. 누구냐 하면 고아, 과부, 객, 나그네 그리고 외국 사람 이방인들이었습니다.
즉 이와 같이 보호 받아야 될 약자로서 그들이 표현된 것을 보니 그들에게 있어서 이와 같은 과부라는 직책은 상당히 쉽지 않은 직책이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과 같이 인권이 보장된 시대도 아니고 경제적으로 심히 어려운 상태 속에 있었고 뿐만 아니라 이러저러한 여러 가지 일로 말미암아 큰 슬픔이 있는 이와 같은 사람이 바로 그 당시의 과부였습니다. 물론 요즘은 옛날과는 달라서 지금은 얼마든지 또 여러 가지 유족한 삶을 하나님의 은혜의 기쁨으로 살 수 있지만 그 당시는 지금과 달랐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과부 여인에게 유일한 소망이 되는 아들이 한사람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그만 세상을 떠나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남편 잃어 고통 속에 빠졌는데 사랑하는 아들까지 잃어버리게 되니 얼마나 큰 고통과 아픔 속에 수많은 눈물과 마음속에 끓어오르는 회한을 그가 견딜 수 있겠습니까? 그는 눈물로 그 아들의 장례행렬을 쫓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눈물로 쫓아가는 장례행렬에 예수님과 그 제자들의 행렬이 스쳐 지나가게 됩니다.
말하자면 죽음의 행렬과 예수님이 이끄는 생명의 행렬이 마주치게 됩니다. 거기서 우리 예수님은 이 장례행렬의 내용을 파악하십니다. 그리고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울지 말라 울지 말라”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시체인 청년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마침내 죽어 시체 된 이 청년이 일어나 앉아 말을 하게 되고 예수님께서 그 청년을 어미에게 돌려보내게 됩니다. 그때 마침내 하나님의 영광이 선포되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고 예수의 소문이 온 유대에 퍼지게 되는 내용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우리는 이 장면을 통해서 도대체 우리가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들에게 무엇을 깨닫게 해주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성경을 보면서 느끼게 되는 것은 인생은 누구나 할 것 없이 극한의 슬픔과 고통의 상황에 놓여 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든지 행복을 추구합니다. 일찍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도 또 때로는 남에게 싫은 소리를 하고 또 싫은 소리를 듣기고 하고 또 가슴 아파하며 때때로는 본의 아니게 남을 속이기도 하는 이와 같은 가슴 아픈 일까지도 하면서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행복이라는 것을 추구하기 위하여서 심한 자책에 빠지면서까지 살아가는 것이 미흡한 인생의 길입니다.

씨 뿌리는 농부의 마음, 공부하는 학생의 마음, 일하는 사람들의 마음, 모두가 행복을 꿈꾸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행복에 대한 꿈을 잃어버릴 때 사람들은 무기력하게 쓰러져 가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런 수고의 의욕을 느끼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행복이란 우리 마음의 의도와는 달리 우리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모습으로 다가오지 않아 우리 마음을 상심할 때가 있습니다. 내 마음에 그렇게 원했던 행복이 내가 원하는 때 오지 않고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오지 않고 내가 원하고 기대하는 이와 같은 방법으로 오지 않으니 우리에게는 심히 고통스러워지는 것입니다.

외아들을 잃고 통곡하며 진행하는 장례의 슬픔을 보게 됩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남편도 없는 그와 같은 상태에서 소망을 걸고 있던 그 아들이 이 세상을 떠났으니 그 어미의 슬픔이 그 얼마나 컸겠습니까?
남편은 땅에 묻지만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고 하지요. 가뜩이나 마음 아파하고 있는 여인에게 자식마저 세상을 떠나니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습니까? 외아들에게 걸고 있는 최소한의 행복마저 무너져 버렸던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 삶에는 꿈의 좌절이 이루어질 때가 있습니다. 꿈의 좌절이 이루어질 때 엘리사 선지자에게 어느 날 한 미망인이 찾아옵니다. “선생님 우리 남편이 전에 선생님을 따라다니면서 선지 공부를 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게 되고 나는 내 두 아들과 더불어 가난하게 살고 있었는데 어쩔 수 없어서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빚값에 내 두 아들이 종으로 팔려가게 되었습니다. 선생님 좀 어떻게 도와주십시오.” 이 여인의 가슴 아파하는 바를 우리가 이해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남편 잃어 괴롭고 이제는 빚져서 괴로운데 그 빚값에 두 아들이 노예로 팔려가게 된다니 얼마나 가슴이 슬프겠습니까? 우리 마음에 모든 소망이 깨어지는 이와 같은 때가 있습니다. 내개 가장 중요한 내 삶의 가치라고 생각했던 내 삶의 의미라고 생각했던 그와 같은 것들이 무너져 내릴 때 우리 삶에는 그와 같은 큰 고통과 아픔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도 바울에게도 꿈의 좌절이 있었지요. 사도 바울은 스페인으로 가기를 원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지도 보시면 알겠지만 유럽의 맨 끝부분에 스페인이 자리를 잡고 있지요. 스페인, 포르투갈, 그리고 모로코 그와 같은 나라들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스페인에서 시작해서 유럽의 끝이 이루어지고 그 뒤에 아프리카가 이어지게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당시의 세계관으로는 세계의 모든 땅 끝은 지금의 세계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스페인이 땅 끝이었어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그리스도의 복음의 증인이 되라고 했는데, 그러면 스페인에 가면 땅 끝까지 가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주께서 말씀하신 복음의 완성을 이룬다고 생각하고 ‘꼭 스페인에 가서 복음을 전해야지.’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스페인에 가려면 어디를 거쳐 가야 되지요? 로마를 거쳐 가야 됩니다. 그러니까 이태리를 거쳐서 스페인을 가야 되는데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사람들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습니다. 로마 교인들에게 편지 쓰기를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기를 원했는데 사단이 내 길을 막았다. 그리고 나는 너희에게로 가서 너희가 나를 후원해서 나를 스페인으로 보내줘서 거기서 내가 복음을 전하기를 원했는데 정말 그러지 못해서 내 마음이 섭섭하다.’라는 편지를 보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꿈은 깨지고 말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의 음습한 밤, 감옥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는 스페인에 가보지 못하고 그의 꿈은 산산조각 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꿈은 깨졌을지언정 그의 꿈은 영원히 깨진 것이 아니라 다시금 조합되어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스페인을 넘어 온 세계 땅 끝까지 역사의 시간과 공간을 넘어 모든 민족에게 전달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사도 바울의 꿈은 깨진 꿈이 아니라 온전히 이루어진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의 꿈에 좌절이 있을 수 있으나 그것은 완전한 좌절이 아니라 우리 꿈의 좌절은 순간적이고 그것을 통하여 이루시는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 속에 우리의 꿈은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행복을 추구하지만 불행이 다가 오기도 하나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통하여 새로운 소망과 용기를 주실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극한의 고통에 빠져 도저히 내 힘으로 감당할 수 없을 때 주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우리 곁에 서 계실 때 우리들에게 새로운 소망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전에 심방을 가서 저희 성도 문안하고 제가 기도해드리고 보는데 옆에 어린 아이가 온몸에 깁스를 했어요. 여러분 온몸에 깁스 한분 봤습니까? 그런데 여자 아이인데 배변할 수 있도록 처리해 놓고 나머지 온몸에 깁스를 했어요. 그런데 참 안됐더라고요. 그런데 아이가 굉장히 총명한 것 같았습니다. 정신은 맑으니까. 제가 기도를 해드려도 되겠습니까? 제가 옆에 계신 분한테 물어보니 목사님 기도하십시오. 해서 제가 기도드리고 나왔는데 그분이 따라 나오면서 이야기 하시는데 전 그분이 아이 어머니인줄 알았는데 어머니가 아니고 큰어머니였습니다. 그러면서 이야기를 하시는데 그 아이의 엄마, 아빠는 교통사고로 두 명 다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교통사고가 나서 엄마, 아빠 두 명은 다 세상을 떠나고 이 아이는 중상을 입어서 깁스를 하고 있는 거였어요. 정신은 온전하니까 아이는 총명했습니다. 나중에 그 아이가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하니까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우리 인생은 정말 이런 경우를 겪게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둘 다 세상을 갑자기 떠났습니다. 아이는 부상을 당했어요. 그 아이가 조금 나으면 어떻게 될까요? 엄마, 아빠 내일 병원에 가볼 수 있을까? 이 아이는 엄마 아빠가 살아서 다른 병실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자기가 조금 걸을 수 있으면 엄마 아빠 병원에, 병실에 가보겠다 할 거 아니에요? 그때 그 아이에게 뭐라고 설명을 하겠습니까? 이 아이가 완쾌돼서 그 병원을 나갈 때 이 아이에게 뭐라고 설명을 하며 이 아이의 삶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정말 우리 인생의 삶에는 어린 아이건 어른이건 쉽지 않은 경우가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이 나인성 과부 여인, 그야말로 겪을 수 없는 이와 같은 극한의 고통 속에서 가슴 아파하며 울며 울며 아들의 장례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이 극한의 장례 행렬 속에서 마침내 우리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주님은 어느 날 예기하지 못했지만 문득 다가와 그 장례행렬과 만나고 계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두 번째 생각하는 것은 이와 같은 극한의 고통의 속에서도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그 모든 상황이 일시에 바뀌어 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상황을 넘어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상황을 넘어서는 분입니다. 따라서 상황이 어떠하거니 문제가 아니라 그 상황을 극복하여 해결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능력의 역사를 일으키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볼까요? 여러분 집에 들어가 보니 온 집이 난장판이에요. 얘들이 다 어지럽혔어요. 그 때 여러분들이 어떻게 생각하죠? ‘아이고, 내 인생 끝났다.’ 이런 분 있어요? 없어요?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럼 뭐라고 하지요? ‘아이들이 이렇게 어지러워 놓고 치워놓지 않았네’ 그러고 팔 걷어붙이고 치우면 한 30분, 1시간 정도면 깨끗해지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이 세상이 이뤄지는 모든 일을 섭리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어떤 상태 어떤 헝클어진 문제 어떤 헝클어진 상황도 하나님께서는 해결하신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상황에 개입하시는 것이 문제지 예수님이 우리 상황에 개입하시면 그 순간부터 모든 문제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저는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이 우리 주님을 만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바로 그 때 우리들에게 새로운 은혜의 역사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장례행렬과 예수님의 행렬이 만났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 마음속에 설레이게 하는 하나의 기대가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저런 슬픈 장례행렬을 만났을 때 뭔가 어떤 사건을 일으키시지 않으실까? 우리 삶에 주님이 계시다는 것, 우리 삶에 주님을 만난다는 것 우리 삶에 전혀 다른 새로운 시작이 이루어집니다.

물고기를 잡던 베드로, 안드레, 요한, 야고보에게 주님께서 ‘나를 따르라 내가 너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그 시간부로 시작해서 이들에게는 다른 훈련의 과정이 있었고, 이들의 삶은 주님을 따라다니며 하나님의 천국에 대해서 배웠고 그리고 이들은 주님이 세상 떠나신 후에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오순절 성령 충만을 받고 이들은 나가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복음을 전하고 죽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시간이 지나니 이들의 죽음이라는 것은 가장 아름다운 삶의 역사를 이루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그 제자들의 이름이 우리 입술에 회자되고 있어 주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복음의 전파자로 우리들에게 깨우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름조차 간단히 나와 있고 그 사람이 어떤 일을 했는지 조차 모르는 이와 같은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께 훈련을 받고 그리스도의 복음의 사도들이 되었던 것을 우리는 봅니다. 어느 누구도 막론하고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그의 삶은 새로운 장면으로 만들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둠 속에 햇빛이 비취듯이 그것으로 말미암아 밝은 빛이 비춰 들어가듯이 우리의 어두운 삶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삶의 기쁨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을 봅니다.

여러분들 오늘 이렇게 새로 오셨는데 여러분들 초청하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한번 두번 오라고 해서 오신 분들은 제가 말씀드렸지요? 굉장히 훌륭하신 분들이에요. 그리고 여러 번 권면해서 오신 분들 있죠? 이런 분들 또 역시 훌륭한 분들이에요. 뭐 일년, 일년 미루다가 수삼년 걸려서 오신 분들 아마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런 분들도 역시 괜찮으신 분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이 자리에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으면 여러분은 절대 이 자리에 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시지 않았으면 이 자리에 절대 오실 수 없습니다.

여러분 그분들이 여기 왜 오자고 그런 줄 알아요? 자 한번 따라서 합시다. ‘절대 진리에 전파사명성’ 절대 진리는 스스로 전파 사명성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이건 절대적으로 진리예요. 그러면 그 진리를 아는 사람은 그것을 전파하지 않으면 안 될 마음의 사명을 느끼게 됩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어떤 사람이 몸이 많이 아팠어요. 그런데 어느 약을 먹고 나았다든지, 어떤 의사선생님을 찾아가서 의사 선생님의 치료와 지도를 받아서 낫게 됐어요. 그런데 자기와 똑같이 아파요. 자기가 느꼈던 증세와 똑같이 아파요. 그럼 그 사람보고 뭐라고 이야기하겠습니까? ‘아! 나 그 약 먹었더니 나았어. 나 어느 병원 어느 선생님 찾아갔더니 다 나았어.’라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그 사람을 볼 때 ‘음, 아프군.’ 그러더니 ‘당신은 당신의 삶이니까 당신이 알아서 처리하는 거야.’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어요. 우리는 마음에 어떤 절대적인 진리와 사실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을 꼭 전파하고 싶은 사명이 생기는 것입니다. 내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가 절대 진리라고 생각하면 꼭 전파하고 싶은 사명이 생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기 위해 같이 갑시다. ‘예수 믿읍시다.’라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니 내 삶이 변화되고, 예수님을 만나니 무엇인가 달라지고, 이것은 절대 진리라는 마음의 확신이 서니 전파에 대한 사명성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다못해 여러분 점심 먹으러 동네에 나갔다고 생각합시다. 전에 어떤 식당에서 맛있게 음식을 먹었어요. 어디로 갈까? 가만히 있겠습니까? ‘야, 내가 그 식당 갔더니 맛있어.’ 다른 사람이 ‘아니야 그거 별로 아닌 거 같던데.’ ‘아니야 내가 가봤는데 정말이야.’ 자기가 체험해서 진리라고 생각하면 거기에 대해서 반드시 증거하게 되어있습니다. 절대 진리는 전파의 사명성을 가지기 때문이에요. 그러므로 우리의 삶속에 ‘내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가 절대적인 진리다.’라고 생각하면 누구든지 그것을 전파하고야 말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내가 전파하지 못한다면 나는 그것에 대한 절대 진리의 확신을 하지 못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예수님 만나면 마음이 바뀌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면 주님이 내 삶속에 개입하면 우리는 새로운 놀라운 기쁨의 역사가 일어남을 기대하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울지 말라’ 말씀하십니다. 여인에게 ‘울지 말라’ 그리고 그 청년에게 ‘일어나라’ 하십니다. 시체에게 일어나라 하니 시체가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황당한 이야기지만 그러나 주님께서는 죽은 자를 살리시는 생명의 구주시니 그 일이 가능한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면 우리의 삶이 달라집니다. 먼저 마음이 달라져요. 어떠한 상황이든지 기쁨으로 바라볼 수 있어요. 어떠한 상황이든지 기쁨으로 바라볼 수 있어요. 어떠한 상황이든지 기쁨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품을 수 없는 것을 품게 되고 넘지 못할 것을 넘게 되고 이룰 수 없는 것들을 이루게 됩니다. 여러분 마음이 참 슬프죠. 정말 견딜 수 없어요. 그럴 때 그 마음을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행복한 거 같지만 햇빛 이쪽에서 비취면 뒷면은 그늘이 지는 것입니다. 밝은 면 있으면 그늘지는 면이 누구나 있습니다. 화려한 쇼윈도우 있죠. 그 상점 어느 구석엔가는 쓰레기나 아니면 청소도구 넣어놓은 이런 구석방이 있는 거예요. 우리 마음의 한 구석에는 누구든지 감당 못할 어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부여잡고 가는 것이 우리 인생이 아닙니까?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우리 마음이 달라져요.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거기서 남이라’ 우리 마음을 지키게 됩니다. 그리고 생활의 변화가 이루어지고 마침내 결과의 변화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우리 인생을 바꾸는 과정을 잠깐 생각해 볼까요?
세 번째로 예수님은 먼저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울지 말라’ 먼저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전에 먼저 명령하십니다. ‘울지 말라.’ 그리고 나서는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것입니다. ‘청년아 일어나라’ 마침내 울지 말라 슬픔이여 안녕, 슬픔은 그만, 마침내 그 여인에게 말씀하시고 그 말이 사실 되도록 보족 적으로 실제 상황을 움직여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울지 말라’ 그리고 울지 않아야 할 상황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 살아가면서 참 많은 아픔을 겪죠. 많은 슬픔을 겪죠. 많은 마음의 상처를 겪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쓰라리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상처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눈물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와 같은 과정을 거처 마침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가운데 주의 역사를 이루는 여호와의 백성이 된다라는 사실입니다. ‘울지 말라’ 그러더니 주님께서는 그 청년을 일으켜 세우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가슴에 임하는 날, 그 말씀이 내 마음속에 믿어지는 날, 그 말씀이 내 삶을 변화시키는 날, 내게 있어서 새로운 은혜의 역사들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어느 날 문득 들은 말씀 한마디가 가슴에 새겨지고, 어느 날 문득 읽은 성경의 한 구절이 내 가슴에 새겨져 그것을 붙잡고 기도하게 되고 그것을 통해서 내 삶의 소망과 용기와 내 삶을 이루는 열쇠를 삼을 때 마침내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더라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도 주님을 사랑하는 우리 성도님들이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내 마음속에 부여잡고 기도하고 그렇게 살아갈 때 그것이 생활 속에 이루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우리의 삶 속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과 은혜가 필요합니다. 여러분 몸이 아파서 고통스럽다 나은 것이 더 기쁘겠어요? 아프지 않은 것이 더 기쁘겠습니까? 그래도 아팠다 나으면 그거 좀 괜찮지 않겠는가 생각하십니까? 어떤 것 택하시겠어요?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아파서 나은 것도 기적이지만요, 몸이 안 아픈 건 더 큰 기적이에요. 여러분 어떤 기적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나는 기적을 좋아해. 그럼 기적한번 날마다 체험해 보실래요? 정말 축복받는 성도는요 기적을 별로 체험하지 않은 성도들이에요. 이해가 되십니까? ‘내 삶에는 기적도 없고 특별한 일도 없어’ 그 사람은 큰 축복을 받은 사람이에요. 매일 특별한 일 체험해 보실래요? 죄송합니다. 목사가 무슨 협박하는 것 같으니까.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큰 기적과 능력이 없어도 살 수 있다는 것은 큰 기쁨이에요. 제가 늘 우리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해요. 하나님, 우리 성도들 중에 화급한 중에 주님을 부르는 분 없게 하여주시옵소서. 정말 화급 중에 주의 이름 부르는 일 없게, 너무 다급해서, ‘주님’ 하고 부르는 일 없도록 우리에게 그런 다급한 지경이 생기지 않게 해주십시오.

저는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날마다 하나님 앞에 정상적으로 기도하고, 정상적으로 응답받고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축복이에요. 우리들의 삶 속에 주님께서 오십니다. 말씀하세요. 그리고 그 말씀대로 우리 삶을 바꾸신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의 한계 속에서 내 가슴의 슬픔 속에서 내 가슴의 눈물 속에서 예수를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를 만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 나에게 명령하신 말씀이 내 가슴에 박히고 내 가슴에 박힌 그 말씀이 내 생활 속에 실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슬픔이 정리되고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의 문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모든 식구들에게 주의 은혜와 능력의 영광이 임하여 주를 사랑하는 백성의 축복과 은혜와 능력과 영광이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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