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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모든 복이 네게 임하리라 (신 28: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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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동호 목사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참 살기가 만만치 않은 세상입니다. 우선 힘듭니다. 힘이 들어서도 힘이 들지만, 정말 힘든 것은 힘을 쓰고 정성을 쏟아도 일이 뜻대로 잘 안되는 경우가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힘이 좀 들어도 일만 뜻대로 좀 된다면 좋겠는데 힘을 썼는데도 일이 안 될 때 정말 힘이 듭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바로 그렇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아픔이 많습니다. 마음 아픈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의 죄와 실수 때문에 당하는 어려움과 아픔은 그래도 이해가 되기 때문에 그렇게 아프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나의 죄와 실수와 직접적인 상관이 없이 당하는 고통과 아픔과 슬픔이 너무 많습니다. 많은 아픔과 슬픔 그리고 고통이 있지만, 제가 볼 때 가장 큰 아픔 중에 하나는 사랑하는 자식이 불치나 난치의 병이 걸려 혹은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 고생하는 것을 보는 부모의 마음입니다. 세상에는 그런 아픔이 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불안함이 있습니다. 앞에서 이야기 한 일이 언제 누구에게 일어날는지 누구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사고들이 장애물처럼 세상에 널려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전혀 예측하지 못합니다. 수많은 장애물이 있는 방을 눈을 가리고 통과하는 것과 같은 것이 인생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고장 난 세상입니다. 우리가 고칠 수 없는 세상입니다. 고장이 났다는 것은 통제가 불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어떨 때는 세상이 쉽게 잘 돌아가는 것처럼 느껴지고 보일 때가 있습니다. 통제가 되고 작동이 제법 되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지나 놓고 보면 아닙니다. 작동이 되기는 된 것 같은데 지나 놓고 보면 잘못 된 것입니다. 거기에는 기쁨과 만족과 행복과 평안이 없습니다.

1982년 처음 자동차를 운전했습니다. 영락교회에서 부목사에게 자동차를 한대씩 지급해 주었습니다. 저는 막내였기 때문에 새 차를 받지 못하고 그 동안 교회에서 쓰고 있던 낡은 차를 받았습니다. 차량번호가 7540이었던 1200cc 포니 원 자동차였습니다. 차가 낡아 비가 새는 것은 물론 이었고, 시도 때도 없이 시동이 꺼지는 그런 자동차였습니다. 시동이 꺼지지 않아도 승차감은 물론이고 운전할 때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아 운전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영락교회에는 포니 박사라는 별명을 가진 집사님 한 분이 있었습니다. 당회장의 차를 운전하시는 기사셨는데 그 분이 차를 만져주면 차가 딴 차가 되곤 했었습니다. 어느 날 그 집사님이 제 차를 손 봐 주셨는데, 액셀을 밟고 운전하는 기분이 마치 새털같이 가벼웠습니다. 벤츠와 같은 고급차를 운전해 본 경험이 없었지만 그때 제가 벤츠 하나 안 부럽다며 좋아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사람들은 다 자기 경험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표현합니다. 제게 인생과 세상은 가는 것 만큼이나 잘 서던 그리고 비까지 새던 고물 7540 포니 자동차와 같습니다. 한번은 종로 2가 사거리 한 복판에 시동이 꺼져 서버렸는데 사방에서 빵빵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땀 뻘뻘 흘리며 차를 옮겼습니다. 그 때 속상함과 창피함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제게 하나님은 포니박사와 같으신 분입니다. 그 분이 제 인생과 세상을 손봐주시면 고물 자동차가 정말 벤츠 같아집니다. 드라이브를 하는 느낌이 마치 새털을 밟는 것과 같아집니다. 하나님이 포니박사와 다른 점은 포니박사가 손 봐 준 자동차는 며칠 안가서 또 고장이 나고 속을 썩였는데 우리 하나님이 손 봐 주신 제 인생과 세상이라는 자동차는 고장이 나지 않고 ‘항상 새털 같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영락교회에서 7540을 운전하고 다닐 때 저는 늘 당회장님이 부러웠습니다. 물론 여러 가지가 부러웠지만 그 중에 하나는 당회장님 옆에는 언제나 포니박사가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당회장님의 차는 제 차와 같지 않아서 고장도 잘 나지 않는 좋은 새 차 였기 때문에 포니박사가 사실 별로 필요 없으셨습니다. 저와 같이 고장이 잘 나는 고물 차를 가진 목사님들이 꽤 여러 명 있으셨습니다. 그래서 포니박사는 좀처럼 제 차례가 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저는 언제 설지 모르고 골골거리는 자동차를 끌고 불안하게 운전을 할 때가 많았습니다.

포니박사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십니다. 늘 우리 곁에 계셔서 시도 때도 없이 고장이 나는 우리의 인생과 세상을 고쳐주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고쳐 주실 뿐만 아니라 고장이 나지 않는 좋은 인생과 세상을 만들어 주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우리의 인생과 세상은 고장이 나지 않습니다. 고장이 나지 않을 뿐 아니라 고장이 나도 상관이 없습니다.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인생과 세상은 마치 새 털 같아 질 겁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 바로 그와 같은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셔서 우리의 인생과 세상에 복을 주시면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나가도 복을 받고 들어와도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오늘 하나님은 본문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말씀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치는 대적이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여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속한 모든 것이 다 복을 받게 될 터인데 우리에게 속한 자녀들이 복을 받게 될 것이고 우리에게 속한 땅과 재산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나님이 친히 직접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십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 축복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는 세상과 인생은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명기 28장 15절 이하에서 그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되면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나가도 저주를 받고 들어와도 저주를 받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우리 몸의 소생과 토지와 토지의 소산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로 더 받을 것도 없습니다. 이미 세상은 그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실제로 그와 같은 저주가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힘이 든 것이고, 그래서 세상에는 슬픔과 아픔과 고통이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세상에서 아무런 힘과 능력과 지혜가 없는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축복과 도우심이 없이 산다는 것 자체가 저주인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은 땅이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창세기 3장 17절 이하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를 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 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 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 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세상과 우리 인생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게 된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치 아니하고 선악과를 따 먹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저주를 받은 세상에서 그 저주의 사슬을 끊고 축복의 삶을 살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저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가지고 ‘모든 복이 네게 임하리라’는 제목을 잡았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그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와 같은 축복을 약속할 때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단 하나의 조건과 전제가 있는 것을 오늘 본문 속에서 보게 됩니다. 그것은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이라는 말씀입니다. 1절 상반 절에 나오는 이 한 말씀에 그 다음에 말씀하시는 ‘모든 복’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에게 장학금을 주듯,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삼가 듣고 그 명령대로 순종하는 삶을 사는 사람에게 복을 주십니다. 공부를 잘하여 장학금을 받는 학생들 중에 보면 자기가 공부를 잘해서 당연히 장학금을 받는 것처럼 생각하여 장학금을 주는 교회나 사람에게 별로 감사할 줄 모르는 학생들이 더러 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더러 있는 것이 아니라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틀린 생각입니다. 자기가 아무리 ‘공부를 잘 한다’라고 하여도 공부를 잘하는 학생에게 장학금을 주겠다는 귀한 뜻을 가지고 장학금을 수여하는 사람이 없다면 그는 절대로 장학금을 받을 수 없습니다. 장학생이 장학금을 받게 되는 이유는 자기가 공부를 잘 해서라기보다는 공부를 잘하는 학생에게 장학금을 주겠다고 자신의 재산을 내어 놓은 분이 있어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복을 받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잘못하면 우리는 그와 같은 복을 받게 되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행위 때문에 구원을 얻고 복을 받는다.’라고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착각입니다. 구원과 복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고 하여도 하나님이 복을 주시지 않으시면 그 뿐입니다. 우리의 행위 자체가 복과 구원을 만들어 낼 수는 없습니다. 구원과 복은 전적으로 우리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축복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에게 주시기로 작정하시고 약속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룰입니다. 그러므로 그 누구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는 오늘 본문에 약속하신 하나님의 모든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면 오늘 본문에 약속하신 모든 하나님의 축복을 다 받을 수 있습니다.

불교에 보면 부처님께 3천 번을 절하는 것이 있습니다. 말이 쉬워서 3천 번이지 무릎을 꿇고 엎드려 손을 벌리는 절을 3천 번이나 한다는 것은 극기 중의 극기입니다. 또 전에 보니 어느 스님이 삼보일배라는 것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세 걸음을 걷고 한번 씩 엎드려 절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와 같은 것을 별로 좋게 보지 않습니다. 특히 ‘삼보일배’와 같은 것이 저는 싫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것은 고집이고 폭력입니다. 그런 면에서 자기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무기한 금식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혹시 며칠 정도 날짜를 정해 놓고 하는 금식까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의견을 들어주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금식을 한다는 것에는 저는 쉽게 동의할 수 없습니다. 이야기가 좀 다른 곳으로 흘렀습니다.

우리 기독교에는 3천 배 같은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을 도리어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은 그와 같은 외형적인 행위나 제사보다 순종을 좋아하십니다. 우리 기독교에서는 순종이 제사이고, 순종이 기도입니다.(삼상 15:22)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게을리 하고 제사만 열심히 올리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이사야 1장 11절 이하에 보면 우리가 잘 아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네게 무엇이 유익 하뇨. 나는 수양의 번 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 염소의 피를 기뻐하 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 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 디지 못하겠노라>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제사와 기도는 순종입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금식하며 기도하는 것보다,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보다, 철야하며 기도하는 것보다 능력 있는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드리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면 기도의 상당부분이 없어집니다. 하나님과의 영적이 대화로서의 기도는 없어지지 않고 더 깊어 질 것이나 무엇을 바라고 구하고 두드리는 면에서의 기도는 줄어들게 될 것입니다. 결국에는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신 모든 복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금식하는 것보다, 철야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3천 번 절을 하는 것 보다 힘들고 어려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초기의 우리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철저히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그 동안 우리 한국교회는 그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는 삶을 가르치는 것을 등한히 하였습니다. 대신에 그냥 열심히 교회 출석하는 것과 봉사하는 것 그리고 새벽에 기도하고 철야하며 기도하고 금식하며 기도하는 것과 같은 것들을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물론 그것이 잘못된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것도 아니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철저히 순종하는 삶이 빠진다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심각하게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는 동안 우리 한국기독교는 마치 부처 앞에 3천 배 절하는 불교와 비슷한 양상을 띠게 되었습니다. 형식은 강하지고 풍성해 졌으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의 실력이 너무 약해지고 말았습니다. 결국 교회는 무너지기 시작하였고 한 집 건너 교회가 세워지기는 하였으나 세상에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무력한 교회가 되고 말았으며 세상에 손가락질을 받고 지탄을 받는 미신적이고 미개한 교회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기독교는 누가 뭐래도 말씀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우리들을 구원하시고 축복하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입으로만 주여, 주여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삼가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팔이 부러졌다가 다시 붙은 후 그 팔은 전과 같이 정상적으로 사용하려면 뼈가 부러지는 것과 같은 아픔을 격으면서도 재활운동을 하여야만 합니다. 그 아픔이 두려워 운동을 포기하면 뼈가 다 붙었음에도 불구하고 평생 불구로 살아야만 할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고장 나고 왜곡된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뼈가 꺽이고 부러지는 것과 같은 아픔을 동반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힘들고 아프다고 회피하면 우리는 평생 불구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죽을 것 같고 뼈가 부러지는 것과 같은 아픔이 있어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재활훈련을 받아야만 합니다. 그러면 조금씩, 조금씩 그 아픔이 없어지게 됩니다. 나중에는 말씀대로 사는 것이 하나도 아프지 않고 어렵지 않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영적인 불구와 장애로 살아가는 사람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 삶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삶입니다. 우리 기독교에는 부적이 없습니다. 말씀을 듣지도 않고, 말씀대로 살려고 애쓰는 발버둥질도 없는데 그냥 주일날 슬쩍 교회에 왔다 갔다고 그것이 부적의 효과를 나타내지는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에 우리가 바라고 소망하는 모든 복을 다 말씀해 주셨습니다. 저는 저와 제 자손들이 그리고 후손들이 모두 다 오늘 본문의 복을 받기를 소원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저는 하나님의 말씀에 도전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모든 복의 유일한 전제조건으로 내 거신 삼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명령과 말씀에 순종하는 삶에 도전하겠습니다. 넘어지면 다시 일어서고, 넘어지면 또 다시 일어나 도전하겠습니다.

그리고 자식들에게 그것을 가르치겠습니다. 때려서라도 가르치겠습니다. 그리하여 반드시 하나님이 약속해 주신 축복을 쟁취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증인이 되는 삶을 살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오늘 이 말씀에 도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입으로 예수 믿지 마시고, 부적으로 예수 믿지 마시고, 순종 없는 역겨운 제사로 하나님 괴롭히는 사람 되시지 마시고, 순종의 제사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이 약속하신 모든 복이 여러분들에게 임하시는 그런 삶을 사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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