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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집 (마 7:2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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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노강국 목사

산상수훈을 마치려는 즈음에 예수께서는 세 가지 사실을 제자들에게 주지시키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는 이 마 7장 끝부분에 나타나고 있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1)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2) “거짓 선지자를 조심하라.” (3) “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자가 되라.” 이러한 세 가지의 내용의 말씀을 끝으로 산상수훈을 마감하게 됩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당신 스스로를 표현하시기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 14:6)이라 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자기  표현은 바로 마태 7장 끝부분에서 결론적으로 제시한 세 가지의 내용과 연결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씀은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길을 암시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거짓 선지자를 조심하라”는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진리를 분별하고 진리 가운데 있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또한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사람이 되라. 그리하면 반석 위에 지은 집과 같아 비가 오고 창수가 나도 쓰러지지 않는다”는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의 생존과 연관된다는 점에서 생명에 대한 언급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자 하며, 거짓 선지자를 조심하며,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은 이렇게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님의 모습을 실제적으로 간직할 수 비결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마 7장의 끝부분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신 예수님의 인격에 도달하는 비결”도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은 이 세 말씀 중에서 마지막 말씀인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瘟?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다”는 말씀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물론 이 예수님은 이 말씀과는 정반대되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26절의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다”는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모든 삶의 모습을 이렇게 집을 짓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 사람은 집을 떠나서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집이라는 공간을 마련하여, 아침이면 집을 나서고, 저녁이면 집으로 들어옴으로 우리의 삶의 패턴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사는 집은 자기도 모르게 자기의 스타일과 인격이 배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이 사는 집은 그 사람의 인격과 밀접한 연관이 된다고 하겠습니다. 바슐라르라는 사람은 그의 “공간의 시학”이라는 책에서 집과 사람의 관계를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집은 인간의 얼굴을 닮은 인간적인 생명입니다. 흔히 말하듯이, 집의 평면은 인간의 의식적 자아를, 지하실은 인간의 무의식적 욕망을 각각 닮았고, 또한 지붕 밑의 다락방은 인간의 초자아를 모방합니다. 집의 생명성은 무엇보다 그 집이 인간 생명과 더불어 오랜 세월을 통과해 오면서 그 길들여지는 여정 가운데에서, 그 집에 사는 사람조차 그 집처럼 길들이는 생명체와 같습니다.”

예수님 또한 이와 같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집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요 1:14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는 표현은 “우리 가운데에서 장막, 곧 집을 세우셨다”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 스스로 세우신 이 장막(집)은 말씀이 눈으로 나타난 현실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 깃들여 있는 집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바로 이렇게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삶이였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집을 지으실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지혜로운 삶을 살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도 같은 집을 짓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혜로운 사람처럼 반석위에 집을 짓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위해서 우리는 주님의 이 산상수훈의 말씀을 잘 깨닫고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모습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사람을 모래위에다 집을 짓는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이렇게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게 되는 것일까요?

첫째는 하나님에 대한 체험이 없기 때문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지혜”라는 말을 바르게 알 필요가 있습니다. 흔히 “지혜롭다”하면 약삭빠르게 잘 빠져나가는 처세술이 강한 사람으로 이해하기 쉬운데, 성경에서 말하는 지혜는 이와는 아주 다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공경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두려워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잠언 9: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경외심이 없기 때문이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없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체험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유대나라에 이사야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사야는 당시 왕이었던 웃시야 왕이 죽었을 때 성전을 찾았습니다. 왜냐하면, 주변의 강대국에서 호시탐탐 유대 땅을 넘보고 있고, 형제 나라인 북쪽 이스라엘도 유대 나라를 공격하려고 하는 위기의 상황에서 임금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성전에서 바로 하나님을 뵙게 되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는 있었지만, 직접 뵙게 되는 경우는 없었던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느끼게 되니까 무척 두려웠습니다. 그 때, 이사야는 자기가 죽을 것 같은 위기감에 사로잡혀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이제 큰일 났구나, 이제 나는 죽게 되었구나. 내 입술이 부정할뿐더러,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뵈었구나.” <이사야 6:5> 이렇게 하나님을 체험한 이사야였기에, 그 평생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살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예외는 아닙니다. 일찍이 하나님을 체험한 예수님은 요 8:55에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 이렇게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지켰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할 수 있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체험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을 경외할 줄 아는 자세를 지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는 것을 같은 선상에 놓고 연결시키십니다. 요 15: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이렇게 주님을 사랑하는 것과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서로 연결된다고 보겠습니다. 우리들도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였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행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의 말을 듣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누구를 사랑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행하는 바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헤롯이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이 헤롯왕은 자기 동생의 부인인 헤로디아를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동생에게서 헤로디아를 빼앗아 자기 아내로 삼았습니다. 이렇게 동생 부인을 빼앗을 정도로 헤롯은 헤로디아라는 여인을 사랑했습니다. 이런 일을 가지고 그 당시 선지자였던 세례 요한은 헤롯왕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꾸짖었습니다. 그래서 헤롯왕은 세례 요한을 잡아 가둡니다. 그러던 중, 자기 생일이 다가왔습니다. 생일잔치에서 헤로디아가 데려온 딸 살로메가 춤을 추는 것을 보고 좋아서 무슨 상이든지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어린 살로메는 자기 엄마 헤로디아에게 가서 선물로 뭘 달라고 할까를 물었습니다. 헤로디아는 “세례 요한의 목을 달라고 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헤롯은 세례 요한이 죽을 만한 잘못을 한 사람이 아니고, 또 당대의 의로운 사람이라고 여기면서도 세례 요한의 목을 베어 죽입니다. 사람은 이렇게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의 말은 듣는 법입니다. 우리 역시도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를 것입니다.

셋째로,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즉 평소에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평소에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자세가 없기에, 사람을 통해서 들려지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트집을 잡습니다. 뭐라고 트집을 잡았는고 하면, 예수님이 전하는 말씀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자기 임의대로 말하는 것이라고 트집을 잡았습니다. “네 스스로 하는 말이니, 네 말에는 신빙성이 없다”는 그런 식이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에서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답변한 말씀이 바로 요 7:17의 말씀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이 말씀은 이런 의미입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나와는 상관없이 진심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한다면, 내가 전하는 이 말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는지, 아니면 내 스스로 내 임의대로 말하는 것인지 분간할 수 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때로는 누구의 말이 옳은 줄 알면서도, 그 사람이 싫거나 밉기 때문에 그 사람의 말을 따르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대하는 태도가 바로 그러했습니다. 이러한 경우에는 결코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듣기 좋은 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우리가 듣기 싫은 말씀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평소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은 사람의 말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옛날,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처음 전파될 때 있었던 일이랍니다. 어느 시골 마을에 아주 올곧게 살아가는 유학자(Confucianist) 할아버지가 살았습니다. 이 할아버지는 그 마을의 훈장으로 아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칠 뿐 아니라, 동네에서 유일하게 글을 아는 분이었습니다. 그 마을에도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이 사람들은 어렵게 성경책을 구했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읽을 수 없었습니다. 글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할아버지를 찾아가서는 성경책을 읽어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래서 며칠에 한 번씩 몰려가서 성경 읽는 것을 듣고 오곤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할아버지는 성경을 다 읽고는 하시는 말씀이, “예배당이 어디 있는지, 다음에 갈 때 나도 데리고 가 달라”고 하시더랍니다. 너무나도 기쁘고 한편으론 황당해서 물었답니다. “어째서 예배당에 나가시려고 하느냐?”고. 그랬더니 그 할아버지 하시는 말씀이 “ 내가 자네들이 놓고 간 성경이란 책을 보니, 거기에 아주 해괴망측한 이야기가 나오더군, 두 딸들이 자기 아비에게 술 취하게 만들어놓고는 자기 아버지 잠자리에 들어가 동침하여 아기를 가진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했지. 하지만 한편 생각해 보니, 이런 이야기까지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책이라면 믿을 만 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예배당에 나가 볼 결심을 했지.”

사실, 조선시대 유교에 깊숙이 빠진 사람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이나 주장보다 하나님의 뜻을 앞세운다면 이러한 자기주장이나 입장은 뒤로 돌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어느 누구에 관계없이 나는 하나님의 뜻을 꼭 행하며 살겠다고 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인지 사람의 말인지를 분간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는 주님의 말씀에 우리는 귀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만일 이러한 자세를 지닌다면, 주님의 가르침을 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비록 하나님 체험이 없다거나 하나님을 사랑함이 부족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행하지는 못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려고 노력한다면 이러한 모습을 하나님께서 알아주실 줄 우리는 믿습니다. 사실, 우리가 이러한 모습을 지니고 있기에 때로는 괴로워하기도 하고, 눈물로 기도하기도 하고, 새로워지고자, 성숙해지고자 노력도 하는 것이겠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자세와 의식을 늘 지니고 있으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자세를 늘 지니고 있다면,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더욱 알고 체험하게 해 주실 것이고, 나아가서 하나님을 더욱 사랑할 수 있는 계기도 주실 것이라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려고 마음을 열어 놓고, 노력하는 자세란 과연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 29절에서 찾을 수 있다고 봅니다. “이는 그 가르치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 일러라.”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놀랬는데 그 이유는 예수님의 말씀이 권세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권세(authority)있는 말씀이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이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청중들이 압도되었음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노력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권세를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권세가 내게서 이루어지기 위해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유념해야 하겠습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모습을 분명하게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는 거침없이 말씀을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말을 유창하게 하셨다거나, 웅변조로 크게 말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청중들의 개인적인 상황을 압도하는(overwhelm) 예수님의 신적(divine) 능력을 가지고 말씀하셨음을 의미합니다. 즉 예수님은 이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말씀할 때에 사람들의 눈치를 보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맞추고자 하는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가감 없이 전하고자 하였습니다. 사실, 우리가 산상수훈을 보면, 상당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들도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진리를 인간적인 그 무엇과 타협하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점이 “저들의 서기관과 같지 않았다”는 말씀의 의미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설교하는 것을 표현하기를 “그들이 기탄없이 말을 하였다”고 하였습니다(행 4:13). 이러한 모습 또한 권세 있는 말씀의 모습인 것이라 하겠습니다.

또 하나 예수님의 권세가 우리들에게 이루어지는 데에 필요한 모습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모습을 산상수훈을 듣게 된 청중들에게서 봅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자원하는 마음과 자세로 들었기 때문입니다. 마 5: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여기서 “나아온지라”는 단어는 원문에 의하면 그저 “가까이 간 것”이 아니라 “접근한 것(approach)”을 말합니다. 즉 어떤 목적과 뜻을 위해 자원하는 자세로 예수에게 접근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들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는 이렇게 “자원하는 심령과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다윗의 경우를 보십시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를 범하고 그 당시 선지자 나단이 와서 책망할 때, 자기가 왕이라고 해서 책망하는 선지자 나단을 배척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의 말을 듣고 회개하였습니다. 즉 다윗은 선지자 나단의 말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것입니다. 즉 나단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권위를 발견한 것입니다. 이는 나단이 위엄이 있거나 훌륭해서가 아니라, 선지자의 음성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다윗의 마음 밭이 하나님의 권위를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된 마음 밭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 일이 있었을 때에 이렇게 노래하는 것입니다. 시 51:12,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이렇게 권위는 자원하는 모습과 자세 속에서 이루어지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교회는 바로 이러한 권위를 지닌 곳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권위를 이렇게 교회에 두셨습니다. 교회는 이 세상의 권위와는 다른 권위를 간직하고 있는 곳입니다. 교회의 권위는 이 세상의 권위와는 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교회의 권위는 성도들이 자원하는 심령이 될 때에야 드러날 수 있는 그러한 권위인 것입니다. 교회에 속한 성도들이 스스로 자원하는 심령을 지닐 때에만 이러한 하나님의 권위를 받아들일 수 있고 그 권위의 능력을 맛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강제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원하는 심령과 자세 속에서 복종이 아닌 순종이 나오고, 거기서 천국 열쇠를 사용할 수 있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권세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이 세상과 다른 질서에 속한 모습으로서, 교회의 거룩성인 동시에 신비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러한 거룩성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에게서만 간직될 수 있는 독특한 권위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결론적으로 기대하는 삶의 모습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결과적으로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비결이고, 우리가 생명의 집이 되는데 있어서의 거룩한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러 가지로 핑계하지 말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모습을 우리의 삶의 우선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산상수훈의 말씀을 힘써 지켜 행함으로 이 말씀이 우리의 인격에 반영됨으로 우리로 하여금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반석위에 세운 집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은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다”는 주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해 보았습니다. 과연 나는 여기에 속하는 지혜로운 사람인가 하고 질문하면서 주님의 말씀을 묵상해 보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그 모습이 우리들의 삶에서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며, 하나님의 뜻을 먼저 행하고자 하는 자세를 갖출 수 있도록 성령으로 인도하시고, 도와주시기를 간구 드립니다. 아울러, 저희들에게 다윗에게처럼 자원하는 심령을 주셔서 언제나 주님의 뜻을 행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가운데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집으로 표현되는 우리의 삶과 인격이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로 충만하게 되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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