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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마 17: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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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광일 목사 

헤럴드 러셀은 1941년 일본군의 진주만 공격이 감행된 후 공수부대원으로 전투에 나갔다가 포탄에 맞아 두 팔을 잃고 장애자가 됩니다. 그는 참혹한 좌절에 빠져 이제 아무 쓸모가 없는 고깃덩어리에 지나지 않게 되었구나 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괴로워하다가 그래도 잃은 것보다는 가진 것이 더 많지 않은가 라는 긍정적인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점차 마음을 가다듬기 시작하여 의족과 의수를 장착하고 글을 쓰기 위하여 타자를 치다가 하루 한 장씩 타자를 치는 수준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꾸준히 글을 쓴 결과 “내 생애 최고의 해” 라는 시나리오 작품을 내게 되었고, 그 영화의 주인공 역까지 맡게 되어 대단한 흥행을 하게 됩니다. 이 일로 인하여 그는 유명 인사가 되었고 많은 돈을 벌어 자기와 같이 전쟁에 나갔다 장애자가 된 사람들을 많이 돕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기자가 인터뷰를 하며, “당신의 신체적인 조건이 당신을 절망케 하지 않았습니까” 라고 묻자 그는 “아닙니다. 나의 육체적인 장애는 나에게 도리어 큰 축복이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언제나 잃어버린 것을 계산할 것이 아니라 남아 있는 것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남은 것을 사용할 때 못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쉽게 이길 수 있는 문제가 있는가 하면, 때로는 아무리 애써 보아도 안 되었던 일들도 있습니다. 실패한 일들도 있습니다. 두드려도 안 열리고, 시원스럽게 안 풀리는 일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 속에서 믿음의 사람은 세상 사람과 달라야 합니다. 세상 사람은 안된다 할지라도 믿음의 사람은 ‘안되었다’ 가 아니라 ‘아직 안되었다’ 라고 해야 합니다. 아직 안 되었다는 말은 앞으로는 되어질 것이라는 말입니다. 같이합니다. “실패했더라도 다시 해 봅시다”. “지금까지 안되었을지라도 다시 해 봅시다”. “주님이 도와주시면 됩니다”. “주님이 되게 하시면 됩니다”. 지금까지 안 되었던 일들이라도 되어질 때를 바라보며, 너희에게 못할 것이 없으리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다시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오직 해답은 주님께 있습니다. 굳센 의지로서 무엇이든지, 어떠한 경우든지 능히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앞세우면 어떠한 문제라도 풀어갈 수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는 말씀처럼 그대로 이루어지게 하십니다.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는 신앙생활이 되려면,

첫째로 산을 옮길만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미국 중서부에 반다마틴이라는 소년 바이올리니스트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18세 때 불행한 사고를 당합니다. 아버지 대장간에서 시뻘겋게 단 쇠가 손위에 떨어져 오른 손의 손가락이 모두 잘려 나가고 엄지손가락 하나만 남았습니다. 바이올리니스트로서의 꿈이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손가락이 없어 연주가 불가능해진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는 손을 바꾸어 바이올린을 켜리라는 결심하고 각고의 노력과 연습을 한 끝에 마침내 성공하여 카운티 교향 악단의 탁월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었습니다. 그는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의 말씀을 믿고 이루었는데 이것이 바로 산을 옮기는 믿음입니다.

20절에 보니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여기에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라고 했는데 당시 유대인들은 아주 곤란한 문제 해결하는 것을 산을 옮긴다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즉 산은 문자적인 의미보다는 사람의 능력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커다란 문제 등을 함축하는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라는 말은 인간적으로 보면 아주 불가능하게 보이는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하는 믿음을 의미하는데, 사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이런 산과 같은 어려운 문제들을 믿음으로 수없이 해결하여 왔습니다.

로버트 슐러 목사는 절대가능의 신조를 가지고 일생을 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산이 앞에 가로막힌다 해도 나는 단념하지 않으리라. 나는 계속 도전하리라. 나는 산에 오르리라. 아니면 산밑에 터널을 파고 통과하리라. 아니면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그대로 산을 변화시켜 금광으로 만들리라.”
여러분 안에 있는 믿음을 과소 평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비록 겨자씨처럼 작아도 활용하기만 하면 큰 힘을 나타낼 것입니다. 그것을 그냥 그대로 묻어두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묻어두면 결국은 없어지거나 썩어서 다시 활용할 수 없을 때가 오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목숨을 걸고 기도해야 합니다

아프리카 부족의 추장 아들이 병으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마침 리빙스톤 선교사가 그 부락을 방문하게 되어 고쳐 보려고 하였으나 가망이 없었습니다. 다급한 리빙스톤은 죽어 가는 추장의 아들을 붙들고 목숨을 건 기도를 드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추장이 기도하는 리빙스톤을 치면서 “당신이 기도 할 지라도 내 아들은 이미 죽었소!”. 보니 아들은 숨이 끊기고 있었습니다. 그때 리빙스톤은 “주여, 제 믿음을 보옵소서 이 사람은 죽은 것이 아니라 주께서 소생케 하심을 믿습니다” 하고 눈을 떴을 때 그 아이가 몸을 틀더니 일어나 앉는 것입니다. 이것이 리빙스톤의 선교적 역사에 대단한 동력이 되었습니다. 그 후 리빙스톤은 “믿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여기라” 는 구절을 제일 좋아하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사실 그가 아프리카 전역을 다니며 만나는 사람들은 병든 자요, 어려운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에게 자기는 가진 것 없어도 오직 있는 것은 기도밖에 없음을 고백합니다. 그리하여 믿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여기라 하신 말씀만 믿고 무조건 붙들고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그럴 때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믿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는 말씀의 확신을 가지고 목숨을 걸고 기도하십니까? 믿어지지 못해서 기도하다 눈을 떠보고, 기도하고는 의심의 찬바람에 고통을 당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현대 교인들은 너무나도 분주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분주한 교인들이 잃어버리는 첫 번째가 기도입니다. 기도하지 아니하고 무엇인가에 쫓겨 살아가도록 만드는 것이 사탄의 작전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도움과 능력을 차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의 승패는 얼마만큼 기도생활을 늘릴 수 있느냐의 여하에 달려있습니다. 기도 시간을 방해하는 모든 장애물들은 확실하게 제거해야 합니다. 영적 전쟁의 승패는 기도의 방패가 제 위치에 있는가의 여하에 달려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꼼짝 할 수 없는 문제에 부딪힐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사도행전 12장이 잘 가르쳐 줍니다. 베드로는 감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때 옥문이 열리고 쇠사슬이 끊어지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문제에 부딪힐 때 옥문을 열어 제키며 우리를 묶고 있는 세상의 끈들을 자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기도의 능력입니다.

셀교회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랄프 네이버 박사는 주님이 세우시기를 원하는 교회들을 향하여 권면합니다. “첫째, 기도에 승리하는 교회가 되어라. 둘째, 교회의 영향력있는 사람들의 기도 리더쉽을 키워라. 셋째, 교회를 능력 있는 기도 공동체로 만들어라” 입니다. 교회의 부흥은 반드시 기도의 부흥으로 시작되었음을 역사적으로 증명되고 있음을 분명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권능에 접속해야 합니다

역사가의 글 가운데 이런 글이 나옵니다. “초대교회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가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외쳤습니다. 즉 초대교회는 은과 금은 없었지만 예수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예수 이름의 권세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교회는 은과 금은 많아졌으나 예수님의 이름, 예수 이름의 권세를 잃어버렸습니다” 라고 비평합니다.

교회 건물들은 저마다 커지고 웅장해졌습니다. 교인들도 많아졌습니다. 재력도 있어 보입니다. 유명인사들도 교회에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능력은 쇠약해져만 갑니다. 하나님이 주신 권능을 행사하지 못합니다. 본문에도 비극적인 구절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려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여기의 제자들이란 말을 교회로 바꾸어 보아야 합니다. “내가 교회에 데려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내가 교회에 문제를 가져와도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능히 변화시키지 못하더이다. 능히 바꾸지 못하더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얼마나 잘 사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세상을 바꿀 수 있느냐, 세상을 고칠 수 있느냐,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느냐의 문제를 알아야 합니다. 결국 문제가 문제가 아니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 없음이 문제입니다.

마태복음 10장 1절에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이미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께서 제자들을 보낼 때에 성경 공부하는 방법을 먼저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가르치는 방법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학원이 아니라 교회는 가족이요 하나님의 군대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게임이 아닙니다. 소풍놀이가 아닙니다. 영적인 전쟁입니다. 그래서 귀신을 쫓아내며 세상을 다스리며 정복하는 권세를 제자들에게 먼저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흉내내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권능에 접속되어진 사람하고, 예수 믿는 것처럼 흉내내는 사람하고는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을 구체적으로 만나셨습니까? 성령 충만의 체험이 있으십니까? 가치관과 모든 삶이 하나님의 권능에 접속되어졌습니까?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권능으로부터 코드가 빠져 있다고 하면 하나님의 능력으로부터 단절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생활의 우선순위를 하나님의 권능에 연결시키는 것에 두어야 합니다. 내 신앙을 하나님의 권능에 접속해야 합니다. 내 삶을 하나님의 권능에 접속하는 일입니다. 내 기도를 하나님의 권능에 접속해야 합니다. 우리의 꿈을 하나님의 권능에 접속해야 합니다.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의 권능에 접속해야 합니다. 자녀의 삶을 하나님의 권능에 접속해야 합니다. 사업을 하나님의 권능에 접속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우리의 찬양이 우리의 비젼이 하나님의 권능에 접속되기만 하면 능력의 바람이 일어나게 됩니다.

모든 것이 불가능하게 여겨지는 현실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은 못할 것이 없으리라고 우리에게 여전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부디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목숨을 거는 기도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권능에 접속되어 능력을 받아 못할 것이 없으리라는 확신속에서 언제나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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